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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역사 모독하는 일본

日 역사교과서, 전범(戰犯) 후손이 만든 왜곡의 전범(典範)

한국, 일본 식민지배 덕분에 타율과 종속의 역사 청산?

  • 글: 안병우 한신대 교수·국사학 bwahn@hanshin.ac.kr

日 역사교과서, 전범(戰犯) 후손이 만든 왜곡의 전범(典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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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역사의 시작은 고조선이 아니라 낙랑군이다’
  • ‘일본의 안위가 위태로워졌기에 아시아를 침략했다’
  •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조선을 근대화시켰다’….
  • 4월5일 일본 문부과학성이 검정한 후소샤(扶桑社)판 역사교과서의 역사 날조 사례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日 역사교과서, 전범(戰犯) 후손이 만든 왜곡의 전범(典範)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는 4월5일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 정부가 교과서 검정제도를 이용해 우경화를 주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이 거세다. 한국의 거듭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이 만든 교과서는 몇몇 문구를 수정하는 정도로 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한국사의 일부를 잘못 서술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 속에 도사린 역사관이 더 심각한 문제다. 새역모의 교과서는 역사 교육을 통해 침략전쟁을 긍정하고 평화를 파괴하는 의식을 심어주고, 그 결과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존 발전을 부정하는 학생을 양성하는 데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역사왜곡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문제다. 우리는 한국사의 자주성을 옹호하려는 폐쇄적·소아적 민족주의 관점에서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아니며, 일본의 장래와 동아시아 전체의 미래라는 관점에서 문제로 삼는 것이다.

일본 역사교과서의 한국사 왜곡은 그 뿌리가 매우 깊다. 1980년대 초반 우익이 제2차 교과서 공격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반발을 사서 교과서를 만들 때 이웃 국가를 배려한다는 근린제국 조항이 만들어지고, 일제의 주변국 침략 사실이 교과서에 반영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난징 대학살은 1984년 중학교 교과서부터, 군위안부는 1994년 고등학교 교과서부터 차츰 수록되기 시작했다.

교과서 개선에 위협을 느낀 자민당은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에 대한 서술의 총괄적인 검토를 목표로 역사검토위원회를 설치하고, 1995년 8월 검토 결과를 발표했다. 그 결론은 ‘대동아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자존·자위의 전쟁이며 아시아 해방전쟁이었고, 일본은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며, 난징 대학살과 위안부 등은 날조’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최근의 교과서는 있지도 않은 침략이나 가해 사실을 서술하고 있어 새로운 ‘교과서 분쟁’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역사인식을 국민의 공통인식으로 만들기 위해 학자들이 국민운동을 전개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러한 결론에 입각해 1996년 제3차 교과서 공격이 시작됐다. 운동의 중심은 자유주의사관연구회였다. 이들은 교과서 공격에 그치지 않고, 아무것에도 구애하지 않는 역사관을 반영해 새 교과서를 직접 발행하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1997년 1월 새역모를 결성했다.

비역사학자들이 결성한 새역모

새역모의 핵심은 역사학자가 아니다. 초대 회장 니시오 간지(西尾幹二)는 전기통신대학의 독문학 교수이고, 핵심인물인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信勝)는 도쿄대 교육학 교수였고, 지금은 탈퇴했지만 선전부장 노릇을 한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善紀)는 저명한 만화가다. 의식만 치열한 비역사학자들이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새역모의 역사관은 자유주의사관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들은 일본의 역사관을 자학사관(自虐史觀)이라고 규정한다. 자학사관은 패전 후 승전국 미국이 강제한 죄의식에서 생겨난 것이며, 좌익이 그러한 역사관을 전파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죄의식에서 해방된 아무것에도 구애하지 않는 역사관, 즉 자유주의사관을 갖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새역모의 역사관은 실제로는 황국사관의 재판(再版)이다. 그들은 천황을 중심에 놓고, 국가주의를 견지하며,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에 걸친 자국의 침략과 지배의 역사를 찬양한다. 고대사에 진무(神武)천황에 관한 설화를 강조하고, 교과서의 대미를 쇼와(昭和) 천황 인물 칼럼으로 장식함으로써 천황을 역사의 중심에 놓았다. 그 칼럼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국민과 함께 걷다

종전 직후 천황과 처음 회견한 맥아더는 천황이 목숨을 구걸하러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황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는 국민이 전쟁 수행에 즈음하여 행한 모든 결정과 행동에 대해 전체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을 당신이 대표하는 여러 나라의 재결(裁決)에 맡기기 위해 방문했다”는 것이었다. 맥아더는“나는 커다란 감동으로 흔들렸다. 죽음을 수반할 정도의 책임, 분명히 천황에게 돌아가서는 안 될 책임을 떠안으려는, 이 용기에 가득찬 태도는 나의 뼛속까지 움직였다”(‘맥아더 회상기’)고 쓰고 있다. 패전 후 천황은 일본 각지를 순행하며 일본의 부흥에 힘쓰는 사람들과 친히 말씀을 나누고 격려하셨다. 격동하는 쇼와 시대를, 국민과 함께 걸으신 생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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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안병우 한신대 교수·국사학 bwahn@hansh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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