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일동포 3, 4세 중 18~30세를 주축으로 구성된 재일본대한민국청년회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고 이성적으로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주변국의 강력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우익 인사들은 우익사관에 근거한 역사교과서 집필을 강행하고 검정을 신청했다. 한술 더 떠, 일본 정부는 교과서에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명시할 것을 주문하는 등 역사왜곡을 주도하고 나섰다. 다쿠쇼쿠(拓殖)대 후지오카 노부카쓰 교수가 주도하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이 집필한 역사교과서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첫째, 태평양전쟁은 자위(自衛)전쟁으로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침략 의도가 깔린 잘못된 전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학(自虐)사관’이며, 일본의 어두운 역사를 강조할 뿐이라는 것.
둘째,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조선을 수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화에 도움을 줬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한다. 또 한일강제합방에 대해서는 1910년 당시 한일합방을 찬성한 조선인도 있었으며, 미국 영국 프랑스이탈리아 러시아 등 당시 강대국들이 승인한 국제조약으로 정당하고 합법적이었다고 말한다.
셋째, 역사적 사실을 날조, 왜곡하고 있다. 우익 역사교과서는 조선에서 자행한 강제연행, 일본어 강요, 일본식 성명 강요 등이 잘못 알려졌거나 날조됐다고 주장한다. 새역모가 역사교과서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삭제하려는 대목은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1937년 12월에 일어난 난징(南京) 대학살은 과장되고 조작된 이야기이며, 당시 난징에서 발견된 중국인 시체는 학살당한 민간인이 아니라 전투에서 죽은 군인들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여러 사료와 학살 현장을 목격한 병사들과 외국인들의 증언을 통해 학살부정론이 사실상 허구임이 이미 밝혀졌다.
새역모는 2001년 새롭게 집필한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문부과학성에 검정을 신청했고, 4년마다 재검정하는 제도에 따라 2005년 3월 재검정을 신청했다. 4월5일 일본 문부과학성은 일제침략을 정당화하는 우익 교과서를 그대로 통과시킴으로써 한국과 주변 아시아 국가들의 공분을 샀다.
19세기 말 이후 형성된 일본 우익은 반외세, 자민족 우월주의, 국수주의에 입각한 활동을 벌여왔고, 1945년 패전 이후에도 꾸준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면, 우익은 왜 2001년이 되어서야 자신의 역사관에 근거해 서술한 중학생용 교과서의 검정을 신청했는가.
개혁 정국이 야기한 불안
이 문제를 설명하려면 후지오카 교수가 다른 우익 지식인들과 함께 새역모를 결성한 1997년 전후 일본사회의 경제적·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선 경제적으로 1991년부터 경기가 후퇴하면서 일본경제의 거품이 꺼지기 시작했고, 일본은 구조적 장기 불황을 경험했다. 10년 이상 지속된 경제불황은 고실업률, 대형 기업과 금융기관의 잇따른 도산 및 기업 채산성 악화 등으로 전후 경제성장의 신화가 뿌리부터 흔들렸다.
1990년대 들어 능률적이고 정직하다고 믿었던 관료들의 부패와 비효율이 잇달아 드러나 관료제의 신화도 붕괴됐다. 전후 일본의 경제성장을 주도한 양대 세력인 기업과 관료집단이 동시에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게 되었으나, 이를 대체할 세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 제3의 국가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둘째, 정치개혁 정국에서 1993년 자민당이 정권을 잃었다. 패전 후 사회 갈등을 관리하면서 지속적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한 정치적 기반이 이른바 ‘자민당 55년 체제’였으나, 이것이 국민의 지지를 더는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개혁 정국은 양당제를 지향하는 소선구제로 선거제도를 개편했고, 사회당 출신 총리가 등장했으며, 정당간 이합집산이 반복되면서 1990년대 10년간 7명의 총리가 교체됐다. 정치권은 사회당이 몰락하면서 보수화하는 혼란을 겪었다. 1990년대 후반의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일본 우익은 자신들의 국가관을 국가 진로의 대안으로 선전하고자 했다.
셋째, 자민당이 정권을 상실한 이후 등장한 호소카와 연립내각과 사회당 출신의 무라야마 총리는 진보적 역사인식을 정치적 어젠더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