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호

폐기했다는 국정원 감청장비의 행방은?

주물공장行, 민간 매각, 기무사 인계… 무성한 說 속 국정원은 말끝 흐리기

  • 김진수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05-08-25 09:4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8월5일 국정원 공식 발표, “국정원 내에서 장비 분해·소각했다”
    • 전 과학보안국 직원, “망치로 부숴 서울 인근 폐기물 처리장에서 소각”
    • 현직 국정원 고위간부, “장비 폐기 땐 사진촬영 필수”
    •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 도입 시점, 기자회견문과 국회 정보위 제출자료 각기 달라
    • 한나라당, 기무사에 ‘국정원 감청장비 공여 여부’ 국감자료 요청
    폐기했다는 국정원 감청장비의 행방은?
    8월5일 국가정보원은 서울 내곡동 청사에서 ‘옛 국가안전기획부 X파일 사건’과 관련, 김승규 원장의 대(對)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면서 기자회견문을 돌렸다. ‘국정원의 과거 불법감청 실태 보고’란 제목이 붙은 이 회견문의 골자는 그간 도청팀 운영에 개입했던 전·현직 직원 40명을 대상으로 이뤄진 중간조사 결과였다. 주 내용은 국정원의 도청 실태 및 감청장비 명세, 안기부 ‘미림팀’의 구성·활동과 해체경위, 도청 테이프와 녹취록의 유출·유포 경위, 도청 테이프 회수 및 폐기 경위 등이다.

    그러나 기자회견문은 물론이고, 이후 그 어떠한 채널을 통해서도 국정원은 감청장비의 폐기에 관한 구체적 정황을 담은 증빙자료를 내놓은 적이 없다. 언론의 관심도 도청 실태에 집중됐을 뿐, 폐기됐다고 알려진 감청장비의 행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국정원이 기자회견문에서 밝힌 휴대전화 감청장비의 명세는 ▲아날로그 방식의 휴대전화 감청을 위해 1996년 1월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감청장비 4세트(1999년 12월 아날로그 방식 서비스의 완전 중단으로 용도 폐기) ▲디지털 휴대전화 상용화에 따라 1998년 5월 국정원이 자체 개발한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 6세트(부호분할다중접속방식(CDMA) 휴대전화 도청에도 일부 활용되다 CDMA 기술 발달에 따른 한계로 2002년 3월 전량 폐기) ▲1999년 12월 역시 자체 개발한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장비 20세트(2000년 9월까지 9개월간 사용하다 기술적 한계로 사용 중단) 등이다.

    이러한 장비의 폐기 정황과 관련해 기자회견문에 나온 내용은 단 한 줄뿐. ‘2002년 3월 감청담당 부서장의 책임하에 국정원 내에서 분해하여 완전히 소각처리’했다는 게 그것이다. 국정원은 그 배경으로, ‘2002년 3월의 통신비밀보호법 개정과 함께 국가기관 보유 감청장비의 국회 신고가 의무화되는 등 감청업무 절차가 대폭 강화되고, 16대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국정원의 불법감청’ 논란이 거세지면서 (불법감청을) 완전히 중단했기 때문’임을 들었다.

    감청장비를 완전히 폐기했다는 국정원의 공식 발표는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현재 정치권 주변에선 국정원의 감청장비 폐기와 관련한 5~6가지 설(說)이 나돈다. ▲감청장비를 인천의 한 주물공장에서 폐기처리했다 ▲장비를 인천지역 소재 한 제철회사의 용광로에서 녹였다 ▲통신 관련 민간기업에 장비를 팔았다 ▲장비를 국군기무사령부로 넘겨 지금도 도청에 활용되고 있다 ▲감청장비 개발의 원천기술은 국정원이 갖고 있지만, 장비 제작은 인천의 한 업체와 공동으로 했으며 장비 폐기 또한 해당 업체에 맡겼다는 설이 그것이다.



    자체 진상조사 불충분

    물론 이 같은 소문은 익명 제보 혹은 전언(傳言)에 의한 것으로, 아직 사실 여부는 명확히 밝혀진 바 없다. 게다가 하나같이 확인할 방도마저 마뜩찮은 내용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2년 당시 국정원 과학보안국(감청 전담부서) 직원으로 일했던 한 인사의 말을 인용한 8월10일자 ‘중앙일보’ 보도 역시 ‘국정원 내에서 분해해 완전히 소각’했다는 국정원의 기자회견문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중앙일보’ 보도는 ‘국정원 감찰실 요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과학보안국 직원들이 장비를 분해하고 망치로 두들겨 형태를 알아볼 수 없도록 부순 뒤 트럭으로 운반해 서울 인근의 폐기물 처리장에서 소각했다’는 것. 소각 장소를 두고 양자는 ‘국정원 내부’와 ‘서울 인근의 폐기물 처리장’으로 엇갈리고 있다.

    어찌됐건 이처럼 다양한 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은 국정원이 8월5일 발표한 기자회견문의 감청장비 폐기 관련 답변이 의혹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지나치게 간결한 ‘단답식’이라는 데 기인한다.

    ‘신동아’는 8월12일 감청장비 폐기를 둘러싼 여러 의문점과 관련, 국정원측에 12가지 질문항목을 담은 질의서를 보냈다. 주된 질문은 ▲의혹의 소지가 다분한데도 감청장비 폐기 당시의 구체적 정황을 공개하지 않는 이유 ▲폐기했다는 장비의 정확한 제원과 폐기 장면을 담은 사진자료의 유무 ▲장비 폐기단계에서 밟아야 할 국정원 내부의 제반 절차 및 근거 규정 ▲정치권에 나도는 여러 설에 대한 국정원의 입장 ▲장비 폐기의 사실관계를 입증할 관련기록(손실처리 여부 포함)의 존재 유무 등이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같은 날 오후 ‘(2002년 3월) 당시 감청장비를 폐기한 사실은 해당 근무직원들의 진술 등을 통해 확인한 바 있고, 구체적인 폐기상황 등에 대해서는 현재 조사를 진행 중이다”는 극히 원론적인 답변만 보내왔다.

    감청장비 폐기와 관련된 의문에 대한 국정원의 이런 ‘임기응변’식 대응은 국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신동아’는, 8월5일 국정원의 대국민 사과성명 발표가 있은 직후 국회 정보위원회가 국정원에 도청 관련자료를 요청한 것에 대해 8월8일 국정원이 회신한 ‘국회 정보위 제출 요구 자료’에서 장비 폐기 부분에 대한 관련 자료가 없다고 못박은 사실을 확인했다.

    국회 정보위가 국정원에 보낸 자료요청 항목은 ①1996년 1월 이탈리아에서 도입한 감청장비 4세트의 종류 ②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의 종류 ③유선중계통신망의 도청 현황 ④이동식 휴대전화 감청장비의 종류 ⑤이동식 휴대전화 감청장비를 이용한 도청 현황 ⑥2002년 3월의 감청장비 폐기를 입증하는 공문서 사본 ⑦휴대전화 도청 중단 시기를 2002년 3월로 주장하는 이유 ⑧복제 휴대전화의 도·감청 이용 가능성에 대해 국정원이 파악한 시기 등 8개다.

    ‘관련자료 없음’은 ‘임기응변’

    국정원은 이 가운데 감청장비 폐기를 입증하는 공문서 사본을 내놓으라는 ⑥번 항목에 대해 ‘관련자료 없음’이란 단 여섯 글자로 답했다.

    ‘신동아’의 질의에 대해 “감청장비의 폐기상황에 대해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답한 국정원이 이보다 불과 나흘 전인 8월8일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 보낸 공식 자료에서 ‘관련 자료가 없다’고 명시한 것은, 결국 그동안 장비 폐기 부분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내놓은 ‘임기응변’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따라서 국정원의 이 같은 ‘예단’은 장비 폐기를 둘러싼 세간의 갖가지 의혹 제기에 쐐기를 박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고 있다.

    또한 국정원은 8월5일의 기자회견문에서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 6세트를 1998년 5월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취재 결과 사흘 뒤인 8월8일 국회 정보위에 제출한 자료에는 이중 1세트만 1998년 5월부터 사용하고 나머지 5세트는 1999년부터 사용했다고 이전의 해명을 번복한 사실도 확인됐다.

    이 역시 8월5일 발표된 국정원의 중간조사 결과가 치밀하고 철저한 진상조사 끝에 나온 것이 아니라 도청에 대한 국민의 강력한 비판 여론에 떠밀려 서둘러 발표됐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일례로 볼 수 있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한 현직 국정원 고위간부의 다음과 같은 말은 국정원의 ‘관련자료 없음’ 답변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게 만든다.

    “국정원이 소유·운용하는 장비를 폐기할 땐 반드시 내부 직원이 직접 폐기토록 한다. 제3자에게 위탁해 폐기하는 일은 없다. 장비를 폐기한 직원은 지체 없이 그 사실을 정해진 절차에 따라 보고해야 한다. 해당 직원은 장비 폐기과정에서 폐기 장면을 사진촬영해 폐기 사실을 보고할 때 첨부해야 한다. 이는 직원이 장비를 제3자에게 임의 처분하는 등 장비를 폐기하지 않고도 폐기했다고 허위보고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특히 감청장비의 경우 외부로 유출되면 원(院)에 큰 손실을 끼칠 뿐 아니라 제3자의 손에 넘어가 악용될 경우 국익 손상 및 사회질서 혼란 등의 우려가 크다. 따라서 이러한 보고체계는 필수적으로 지켜진다.”

    이와 관련, 국정원 홍보관리관은 8월12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감청장비 폐기 당시 폐기에 참여한 직원들이 준수해야 할 국정원 내부 절차가 있었느냐”는 물음에 “그러한 절차가 존재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특별조사팀이 조사 중”이라며 기존의 모호한 입장을 되풀이했다.

    국감 최대 쟁점 될 듯

    한편 ‘신동아’는 국정원 감청장비가 폐기되지 않고 국군기무사령부로 옮겨져 현재도 도청에 활용되고 있다는 정치권 일각의 의혹과 관련, 한나라당 김재경 의원이 8월10일 기무사측에 국정감사 자료를 요청한 사실을 확인했다. 요청한 자료의 내용은 2003년부터 2005년 6월까지 기무사의 감청 현황 및 통신사실 확인 자료, 2002년부터 현재까지의 연도별 감청장비 보유 현황, 국정원과의 감청장비 공유 사용 여부, 국정원으로부터 감청장비를 지원받거나 감청장비 개발 기술을 지원받았는지 등이다.

    김재경 의원실 관계자는 “국정원이 많은 비용을 들여 어렵게 자체 개발한 휴대전화 감청기술 및 장비는 국가안보 등을 위해 활용가치가 높은데도 2002년 3월 도청행위를 의심받는다는 이유로 한순간에 이를 모조리 폐기했다는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워 기무사에 국감자료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국정원에 대해서도 감청장비 폐기를 입증할 수 있는 사진 등 관련기록을 국감자료로 요청했다.

    감청장비 폐기 미스터리가 어떤 방식으로 귀결될지는 미지수다. 분명한 것은 2002년 3월 장비를 폐기한 이후 더는 도청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국정원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장비 폐기를 둘러싼 의문이 객관적 근거에 의해 명확히 풀려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 입증 책임은 대국민 사과성명 당시 “이제부터 국정원의 역사를 백지에 새롭게 쓴다는 비장한 각오로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고 공언한 도청의 주체, 국정원에 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