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기자회견문은 물론이고, 이후 그 어떠한 채널을 통해서도 국정원은 감청장비의 폐기에 관한 구체적 정황을 담은 증빙자료를 내놓은 적이 없다. 언론의 관심도 도청 실태에 집중됐을 뿐, 폐기됐다고 알려진 감청장비의 행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국정원이 기자회견문에서 밝힌 휴대전화 감청장비의 명세는 ▲아날로그 방식의 휴대전화 감청을 위해 1996년 1월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감청장비 4세트(1999년 12월 아날로그 방식 서비스의 완전 중단으로 용도 폐기) ▲디지털 휴대전화 상용화에 따라 1998년 5월 국정원이 자체 개발한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 6세트(부호분할다중접속방식(CDMA) 휴대전화 도청에도 일부 활용되다 CDMA 기술 발달에 따른 한계로 2002년 3월 전량 폐기) ▲1999년 12월 역시 자체 개발한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장비 20세트(2000년 9월까지 9개월간 사용하다 기술적 한계로 사용 중단) 등이다.
이러한 장비의 폐기 정황과 관련해 기자회견문에 나온 내용은 단 한 줄뿐. ‘2002년 3월 감청담당 부서장의 책임하에 국정원 내에서 분해하여 완전히 소각처리’했다는 게 그것이다. 국정원은 그 배경으로, ‘2002년 3월의 통신비밀보호법 개정과 함께 국가기관 보유 감청장비의 국회 신고가 의무화되는 등 감청업무 절차가 대폭 강화되고, 16대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국정원의 불법감청’ 논란이 거세지면서 (불법감청을) 완전히 중단했기 때문’임을 들었다.
감청장비를 완전히 폐기했다는 국정원의 공식 발표는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현재 정치권 주변에선 국정원의 감청장비 폐기와 관련한 5~6가지 설(說)이 나돈다. ▲감청장비를 인천의 한 주물공장에서 폐기처리했다 ▲장비를 인천지역 소재 한 제철회사의 용광로에서 녹였다 ▲통신 관련 민간기업에 장비를 팔았다 ▲장비를 국군기무사령부로 넘겨 지금도 도청에 활용되고 있다 ▲감청장비 개발의 원천기술은 국정원이 갖고 있지만, 장비 제작은 인천의 한 업체와 공동으로 했으며 장비 폐기 또한 해당 업체에 맡겼다는 설이 그것이다.
자체 진상조사 불충분
물론 이 같은 소문은 익명 제보 혹은 전언(傳言)에 의한 것으로, 아직 사실 여부는 명확히 밝혀진 바 없다. 게다가 하나같이 확인할 방도마저 마뜩찮은 내용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2년 당시 국정원 과학보안국(감청 전담부서) 직원으로 일했던 한 인사의 말을 인용한 8월10일자 ‘중앙일보’ 보도 역시 ‘국정원 내에서 분해해 완전히 소각’했다는 국정원의 기자회견문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중앙일보’ 보도는 ‘국정원 감찰실 요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과학보안국 직원들이 장비를 분해하고 망치로 두들겨 형태를 알아볼 수 없도록 부순 뒤 트럭으로 운반해 서울 인근의 폐기물 처리장에서 소각했다’는 것. 소각 장소를 두고 양자는 ‘국정원 내부’와 ‘서울 인근의 폐기물 처리장’으로 엇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