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야권이 노 대통령의 주장에 의문을 표시하며 음모론을 계속 제기하는 가운데 10일 DJ가 갑작스럽게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함으로써 도청 정국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평생을 인권과 평화를 위해 살았다고 자부해왔고 이를 바탕으로 노벨평화상까지 탄 김 전 대통령이 독재정권 시절 도청의 최대 피해자에서 도청의 가해자로 매도되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마음의 병이 몸으로 옮아간 게 아니겠느냐. 노 대통령은 기자간담회에서 ‘(국정원의 도청 발표에) 정치적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나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지만 모독은 국민의 정부가 당한 것 아니냐.”
DJ 측근의 주장처럼 노령(老齡)의 DJ가 국민의 정부 쪽으로 칼날이 다가오는 도청 수사의 진행상황과 자신에게 쏠리는 의혹에 큰 충격을 받았음은 분명해 보인다. 여권이 DJ 입원 이후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청와대는 물론 열린우리당에서도 DJ의 역사적, 정치적 역할을 ‘찬양’하는 등 사태 수습에 적극 나선 것은 DJ의 충격과 분노를 읽었기 때문이다.
사실 7월21일 안기부 X파일이 언론에 처음 보도됐을 때만 해도 정치적 공방은 김영삼(YS) 정부 시절의 불법도청 구조와 도청 내용 공개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따라서 대립전선도 ‘열린우리당 대 한나라당’으로 뚜렷한 편이었고, 초점도 안기부 도청팀인 미림팀의 불법적인 활동과 언론에 공개된 삼성 관련 테이프 외에 다른 내용을 담은 도청 테이프가 있는지에 모아졌다.
‘선공’으로 바람 잡는 정치권
이런 상황은 검찰이 미림팀장 공운영씨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에서 120분짜리 녹음테이프 274개와 녹취보고서 13권(총 3600여 쪽)을 압수했다고 발표한데 이어 국정원이 YS의 문민정부 때만이 아니라 DJ의 국민의 정부에서도 불법도청이 이뤄졌으며 국민의 정부 후반기인 2002년 3월부터 도청이 중단됐고 참여정부에서는 불법도청이 없었다고 발표하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정치권의 이전투구(泥田鬪狗)식 상호 비난이 더욱 심해지면서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속으로 빠져들었다. 여기에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을 때 다가올 위기를 미리 의식해 ‘선공으로 바람을 잡아놓는’ 정치권 특유의 선제공격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렇다면 국민의 정부 시절 여당이었고 현 정권을 창출하는 데 기반이 된 민주당의 반발과 DJ의 분노가 분명히 예상되는데도 국정원이 ‘고해성사’식 발표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