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실 거리로 연달아 나오는 탱자, 수세미 효소, 천일홍 효소, 맨드라미 효소는 지난해 바로 이 땅에서 자란 것들로 그냥 입속에 털어넣기 아까울 만큼 향 좋고 빛깔 고왔다. 밭에서 꺾어 갓 쪄낸 옥수수, 소금 두어 알 얹은 수박 맛도 서울서 먹던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수박은 음이니 양인 소금을 섞어 먹어야 탈이 없단다).
나는 주인이 내준 황톳물들인 인조견 바지에 자투리천을 모아 지은 삼베 적삼을 입고 날아갈 듯 가벼워져서 연신 뱃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흐뭇한 웃음을 웃어댔다. 모처럼 맛보는 삽상한 의식주의 체험이었다. 전에 분명 이렇게 살았건만 잊고 있던 자연주의적 삶이었다.
쪽빛 기저귀, 인조견 잠옷
김정덕 할머니! 황토집 짓고 야채 효소 만들며 천연섬유에 자연 염색해 한땀 한땀 옷을 지으며 장 담그고 장아찌 만들고 차 우리고 농사짓는 그를 일쑤 ‘황토 연구가’라고들 부르는 모양이지만 그의 관심은 황토에 국한된 게 아니라 의식주 전반에 걸쳐 있다.
올해 일흔하나, 할머니라 부르기엔 몸매도 피부도 태도에도 여태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종횡무진, 천의무봉하게 솟아나는 아이디어와 호기심은 차라리 아이 같고 새로움을 좇는 순발력과 추진력, 관심의 다양함은 어느 청년에 못지않다. 그러면서 문득 다 내려놓고 물러서는 고요와 비움을 말하는 그를 나는 일단 ‘자연식 삶 연구가’라고 칭한다.
“나의 전공은 의상 디자인이었다. 스페셜 코스로 섬유조직학도 공부했다. 그러나 그때 배운 암홀이니 웨이스트 라인이니 하는 규정들은 내 의생활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 나는 삼베에 쑥물들인 넉넉한 바지를 입고 베 쪼가리로 만든 상의에 굵은 삼베와 가는 삼베를 섞어 만든 모자를 쓰고 다닌다. 석유에서 뽑은 화학섬유의 범람, 오존층이 깨져서 직사하는 자외선, 배기가스 등의 뒤범벅으로 아토피 피부병은 늘어만 가는 추세다.
천연직물에 천연염색한 옷은 이 살벌한 시대를 살아가는 방위복이 될 것이다. 붉은 홍화물은 나쁜 세균을 막고 바닷빛을 내는 쪽은 피부를 보호한다. 그래서 아기들 기저귀에 쪽물을 들이면 좋고, 치자나 금잔화로 노란물들인 인조견 잠옷은 촉감이 가실가실해서 좋다. 비바람에 떨어진 풋감을 짓이겨 물들인 감물옷, 이보다 더 우아하고 고상한 사치가 또 있을까….
나는 우리 동네 한복집에다 사람을 자주 소개한다. 베 자투리를 얻기 위한 목적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 중의 하나는 조각 모아 옷 만들기다. 동네 한복집 아주머니의 비위를 맞춰 얻어온 백옥 같은 모시, 노르스름한 안동포, 누런 삼베를 이리저리 매치해서 옷을 짓는다. 누구와 만나 필(feel)이 좋으면 그를 위해 무조건 옷 한 벌을 만드는 마음, 그게 바로 내 재산이다.”
그는 이렇듯 글도 잘 쓴다. 쉽고 선명해서 더욱 힘찬 글이다.
그는 1987년에 이곳 병천으로 내려왔다. 병천으로 오게 된 사연, 그게 또 여느 삶과는 완연히 다르다. 1970년대 말엽 일본에서 자연건강법을 공부하고 돌아왔을 때 그의 주변엔 양생법과 자연요법을 지지하는 사람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한국양명회란 단체를 만들었다. 자연건강회, 한마음회 같은 모임도 그를 중심으로 생겨났다. 그 무렵 김정덕은 사람을 만나면 그들 심신의 상태를 환하게 읽었다. 처방도 금방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