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는 지구촌이라는 단어의 의미망이 더욱 확대돼 지역과 세계가 바로 연결되는 글로벌 시대다. “한국학의 본산이 한국이니, 한국학은 한국에서 연구해야 한다”는 원조 타령은 구시대적 사고일 뿐이다.
미쳐야 미친다
1990년대 중반, 호주에서 한국학 붐이 일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동남아에서 한류(韓流)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이웃한 동남아와 대양주에서 ‘한국 바람’이 연이어 분 것이다.
이런 지역적 상황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한국학 연구소가 호주에서 굳건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영어권 국가인 호주에 한국학 전진기지를 구축한 것. 시드니 소재 뉴사우스웨일스(NSW)대에 자리잡은 ‘한-호 아시아연구소(Korea-Australasia Research Centre)’가 바로 그곳이다.
호주의 대학은 엄격한 학사관리와 우수한 연구실적으로 국제사회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뉴사우스웨일스대는 호주에서 선두를 다투는 명문학교다. 그렇다면 왜 호주학도 아닌 한국학의 전진기지가 이 대학에 구축됐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에서도 20대 초반부터 시작된 힘겨운 유학생활과 부단한 연구를 바탕으로 호주학계에 견고한 입지를 구축한 몇몇 학자가 20년도 넘게 흘린 땀과 눈물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한-호 아시아연구소를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 밤낮 없이 애쓰는 ‘4인방’의 지난 5년여 삶을 추적해보면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난다. 그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不狂不及)’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연구소에서 학자로서의 황금 같은 중년을 다 보내면서, 합목적적인 한국학의 세계화(globalization)와 현지화(localization)에 골몰하는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한국학이라는 종교에 충직한 선교사 같다.
한-호 아시아연구소 4인방
지적 산물의 집합체인 연구소는 구성원의 역량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또한 멤버들이 얼마나 애정을 쏟아붓느냐에 따라 연구소의 업적도 천차만별이 된다. 그런 측면에서 거의 ‘맨땅에 헤딩하기’식으로 출범한 한-호 아시아연구소의 주요 멤버들은 늘 일당백으로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연구소의 4인방으로 불리는 서중석(48) 소장, 권승호(41) 부소장, 신기현(51) 자문위원, 김현옥(41) 부장이 그 주인공이다. 서중석·권승호·신기현 교수의 공통점은 20대 중반에 호주에서 석·박사과정을 밟았다는 것. 그만큼 호주에 정통한 학자들이다.
연구소의 선장 격인 서중석 소장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79년 12월에 가족과 함께 호주로 이민왔다. 그는 이민 초기 숱한 고생을 했다. 용접공, 택시운전사, 공무원, 청소원 등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그러나 마침내 뉴사우스웨일스대에서 한국인 최초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같은 학교의 상과대학에서 한국인 제1호 교수(경제학)가 됐다. 그때 몇 가지를 결심했다. 그중 하나가 조국을 위해서 어떤 형태로든지 기여하겠다는 다짐이다.
그는 20년 동안 뉴사우스웨일스대에서 경제학과 국제경영학을 가르치며 동남아의 인재들을 키우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그들이 졸업 후 자기 나라로 돌아가 학계와 정·재계에 뿌리내리면서 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2000년 한-호 아시아연구소를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