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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의 한국혼 ⑨

6년 학력의 대문호 김달수 下

문학으로, 고대사로… 신음하며 써내려간 ‘뿌리’ 이야기

  •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6년 학력의 대문호 김달수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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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등학교도 졸업 못한 청년 김달수는 서류를 위조해 간신히 들어간 대학에서 한국 출신의 문인들과 인연을 맺었다. 광복 후 그의 응축된 정신세계는 폭발하듯 문학작품으로 쏟아져 나왔다. 조국 분단에 대한 안타까움을 비판과 풍자가 어우러진 소설에 담는 것에 한계를 느낀 그는 한국 고대사에 빠져들었다. 일본에 남은 한반도의 도래문화 유적을 찾아 20여 년간 답사여행을 하고 그것을 글로 남겨 재일동포와 일본인들의 호응을 얻었다.
6년 학력의 대문호 김달수 下
넝마주이 청년 김달수(金達壽)의 인생에 전기가 찾아왔다. 장두식(나중에 ‘어느 조선인의 기록’을 펴냄)이라는 가난한 문학청년과의 만남이다. 장은 김보다 세 살 위, 그러니까 스물한 살이었으나 둘은 우정이 깊어져 평생 친구가 된다.

장두식 역시 ‘빈곤아동’으로 어렵사리 학교에 다녔다. 학비는 면제됐으나, 생활비는 토공, 신문배달 같은 궂은일을 해서 스스로 벌어야 했다. 그래도 머리는 좋아 줄곧 우등생으로 오사카의 나니와(浪速) 중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 중퇴했다.

문학을 향한 두 청년의 열정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장두식은 “문학이란” “문학이야말로” 하는 유식한 말투로 김달수를 사로잡았다. 김달수는 ‘문학강의록’ 같은 것을 읽긴 했지만, 아직 장두식만큼의 지식이나 논리를 갖추지는 못했다. 장두식에게 자극을 받아 김달수의 문학 열정이 일거에 폭발하게 된다. 한마디로 죽이 맞는 친구였다.

두 사람은 등사판으로 ‘함성(오타케비)’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한국인 문맹청년을 가르치기 위한 자료였다. 그러나 이 잡지는 두 번째 호가 나오고 난 뒤, 요코스카(橫須賀) 경찰서의 사상 단속반인 특고(特高·특별고등경찰의 준말로 사상·저항운동을 감시, 단속했다)에 걸리고 말았다. 제목부터가 저항적이라고 해서 불온 유인물로 찍혀 발행금지를 당했다.

김달수는 대학에 다니고 싶었다. 당시 메이지대학, 일본대학 같은 사립대는 전문부라는 것을 두고 있었다. 4년제 중학교 졸업자나 중3 수료자 정도면 3년 과정의 전문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정식 4년제 대학은 당시에도 고등학교나 예과를 마쳐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김달수는 전문부조차 지원할 수 없었다. 그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처지였다. 장두식도 대학에 다니고 싶었으나 역시 자격미달. 비록 중4 중퇴라고는 하지만 수업료 체납이 길어져 그만뒀기 때문에 수료증을 떼어줄 리 없었다.

두 사람은 일단 도쿄로 가서 시나가와의 가나모리(金森)라는 한국인 넝마업자 집에서 입주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도시바(東芝)의 가와사키 공장 잡역부로 일할 수도 있었으나, 야학에 다니며 영어공부를 할 수 없어 도리없이 넝마주이 일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서 받는 돈으로 밤에는 영어학원인 마사노리(正則) 영어학교에 다녔다. 김달수는 초등과, 장두식은 중등과에서 공부했다.

편법으로 대학생 되다

이 주경야독의 기간에 김달수는 큰 소득을 얻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으면서, 무엇을 소재로 글을 쓰든 인간의 진실을 리얼하게 기록하면 문학이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또 시가 나오야(志賀直哉·1883∼1971)라는 일본 최고의 사소설 작가가 쓴 작품도 읽었다. 그것을 읽으며, 자기 자신의 얘기를 쓰는 것만으로도 좋은 소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인의 비애와 고통을 쓰자. 멸시당하고 차별받는 한국인들, 그들의 삶을 소설로 그리자. 진실하게만 쓴다면 일본인에게 울림이 있을 것이다. 일본인의 인간적 진실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나가와의 넝마주이 생활은 서너 달 만에 한계에 부딪혔다. 둘이서 하루 종일 리어카를 끌고 넝마를 수거 해도 점심으로 라면 한 그릇씩 때우면 남는 게 없었다. 학원비를 댈 길이 막막했다. 궁지에 몰린 김달수는 ‘막가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다른 사람 명의로 입학하면 그만 아닌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어차피 ‘조센진’은 전문부를 나와도 일본인처럼 취직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자기 명의든 타인 명의든 무슨 차이가 있는가. 거기서 배우고 머릿속에 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자격을 얻는 길은 너무 멀고 험하다.’

김달수의 매제 정조화(鄭朝和)가 요코스카 시립실업학교 출신이었다. 김달수는 매제의 졸업증명서를 이용해 마침내 일본대학 전문부 국문과에 입학했다. 꿈같은 일이었다. 철학개론, 논리학을 공부하면서 대학생임을 실감했다. 무엇보다 즐거운 것은 전문부 학생이나 4년제 학생이나 청강생이나 모두 같은 방에서 강의를 듣기 때문에 차별받을 일이 없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하늘같은 천황(텐노)을 ‘텐짱’이라고 부르는 학생도 있어 놀랐다. 대학의 자유분방함이라니!

그러나 본명 ‘김달수’를 감추고 ‘정조화’라는 매제 이름으로 다니는 게 부끄러웠다. 그는 본명을 찾기 위해 다른 과에 편입학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국문과 학생들이 만드는 잡지 ‘신생작가’에 글을 낼 땐 필명으로 ‘김달수’를 쓰고 있다, 어차피 입학했으니 이번에는 전과(轉科) 절차가 허술한 점을 이용하자, 김달수 이름으로 창작과에 편입을 시도하자고 생각한 것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접수 창구의 아가씨는 ‘일본대학 재학 중’이라는 것을 믿어서일까, 중학수료증 같은 건 요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편입 합격. 마침내 진짜 ‘대학생 김달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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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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