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벽면과 수납장 위엔 아프리카 전통 가면과 조각상 등이 빼곡했다. 한켠에는 다양한 지포라이터가 액자로 짜여진 틀에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모두 그가 수집한 것들이다. 책장은 사진과 아프리카 관련 책들로 가득했다. 그 속에서 그의 취향과 그가 그동안 걸어온 삶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김씨의 부친은 아프리카의 한국인 ‘슈바이처’로 불리는 고(故) 김정 박사다. 김 박사는 정부에 의해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로 파견돼 그곳에서 30여 년간 의술을 펼치다 세상을 떠났다. 김 박사의 시신은 화장돼 절반은 아프리카에, 절반은 한국에 안치돼 있다. 김씨에게 아프리카는 아버지의 땅이나 마찬가지다. 그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은 단돈 200만원. 하지만 그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삶의 지혜를 물려받았다.
“아버지는 정말 세상물정을 모르셨어요. 오죽했으면 어머니가 아프리카까지 가셔서 샌드위치 장사를 했겠습니까. 하지만 두 분 모두 정말 행복하게 사셨어요. 10년 전, 40대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았죠. 부모님은 출세욕이나 물욕 없이 자연과 더불어 자유로운 삶을 사셨던 거죠.”

김중만씨가 자신의 사진 작업실인 청담동 소재 ‘스튜디오 벨벳언더그라운드’에서 부인 이인혜씨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부인 이씨는 모델 출신이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그의 자유분방한 사고와 행동을 받아들일 준비가 채 되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그는 두 차례나 강제추방자 신세로 전락한다. 특히 1986년 두 번째 추방은 그를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뜨렸다.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시간과 공간 속으로 던져진 그에겐 삶을 추스를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살고 싶지 않은 나를 버리고 싶었다”는 게 암울했던 당시 상황에 대한 그의 회고다.
김씨를 나락에서 구해준 건 1986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피코(PICO)가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이다. 그가 찍은 것은 아스팔트 위에 나뒹구는 작은 돌멩이였다. 아무 의미 없이 거리를 방황하는 자신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사진을 인화하자 그 배경으로 잡힌 초점 잃은 뿌연 화면 속에 도로가 보이고, 그 끝에 태평양이 이어져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출됐다. 거기서 그는 희망을 봤다. 그리고 그 사진은 그를 ‘자유주의자’에서 ‘희망주의자’로 바꿔놓았고 지금의 그를 있게 했다.
향내 가득한 거실을 돌아 식탁이 놓인 주방 쪽으로 기자가 들어서자 김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