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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대도박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NATO] 냉전종식 후 체제개편, [한미동맹] 체제개편 후 냉전종식?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노무현의 대도박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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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대도박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한미연합사(왼쪽)와 유엔사 마크

이 대통령이 편지를 잘못 썼다는 것은 오히려 미국측에서 확인해줬다. 무초 당시 주한 미대사는 그후 이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대통령이 미국군에 이양한 것을 ‘작전통제권(Operation Command Authority)’으로 표현했다. 미국은 통수권은 이양 대상이 될 수 없고 작전통제권만 이양할 수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

통수권은 크게 인사와 예산·군수 같은 군사행정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군정(軍政)과 군사작전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군령(軍令)으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작통권은 군령권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그러나 6·25 전쟁 내내 미국군은 한국군에 대해 군령권은 물론이고 군정권까지 행사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군사원조’란 명목으로 예산을 지원한 것. 그러나 한국군에 대한 인사권만은 이 대통령이 행사했다.

이러한 밀월관계는 1951년 미국이 정전(停戰)협정을 추진하면서 깨졌다. 이 대통령은 미군측에 “정전을 추진하면 모든 지휘권을 환수해 한국군 단독으로 북진하겠다”고 위협했다. 정전협정을 맺으면 양쪽은 반드시 포로교환에 들어간다. 이 대통령은 자신이 한 주장이 엄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반공)포로 석방을 감행했다.

방위조약·군현대화와 맞바꾼 작통권

깜짝 놀란 미군은 이 대통령을 제거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에버레디 작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에 대한 한국민의 지지가 굳건한 것을 알고 실행을 포기했다. 그리고 ‘정전에 협조하면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한국군 20개 사단을 무장시켜주겠다’는 당근을 제시했는데, 이 대통령이 못 이기는 척 이를 수용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뒤인 1953년 10월1일 미국은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양국 국회의 비준동의를 거쳐 1954년 11월18일 이 조약을 발효시켰다. 그와 동시에 미군은 한국군 20개 사단을 현대식 무기로 무장시키고, 60만 병력을 유지할 수 있는 예산과 물자를 원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선례가 돼 그후 오랫동안 한국군은 총병력 60만에 육군 상비사단 20개 전력을 유지했다. 그러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북한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 병력을 늘림으로써 총병력 69만, 상비사단 22개의 현행 체제가 만들어졌다.

방위조약이 발효되기 직전인 1954년 11월7일 양국은 ‘유엔군(미국군)사령부가 한국 방위를 책임지는 동안 유엔군사령부는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을 계속 갖는다’는 문구가 들어간 합의의사록을 교환함으로써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유엔군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한국은 핵심적인 국가 주권인 작전권을 넘기는 대신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벗어났고, 이 대통령의 ‘벼랑끝 전술’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국군 현대화라는 성과를 얻어낸 것이다. 반면 미국은 유엔을 통해 한국군 작통권을 양도받음으로써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 미국과 한국 중에서 거래를 잘한 쪽은 어디일까.

미군이 한국군 현대화를 위한 원조를 1976년까지 계속한 덕에 한국은 과도한 국방비 부담을 덜 수 있었다. 1961년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18년간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끌 수 있었던 데는 미국의 안보 지원이 큰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5·18 때 문제 제기

미군에 대한 일방적인 안보 의존은 1968년 1월21일 북한군 특공대의 청와대 기습 미수사건을 계기로 깨지게 된다. 박 대통령은 사건 직후 응징보복을 계획했으나 작통권을 가진 미군이 반대했다. 그런데 이틀 후 미 해군 정보함인 푸에블로함이 북한 해군에 납치되자 미군은 항공모함을 북한 해역에 파견하는 등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를 계기로 박정희 정부는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방위산업 육성에 착수했다. 국민은 미국에 의존하지만은 않겠다는 박 정권의 자주국방 노선을 지지했는데, 이러한 자주 의식이 그후 학생운동 세력에 ‘이상하게 접목’되면서, ‘한국은 미국에 자발적으로 안보권을 넘긴 게 아니라 빼앗겼다’라는 반미 자주의식을 낳았다.

반미감정이 증폭되는 데는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시절 여러 차례 발동된 계엄령과 위수령도 한몫을 했다. 그중에서도 분수령이 된 것은 박 대통령 사망으로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터져나온 1980년 5월의 광주 민주화운동이었다. 시위 규모가 커지자 계엄군이 유혈 진압에 나섰는데 이것이 정치 문제로 비화했다.

문제를 제기한 측은 “한국군에 대한 작통권은 미군에 있으므로 미군의 동의가 없으면 한국군은 유혈 진압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유혈 진압의 책임은 미군에 있다”고 따졌다. 이에 미국측이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자 “그렇다면 한국군은 작통권을 가진 미군의 동의를 받지 않고 움직인 것이니 군사반란을 일으킨 것이 된다”고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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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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