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련을 위해 맞선 두 사람. 호구를 착용하니 남녀노소 구별이 사라지고 팽팽한 긴장만 남는다. 쩌렁쩌렁한 외침과 동시에 상대를 향해 날렵하게 달려드는 죽도. 상대도 물러서지 않는다. 검도엔 방어가 없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검도는 무슨 일이든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자신감을 가르친다.
연세대 물리학과 박홍이(朴洪二·62) 교수는 ‘천하무적’이다. 지난해 7월 SCI(세계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 등재 논문 수 300편을 돌파했고, 그후로도 17편의 논문을 더 썼다. ‘30원’이란 제목으로 펴낸 만화책이 일본에서도 출간됐는가 하면, 10년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단어 카드를 이용해 영어 공부를 해왔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그는 20년간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 번도 안식년을 쓰지 않았다.
“일과 휴식을 구분하지 않고 사니 따로 쉴 필요가 없지요. 일도 공부도 놀듯이 합니다. 좋은 일은 빨리 하고, 어쩔 수 없는 일도 태도를 바꿔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하고요. 그러니 늘 바쁘죠(웃음).”
희끗희끗한 머리칼만 아니면 청년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활력이 넘치는 박 교수는 호탕한 웃음이 트레이드 마크다. 그에겐 ‘삶은 재미있어야 하고, 나를 잊고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신념이 있다.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옆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고 살 자격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나눔은 연습해야 한다고도 배웠죠. 100원을 가졌을 때 10원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더 큰 나눔도 실천할 수 있다고요.”
박 교수는 매주 월·수·금 점심시간에 연세대 학생과 교직원들에게 검도를 가르친다. 기본동작을 지도한 뒤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인 이들로부터는 공격을 받아준다. 머리면 “머리!”, 손목이면 “손목!” 하고, 공격할 부위를 큰 소리로 외치며 공격해오는 적에게 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물러서지 않고 공격으로 맞서는 것이다.
대학원생들로부터 실험 경과보고를 듣고 있는 박 교수. 검도, 만화 그리기, 봉사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본업인 연구에 빈틈이 없다.
그가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나누는 삶을 실천하고, 언제나 밝게 웃으며 생활하는 데에는 50년 가까이 계속한 검도의 도움이 컸다. 나누는 삶을 가르치던 아버지는 그가 중학생 때 검도를 배우도록 권했다. 학교 공부를 썩 잘하는 아들이 문무를 겸비한 강자가 되길 바랐던 것. 아버지는 그에게 ‘강자한테 강하고, 약자한테 약한 사람이 진정한 강자’라고 가르쳤다. 검도 공인 5단인 그는 “육체적으로 강해지니 정신적으로도 두려울 게 없어졌다”고 말한다. 약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여유와 자신감도 생겼다.
그는 요즘도 월·수·금요일 오후엔 학교 검도장에서 검도를 한다. 교수실에서도 혼자 죽도를 휘둘러 벽이며 천장 곳곳에 찌르기 연습을 한 흔적이 남아 있다.
“검도는 기본 동작이 머리치기, 손목치기, 허리치기, 찌르기 네 가지밖에 없어요. 그렇다보니 보통은 시작해서 1년 이상을 못합니다. 지루하니까요. 하지만 몇 년을 해도 기본 동작의 완벽한 자세를 갖추기 힘들어요. 그런 과정을 통해 겸손을 배우는 거죠. 뭐든 10년을 계속하면 사람이 달라지고 멋있어집니다.”
박 교수는 검도를 통해 어떤 일이 닥치든 물러서지 않는 적극적인 태도를 몸에 익혔다.
“칼을 뺄 때는 앞발을 내밀고, 칼을 넣을 때는 뒷발을 앞으로 당깁니다. 검도엔 후퇴나 방어가 없어요. 공격만 있죠. 상대가 공격해오면 옆구리를 맞더라도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최선의 방어는 적극적인 공격이거든요. 물러서지 않는 정신, 한 번 사는 인생에 꼭 필요하죠.”
검도는 시작과 끝에 단전호흡을 한다. 오른쪽 무릎 앞에 호구를, 왼쪽 팔 아래 죽도를 내려놓은 채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으면, 공격을 알리는 외침과 죽도가 부딪치며 나는 파열음이 뒤흔들어놓은 마음이 평정을 되찾는다. 상대를 제압하려던 승부욕도 사라지고 무상무념, 다시 나를 잊고 남에게 잘하라는 신념이 제자리를 찾는다.
박 교수는 “하루에 10분이라도 즐거울 일이 있으면 삶이 달라지고, 즐길 거리가 많으면 삶이 풍요로워진다”며 힘들고 지친 사람일수록 잠시라도 푹 빠져들 수 있는 걸 찾아볼 것을 권했다.
10년 뒤 복지관에서 공연할 것을 목표로 틈틈이 아코디언을 연습하는 박 교수. 평생 학생처럼 배우는 삶을 살고 있는 그는, 배운 것을 다시 나누기에 배우고자 하는 욕망이 샘솟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