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생 때는 이화학당 최고의 인재로 명성이 자자했고 졸업 후에는 모교 교사로 일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기도 했던 박인덕. 그러나 그는 쏟아지는 세간의 기대와는 달리 부유한 유부남을 이혼시켜 결혼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입방아에 오른다. 우여곡절 끝에 6년간의 유학을 끝내고 돌아온 후에는, 어렵게 결혼한 남편과 자식을 찾지 않아 다시 한 번 사람들을 어리둥절케 하는데…. 경성 안 호사가들을 자극했던 이 여인의 행보에 숨은 당대 결혼제도의 그늘과 ‘신여성’이라는 이름의 굴레.
‘당대의 여성인재’ 박인덕의 이혼사연은 세간의 대대적인 관심을 끌었다. ‘신동아’ 1931년 12월호에 실린 ‘조선이 낳은 현대적 노라 박인덕’과 ‘제일선’ 1932년 7월호에 실린 ‘돌아오지 아니하는 어머니 박인덕’.
사회는 개화됐어도 가정은 여전히 가부장적이었다. 많이 배우고 능력 있는 여성, 심지어 교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 여성조차 결혼하면 쪽을 찌고 집안에 들어앉아 전업주부가 되는 게 보통이었다. 어지간히 독한 마음을 먹지 않고는 사회생활과 결혼생활을 병행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배우자뿐, 결혼 후의 삶은 전적으로 배우자의 의지와 능력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신여성에게 결혼은 일생을 건 도박과도 같았다. 한 남자에게 인생의 모든 것을 거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면 평생 독신으로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근대와 전근대가 어정쩡하게 뒤섞인 결혼생활은 자유연애의 이상도 퇴색시켰다. 역설적이게도 자유연애가 일반화된 이후, 능력 있고 돈 많은 남성의 인기는 오히려 치솟았다. 아무리 사랑한대도 무능하고 가난한 남성과 결혼한다면 평생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 큰 탓이었다. 당시 여학교 동창회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갈 정도였다.
“아이고 저기 저이가 우리 3학년 때 4학년 반장으로 있던 이지?”
“그런데 어쩌면 쪽을 찌고 왔어! 퍽 예뻐졌는데. 옷도 예쁘게 지어입구…”
“저이가 신문기자한테 시집갔다지?”
“시집 잘 갔네!”
“잘 가긴 뭐가 잘 가. 하인 하나 없이 조석도 자기가 짓는다는데.”
“아이고 어쩌면! 신문기자가 그렇게 껄렁껄렁한가.”
“거기다 시어머니까지 있다는 걸.”
“아이고 징역살이로구려.”
(…)
“잘생긴 여왕님 뒤에 시종무관이 없을 리가 있나. 있지, 응? 무엇하는 양반이요?”
“문학가요, 교육가요, 실업가요, 예술가요, 말을 좀 해요.”
“몰라! 몰라!”
“물론 문학가나 예술가겠지. 원래 학생 적부터 취미가 많았으니까. 그런데 제발 월급쟁이나 시어미 있는 데는 연애도 걸지 말아요. 사람이 그냥 썩어요, 썩어!”
“혼자 살면 살았지 누가 그런 데로 가!”
(…)
“그래도 지금 신식살림이라고 누가 와서 보더라도, 피아노나 하나 놓고 라디오나 놓고 커피 한 잔이라도 내놓아야지. 그 정도도 못하면 뭐가 신식이란 말이오!”
“그러게 말이야.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산다면 모르지만 10년 동안이나 학교를 다니고 나서 신식결혼이라고 해 가지고 누가 시어미 버선 짝이나 꿰매고 아궁이에 불이나 때고 있단 말이오!” (‘신여성과 결혼하면’, ‘별건곤’ 1927년 12월호)
남성중심주의에 젖은 남성이 신여성을 악의적으로 매도한 글을 가지고 신여성 전체의 결혼관을 가늠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혼여성의 사회활동이 금기시되던 1920~30년대 신여성에게 부잣집에 시집가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아무 생각 없이 겉멋으로 여학교에 다니던 여성뿐 아니라 사회지도자급 여성도 곧잘 돈의 유혹에 넘어가곤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경제적인 여유를 누리며 살자는 것이 크게 잘못된 생각은 아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잣집에 시집가 행복하게 잘살았다면 바람직하지는 않아도 ‘성공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그렇게 계획대로만 풀려나가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박인덕의 화려한 귀국
1931년 10월, 온 나라의 이목은 6년간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박인덕에게 쏠렸다. 박인덕은 이화학당에 다닐 때부터 ‘노래 잘하는 박인덕’ ‘연설 잘하는 박인덕’ ‘인물 잘난 박인덕’이란 평판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3·1운동 때에는 모교인 이화학당의 기하, 체육, 음악담당 교사로 재직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학생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경찰에 연행돼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유관순 열사가 그의 제자다.
재색을 겸비해 뭇 남성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박인덕은,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배재학당 출신 청년부호 김운호와 결혼했다. 김운호는 박인덕을 아내로 맞기 위해 동대문 밖 홍수동(지금의 창신동)에 저택을 짓고, 다이아몬드 반지와 만원짜리 피아노까지 선사했다. 당시 만원이면 고급주택 한 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청년부호와 결혼했다고 민족과 여성을 향한 박인덕의 열정이 식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을 향한 열정은 결혼 후 더 커졌다. 박인덕은 맏딸 혜란을 출산한 직후 배화학교와 여자신학교 교사로 사회활동을 재개했다.
박인덕은 얼굴만 잘났는가? 아니 그보다 더 칭찬할 만한 것은 그의 재주고 그보다 더 부러운 것은 그의 건강이다. 그가 얼마나 건강한가 하면, 배화학교와 여자신학교의 영어와 음악 선생으로 가정교사로 하루 평균 5시간 이상을 가르치면서 두 아이를 젖을 먹여 기른다. 해산하기 전 하루나 이틀, 해산한 후 2~3주 동안 학교를 쉬는 이외에 하루도 학교를 쉬는 일이 없다. 그렇게 건강에 무슨 비결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비결요? 아무 비결도 없습니다. 시간 맞추어서 하루 세 번 밥 먹고 시간 맞춰 하루 8시간 이상은 꼭 자고 힘써 일하고 유쾌하게 노는 동안에 자연히 건강한 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아이 나은 지 2주일쯤 되면 나는 벌써 학교에 갑니다. 갑갑해서 더 들어앉아 있을 수 없어요. 어린아이에게는 꼭 젖 주는 시간을 정해놓고 아침에 나갈 때 충분히 배불리 먹이고, 점심 때 돌아와 또 잘 먹인 다음에, 네 시에 돌아와 또 먹입니다. 그렇게 습관을 해오면 으레 그 시간이 되기 전에는 젖을 찾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정신이 들기 시작하여 내 얼굴을 익숙히 알게 되면 잘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지만 아침이면 으레 나가는 것이 습관이 되면 아침에 떼놓고 나가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돌이 지나서 걸어 다니게 되면 으레 아침이면 엄마는 학교 갈 줄 알고 갈 때 따라 나와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합니다. 주일날이나 국경일에는 오늘은 왜 나가지 않느냐고 묻지요. 아이들이 다 건강합니다. 큰 아이는 유치원에 다니는데요, 창가를 곧잘 해요. 창가선수로 뽑혀 다닌답니다.” (‘재주 있고 인물 잘나고 좋은 건강을 가진 박인덕 여사’, ‘동아일보’ 1926년 1월27일자)
박인덕은 청년부호와 결혼하고도 하인 한 명 부리지 않고 두 아이를 낳아 손수 키웠다. 학교 두 곳에서 가르치는 것도 모자라 개인교습까지 했다. 어지간한 열정과 체력 없이는 감당하기 벅찬 일이었다. 박인덕의 일 욕심, 공부 욕심은 끝이 없었다. 박인덕은 1926년 7월, 다섯 살 난 맏딸 혜란과 세 살 먹은 둘째딸 혜린을 서울에 두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남편 김운호와 요코하마 부두에서 헤어지면서 3~4년 안에 돌아오리라는 기약을 남겼다. 여성계에서 손꼽히는 재사였던 만큼 박인덕의 미국 유학은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모았다.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여자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고 있던 박인덕(30세) 여사는 돌아오는 20일에 다년간 숙망이었던 미국 유학길에 올라 조지아주 웨슬리언대학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여사는 김운호씨의 부인이요 두 아기의 어머니요 칠십이 되신 홀어머니의 따님이십니다. 여사가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두 따님, 늙은 어머님을 떠나 얼른 돌아오지 못할 길을 밟게 된 것은 여사의 마음 가운데 “조선 여자사회를 위해 좀 더 잘 배운 일꾼이 되어보자” 하는 결심이 얼마나 깊은지 능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박인덕 여사는 다음과 같이 포부를 밝혔습니다.
박인덕이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할 당시 학생들과 찍은 단체사진. 뒷줄 가운데가 박인덕이고 같은줄 오른쪽 끝이 유관순 열사다.
박인덕의 미국 유학은 성공적이었다. 3년 만에 웨슬리언대학을 졸업하고, 2년 후에는 컬럼비아대학에서 사회학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대학원에 다니던 1928년 가을부터 1931년 봄까지 국제기독교청년회 초청으로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등 32개국을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열었다. 컬럼비아대학, 케임브리지대학, 파리대학 등 서구 유수 대학에서 연 순회 강연회가 260회에 달했다. 박인덕은 순회강연회에서 조선의 사정을 설명하고 조선 민족의 독립의지를 토로해 청중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1931년 6월, 귀국길에 오른 박인덕은 영국, 독일,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터키, 시리아, 이집트, 인도, 싱가포르, 홍콩, 난징, 베이징, 톈진, 다롄, 펑톈, 안둥을 거쳐 10월2일 평양에 도착했다. 10월6일, 비행기를 타고 평양을 출발해 여의도비행장에 도착했다. 장장 5개월에 걸친 육해공을 아우르는 세계일주 귀국길이었다. 당시는 여객기가 상용화되기 이전이어서 서울에 비행기를 타고 나타난 것만으로도 한동안 화제가 되었다.
“평양에는 누가 계십니까?”
“우리 어머님께서 계십니다. 중국서 전보를 쳤기 때문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평양서 비행기로 서울까지 오셨다고요?”
“예, 퍽 기분이 상쾌했어요.”
“처음이셨습니까? 비행기 타시기?”
“예, 처음이지요. 누구에게든지 권하고 싶어요. 한번 타보라고…….”
“고국 땅을 디디실 때 무슨 감상이 나셨습니까?”
“6년 전 내가 조선에 있을 때보다 생활 문제가 더 곤란해진 것은 더 말할 것 없고요, 사람들의 기분을 말하면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서 활기가 없어 보입니다. 물론 주위환경의 지배로 그렇겠지만 애수에 젖어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박인덕 여사 방문기’, ‘신여성’ 1933년 11월호)
유학 6년간 박인덕은 조선을 넘어 세계 여성계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귀국한 박인덕에게 쏠린 세상의 관심은 그가 이룩한 엄청난 성공 때문이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이 궁금히 여긴 것은 단 하나. 그가 집에 돌아가지 않는 이유였다.
박인덕 여사는 지금으로부터 6년 전에 미주에 건너가서 그간 컬럼비아, 웨슬리언 두 대학을 마치고 구미의 10여 나라를 만유하다가 얼마 전 귀국했다. 무슨 사정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남편인 김운호 씨와 사랑하는 두 따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집인 아현리에는 발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시내 필운동 양주삼 목사 댁에서 체류하며 자기 시집가족의 면회 사절은 물론이고 신문기자 같은 방문객의 면회도 일체 사절한다. 첨단여성의 최첨단식! (‘阿園不歸家의 첨단여성’, ‘별건곤’ 1931년 11월호)
유학길에 오르면서 박인덕은 남편이 일본 유학을 할 것이라 말했지만, 남편 김운호는 아현리 자택에 남아 두 딸을 돌봤다. 당시 아현리는 서울의 대표적인 빈민가였다. 1920년 결혼 당시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부호였던 김운호와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집이었다. 박인덕이 유학을 떠난 6년간 김운호는 하루 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아내가 성공해 금의환향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1년에도 몇 차례씩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혜란과 혜련의 사진을 찍어 멀리 있는 아내에게 보내며 적적함을 달랬다. 박인덕은 남편과 두 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남편에게 매달 20원 남짓 돈을 부쳐주었다. 결혼 선물로 아내에게 만원짜리 피아노를 사주어 장안에 화제가 되었던 김운호는 아내가 보내주는 돈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했다. 당시 20원은 도시노동자 최저생계비였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박인덕의 소식을 전하는 1926년 7월16일자 ‘동아일보’ 기사.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박인덕이 귀국한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신보 기자가 아현리 김운호의 집을 찾았다. 기자를 맞은 것은 맏딸 혜란. 혜란은 방금 수를 놓다가 나왔다며 색실을 손에 들고 있었다. 기자가 물었다.
“어머니 보고 싶지 아니하냐?”
“……”
혜란은 머뭇거리며 아무 말도 못했다. 기자는 말을 바꿔 물었다.
“어머니 오셨다는 소리는 들었지?”
“예.”
“어머니가 오시기 전에 오신다고 편지 했더냐?”
“아니요.”
혜란은 애교 있는 얼굴에 약간 쓸쓸한 웃음을 띠고 대답하기를 꺼렸다.
“그러면 어머니가 오셨다는 소리는 누구에게 들었니?”
“어른들이 이야기하시는 것을 들었어요.”
“어머니 보고 싶니?”
“예, 왜 안 오실까요? 필운동에 계신다지요?”
혜란은 반문하며 손에 들었던 색실을 이 손가락 저 손가락에 감아가며 얼굴을 도리질쳤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애써 미소 짓는 얼굴에는 적막함이 가득했다.
“그래 필운동에 계신단다.”
“필운동이 어디에요? 퍽 멀지요?”
“아니다, 필운동은 인왕산 밑이란다.”
혜란은 인왕산이 어느 곳에 있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또 고개를 숙였다.
“어느 날 오셨습니까?”
“6일 날 오셨다.”
“비행기 타고 오셨다지요?”
혜란은 어머니가 비행기를 타고 왔다는 말을 누구에게 들었는지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 비행기 타고 온 어머니를 훌륭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랴?”
“어떻게요?”
“내가 데리고 가서.”
“아버지가 보내주실까요?”
열한 살밖에 안 된 혜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나러 가지 못하게 할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한테 이야기하고 데리고 가지.”
“예, 만나게 해주세요.”
혜란은 아버지에게 말하고 어머니에게 데려다준다는 말에 처음 만나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 기자에게 반갑게 달려왔다. 기자가 혜란을 어머니에게 데려다줄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취재 도중 우발적으로 하게 된 말이었다. 기자는 공연히 천진한 아이를 속인 것을 뉘우치지 않을 수 없었다. 혜란은 거짓말인지도 모르고 또다시 말을 이었다.
“학교에 가면 밤에 돌아오니까 일요일이 아니면 못 가요. 요다음 일요일에 꼭 데려가 주세요.”
기자는 또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어린아이에게 더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어서 집으로 들어가라 하고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집으로 들어가던 혜란은 또다시 기자를 찾았다.
“혜린이도 데리고 가야지요.”
자기 혼자만 어머니를 만난다는 것이 철없는 그로서도 동생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 혜란은 집으로 돌아가다 말고 돌아서서 기자에게 말했다. 기특한 주문이지만 기자는 양심상 더 이상 거짓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들이 가여워서…… 확실한 대답을 못하는 기자에게 또
“어제도 학교에 가니까 동무들이 신문에서 어머니가 오셨다는 것을 보았다며 얼마나 좋으냐고 묻겠지요.”
어머니를 가진 동무가 부러운 듯, 동무의 앞에서 귀국하신 어머니가 집에는 안 오셨다는 말을 차마 못했다는 듯이 혜란은 울음 반, 웃음 반으로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거짓을 모르는 순진한 그들이 기자의 말을 믿고 일요일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하겠는가. (‘돌아는 오고도 안 돌아오는 수수께끼’, ‘매일신보’ 1931년 10월13일자)
박인덕은 미국 유학 중 갑자기 이혼을 결심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 유학 자체가 집을 나가기 위한 방편이었다. 축복은커녕 사회적 비난과 질타 속에 시작된 박인덕과 김운호의 결혼생활은 신혼 초부터 삐걱거렸다. 박인덕의 귀국과 이혼 요구는 10여 년 결혼생활의 비밀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잘못된 만남
박인덕은 인물 많기로 소문난 이화학당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얼굴 예쁘고, 공부 잘하고, 피아노 잘 치고, 노래 잘하고, 연설 잘하고, 교제 잘하는 이가 누구냐 물으면 누구든 박인덕을 첫째로 꼽았다. 겸손하고 기독교 신앙도 독실해 이화학당 교사들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여인 티가 나면서부터 뭇 남학생의 구애를 받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고 학업과 신앙생활에 매진했다. 이화학당 선교사들은 박인덕이 독신으로 남아 학교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줄 것으로 믿었다.
박인덕은 방년의 나이에 교사생활을 시작해 기하, 영어, 음악, 체육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다. 3·1운동 때에 3개월 간 옥고를 치르고, 그해 11월 대한애국부인회사건으로 투옥돼 또 한 번 고초를 겪었다. 박인덕의 미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은 비단 주변의 남학생들만이 아니었다.
독립운동 때 박인덕 여사는 석달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그때 감옥 안 간수 사이에는 인물 잘나고 애교 있는 여죄수라하면 으레 박인덕 여사인 것을 알아들으리만치 그 미명(美名)이 높았다. 여사의 사건을 맡아 다스린 일본인 예심판사까지도 사석에서 박인덕 여사의 미모를 한껏 칭찬했다 한다. (‘재주 있고 인물 잘나고 좋은 건강을 가진 박인덕 여사’, ‘동아일보’ 1926년 1월27일자)
이화학당 외국인 선교사들은 출옥한 박인덕에게 미국 웨슬리언대학으로 유학을 주선했다. 그러나 박인덕은 머뭇거리다가 끝내 제안을 거절했다. 꿈에 그리던 미국 유학까지 포기하면서 박인덕이 선택한 것은 김운호와의 결혼이었다. 얼마나 뜻밖의 소식이었던지, 결혼 청첩을 받은 이화학당 교사들이 남의 집 경사에 도리어 화를 낼 정도였다. 박인덕이 마음은 물론 미래까지 바쳐 ‘사랑’한 김운호는 배재학당을 마친 잘생긴 청년부호였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이미 아내를 둔 유부남이라는 것이었다.
김운호는 박인덕에게 구애하기 위해 동대문 밖 홍수동에 저택을 짓고 다이아몬드 반지와 만원짜리 피아노를 선물했다. 여학생에게 구애하는 남학생의 모습을 그린 학생만화. ‘별건곤’ 1927년 1월호.
이씨의 아픔에도 아랑곳없이 박인덕과 김운호의 혼담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두 사람은 1920년 6월 정동예배당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동대문 밖 홍수동에 ‘스위트홈’을 차렸다. 그러나 남의 가슴에 못질을 하며 시작된 결혼생활이 순탄할 리 없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몹시 따가웠다. 결혼한 지 얼마 후, 박인덕은 어느 음악회의 간청에 피아노 연주자로 무대에 섰다. 그러나 청중이 야유를 퍼부어 피아노 뚜껑 한번 열어보지 못한 채 울면서 퇴장했다. 그날 저녁부터 무려 7개월간 박인덕은 두문불출하고 아무와도 만나지 않았다.
진짜 불행은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아니었다. 3·1운동으로 옥고까지 치른 민족운동가이자 이화학당이 자랑하는 여성운동가가 유부남을 이혼시켜 결혼하면서 그 정도의 각오가 서 있지 않을 리 없었다. 문제는 너무 빨리 찾아온 김운호의 몰락이었다.
결혼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김운호의 사업은 큰 위기를 맞았다. 인사동 택시회사, 관철동 병원, 종로 요리집이 차례로 도산했다. ‘스위트홈’에서 피아노만 치고 앉아 있어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렸다. 급기야 결혼한 지 1년이 되기도 전에 동대문 밖 저택과 피아노를 처분했다. 살림을 줄여 시내로 들어와 이곳저곳으로 전전하다가 김운호의 모친이 사는 아현리 옛집으로 들어갔다.
경제적 풍요 하나 바라보고 한 결혼은 박인덕을 결혼 전보다 더 심한 경제적 곤궁 속에 빠뜨렸다. 김운호의 사업이 그 지경이 되고 보니 박인덕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직업전선으로 나가 남편과 두 딸,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부양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 두 곳 출강하는 것으로도 딸린 식솔을 다 벌어 먹일 수 없어 윤덕영 자작 집에 가정교사까지 다녔다.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하고 이화학당 중학과에서 얼마간 교편을 잡다가 결혼생활에 들어갔습니다. 내 결혼생활은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기도 싫습니다. 6년을 사느라고 사는 사이에 나는 내 자신까지 아주 까맣게 잊어버리도록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마음도 몸도 한가할 수 없었습니다. 배화학교 시간교수, 여자신학교 시간교수, 개인교수…. 어쨌든 하루에 14시간 노동으로 몸은 피로할 대로 피로하고 마음도 또한 그 이상으로 피곤하고 우울하고 괴로웠습니다. 지옥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유쾌한 시간이라곤 없었습니다. 이렇게 6년을 사는 사이에 아이가 둘이 났습니다. 두 아이를 기르면서 그날그날을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부어가는 격으로 살아왔습니다. 많은 날이 갈수록 나는 결혼생활에서 오는 지옥보다 더 무섭고 싫은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나를 살리자. 아랫돌을 빼 윗목에 막고 윗돌을 빼 아랫목에 막는, 밤낮 마찬가지인 공허한 생활에서 뛰쳐나가자.’
결국 나는 이렇게 결단을 짓고 여장을 꾸려 미국으로 떠났던 것입니다. 남들이야 별별 소리를 하거나 말거나 나에게는 천당이었습니다. 무거운 쇠사슬이 내 발목에 항상 얽혀 내 걸음을 방해하든 것이 툭 끊겨 나간 듯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나 어디서나 늘 웃는 것으로 일을 삼았습니다. (박인덕, ‘파란 많은 나의 반생’, ‘삼천리’ 1938년 11월호)
박인덕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동안 김운호는 지난 시절 부귀영화를 추억하며 허송세월을 했다. 아내가 “제발 경제적 독립을 해달라”고 피눈물을 흘리며 애걸해도 허구한 날 낮잠만 자는 속 편한 남편이었다. 아현리 김운호의 집에서는 수시로 남자의 호령소리와 여자의 울음소리, 매질소리와 여자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여성’ 1939년 3월호에 실린 박인덕의 글 ‘나의 자서전’.
“여자란 남편이나 섬기고 자녀를 기르는 것이 본위니 속히 돌아오라.”
남모를 고민
박인덕이 자기 한 몸 편하고자 부유한 유부남 김운호와 결혼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 3·1운동 직후 미국 유학을 제안받았을 때,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환갑을 훌쩍 넘긴 노모를 홀로 두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김운호는 노모를 극진히 떠받들어 박인덕의 환심을 샀다.
박인덕은 평안남도 진남포 억양리에서 1896년 태어났다. 박인덕의 아버지는 평생 글만 읽은 선비였다. 돈 벌 생각도 없이 오직 글을 읽으며 평생 과거 준비에만 매달렸다. 박인덕이 태어나던 해 과거가 폐지되자 신세한탄만 하다가 박인덕이 일곱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평생 선비 노릇만 하던 아버지가 유산을 남겼을 리 없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생활고에 직면했다. 어머니는 박인덕을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갔다.
그때만 해도 딸자식은 남이라는 관념이 꽉 박혀 있을 때입니다. 관념뿐 아니라 실상 딸이란 시집만 가면 그만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어머님의 신세가 생각할수록 기가 막힐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머니는 남들이 다 자는 밤이면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왜 네가 사내 녀석으로 태어나지 못했니?”하고 한숨을 길게 쉬셨습니다. 이렇게 지내는 어머님께 어느 날은 어떤 이가 이런 말을 하셨더랍니다.
“지금은 딸자식도 공부만 시키면 아들만 못하지 않다구.” (박인덕, ‘파란 많은 나의 반생’, ‘삼천리’ 1938년 11월호)
어머니는 박인덕에게 공부를 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진남포에는 학교가 없어 친정 조카가 훈장 노릇하는 서당에 딸에게 사내아이 옷을 입혀 다니게 했다. 여자는 서당에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홉 살 때 진남포에 삼승학교라는 여학교가 처음 생기자 박인덕은 서당을 그만두고 학교에 다녔다. 삼승학교에서 박인덕과 절친히 지내던 친구가 윤심덕과 김일엽이었다. 공교롭게도 이후 세 여인 모두 남자 때문에 비극적 삶을 살아야 했다. ‘사의 찬미’를 부른 여가수 윤심덕은 극작가 김우진과 관부연락선 위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져 정사(情死)했고, 소설가 김일엽은 4차례나 결혼에 실패한 후 머리를 깎고 수덕사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열두 살에 삼승학교를 졸업한 박인덕은 무작정 상경해 이화학당을 찾아갔다. 교장을 만나 공부를 하겠노라고 했더니, 교장은 보증인도 친척도 없는 아이가 어떻게 공부하느냐며 입학을 거절했다. 박인덕은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공부하겠다고 서울 온 사람을 그냥 돌아가라고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대들었다. 교장은 당돌한 여자아이에게 장학금을 주며 학교에 다니게 했다.
이화학당에 입학한 후 박인덕의 인생은 파죽지세로 뻗어갔다. 공부, 운동, 노래… 못하는 것이 없었고, 스승, 친구, 후배 심지어 ‘연애병환자’ 남학생까지 누구든 그를 아끼고 사랑해주었다. 사회적으로 보자면 박인덕은 완벽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 바로 자기 하나만 바라보며 홀로 늙어가는 어머니였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김운호와의 결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장고 끝에 내린 일생일대의 패착(敗着)이었다.
김운호에게 바란 단 한 가지였던 경제적 여유는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사라졌다. 기대한 것이 충족되지 않더라도 배우자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다면 행복까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참고 사는 게 결혼생활이다.
그러나 김운호는 최소한의 책임감도 없는 나태하고 파렴치한 사내였다. 6년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가 이혼을 요구했을 때 김운호는 무엇이 문제인지 깨닫지 못할 만큼 아둔했다. 박인덕이 이혼을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운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가 나를 배척하려는 동기와 원인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가 표면에 내세우려는 이유라는 것은 남편인 내가 경제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단순히 이에 대한 원인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보지 아니합니다. 그가 외국에 가서 있는 동안에 나를 버리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나는 그 동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안다는 그것은 지금에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 조선에 돌아올 때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가 만주에 와서 교회에 있는 교역자를 중간에 넣어 이러한 주문을 했습니다. 내가 조선에 들어갈 터이니 나의 자유를 간섭치 않겠느냐고….
나는 완전히 그의 마음이 변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문대로 해주겠다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만약 간섭을 하겠다고 하였으면 조선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그리하여 돌아와서는 교회를 중심으로 이혼을 요구합니다. 절대로 이혼을 안 해주려 하였습니다만 너무 끈적끈적한 행동인 것 같아 단념하고 이혼을 하여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내가 이혼을 하여줄 테니 돈을 내라고까지 했다는 말이 세상에 돌아다니나 나는 그러한 요구를 한 바도 없었고 또한 준다 하여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돌아는 오고도 안 돌아오는 수수께끼’, ‘매일신보’ 1931년 10월15일자)
김운호는 자기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공연히 미국에 있는 동안 아내에게 남자가 생겼을 것으로 의심했다. ‘이혼해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호언했으나, ‘자식 양육을 대가’로 집요하게 돈을 요구했다.
왜 이혼하려 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인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편과 자식을 먹여 살려야만 합니까. 자식을 낳아주어야만 합니까. 그것도 아들만…. 그리고 옷 해 입히고, 밥 지어 먹여야만 합니까. 나는 여자이니 어디까지든지 남편의 종이 되라는 말입니까.
나는 결혼 이후 10년이 되는 오늘까지 그들을 부양해왔고, 그들의 어머니요 아내라기보다는 종노릇을 해왔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디까지든지 그에게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달라는 것을 애원했습니다. 아내라는 사람은 뼈가 빠지도록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하는데 남편은 집에서 낮잠만 자야겠습니까. 나는 더 이상 인종할 수 없습니다. 신여성이요 선각자라는 내가 이에 굴종한다고 하면 이후 다른 여성들도 남편의 종이 되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 이혼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별거를 요구한 것입니다. 남편이 별거와 이혼이 무엇이 다르냐고 이혼해주마 한 것이지요. 또 시집갈 내가 아니요 남편이 탐나는 내가 아니니 이혼을 해주거나 별거를 하거나 문제가 아닙니다. 이혼을 해줄 터이니 돈을 내라니요. 모든 것이 나의 자유인 이상 내 자유를 돈을 내고 사겠습니까. 어린아이의 양육비로 달라고요. 자기의 자식을 자기가 기르지 아니하고 아내에게 양육비를 달라는 어리석은 말이 어디 있습니까.
자식의 장래를 위해 호의로서 주고자 하는 뜻도 없지는 않으나 남편에게 돈을 준다 하면 이혼을 돈 주고 샀다는 오해를 받기 쉬운 고로 한푼도 낼 수 없습니다. 자식이 기르기 어려워 내게 맡긴다면 장성할 때까지 훌륭히 양육하지요. 그가 무엇이라고 하든지 어떠한 짓을 하든지, 나는 사회를 위하여 일하려는 사람입니다.” (‘돌아는 오고도 안 돌아오는 수수께끼’, ‘매일신보’ 1931년 10월15일자)
박인덕의 주장도 모두 이치에 맞는 것은 아니었다. 별거를 요구했지 이혼을 요구하지는 않았다거나, 이혼하건 같이 살건 모든 것이 자기 자유라는 주장은 군색하기 이를 데 없다. 다행히 두 사람 사이의 분쟁은 오래가지 않았다. 박인덕이 귀국한 지 한 달이 채 되기도 전인 1931년 10월26일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갈라섰다. 돈을 받지 않겠다거니 주지 않겠다거니 호기를 부렸지만, 실제로는 박인덕이 김운호에게 위자료 2000원을 주는 것으로 정리됐다. 두 딸의 양육권은 박인덕이 가졌다. 박인덕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남편에게 위자료를 주고 이혼한 여성이 되었다.
행복의 조건
박인덕의 파란만장한 결혼생활을 돌이켜보면 이혼의 책임은 전적으로 김운호에게 있었다. 그러나 박인덕에겐 물불 가리지 않고 부유한 유부남과 결혼한 원죄가 있었다. 박인덕은 배우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려 했기에 어리석은 결혼을 했고,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었기에 불행한 결혼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쩌면 불행한 결혼생활의 궁극적인 책임은 남성중심주의와 가부장제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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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덕은 썩어가는 물건이 있다면 그 물건이 다 썩기 전에 썩은 부분을 잘라버려야 남은 부분이라도 생생하게 그대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두 사람이 하루라도 빨리 갈라선 것은 서로를 위해 다행한 일이었다.
결혼을 일컬어 인륜지대사라 한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본인의 의지로 결정할 수 없지만, 결혼만큼은 통제할 수 있다. 부귀영화가 결혼생활의 성공을 보장하지 못한다. 부유한 부부가 갈라서는 경우는 있어도, 서로 믿고 사랑하는 부부가 갈라서는 법은 없다. 돈 많고 신의 없는 사람처럼 위험한 배우자도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