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삐삐루 삐리리 삐-.’ 일하다가 밀화부리 우는 소리가 들리면 뭔가에 홀린 듯하다. 그러면 일손도 놓고 이 소리에 빨려든다. 딱따구리 소리는 경쾌하다. ‘따라라라락. 따라라라락’. 마치 드럼을 두드리는 것처럼 리드미컬해서 몸 근육이 불끈불끈 솟는다. 봄에 온 산과 들판에 새소리가 가득하면 감동을 넘어 열기가 느껴진다. 게으르고 싶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진다.
이른 새벽에 봄나물 캐러 나보다 먼저 산을 오른 아주머니들. 새벽은 깨어 있는 사람 몫이다.
봄에는 새롭게 보는 것이 많다. 그래서 ‘봄’이라 했을까. 새싹이 돋아나는 걸 보고, 나무에 꽃망울이 터지는 걸 보면서 많은 시인이 봄을 읊었다. 하지만 나는 소리를 듣는 데서 봄을 먼저 느낀다. 고요한 산골의 어느 봄날. 산을 오르다가 처음으로 듣는 새소리는 아주 각별하다.
내 몸을 깨우는 소리들
우리 동네는 3월 초라고 해도 아직 새들이 활발하게 울지 않는다. 집 둘레에 사는 텃새인 참새나 까치가 우는 정도다.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기에 날마다 듣지만 별다른 느낌을 못 받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들리는 멧비둘기 울음소리. 구구우 쿠우구. 구구우 쿠우구. 먼 산등성이를 타고 울려온다. 낮은 소리로 느릿느릿.
무엇이든 처음이 주는 느낌은 강렬하다. 그중에서도 짝을 찾고 짝을 맺는 거라면 더 그런 것 같다. 첫사랑, 첫 고백, 첫날밤…. 멧비둘기들은 보통 4월이 돼야 활발하게 우는데 이 놈은 꽤 급한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멧비둘기 첫 울음소리는 더 애잔하다. 그 떨림이 사람의 가슴을 파고든다. 하던 일을 멈추고 고요히 소리를 들어본다. 구구우 쿠우구. 구구우 쿠우구…. 내게는 ‘너는 지금 뭐하니, 너는 지금 뭐하니’ 하고 물어보는 소리로 들린다. 그래서인지 이 날은 하루 종일 멧비둘기 울음소리가 귓전에 남았다.
오랜만에 논밭을 둘러본다. 지난 가을 미처 정리하지 못한 논밭에는 일거리가 널려 있다. 쉬엄쉬엄 정리하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들판 햇살을 받아서인가 집둘레에도 지저분한 게 눈에 많이 뜨인다. 거무칙칙한 겨울 빛이 봄 햇살에 무거워 보인다. 겨우내 안 하던 청소를 다 한다. 늦게나마 봄 꽁무니를 따라간다.
봄은 날마다 변한다. 새소리도 하루하루가 달라진다. 멧비둘기를 시작으로 앞산에서 꿩이 ‘꿩 꿩’ 하면 뒷산 꿩도 ‘꿩 꿩’ 한다. 청딱따구리는 ‘삑 삑 삑 삐’. 낮에만 새가 우는 게 아니라 밤은 밤대로 우는 새가 따로 있다. 밤에 우는 새소리는 으스스하거나 구슬프다. 호랑지빠귀는 ‘삐이이 삐이이’. 부엉이는 ‘부엉부엉’…. 봄에는 밤낮 없이 새들이 운다.
그러니 잘 때 자고, 깰 때 깨지 않으면 새소리는 스트레스다. 행여나 잠 못 이루는 밤이라면 밤에 우는 새소리 때문에 마음이 더 싱숭생숭하다. 늦게 잠들어 새벽에 일어나지 못하면 까치 우는 소리가 시끄러울 때가 있다. 그것도 바로 집 앞 나무에 앉아 ‘꽈악! 꽈악!’ 하며 악을 쓰듯 울 때는 화가 날 정도다. 조금 참자 하다가 계속되면 밖으로 나가 돌멩이를 집어던지고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몸이 봄을 따르지 않으면 새소리도 짜증스럽다.
사실 대부분의 새소리는 더없이 아름답다. 딱새, 박새, 휘파람새, 밀화부리…. 일하다가 밀화부리 우는 소리가 들리면 뭔가에 홀린 듯하다. ‘삐삐루 삐리리 삐….’ 아예 일손도 놓고 소리에 빨려든다. 말할 수 없는 어떤 기쁨이 차오른다. 검은등뻐꾸기 소리는 에로틱하다. 이 새 울음소리를 말로 적자면 ‘호 오 홋 오’인데 적고 나서 다시 읽어 보면 영 새소리가 아니다. 새소리에서 리듬을 빼고 글자로만 적으면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홀딱 벗고, 홀딱 벗고’
울퉁불퉁 돼지감자. 모양도 제각각 제멋대로다. 그래서인지 볼수록 정겹다.
새소리 몇 가지를 순서대로 적어보았는데, 실제로는 여러 새가 한꺼번에 운다. 먼 곳에서는 꿩이랑 멧비둘기가 울고, 가까운 곳에서는 참새, 딱새, 까치가 울어댄다. 나뭇가지에 앉아 우는 새가 있는가 하면 매는 하늘 높이 떠, 운다. 온 산과 들판에 새소리가 가득하다. 거대한 생명의 합창이자 새들이 들려주는 교향악이다. 감동을 넘어 때로는 열기마저 느껴진다. 어느새 게으르고 싶었던 내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진다. 몸을 움직여 뭔가를 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그러다가도 봄비가 오면 새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거의 울지 않는다. 그럼 세상이 아주 고요하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우는 소리가 있다. ‘호로로로 호로로로.’ 산개구리 우는 소리다. 꼭 새소리처럼 들린다.
산개구리는 언 땅이 녹고 봄비가 내리면 울기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소리가 더 아련하다. 조심조심 짝을 부르는 소리다. 집 왼쪽 개울에서 호로로로, 호로로로. 그러다 한 호흡 쉬는가 싶어 귀를 쫑긋하면 집 오른쪽 논에서도 호로로로. 이렇게 오른쪽 왼쪽, 두 곳에서 교대로 들리니 그 화음이 절묘하다. 살아 있는 입체음향이다. 부부가 서로를 부르는 소리가 산개구리 울음소리만 같다면 얼마나 좋으랴.
‘천연 인슐린’ 돼지감자
새소리, 산개구리 우는 소리에 자극을 받아 나도 씨앗을 챙긴다. 고추씨를 시작으로 감자, 옥수수, 볍씨 등 심어야 할 씨앗을 두루 챙긴다. 그런데 늘 반복하던 농사일은 솔직히 건성으로 하기 쉽다. 하지만 씨앗을 바꾸거나 새로 심을 씨앗에는 아무래도 마음이 더 간다. 새로운 일이 삶의 활력소가 되는 것 같다.
올해 우리 식구 농사에서 특별한 거라면 돼지감자다. 일명 ‘뚱딴지’라고도 하며 지역에 따라서는 ‘땅감자’라 부르기도 한단다. 이 감자는 보통 감자와 여러 모로 다르다. 모양도 맛도 꽃도 한살이도 아주 다르다. 보통 감자는 캐지 않고 그냥 두면 추운 겨울 동안 땅 속에서 얼거나 썩어버리기 쉽다.
하지만 돼지감자는 땅 속에서 고스란히 겨울을 난다. 그리고 이듬해 저절로 잘 자란다. 한마디로 돼지감자는 야성 그대로다. 농사가 쉬운 맛에 이웃에게 씨앗을 얻어 조금 심은 적이 있다. 가꾸지도 않고 그냥 심어만 두었는데 잘 자랐다. 감자는 줄기가 커봤자 두 자 안팎이다. 돼지감자는 줄기가 2m 이상 훌쩍 자라고 노란 꽃을 예쁘게 피운다. 마치 작은 해바라기 꽃 같다. 꽃이 지고 나서 가을에 캐보니 한 상자가 넘어 나왔다.
그런데도 먹을 줄을 몰라 그냥 버렸다. 내 어린 시절, 학교 다녀오는 길에 배가 고프면 길 가에 자라던 돼지감자를 캐먹은 기억이 있다. 맛은 별달리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돼지감자를 거두고도 먹지 않았다. 그러다가 올초 아내가 돼지감자를 몇 알 구해왔다. 다른 정보도 함께. 돼지감자는 당뇨에 좋다고 한다. 또 돼지감자는 ‘이눌린’이라는 성분을 많이 갖고 있어 ‘천연의 인슐린’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약으로 먹는 게 아니고 반찬으로 먹는다. 아내는 감자를 채 썬 다음 소스를 넣고 샐러드처럼 만들었다. 한겨울인데도 싱싱한 맛을 볼 수 있어 잘 먹었다. 얻어온 양이 적어 두 번 먹으니 없다. 예전에 버린 돼지감자가 아쉬웠다.
알고 보니 돼지감자는 지천에 널려 있다. 산골이라 그런지 길가에서도 곧잘 돼지감자를 볼 수 있다. 예전에는 모르고 지나쳤는데 가꾸어보니 눈에 들어온다. 묵은 논에 저절로 자라는 돼지감자를 캐 산밭에 심었다. 왠지 마음이 든든하다.
봄이면 이웃 사이에 이런저런 씨앗을 나눈다. 우리는 그동안 나름대로 토종 씨앗을 찾고 또 이어온 게 몇 가지 있다. 그 가운데 토종고추와 오이 씨앗은 인기가 높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여러 번 나눠준 적이 있다. 토종고추는 양은 적지만 향기가 좋다. 토종오이는 맛도 담백하거니와 키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장에서 파는 개량오이는 거름이 부족하거나 가뭄이 들면 금방 표가 난다. 오이 끝이 말리며 볼품이 없고 맛도 쓰다.
하지만 토종오이는 가뭄에 강하다. 크기는 개량오이에 견주어 작다. 기껏 손바닥 길이 정도. 하지만 꾸준히 달린다. 서리 올 때까지 달리니 그 생명력이 놀랍다. 시장에 내놓기에는 상품가치가 떨어질지 몰라도 밥상에 올리기에는 더없이 훌륭하다.
“씨는 갈라 써야 혀”
이런저런 씨앗을 구하는 과정에 우리 식구는 마을 이웃에게 도움을 많이 받는다. 올해는 고구마 씨앗을 바꾸었다. 우리의 고구마 수확량은 해마다 들쭉날쭉했다. 모종을 장에서 사다 심으니 유전자가 안정적이지 못했다. 아랫마을에 알아보니 순희 아주머니네 씨고구마가 좋단다. 오랜 세월 이 땅에서 이어오던 씨앗이란다.
아주머니네 집에 가니 집에 쓸 고구마 모종을 그릇에 키우고 계신다. 붉은빛이 도는 싹이 예쁘다. 씨고구마를 정성스레 상자에 담아주신다. 게다가 맛도 보라며 몇 개 더 주신다.
“고마워서 어쩌지요?”
“고맙긴. 아무리 없이 살아도 씨는 갈라(나누어) 써야 혀. 그래야 후손이 많이 늘어난디아.”
씨고구마를 얻고 돌아오는 내내 아주머니 말이 귓전을 맴돈다. ‘씨는 갈라 써야 혀’ ‘씨는 갈라 써야 혀’ ‘아무리 없이 살아도’….
아주머니네는 참 가난하게 사신다. 없는 집안의 막내에게 시집와, 자식 셋을 대학까지 보내신 분. 초등학교를 2학년까지 다니다가 동생을 돌봐야 해서 더는 배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겨울이면 한글 공부를 하시고, 띄엄띄엄 일기를 쓰신다. 못 배운 한을 풀고자, 하루 일을 마치고 일기를 쓰신다. 내가 일기를 보자고 하니 쑥스러워하시며 내놓는다. 아주머니의 고민이 서투른 맞춤법 속에 가지런히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아주머니가 씨앗을 건네며 던진 말씀이 여러 가지로 내 가슴에 와 닿는다.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가진 걸 아낌없이 나눠주고자 하는 마음. 게다가 요즘 웬만한 씨앗은 죄다 다국적 기업의 손으로 넘어가 돈 주고 씨앗을 사야 한다. 씨를 돈 주고 사야 하는 세상이니 아주머니 이야기가 더욱 감동스러운지도 모르겠다. 흉년에 배를 곯아가면서도 이듬해 농사를 위해 아껴두었던 씨앗을 나눠주며 배고픔을 함께 이겨낸 백성의 아픔과 사랑이 담긴 말이 아닌가.
아주머니 이야기에 자극을 받아 곡식 씨앗만이 아닌 생각의 씨앗, 마음의 씨앗을 돌아본다. 누군가의 좋은 생각은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씨앗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쓰는 글이나 그린 그림이 어느새 저작권, 지적재산권이 되는 세상이다. 아주머니 말을 내 식으로 패러디해본다. ‘좋은 생각은 나누어야 해. 그래야 인류가 멸종하지 않고 계속 진화할 거야.’
날로 먹는 향긋한 ‘냉이회’
봄을 피부로 느끼게 하는 거라면 햇살과 바람을 들 수 있다. 햇살이 조금씩 길어지면 땅이 녹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른 봄에는 땅거죽만 녹기 쉽다. 겨우내 언 땅 속은 그냥 얼어 있다. 삽으로 땅을 파보면 어림도 없다. 그나마 낮에 녹은 거죽은 밤이 되면 다시 꽁꽁 언다. 그러니 낮에는 다시 땅이 질척질척하다. 땅 위에 녹은 물이 땅 속으로 스미지는 못하고, 땅 위로 증발하기에는 이른 날씨다.
하지만 하루하루 날씨가 변하면서 땅도 달라진다. 때로는 신발을 떼기가 어려울 만큼 질척거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 땅이 보송보송하다. 걸음을 걸으면 아주 부드럽고 편안하다. 마치 딴 나라에 온 것 같다. 드디어 땅 속 얼음이 사라진 것이다.
땅이 녹은 기념잔치를 안 할 수 없다. 냉이잔치를 벌여야겠다. 땅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겨울을 난 냉이. 아직 푸른빛이 돌지도 않아 흙빛 그대로 땅에 납작 엎드려 있다. 정말 땅이 녹았나? 호미를 먼저 박아본다. 푹 들어간다. 한 손으로 냉이 밑동을 잡고 호미와 함께 냉이를 당긴다. 흙을 잔뜩 안고 달려오는 냉이. 마치 낚싯대에 고기가 달려오는 맛이다. 향이 은은하다. 언 땅이 녹으면 땅이 포슬포슬하다. 그럼 호미를 쓸 것도 없이 그냥 냉이를 당긴다. 하나 둘 캐는 재미에 냉이가 한 바구니 가득하다.
온 들판에 새소리가 가득하면 사람도 모두 들판으로 나온다. 논두렁을 깎고 있는데 온 식구가 논으로 모였다.
잎부터 먹을까. 뿌리부터 먹을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향기가 먼저 코로 들어온다. 냉이는 향기가 좋아 무슨 요리를 해도 맛있다. 무쳐도 먹고, 된장국에도 넣어 먹는다. 냉이잔치로 봄을 맞을 힘을 얻는다.
밭에 쪼그리고 앉으면 바람이 느껴진다. 겨울바람과 달리 봄바람은 방향을 종잡을 수 없다. 북동쪽에서 불다가 어느 순간 남동쪽에서도 분다. 있는 듯 없는 듯 불다가도 나뭇가지를 흔들며 흔들바람이 분다. 이럴 때 들판에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땅에 어설프게 놓인 것은 다 하늘로 날아간다. 들판에 쓰다 남은 비닐, 종이, 검불. 땅에 미처 뿌리내리지 못한 풀씨들도 바람에 멀리 날아가 씨앗을 퍼뜨린다.
봄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산들바람은 사람을 집 밖으로 끌어내고, 흔들바람은 들에 머물지 말고 집안으로 들어가라고 민다. 그 말을 안 듣고 무리를 하면 손가락 살이 트고 갈라진다. 들판에서 봄바람을 맞다 보면 이 바람이 도대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로 가는 걸까 하는 아련한 생각에 젖는다.
바람이 몸을 흔드니 마음도 흔들린다. 사람도 저절로 봄이 된다. 내 어린 시절에 듣던 유행가 가운데 이런 노래가 있었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말만 들은 서울로 님을 찾아서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봄바람만 해도 마음이 흔들리는데 흐르는 우물가에 앵두나무 꽃이 피고, 벌이 날아드는 걸 보고 바람이 안 난다면 이상하리라. 그것도 꽃다운 처녀와 총각들이.
지금 시절은 말로만 들던 서울은 아니다. 산골에 앉아서도 세계를 다 볼 수 있는 세상이다. 그래도 봄은 산골 처녀 총각들을 흔드나 보다. 우리 이웃에 귀농한 노(?)처녀가 몇 사람 있었다. 몇 해 전, 경남 함양으로 귀농한 노총각들과 집단 맞선을 주선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는 짝이 맺어지지 않았다. 짝을 바라보는 서로의 시선이 많이 달랐나 보다.
농사 ‘신고식’, 왕겨숯 만들기
다시 세월이 흘러 이웃에 살던 그 노처녀들은 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사람의 중매보다 자연의 중매가 결혼을 성사시켰다. 자연이 가장 위대한 중매쟁이가 아닌가 싶다. 짝을 찾는 새소리, 산개구리 울음소리, 봄 햇살, 봄바람의 숨결. 돋아나는 새순, 그리고 벌과 나비. 이 모두가 짝을 맺으라고 부추기지 않았을까. 처녀와 총각은 서로 끌리는 거라고 말없는 가르침을 주지 않았을까.
봄은 산골에도, 나이 드신 할아버지에게도 뚜벅뚜벅 오나 보다. 아랫마을 할아버지가 모는 경운기 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른다. ‘탈탈탈.’ 멀리 고추밭에 거름 내러 가는 소리다. 한평생을 농사만 지어오신 분인데 봄이 되면 어김없이 앞장서 농사일을 하신다. 이 어른을 보면 부지런하시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부지런함은 게으름의 반대말이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게으름 자체를 모르시는 것 같다.
더는 게을러질 수 없는 계절. 나도 왕겨로 숯을 만든다. 왕겨숯 만들기는 나 나름대로 농사를 시작하는 의식이다. 이 왕겨숯은 쓰임새가 아주 많다. 거름은 물론 병충해 방지에도 쓰인다. 공기를 통하게 하는 성질이 좋아 못자리에도 쓰고, 밭곡식 모종 흙에도 넣는다. 그러고도 남는 건 뒷간에 두고 볼일을 보기 전에 뿌리고 볼일 보고 나서도 뿌린다. 그러면 냄새도 덜 나고 벌레도 잘 안 꼬인다. 뒷간에 왕겨숯을 두면 냄새 제거에도 만점이다.
숯을 굽자면 기본 준비가 필요하다. 정미소에서 왕겨를 가져오고, 산에서 솔가리 한 포 끌어다놓고, 마당에다가 연통을 설치해야 한다. 연통으로는 작지만 쇠파이프를 이용하고 그 둘레에 짚을 한 단 매달았다.
무당벌레도 고물고물 기어나오고
왕겨숯을 굽는 광경. 바람 따라 연기가 폴폴, 냄새도 폴폴. 온 사방으로 아름답고 구수하게 흩어진다.
이제 왕겨를 덮는다. 굴뚝 위로 파르스름한 연기가 폴폴폴 솟아난다. 바람이 미세하게 일어나면 바람 따라 연기가 이리저리 사방으로 흩어진다. 연기가 사라지는 모양을 바라본다. 위로, 아래로, 동쪽으로, 서쪽으로…. 연기 따라 마음도 너울너울 일렁인다. 안에서부터 서서히 숯이 된다. 왕겨 두 포대가 숯이 되자면 장장 여덟 시간이 걸린다. 마지막에는 불꽃이 일며 탄다. 숯이 덜 된 곳을 뒤집어가며 마저 굽는다.
왕겨숯은 만드는 과정이 참 신비롭다. 다양한 빛깔이 나타나고 사라진다. 왕겨는 노란빛인데 숯이 되면서 서서히 검은 빛이 된다. 그 과정에서 연기는 파란빛을 띤다. 숯으로 구워지는 과정에서 하얀 김도 난다. 나중에는 연기와 김이 자욱하여 마치 내가 구름 속에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숯이 다 될 무렵 마지막에 붉은 불꽃이 일어난다. 왕겨숯을 만드는 과정에서 노랑, 검정, 파랑, 하양, 빨강이 어우러진다.
왕겨숯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는 냄새도 아주 독특하다. 싸하고 매캐하고 구수한 것이 흡사 숭늉 냄새 같기도 하고, 고구마 타는 냄새 같기도 하다. 말로 나타내기는 어렵지만 기분 좋은 냄새다. 냄새가 손바닥에 먼저 배더니 차츰차츰 옷에도 밴다.
하루 종일 굽다 보면 몸속까지 배어 씻어도 냄새가 가시지 않는다. 냄새는 집안까지 스며든다. 하늘로도 멀리멀리 날아간다. 농사를 시작하는 나 나름의 신고식이다. 온 세상에 냄새를 풍겨 농사를 시작한다는 걸 알리는 셈이다.
햇살이 하루하루 길어지고 볕이 더 따뜻해지면 온갖 생명이 움튼다. 여기저기 쑥이 돋아나고 수선화가 어느 틈에 불쑥 솟아 있기도 하다. 산에 산나물도 하나둘 고개를 내민다. 겨우내 형광등 갓 속에 겨울잠을 자던 무당벌레도 깨어나 고물고물 창문을 기어다닌다.
아이들도 봄을 느끼는지 밖에서 노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무위는 요즘 줄넘기에 한창이다. 이단 줄넘기를 처음으로 배우다가 뒤로 넘어지기도 하더니 한 번, 세 번, 다섯 번. 점점 늘어난다. 그러더니 열아홉 번을 했단다. 그냥 줄넘기는 150개를 넘어 220개를 했다고 하더니 어제는 드디어,
“400개 했어요. 조금 더 할 수 있었는데 그만했어요. 심장이 엄청 뛰더라고요.”
겨우내 거의 집에서 식구들과 지내던 무위가 봄이 되면서 친구를 찾는다. 마을 아이들과도 놀지만 올해는 인터넷도 활용한다. ‘다음 플래닛’(다음에서 제공하는 1인 미디어 서비스)을 꾸미면서 친구를 사귀기 시작한다. 새싹도 아이들도 하루하루 달라지는 봄, 나도 달라져야 할 것 같다.
나도 곡식 꽃으로 달리고 싶다
농사를 지어 보면 풀과 경쟁해서 이길 만한 게 드물다. 기껏 들깨, 팥, 수수 그리고 기장이 그나마 씨앗을 다시 거둘 정도고 대부분 풀에 치여 녹아버린다. 쑥과 같은 여러해살이풀은 물론이요 망초 같은 두해살이풀과 경쟁이 안 된다. 환삼덩굴이라는 풀은 한해살이이지만 3월 초면 벌써 싹이 돋아난다. 우리가 가꾸는 고추는 자연 상태라면 5월 초가 돼야 싹이 돋는다. 곡식은 사람에게 길들여져서인지 그냥 두면 풀과의 싸움에서 진다. 게다가 풀만 있는 게 아니라 나무들도 호시탐탐 밭에서 자랄 기회를 노린다.
자연 환경이 그러하니 농사꾼을 잘못 만나면 곡식은 종(種)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까 농사꾼은 씨앗을 잘 갈무리하고 다시 심어 꽃을 피우고 다시 열매를 맺게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왕 할 거면 의무가 아닌 권리로 농사를 짓고 싶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기다리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
우리 집 둘레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은 생강나무 꽃이다.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도 하는데 터질 듯 팽팽하던 생강나무 꽃망울이 드디어 터졌다. 노란 꽃. 환하다. 이제 조금 더 지나면 산수유나무, 매화나무 꽃이 필 것이다. 그리고 뒷산 개나리, 앞산 진달래도 이어서 피어나리라.
나도 꽃을 피우고 싶다.씨앗 심고 나무 가꿔 꽃을 피우고 싶다.
4월이면 복숭아꽃, 딸기꽃5월 밀꽃6월 하얀 감자꽃, 붉은 잇꽃7월 분홍 옥수수꽃, 묶은 밭두렁 노란 호박꽃8월 보라 콩꽃, 연노란 벼꽃….
산과 들에 피는 들꽃 따라나도 곡식 꽃으로 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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