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의 충돌’ 토마스 소웰 지음/채계병 옮김/이카루스미디어/342쪽/1만8000원
“비전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미로 속에서 우리를 인도해주는 지도와 같다. 지도처럼 우리가 목적지로 가는 몇 가지 중요한 길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여러 구체적인 특징을 단순화한다.”
어떤 사람이라도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해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자신이 잘 아는 분야에 대해서는 갖고 있는 지식과 경험에 의존하겠지만, 그 밖의 복잡한 사회 현상을 이해하고 판단할 때에는 자신이 알게 모르게 갖고 있는 비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를 두고 사람은 저마다 두뇌 속에 ‘세상을 바라보는 창(窓)’을 갖고 있다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창이 어떤 모양인가에 따라서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데, 이런 창을 두고 비전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 소웰의 분류에 따르면 비전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제약적 비전’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무제약적 비전’이다. 사회에 대한 비전은 우선 인간 본성에 대한 기본 가정의 차이에서 비롯되는데, 제약적 비전은 자신의 이익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주의를 비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그리고 인간의 이같은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약적 비전과 무제약적 비전
이 분야에서 원조를 찾는다면 당연히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를 들 수 있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등장한 인간 본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정의야말로 ‘제약적 비전’의 기초를 이룬다.
“지진으로 거대한 중국이 모든 주민과 함께 갑자기 사라져버렸다고 가정할 때, 중국과 전혀 관련이 없는 유럽의 인간성 좋은 사람이 이 끔찍한 재난 소식을 듣고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해보기로 하자. 나는 우선 그가 중국인의 불행한 재난에 아주 강한 슬픔을 표현하고 삶의 불확실성에 대한 생각으로 매우 우울해질 것이며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는 인간의 모든 노고의 허망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리라 상상한다.
또한 그가 이론적인 사람이라면 중국의 재난이 유럽의 통상 및 일반적인 세계 무역과 사업에 미칠 영향과 관련해 많은 것을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고상한 철학을 끝내고 인도주의적인 감정을 일단 그럴 듯하게 표현하고 나면 마치 그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평온하게 자기 일을 다시 시작하거나 쾌락을 추구하고, 혹은 휴식을 취하거나 기분전환을 하려 할 것이다.”
반면 무제약적 비전은 인간이 자신의 이익보다 타인의 욕구를 먼저 생각할 수도 있다고 가정한다. 본성의 이타적(利他的)인 면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무제약적 비전은 제약적 비전과 인간관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 분야에서 대표적인 사람과 저서를 꼽자면 윌리엄 고드윈의 ‘정치적 정의에 관한 고찰’을 들 수 있다. 고드윈의 견해에 대해 토마스 소웰은 이렇게 적었다.
“고드윈은 ‘인간은 분명 다른 사람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이익에 대한 편애는 환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 기인하는 것이며 우리 본성의 불변의 법칙은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우리는 사물과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버크의 견해와 대조적으로 ‘인간은 이제부터 만들어져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무제약적 비전은 ‘인간은 제도와 인센티브에 의해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가정 위에 서 있다. 그런 까닭에 사회악 중에 해결하기 힘든 것은 없다고 믿는다. 이에 반해 제약적 비전은 어떤 제도나 강제조차 스스로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인간 본성을 바꾸어놓을 수 없기 때문에 사회악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이 같은 제약 조건을 인정하고,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기심이냐 공익이냐
제약적 비전과 무제약적 비전은 경제 체제에 대해서도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제약적 비전은 인간의 이기심에 큰 비중을 두면서 인간이 자신의 이익에 충실하도록 행동하는 것만이 경제 문제의 상당 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 무제약적 비전은 인간이 공익을 위해 헌신할 수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정부 개입의 범위가 확대되고 급기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제도로 발전되게 된다. 여기서 좌와 우의 극명한 차이가 비전의 차이에서 비롯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세기에 있었던 두 가지 사건 즉,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의 헌법 제정을 보자. 프랑스 대혁명을 주도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무제약적 비전이 들어 있었다. 제도 개혁을 통해서 얼마든지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진행된 것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다. 반면 미국의 헌법은 전혀 다른 인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은 권력을 독점하면 얼마든지 전횡을 휘두를 수 있다고 전제하고, 인간의 선의에 기대기보다는 폭정을 제어할 수 있는 정교한 제어 시스템을 만드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18세기에 있었던 이 두 가지 굵직한 사건에 대해 토마스 소웰은 이런 주장을 펼쳤다.
“정교한 견제와 균형으로 이루어진 미국의 헌법은 분명 누구에게도 권력을 전적으로 위임할 수 없다는 견해를 분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생사여탈권을 포함해 루소의 ‘일반의지’를 표명하며 ‘민중’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들에게 전권을 부여한 프랑스 대혁명과는 분명한 대조를 보인다. 당시 직위를 박탈당하고 사형당한 지도자들에 대해 몹시 실망했을 때에도 무제약적 비전을 믿는 사람들은 혁명지도자들의 악행을 개인의 문제로 국한했지, 자신들의 정치 시스템에 대한 믿음을 바꾸지 않았다.”
이처럼 인간 본성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가진 제약적 비전과 무제약적 비전은 지식의 양과, 집중 또는 전파 과정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다른 견해를 보인다.
제약적 비전은 누구든지 자신의 지식만으로는 사회적인 정책을 결정하는 데 부족하고 종종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결정을 하는 데도 대체로 불충분한 점이 많다고 가정한다. 반면에 무제약적 비전은 인간의 지식이나 이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의 양과 적용에 대해서 제한적인 견해를 갖지 않는다.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훗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같은 사회적 실험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
지식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비전에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느냐에 대해 토마스 소웰은 이렇게 말한다.
“요컨대 제약적 비전과 무제약적 비전은 특정 개인이 얼마나 많이 알 수 있고 얼마나 많이 이해할 수 있느냐에 대해 서로 다른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따라서 최선의 사회적 의사 결정이 전문화된 지식을 가진 소수의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느냐 아니면 많은 사람에게 적은 양으로 흩어져 있는 지식을 활용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상반된 결론에 이른다.”
한편 인간 본성에 대한 비전의 차이는 사회 과정에 대해서도 아주 다른 견해를 도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제약적 비전은 최선의 정책이란 인간이 가진 결점을 완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자율적인 조정 과정 그 자체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반면 무제약적 비전은 청사진을 갖고 그런 이상적인 상태를 만들어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한다. 다시 말하면 제약적 비전은 사회 과정을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데 반해 무제약적 비전은 사회 과정에 대해 혁명적인 관점으로 접근할 때가 많다.
무제약적 비전의 오류
기존 지식과 이성에 의거해서 새로운 질서를 얼마든지 창출할 수 있다고 믿었던 무제약적 비전이 낳은 결과로 20세기의 다양한 사회적 실험을 들 수 있다. 이 책이 발간된 이후 진화심리학이나 두뇌과학 등과 같은 분야의 발달로 말미암아 인간 본성에 관한 진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결론은 무제약적 비전의 근본 가정에 커다란 오류가 있다는 사실이다. 좌파 실험의 실패는 비전의 오류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런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현실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