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근대미술의 선구자인 고(故) 오지호(吳之湖·1905~82) 화백의 차남이자 한국 구상미술의 거장 오승윤(吳承潤·65) 화백이 자살 직전인 지난 1월13일 아침 아들 앞으로 남긴 유서 내용 중 일부다. 오 화백은 유서를 쓰면서 자살 장소로 호수를 택한 듯했다. 그러나 아내가 장을 보기 위해 집을 비운 사이 그의 발걸음은 호수가 아닌, 광주시 서구 풍암동에 있는 누나의 아파트(12층)로 향했다. 평소 격려를 아끼지 않던 누나 부부에게 “화집 제작과 전시회가 제때 이뤄지지 않아 괴롭다”면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채 현관문을 나섰다. 잠시 후 그는 이 아파트 화단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오 화백의 죽음으로 미술계가 술렁였다. 화가들은 “오 화백의 죽음이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며 애도했다.
“바람처럼 물처럼 살다 가려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명성과 권위를 지닌 노(老) 화백이 목숨을 내던졌을까. 3월5일 오 화백이 작품 활동에 매진했던 예향의 도시 광주에서 유가족을 만났다. 유가족은 그가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 흔적이 있는 일기장과 ‘자살의 문턱으로 내몬 주범’이라면서 ‘계약서’를 펼쳐보였다.
“이 계약서가 아니었다면, 아니, 이것(계약서)만 제대로 지켜졌다면 남편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림밖에 모르던 순수한 남편은 뭘 따지는 법이 없었다.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고 잇속을 챙기는 데 둔했다. 아마 남편뿐 아니라 대다수 예술가가 다 그럴 것이다.”
부인 이상실(59)씨의 말이다. 1950년대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그림에 두각을 나타낸 오 화백은 1970년대에 전남 추천작가와 초대작가로 선정돼 작품성을 알렸으며, 대한민국미술대전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작가로 성장했다. 1974년에는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창설에 참여하는 등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 오 화백은 1980년 교수직을 버리고 파리로 건너가 작품활동에 전념했는데, 그곳에서 한국의 전통색인 ‘오방색(五方色, 적·청·황·백·흑)’을 주조로 하는 독특한 화풍을 선보였다. 유럽 화단은 그의 작품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국제적 작가로 주목받으며 왕성하게 활동하던 오 화백은 1999년 6월 작품 ‘풍수’가 프랑스의 유력 미술잡지 ‘위니베르 데자르’의 표지를 장식하면서 거장 대열에 합류했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 미술평론가인 파티르스 드라 페르는 “오 화백의 작품은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진리와 본심에서 우러난 진솔성을 가지고 있다”고 격찬했다.
우리나라보다 유럽 화단에서 그 능력을 더 인정받았던 오 화백은 이승과 작별하기 며칠 전 박철환 변호사 등에게 쓴 편지에서 “다시는 나와 같은 순진한 예술인이 없도록 사회에 경종을 울려주시고 격려해달라. 아직 화집이 나오지 않았으니 사실상 계약은 무효다. 사회정의나 법의 정의로 바로잡아달라”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