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를 위해 이런 소중한 자리를 마련해주시고 또 바쁘신 중에도 이 자리를 같이해주신 모든 분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평소 자주 만나보고 싶어도 쉽지 않은 분들을 이렇게 한자리에서 만나 뵙게 되니 저는 그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에 젖어 있습니다.
이런 경우 제가 늘 되씹어보는 아름다운 말이 있습니다. “인생이란 언제나 일정의 사람들만이 초대되어 있는 하나의 만남이다.” 독일의 의사이자 작가인 한스 카로사의 말입니다.
지난번 이미륵상(賞)을 탈 때도 고백한 바와 같이 저는 허영심이 많아서 상 타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번엔 독일 훈장을 타게 되었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더니 “아니, 진작 탄 줄 알았는데 겨우 이제야 타느냐”고 사뭇 측은하게 여기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독일에 대한 ‘사랑의 노래’를, 비록 좋은 목소리는 아니지만 남들도 들으라고 작지 않은 목소리로 오랫동안 불러왔던 것입니다. 독일은 말하자면 제 젊은 날의 첫사랑, 곧 ‘유겐트리베(Jugendliebe)’였습니다.
저는 1951년 6·25전쟁의 와중에 독일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1955년 신문사에 입사하면서 저는 1908년부터 북한에서 선교사업을 벌여오던 독일 베네딕트 교회의 신부, 수녀, 수사들이 발간한 합동보고서 ‘북한에서의 운명(Schicksal in Korea)’을 40회에 걸쳐 신문에 번역 연재하면서 기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 1960년부터 저는 독일에 건너가 다시 공부도 하고 특파원으로 일도 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의 독자를 향해 독일을 위한 사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1960년대 말 고국에 돌아온 뒤에도 신문사에서, 그리고 대학에서 같은 테마의 노래 부르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다 1999년 20세기가 끝나가면서 저는 대학에서 정년퇴직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사랑의 노래를 부른 독일은 주로 20세기 후반기의 독일, 통일 이전의 독일, 그리고 통일이 된 뒤에도 베를린으로 천도(遷都)하기 이전의 이른바 ‘본 공화국(Bonner Republik)’입니다.
분단이 서독 발전 걸림돌 안 돼
그럼 이제부터 독일에 대한 제 사랑의 노래를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불러보고자 합니다. 저는 독일의 제2공화국, 특히 1949년부터 1999년까지의 ‘본 공화국의 50년’이 1000년 독일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가장 아름다운, 가장 생동적인, 그리고 가장 생산적인 시대로 보고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그리고 문화적으로나 정신으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