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호

경영 컨설턴트 김경준이 동행한 엄홍길 히말라야 원정

산은 겸허한 자에게만 정상을 허락한다

  • 김경준 딜로이트 상무 kjunkim@hanmail.net

    입력2006-06-08 13:4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커다란 계곡 사이로 빙하 녹은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리고, 하늘 닿은 곳에는 하얀 설산(雪山)이 끝없이 이어졌다. 계곡 따라 난 길로 딸랑딸랑 종소리를 내며 야크들이 오가는 풍경은 이국적이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트레킹 종반에 죽음의 공포를 코앞까지 느꼈던 나로선 엄 대장의 말이 엄숙하게 다가왔다. ‘인간은 최선을 다하고, 산이 허락하면 정상을 잠시 빌린다.’
    경영 컨설턴트 김경준이 동행한 엄홍길 히말라야 원정
    “김상무님, 히말라야 함께 갑시다. 나에 대해 책을 썼으면 적어도 히말라야 공기는 같이 숨쉬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엄홍길 대장의 히말라야 초대는 갑작스러웠다. 엄 대장은 세계 여덟 번째, 아시아 최초로 해발 8000m 이상의 히말라야 고봉 14좌를 완등(完登)한 산악인이다. 나는 엄 대장의 도전정신과 리더십을 기업경영과 조직관리의 관점에서 해석해 ‘엄홍길의 정상경영학-거친 산 오를 땐 독재자가 된다’는 책을 낸 바 있다. 기회가 있으면 히말라야를 한 번 경험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는데, 마침 엄 대장이 불쑥 제안한 것이다. 엄 대장의 리더십을 히말라야 현장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2000년 여름, K2 등정으로 14좌를 오른 후 새 목표를 세웠다. 위성봉이지만 독립봉의 성격이 강한 얄룽캉(8505m)과 로체샤르(8400m)를 올라, 세계 최초로 ‘14+2 프로젝트’를 달성하는 것. 얄룽캉은 2004년 정복했으니 이제 로체샤르만 남았다. 원정 일정은 2006년 3월16일 서울을 떠나 3월29일 베이스캠프 도착, 4월 말에서 5월 초에 정상 공격, 5월25일 서울로 귀환이다. 필자는 서울에서 함께 출발해 추쿵(Chukung)까지 따라가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선뜻 따라나서겠다고 했지만 우선 체력이 걱정스러웠다. 출발일까지 남은 기간은 한 달, 평일에 운동하고 주말에 등산하는 것밖에 준비할 게 없었다. 등산장비도 문제였다. 10년 가까이 사용한 등산화와 등산복밖에 없었다. 엄 대장과 상의하니 안치영 대원을 소개해줬고, 등산용품점이 몰려 있는 종로5가에서 그와 만났다. 그가 골라주는 등산화, 바지, 재킷, 우모복, 배낭, 내복, 양말, 헤드랜턴, 물통, 선글라스, 등산용 스틱을 구입했다. 모자를 3개나 샀는데, 카트만두용 모자, 캐러밴용 모자, 밤에 쓰는 보온용 모자였다.

    ‘로마군은 병참으로 이긴다’



    물건을 다 고르고 계산하니 200만원이 넘었다. 안 대원은 “개인장비 사는 데 돈 아까워하지 말라. 고산 등반에서 개인장비는 목숨이나 마찬가지”라며 엄청난 장비 구입 가격에 놀란 나를 다독였다. 실제 히말라야에 가보니 그의 말이 맞았다. 산악인이 쓰는 선글라스는 멋을 내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 없이는 낮에 단 5분도 견딜 수 없었다. 3000m 이상 고도에서 방한용 모자를 잠깐이라도 벗는다면 고소증 희생자가 되기를 자처하는 셈이었다.

    3월16일, 드디어 떠나는 날. 일행은 3월8일 선발대로 떠난 이인·안치영 대원을 제외하고 엄홍길 대장, 정오승·남영모·박홍기 대원과 아리랑TV의 안석환 카메라 감독, 황응기·김민수 PD, 그리고 나까지 8명이었다. 카트만두에 도착하면 선발대 2명, MBC 교양제작국 3명, 재일교포 5명을 포함해 총 15명이 등정할 예정이었다.

    비행기는 태국 방콕을 경유해 카트만두로 들어갔다. 공항에 내리자 이번 등반에 참가할 셰르파(네팔 안내인)들이 나와 엄 대장을 반갑게 맞이했다. 능숙한 네팔어로 인사를 나누는 엄 대장은 마치 귀향한 네팔 사람 같았다. 엄 대장은 종종 자신이 전생에 네팔인이었던 것 같다고 했는데, 여기서 보니 농담 같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해 여장을 풀고 나니 엄 대장과 대원들은 더욱 바빠졌다. 떠나기 전 사흘 동안 7t이 넘는 짐을 점검하고 꾸려야 하는 마지막 병참기지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선 텐트, 아이젠, 산소통, 의약품, 고소식량, 쌀, 김치 같은 기초물품부터 철사, 못, 이쑤시개, 손톱깎이 같은 자질구레한 물건까지 수백가지 품목을 점검해야 한다.

    장비와 물품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꾸리느냐에 등반의 성패가 달려 있다. 군인은 정신력만으로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 등반대원도 마찬가지다.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일사불란하게 현장을 지휘하는 엄 대장을 보니 ‘로마군은 병참으로 이긴다’는 말이 떠올랐다. 무적의 로마군단은 전통적으로 병참을 중시했다. 나아가 적국을 공격하기 위한 도로를 정비하고, 전쟁터가 될 지역주민의 민심을 얻는 것도 전쟁의 일부라고 여겼다.

    네팔의 불안한 정치 상황

    로마군의 전쟁준비는 병력, 무기, 군량보급으로 시작해 정신력, 사기라는 불확정 요소를 극대화하는 것으로 진행됐다. 이 때문에 로마군은 개별적 ‘전투’에서는 패배해도 장기적 ‘전쟁’에서는 지지 않았다. 전쟁이란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하고 계획해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으로 패배할 수 있다. 막연히 정신력만 강조하고 행운에 의존한다면 그 군대는 전쟁에서 계속 승리할 수 없다.

    카트만두에서의 최종 점검은 로마군의 병참작전과 흡사했다. 엄 대장은 ‘인간은 최선을 다하고, 산이 허락하면 정상을 잠시 빌린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최선을 다해 계획하고 점검한 후 겸허한 마음으로 등반에 나서는 그를 보니 병참을 중시하는 로마군 지휘관이 떠올랐다.

    엄 대장은 바쁜 일정에서도 우리에게 카트만두 주변 관광을 주선해줬다. 이 중 1시간 동안 경비행기를 타고 에베레스트 주변을 둘러보는 것은 굉장한 볼거리였다. 비행기는 계곡을 따라 늘어선 쿰부 히말의 고봉들 위로 떠올랐다. 조종실이 개방돼 정면에서 바라보니 설산(雪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연이은 봉우리가 연출하는 웅장한 풍경에 감탄하면서도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햇빛이 비치는 남쪽의 완만한 경사면에는 어김없이 크고 작은 밭이 있었고, 드문드문 집도 있었다. 저렇듯 높은 곳에서 사람들은 무얼 일궈 먹고 사는지 궁금했다. 이런 궁금증은 등반하면서 만난 포터를 통해 풀렸다.

    예정대로라면 3월21일 카트만두를 떠나야 했으나 하루가 늦어졌다. 준비기간도 짧았고, 불안정한 네팔의 정치상황도 원인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혁명사상을 표방한 마오이스트 반정부군이 카트만두로 통하는 주요 도로를 봉쇄하는 바람에 물자수송에 차질이 생겼다. 1인당 국민소득 260달러의 세계 최빈국 네팔에선 1996년 이후 사망자만 1만3000명에 이르는 내전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반정부군은 절대빈곤에 허덕이는 농촌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 5만명의 병력으로 국토의 40%를 장악했다.

    게다가 1768년 성립된 ‘샤’ 왕조의 후예 갸넨드라 국왕은 계속 정통성 시비에 시달리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2001년 6월1일 왕실 가족파티에서 당시 비렌드라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실가족 9명이 디펜드라 왕세자의 총기난동으로 몰살당하고 왕세자 자신도 자살하면서부터. 왕의 직계가족이 모두 죽었기에 왕의 동생인 갸넨드라가 즉위했다. 그러나 갸넨드라는 사건 당일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데다, 현장에 있던 그의 자녀까지 모두 무사했기에 주위의 의심을 샀다. 전임 비렌드라 국왕을 살아 있는 신(神)으로 추앙하던 국민은 ‘사랑에 눈먼 왕세자가 벌인 왕실 가족의 비극’이라는 정부 발표를 불신하고 있다. 오히려 현 국왕을 참극의 배후세력으로 믿는 분위기다. 새로 즉위한 왕이 입헌군주제를 폐지하고 의회를 해산하는 철권통치로 절대왕정을 추구하자 국민의 반발은 극에 달했다.

    상황은 엄 대장이 예상한 것보다 좋지 않았다. 도로봉쇄로 김장용 채소 값이 몇 배나 올랐고, 수송용 트럭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는 현지 셰르파들을 통해 상황을 파악했고, 예정보다 하루 늦게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화물은 카트만두에서 9시간 걸리는 지리(Jiri)까지 트럭으로 싣고 간 다음, 헬기를 이용해 샹보체로 수송하고, 대원들은 비행기로 루쿨라까지 간 다음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천천히 꾸준하게 걸을 것”

    로체샤르는 쿰부 히말 지역의 에베레스트 산군(山群)으로 이곳을 가려면 해발 2784m에 있는 루쿨라 공항으로 가야 한다. 30인승 경비행기를 타자 스튜어디스가 쟁반 위에 사탕과 솜을 수북이 담아 내민다. 솜사탕인 줄 알고 입에 넣으니, 스튜어디스가 웃으면서 작게 뭉쳐 귀에 꽂는 솜이라고 알려줬다. 낡고 시끄러운 경비행기로 30분을 날아 산 중턱을 깎아 만든 비행장에 닿았다.

    위에서 보니 활주로는 ‘ㄱ’자로 꺾여 있었다. 거의 곡예비행을 하듯 착륙하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륙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서 살펴보니, 비행기가 정지상태에서 엔진출력을 최대한 높인 후 마치 항공모함의 전투기처럼 튀어올랐다. 꺾여 있는 활주로는 전세계에서 여기뿐일 것 같았다. 공항 주변을 살펴보니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사람과 야크(소와 비슷한 동물)만 오갈 뿐이었다.

    경영 컨설턴트 김경준이 동행한 엄홍길 히말라야 원정

    히말라야 원정대 일행이 해발 4350m의 딩보체로 향하고 있다(왼쪽). 산악지대에 비행장을 만들다 보니 활주로가 ‘ㄱ’자로 꺽여 있다(가운데). 7t이 넘는 물품이 도착한 샹보체 헬기장(오른쪽).

    드디어 해발 4750m의 추쿵까지 엄 대장과 함께 등반하는 날이 왔다. 등산화 끈을 동여맨 다음, 선글라스와 캐러밴 모자를 쓰고 등산용 스틱을 양손에 들고 걸어보았다. 정말 산악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착각은 잠깐, 정오승 대원이 초보자에게 스틱 사용하는 방법부터 가르쳐줬다. 고산 행군시 호흡방법도 알려줬다. 핵심은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가는 것. 정 대원은 “다른 사람 의식하지 말고 천천히 걸어라. 하루 거리는 정해져 있다. 무리하게 따라가면 탈진해서 못 간다. 천천히 자기 페이스로 가면 누구나 갈 수 있다”고 용기를 줬다. 엄 대장 같은 사람은 히말라야에 오면 마구 뛰어갈 것 같지만, 실제 걷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초반 30분 정도는 내 걸음으로도 따라갈 정도였다. 높은 산을 오르는 기본자세는 속도가 아니라 꾸준함이었다.

    정 대원은 등반 내내 숨쉬는 것부터 고소(高所) 대응하는 방법까지 자상하게 일러줬다. 마치 회사 팀장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신입사원을 가르치고 이끄는 것 같았다. 다른 대원들 또한 혼자 걷기도 쉽지 않은데 나 같은 초보자까지 따뜻하게 배려했다. 혼자라면 불가능했을 캐러밴 일정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대원들 덕분이다.

    고소증으로 죽어간 사람들

    태어나 처음으로 걷는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는 상쾌했다. 커다란 계곡 사이로 빙하 녹은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리고, 하늘 닿은 곳에는 하얀 설산이 끝없이 이어졌다. 계곡 따라 난 길로 딸랑딸랑 종소리를 내며 야크들이 오가는 풍경은 이국적이고 평화로웠다.

    첫날은 팍딩(Phakding, 2610m)에서 묵을 예정이었지만, 운행이 순조로워 2시간을 더 걸었다. 도착한 곳은 몬조(Monjo), 해발 3200m지대였다. 엄 대장은 이곳에서 짐을 푸는 것이 고소 적응에도 좋고, 다음날 산행 일정에도 유리하다고 판단한 듯했다.

    숙소인 로지(Lodge)에 도착해 삐거덕거리는 계단과 복도를 지나 방으로 들어서니 나무 침대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전등은 없고, 세면장과 화장실은 공용이었다. 히말라야의 극심한 일교차는 정말 실감났다. 낮에는 얇은 옷만 입고 걸었지만, 밤에는 두꺼운 오리털 파카를 입어도 추웠다.

    몬조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남체(Namche Bazzar)로 향했다. 남체는 쿰부 히말 지역에서 가장 큰 셰르파 족 마을로 대규모 5일장이 열리는 곳이다. 고소증세는 산소량이 평지의 3분의 2 이하로 줄어드는 3000m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남체는 3440m여서, 여기서부터는 조심해야 했다. 높은 곳에 적응하려면 산소를 많이 받아들여 세포에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적혈구 숫자가 증가하고 모세혈관이 늘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적혈구가 증가하면 혈액농도가 짙어지는데다 건조한 고산지대에서는 땀이나 오줌보다 호흡으로 수분을 빼앗겨 하루에 3ℓ이상 물을 마셔야 했다. 높은 곳에서는 산소공급이 필요한 뇌와 폐는 물론이고 소화기관조차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흔히 ‘고소를 먹는다’고 표현하는 고소증세가 올 경우 제때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는다. 두통과 기침, 각혈로 고생하다가 결국 뇌수종이나 폐수종으로 사망하는 것이다.

    2005년 봄, 초모랑마 휴먼 원정대를 격려하기 위해 베이스캠프를 방문했던 한승권 계명대 산악회장도 고산병에 희생됐다. 한 회장은 정통 산악인으로 히말라야 원정 경험도 많았지만, 하산하는 길에 고소증에 빠졌다. 2005년 11월에는 표세진 전 공정거래위원장이 에베레스트 근처의 해발 5500m 칼라파타르 전망대 부근에서 고산증세로 숨졌다는 얘기도 들었다. 오싹했다.

    남체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숙소 ‘쿰부 로지’의 시설은 좋았다. 방에 전등이 있었고, 화장실도 딸려 있었다.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자인 뉴질랜드 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가 자주 묵었다는 ‘힐러리 룸’이 있었다. ‘엄홍길 룸’도 보였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히말라야에 왔을 때도 묵었다고 한다. 이곳에선 고소 적응을 위해 이틀 머무를 예정이다. 엄 대장은 고소증세 예방 필수지침을 일러줬다.

    ▼ 5ℓ마시면 살고 3ℓ마시면 죽는다. 틈만 나면 따뜻한 물을 마셔라.

    ▼ 고소증을 이기려면 많이 먹는 것이 최고다. 살아남으려면 먹어야 한다. 무조건 먹어라.

    ▼ 머리 감지 말고, 세수도 하지 마라. 몸의 온도조절 능력이 떨어지는 고소에서 머리가 젖으면 바로 감기에 걸린다. 고소에서 감기에 걸리면 치명적이다.

    ▼ 남체에서부터는 절대로 뛰지 마라. 의식적으로 천천히 걸어라.

    고소증세라는 불청객은 저녁식사 후 갑자기 찾아왔다. 밤이 되자 얼굴이 붓는 듯하더니 머리가 아프고 심장박동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같은 방을 쓰는 경향신문 정지윤 기자는 은행잎 성분의 혈액순환제를 건넸다. 고소증세에는 비아그라가 특효약이지만 ‘꿩 대신 닭’이란다. 감기약까지 챙겨 먹고 잠을 잤는데, 낮에 물을 많이 마셔서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아침에 일어날 때는 괜찮은 듯했는데, 식당에 가니 하룻밤 사이에 음식냄새가 신경을 자극했다. 맛있던 네팔 음식이 다음날 아침에는 향신료 냄새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억지로 입에 우겨넣었지만 음식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재일교포 일행 중 두 명은 얼굴이 창백한 것이 한눈에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엄 대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컨디션을 물어보더니 하산명령을 내린다. 셰르파 한 명과 함께 낮은 지대로 내려가 하루 이틀 쉰 다음 상태가 호전되면 본대를 따라오라고 했다.

    아침식사 후 에베레스트가 보인다는 샹보체 언덕(3850m)을 올랐다가 점심 무렵 내려온 것이 무리였는지 감기 몸살이 심하게 걸린 것처럼 머리가 아프고 온몸이 쑤셨다. 음식냄새가 코끝을 스치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왔다. 아내가 임신해서 입덧할 때 음식냄새 못 맡겠다고 하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먹은 것도 없는데 점심식사 후에는 구토까지 하는 바람에 오후부터는 방에서 꼼짝도 못했다. 말로만 듣던 고소증세를 직접 겪어보니 만만치 않았다. 엄 대장은 내게 “히말라야에 왔으면 고소 신고식은 한번 해야지” 하면서도 하산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아직 위험한 지경은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내려가면 히말라야는 ‘맛’도 못 보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엄 싸부’와 셰르파 동지들

    고소를 먹어 정신 차리지 못하는 동안, 본대의 캐러밴 일정에도 약간 차질이 생겼다. 헬리콥터로 지리에서 샹보체까지 수송하기로 한 화물은 예정대로라면 23일, 24일에는 도착해야 했다. 그러나 기상 악화로 헬기가 뜨지 못했다. 남체를 떠나는 25일에도 오지 않으면 전체 일정에 문제가 생긴다.

    엄 대장은 차분하게 대처했다. 먼저 목적지를 당초 탱보체에서 헬기장이 가까운 쿰중(Khumjung, 3763m)으로 변경했다. 헬기가 올 때까지 쿰중에서 대기할 예정이라고 했다. 다음으로 대원 한 명을 헬기장이 있는 샹보체 언덕으로 올려 보내고 날씨를 계속 체크하면서 연락을 취했다.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본대와 함께 샹보체 비행장으로 올라가 기다리고 있으니 다행히 점심 무렵 첫 번째 헬기가 도착했다. 7t이 넘는 물량이어서 세 차례 나눠 왔는데, 야크 130마리, 포터 25명이 동원돼 짐을 옮겼다. 늘어놓은 화물을 보니 히말라야 원정이 대규모 프로젝트라는 게 실감났다. 수백개의 화물수송용 가방과 박스, 플라스틱 드럼통에 담긴 물품은 모두 등반에 필수적인 장비였다.

    이 중 산소통, 고소식량처럼 핵심장비가 들어 있는 가방을 분실하면 등반 전체가 위험에 처한다. 큰 비행기가 부품 한 개의 불량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대규모 원정도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산될 수 있다. 엄 대장과 대원들은 짐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후 대원 세 명이 남아 뒤처리를 하기로 하고 본대는 쿰중으로 향했다.

    쿰중에는 엄 대장을 반기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1985년 엄 대장의 첫 히말라야 원정 때 함께 산을 올랐던 셰르파 까르상. 당시 그는 낙빙에 맞아 다리가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었지만 엄 대장을 비롯한 동료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다른 사람은 1986년 엄 대장의 두 번째 히말라야 원정 때 목숨을 잃은 셰르파의 미망인 핫파디기였다. 결혼한 지 7개월 만에 남편이 죽었지만 지금껏 재혼하지 않고 홀로 산다. 그녀를 보는 엄 대장의 눈길이 촉촉했다. 엄 대장은 식사 때마다 두 사람을 같은 테이블에 앉혀 놓고 한 때 모든 것을 걸고 같은 목표를 추구했던 오랜 동지들과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그는 어디에서나 옛 동료를 찾아 우정을 나눴다. 카트만두에서는 같이 등반하다 유명을 달리한 셰르파 다와 따망의 초등학생 아들과 나티의 중학생 딸이 사는 집을 찾아가 선물을 전했다. 세상을 뜬 옛 동료의 장성한 아들이 찾아와 아버지에 이어 엄 대장의 등반에 참가하기도 했다. 히말라야에서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엄 대장을 현지 셰르파들은 ‘엄 싸부’라고 부른다. 엄 대장은 셰르파들을 고용주-피고용인의 관계가 아니라 진정한 동료로 대접했다. 그들도 엄 대장의 마음을 알고 훌륭한 친구이자 리더로 받아들였다.

    3대 美峰 앞에서 빵을 먹다

    경영 컨설턴트 김경준이 동행한 엄홍길 히말라야 원정

    엄홍길 대장이 탱보체에서 옛 셰르파 가족을 만나 환담하고 있다.

    쿰중에서 하루를 묵고 탱보체(Tengboche, 3860m)로 향했다. 코스 초반부는 안나푸르나의 마차푸차레, 알프스의 마터호른과 함께 세계 3대 미봉(美峰)으로 꼽히는 아마다블람(Ama Dablam, 6814m)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었다. 절경이었다.

    깊은 계곡을 내려갔다 올라가니 넓은 언덕 위의 큰 사원이 우리를 맞아줬다. 쿰부 히말에서 가장 크다는 탱보체 사원. 코스 전체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으로 에베레스트, 로체, 탐세르크, 아마다블람이 한눈에 보이는 지점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해발 3900m인 이곳에 빵집이 있다는 사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 빵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빵 만드는 재료를 포터들이 등짐으로 실어 나르기 때문에 빵 서너 개 값이 포터의 하루 일당인 300∼400루피(5000∼6000원)에 이른다. 약간 질기고 텁텁한 것이 어릴 때 먹던 동네 제과점 빵 맛인데, 생각보다 맛있다. 종류도 크루아상, 케이크, 토스트 등 다양하다. 풍채 좋은 빵집 주인은 마치 지역사령관처럼 당당했다. 로지까지 운영해 이 지역에서 손꼽히는 유력자라고 한다. 고소를 먹어 입맛이 떨어진 나는 빵이 네팔 음식보다 훨씬 반가웠다. 이 빵집은 트레킹하는 서양인의 필수코스다. 우리로 치면 히말라야 중턱에 있는 김치찌개 식당이라고 할까.

    오늘의 목적지인 팡보체(Pangboche, 3900m)는 큰 계곡을 내려갔다 올라가는 힘든 코스다. 포터들은 30kg짜리 짐을 등에 지고, 슬리퍼를 신고서도 거침없이 올라간다. 오후 늦게 팡보체에 도착하자 엄 대장은 다시 한 번 고소증세에 대해 주의를 준다.

    “고소증세는 3000m에서 한 번 오고, 4000m를 넘어 또 온다. 몸을 따뜻하게 하고 따뜻한 물을 많이 마셔라. 지금부터는 세수도 하지 마라. 특히 모자를 절대로 벗지 마라. 머리가 차가워지면 고소는 무조건 온다.”

    셰르파도 4000m 이상 올라오면 세수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기압이 낮고 산소가 부족한 곳에 사는 사람들이 몸을 안 씻는 것은 위생관념이 없어서가 아니다. 거친 곳에서 생존하기 위한 나름의 방식이었다.

    다음날의 목적지는 딩보체(Dingboche, 4350m). 엄 대장은 아침에 쿰부 히말의 티베트 불교사원 중에서 가장 오래된 팡보체 사원에 들렀다. 이곳에서 그는 원정의 성공을 기원하는 의식을 올렸다. 팡보체 사원은 500년 전 티베트에 살던 몽골계통의 셰르파 족이 히말라야를 넘어와 네팔의 쿰부 히말에 마을을 형성하고 정착하면서 건립됐다. 대원들은 스님께 나아가 기원을 드리고 축복을 받았다.

    성공을 기원하는 그에게서 구도자의 겸허한 몸가짐이 엿보였다. 이는 비단 등반가뿐 아니라 조직을 이끌어가는 모든 리더에게 공통적인 모습일 것이다. 역량 있는 리더란 투철한 신념과 인간적 겸허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팡보체부터는 관목만이 드문드문 있는 황량한 풍경이 이어졌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나무의 키는 작아지고 돌은 커진다. 깊고 황량한 계곡 사이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은 모자를 날려버릴 정도였다. 걸으면 힘들고, 멈춰서면 추우니 그냥 천천히 걸을 뿐이다. 세찬 바람을 뚫고 도착한 딩보체는 변변한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고산지대다. 수목한계선을 넘어선 4350m, 녹색을 볼 수 없는 무채색의 세계가 펼쳐졌다.

    이젠 죽는 게 아닐까…

    저녁식사를 마치고 침낭 속에 들어갔는데 고소증세가 다시 오려는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혈액순환제와 감기약을 먹고 따뜻한 물을 계속 마시면서 대비할 수밖에 없다.

    경영 컨설턴트 김경준이 동행한 엄홍길 히말라야 원정

    캐러밴 도중 정오승 대원과 박홍기 대원이 잠시 포즈를 취했다.

    10시쯤 잠들었는데 잠결에 누군가 내 가슴을 올라타고 짓누르는 듯했다. 숨이 막혔다. 잠을 깨 시계를 보니 11시30분. 가슴이 답답한 것이 마치 물속에서 숨을 쉬는 느낌이었다. 누운 채로 심호흡을 했다. “후∼우∼, 후∼우∼” 계속 심호흡을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다음날을 생각하면 빨리 잠을 자야 하는데, 숨을 아무리 쉬어도 편안하지 않았다. 심호흡을 시작한 지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밤이 깊어갈수록 숨쉬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심장 뛰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가슴에 통증까지 느껴졌다. 처음 맛보는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다. 이러다가 숨 막혀 죽는 것은 아닐까. 만사 제쳐두고 날만 밝으면 내려가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시계를 본 게 새벽 4시였는데, 어쩌다 잠이 들었는지 깨어보니 아침 7시였다. 호흡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어젯밤의 공포는 그때껏 생생했다.

    엄 대장은 추쿵까지는 가야 히말라야의 속살을 볼 수 있다며 빨리 하산하고픈 생각밖에 없는 나를 잡아 이끌었다. 어젯밤에 죽을 뻔했다고 말했지만 내 얼굴을 보더니 아직 위험수준은 아니란다. 그는 “히말라야에서 얻어갈 것은 고통을 이겨내는 성취감인데, 지금 내려가면 죽도 밥도 안 된다”고 했다. 망설이는 나에게 나약해지지 말고 마지막 힘을 내라며 질책과 격려를 했다. 내려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엄 대장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캐러밴을 함께 하면서 엄 대장에 대한 신뢰가 나도 모르게 쌓인 것이다.

    추쿵(Chukung, 4743m)으로 가는 마지막 여정이다. 엄 대장을 비롯한 본대는 추쿵에서 이틀 머물고 베이스캠프로 들어가지만, 나는 일정상 추쿵에서 본대와 헤어져 하산해야 한다. 오전에 딩보체를 출발하여 추쿵까지 올라가 점심을 먹은 후 오후에 하산을 시작하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추쿵은 인간이 정착해 살아가는 마지막 지점이다. 여기서부터는 지붕을 얹은 집을 볼 수 없다. 등반대도 텐트생활을 해야 한다. 엄 대장은 추쿵을 둘러싼 높디높은 설벽(雪壁)을 마주봐야 진정한 히말라야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친근감과 존경심은 양립 불가?

    추쿵에 도착하니 엄 대장의 말은 여지없는 사실이었다. 아일랜드 피크(Island Peak, 현지어로 Imjatse, 6189m)의 설벽이 손에 잡힐 듯했다. 에베레스트, 로체, 넙체 등의 고봉이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마을 주변을 둘러싼 다섯 개의 빙하는 그 자체로 장관이다. 사람이 지붕 아래서 살아가는 마지막 지점에 도달한 감회는 특별했다. 무엇보다 대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일정을 무사히 소화했다는 점에서 기뻤다. 고통을 이겨내면서 목표를 달성했다는 성취감이 밀려왔다.

    본대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엄 대장에게 감사 겸 작별인사를 했다. 루쿨라까지 혼자서 내려가야 했다. 정오승 대원과 이인 대원이 하산 준비를 도와줬다. 필요한 물품과 비상식량을 챙겨주고 포터 한 명을 붙여줬다. 이 대원은 나에게 포터를 다룰 때의 주의사항을 일러줬다.

    “절대로 돈을 미리 주지 마라. 일정을 마치고 나중에 주어야 도중에 말을 잘 듣는다. 수고했다고 보너스를 주는 것은 괜찮지만 너무 많이 주지 마라. 개인적인 호의가 다른 포터에게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 친절하게 대하되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주의사항을 듣고 있으려니 ‘친근감과 존경심은 양립하기 어렵다’는 말이 생각났다. 목표를 추구하는 조직에서 어쭙잖은 친근감은 오히려 조직의 질서를 해칠 수 있다. 나와 포터는 인격적 존엄성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포터를 고용해 무사히 하산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목표와 분업관계를 가진 작은 조직이다. 포터를 차별하지 않고 친절히 대하되 서로의 처지와 역할을 분명히 구별하라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적절한 충고다.

    엄 대장이 셰르파를 다루는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셰르파를 동료로 받아들이되 서로 역할은 분명히 했다. 아무리 친해도 기본보수를 더 주는 법은 없다. 돈을 더 주면 고마워하겠지만, 현지의 질서를 깨뜨려 나중에 오는 다른 사람이 불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셰르파들에게 등산장비나 보너스를 넉넉하게 주면서 고마움을 표시한다고 한다.

    경영 컨설턴트 김경준이 동행한 엄홍길 히말라야 원정

    탱보체 사원의 스님. 등정팀은 이곳에서 무사귀환을 빌었다.

    대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첫날 팡보체, 이튿날 남체를 거쳐 3일째 루쿨라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세찬 바람을 뚫고 빙하계곡을 포터와 단 둘이서 내려오니 대원들과 함께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외로움이 밀려든다. 하산길에 고용한 개인 포터는 영어를 조금 할 줄 알아서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하루 종일 둘이서 걷는지라, 이런저런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그의 이름은 사와디리, 35세이며 결혼해서 5명의 아이가 있고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 농사를 조금 짓고, 등반 시즌에는 포터 일을 해서 생활비에 보탠다. 쿰부 히말에서는 감자, 보리와 기장을 주로 심는데, 4000m 높이에서도 감자는 재배할 수 있다고 한다. 가족 중 한 명이 해외 노동자로 취업하는 행운을 잡으면 살림은 훨씬 나아진다. 루쿨라에서 추쿵으로 올라가는 상향 캐러밴에서 히말라야의 자연을 느꼈다면 하향 캐러밴에서는 포터인 사와디리를 통해서 쿰부 히말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야크가 없다면 셰르파도 없다

    포터의 일당은 짐 30kg을 기준으로 하루 350루피(5000원). 일당에는 숙박비, 식비가 포함돼 있다. 하루 100루피 정도의 숙식비를 감안하면 실제 일당은 4000원 안팎이다. 포터들이 담벼락에 붙어서 노숙하다시피 하는 것도 숙박비를 아끼려는 것이다. 사와디리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일 없이 공치는 날이 많아 수입이 일정치 않은데다, 1500루피(2만원)짜리 운동화는 포터의 일당으로는 너무 비싸다. 내게 등산화는 레저용품이지만, 포터에게 신발은 필수적인 자본재다. 그러나 가난한 그들은 신지 못했다. 그나마 눈치껏 영어라도 몇 마디 익히면 외국인의 개인 포터라도 할 수 있어 수입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히말라야 오지에서도 ‘영어는 힘’이었다.

    짧은 영어로 열심히 설명하는 포터를 보면서 나는 한 사회가 개인에게 주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사와디리가 20세기 후반 네팔에서 태어나 가질 수 있는 삶의 기회와 같은 시기 한국에서 태어난 나를 비교했다. 머리 좋고 눈치도 빠른 이 친구에게 네팔 사회가 줄 수 있는 기회는 포터 정도의 직업이다.

    50년 전 한국의 사정은 네팔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경제발전을 이룩한 한국은 내게 히말라야 포터보다는 더 많은 가능성을 부여했다. 물질적 번영이 인간의 행복과 직결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번영한 사회가 개인에게 더 많은 가능성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네팔처럼 절대빈곤에 허덕이던 우리 사회에서 빈곤의 사슬을 끊어준 우리 윗세대의 노력과 성취에 대해 새삼 감사했다.

    히말라야에서 또 하나 재미있게 관찰한 것은 인간과 가축의 관계다. 거친 환경에서 살아가는 쿰부 히말 사람과 그들이 기르는 야크의 관계를 보면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란 책이 떠올랐다. 가축화할 수 있는 대형 포유류를 발견한 사회는 자연 적응력과 생산력이 높아져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는 것. 소, 말, 야크는 고기와 젖이라는 단백질은 물론 운송수단을 제공하고, 쟁기질과 같은 인간노동을 대신하는 중요한 가축이다.

    3000m 이상에서만 생존하는 야크는 히말라야에서 사람을 제외한 유일한 운송수단이다. 그뿐인가. 고기와 젖은 귀한 단백질원이고, 털은 추위를 견디는 옷의 재료다. 똥은 말려서 연료로 쓰는데, 실제 야크 똥을 태우는 난로를 쬐어보니 냄새가 없고 화력도 좋은데다 오래 타는 완벽한 연료였다. 또 야크는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거친 풀을 먹기 때문에 식량을 두고 사람과 다투지도 않는다. 야크가 없다면 이곳에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 두 번은 더 온다”

    오후 늦게 팡보체에 도착, 숙소를 정하고 식당으로 올라가니, 반가운 말이 들려왔다. 통성명을 해보니 ‘2006 부산 에베레스트 원정대’였다. 2003년 로체샤르 원정에서 유명을 달리한 대원들의 추모비를 세우고 카트만두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식욕저하에 시달리며 건빵으로 허기를 달래던 내게 가장 기쁜 소식은 부산 원정대가 네팔인 요리사를 데리고 다니면서 한식으로 식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저녁은 닭백숙에 김치까지 곁들여진다고 하니, 하산길이 갑자기 즐거운 축제로 바뀌는 기분이었다.

    다음날부터 부산 원정대와 함께 하산했다. 하산 이틀째 남체에서 묵고 사흘째 루쿨라로 향했다. 루쿨라가 가까워지니 이제 무사히 캐러밴을 마친다는 안도감이 커지면서, 하산길을 동행해준 포터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하고 싶었다. 슬리퍼를 신고 험한 길을 걷는 것이 안쓰러워 신발 한 켤레를 보너스로 사주기로 마음을 정했다. 루쿨라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신발가게를 찾았다. 신이 난 포터가 하나를 골라든다. 1400루피(2만원), 큰 부담 없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포터에게 일당을 지불하며 내친김에 침낭, 목도리, 모자까지 줘버렸다. 뜻하지 않은 횡재를 만나 “땡큐”를 연발하는 포터와 작별인사를 나눴다.

    3월31일 루쿨라에서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10일 만에 뜨거운 물로 샤워했다. 문명세계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저녁에 네팔 한국대사관의 정용관 영사를 만났다. 산악인 출신인 그는 히말라야를 동경해 모두가 꺼리는 네팔 근무를 자원, 1983년부터 근무하고 있다. 그동안 히말라야를 찾은 한국 원정대의 뒷바라지를 도맡아 히말라야 원정대의 산 증인으로 불린다.

    정 영사에게 내가 겪은 고소증세를 말했더니 초보자가 고생을 많이 했다고 위로했다. 고소증세는 눈 통증, 뒷머리 두통, 구토, 뒷골 땅김, 앞머리 두통의 순서로 심해지는데 나는 뒷골 땅김까지 경험했으니 히말라야 신고식치고는 혹독하게 했다고 했다. 정 영사는 “네팔과 히말라야는 한 번 오면 세 번 오게 되는 곳이다. 당신도 언젠가 두 번은 더 올 것이다. 네팔과 좋은 인연 맺었다”며 웃었다.

    히말라야는 멀고먼 곳이었다. 비록 짧은 여정이었지만, 세계적 산악인이 이끄는 원정대에 참가했다는 것은 내 인생에서 두 번 다시 갖기 어려운 소중한 경험일 것이다.

    경영 컨설턴트 김경준이 동행한 엄홍길 히말라야 원정
    金京俊
    ● 1963년 부산 출생
    ● 서울대 농경제학과 졸업, 동 대학원 경제학 석사
    ● 쌍용투자증권 기업금융 및 투자분석 애널리스트, 쌍용경제연구소 미래산업 및 신규사업 진출전략 담당, 한국경제신문 칼럼니스트
    ● 現 딜로이트 상무
    ● 저서 : ‘잘되는 회사는 분명 따로 있다’ ‘인정받는 팀장은 분명 따로 있다’ ‘소니는 왜 삼성전자와 손을 잡았나’ ‘거친 산 오를 땐 독재자가 된다’


    엄 대장의 원정에 동참하면서 산악인의 고산 등반, 경영자의 사업 운영, 지휘관의 전투 수행은 모두 일종의 ‘프로젝트’라는 점을 느꼈다. 계획을 세우고, 필요한 인원과 물자를 조달해서 현장에 투입하고 결정적인 승부처에 자원을 집중해서 목표를 이루어내는 과정은 공통적인 프로세스다. 작전과 타이밍이 맞아야 성공할 수 있다는 점도 동일하다. 가장 큰 수확은 나 자신이 몸으로 체험했다는 것이다. 깊은 골짜기와 높은 산마루를 내 발로 직접 걸어 올라간 성취감, 고소증세를 겪으면서 느낀 고통, 대원들과 나눈 동료애, 포터와 나눈 따뜻한 교감이 그것이다.

    히말라야의 속살로 걸어 들어갈수록 자연은 커지고 인간은 작아진다. 그러나 그 거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히말라야 사람과 높은 봉우리에 도전하는 산악인 엄홍길과 대원들은 강인했고 당당했다. 그들에게서 느낀 강인함과 당당함은 히말라야가 내게 준 귀중한 선물이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