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호

한국 축구 공격진의 세계 경쟁력

조재진·박주영 궁합, 안정환 집중력, 박지성 진화가 최대 자산

  • 장원재 숭실대 교수·연극학, 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j12@ssu.ac.kr

    입력2006-06-07 16: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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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월드컵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국은 4년 전 한일월드컵에서 이룩한 신화를 재현할 것인가. 수비도 수비지만 이기려면 스트라이커가 골을 넣어야 한다. 설기현, 조재진, 박주영, 안정환, 박지성 등 국가대표팀의 공격 경쟁력을 고찰했다.
    한국 축구 공격진의 세계 경쟁력
    축구에는 판정승이 없다. 비기는 게 목표라면 몰라도 이기려면 어떻든 최소한 한 골은 넣어야 한다. 그래서 전문 골잡이인 스트라이커는 언제나 주목의 대상이다. 자기 힘으로 직접 승부를 결정지어야 하는 고독한 영웅이다.

    고전적 의미의 스트라이커는 행동반경을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로 제한하고 에너지 소모를 효율적으로 조절하면서 자신에게 넘어온 공을 득점으로 연결하는 플레이어를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또박또박 받아먹는’ 유형의 스트라이커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 당시 수케르(크로아티아), 호나우두(브라질), 비에리(이탈리아) 정도로 현저히 줄어들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선 모든 스트라이커가 다기능 공격수로 변신했고, 오직 호나우두만이 고전적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다. 그것도 경기시간의 절반가량을 부분적으로 이용하는 정도였다.

    이러한 변화는 세계 축구계의 진화방향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21세기에 공격수에게 요구되는 최상의 덕목은 더 이상 위치선정 능력과 슈팅능력이 아니다. 현대축구에서 공격수는 남이 만들어준 찬스를 마무리하는 것보다 스스로 찬스를 만들어 득점하거나, 2선 공격수들에게 찬스를 마련해주는 역할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미드필드를 중요시하고 중원에 대부분의 병력을 배치하는 현대 압박축구의 속성상, 최전방 공격수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황에서 지원병력의 도움 없이 모든 것을 스스로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미드필드에서 백병전이 치열해지면서 찬스의 횟수 자체가 감소하고 있는 사정도 겹친다. 따라서 종래에는 윙의 덕목이던 스피디한 드리블의 중요성이 증대했고, 롱패스를 안전하게 처리하며 볼의 소유권을 유지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기술인 트래핑이 일류와 이류 스트라이커를 가르는 가늠자가 되었다.

    공·수 겸비 플레이어



    윙 플레이어가 감소하는 점도 현대 축구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1998년 월드컵에서 부분적으로라도 윙 플레이를 활용한 나라는 본선 진출 32개국 가운데 네덜란드, 프랑스, 멕시코, 나이지리아 4개국에 지나지 않았다. 2002년에는 이런 전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팀이 아예 없었다. 로베르토 카를로스(브라질)는 역대 최고의 윙으로 불리는 자국의 축구영웅 가린샤를 능가할 재질을 타고났지만, 시대는 그에게 수비에도 가담하고 경기장 중심부 쪽으로 이동하여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미드필드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최종 수비수를 따로 배치하는, 즉 네 명의 수비수를 마름모꼴로 포진시켜 스토퍼, 스위퍼를 두는 전술은 자취를 감췄다. 대신, 스리백이든 포백이든 수비진영을 일자(一字)로 꾸리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다. 공의 소유권을 빼앗아오면 팀 전체가 즉각적으로 공격에 나설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유사시 동원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현대 축구는 이렇게 수비수에게도 여러 가지 복합적인 능력을 요구한다. 경기시간의 대부분을 자기 진영에 머물며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는 임무만 충실히 수행하는 것은 옛이야기다. 경우에 따라 수비수도 미드필드로 진격하고, 때로는 최전방까지 달려가 과감하게 슛을 날릴 줄 알아야 한다. 페널티 지역 한참 바깥에서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터지는 김동진의 왼발 장거리포나, 김진규의 묵직한 캐넌 슛이 여기에 해당한다.

    수비수 중에는 포지션의 특성상 건장한 체격을 지닌 장신이 많다. 매우 유효한 공격수단인 공중볼을 걷어내는 데는, 공격수의 전진을 몸으로 저지해 탄착점 근처로 진입하지 못하게 봉쇄하고 유리한 지점을 확보한 뒤 상대 선수보다 먼저 공중으로 몸을 솟구치는 기술이 필수이기 때문.

    이러한 장점을 수세적 상황에서만 써먹는 것은 자원의 효율적 운용이 아니다. 코너킥이나 프리킥 같은 세트피스 상황에서 공세적 공중볼을 다툴 때, 세계 일류 팀들은 수비수들을 일시적으로 최전방에 배치한다. 직접 골을 노리거나 공격 전문가들에게 볼을 떨궈주는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코너킥과 프리킥의 기본대형을 여덟 가지 경우의 수로 세분하고, 선수 개개인에게 상대 수비수의 앞, 뒤, 사이사이 등 특정 루트로 진격하라는 세부명령을 하달하곤 한다. 이 작전명령의 최전방에는 숭실대 시절까지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던 최진철과 건국대 시절부터 발이든 머리든 원하는 지역으로 공을 배분하는 능력에 관한 한 당대의 일인자인 김영철이 선다.

    이렇듯 현대 축구는, 역설적이게도 공격능력을 보유한 수비수와 수비능력이 뛰어난 스트라이커를 요구한다. 최전방 공격수의 수비력은 유사시에 상대의 공격을 제일선에서 저지하고, 공을 빼앗아오지는 못하더라도 몸싸움을 벌이며 수비진 정비에 필요한 시간을 벌어주는 능력이다.

    2006년 대한민국 대표팀에서 수비가담 능력이 가장 뛰어난 공격수는 설기현이다. 지난 한일월드컵에서 경기장의 절반을 가로질러 뛰어오며 대인방어에 나서는 모습을 보고 일부 유럽 기자들은 그를 가리켜 ‘최전방 수비수’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공격자원 중 유일한 왼발잡이라는 희귀성도 그의 가치를 높이는 또 다른 포인트다.

    임팩트 뛰어난 이동국의 결장

    공격수 본연의 기능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유럽 프로축구 통계를 보면 지난 10년간 전체 득점의 67%가 골문 반경 9m 내에서 이루어졌다. 골대 근처에서 슛을 날릴수록 득점 확률이 높아진다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 따라서 공격수는 되도록 골대 가까이에서 슛을 날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바꿔 말하면, 더 가까운 거리에서 더 안정적으로 슛을 날리는 데 필요한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려 애쓴다는 이야기다.

    공격수가 수비수를 돌파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순발력을 동반한 스피드, 몸싸움 그리고 페인트 모션이다. 이 세 가지를 모두 구현하는 선수는 드물다. 2006년 현재 호나우두와 웨인 루니 정도가 여기에 해당할까. 이동국도 이 범주에 드는 희소자원이다. 단, 1998년 월드컵에서 엿보인 가능성에 비해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냉정하게 말해서 세계적인 재능을 타고나기는 했지만 호나우두나 루니에 비해 각각의 요소에서 약간씩 부족하다는 게 국내외 전문가들의 일관된 평가다.

    그가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며 본프레레-아드보카트 체제에서 부동의 최전방 스트라이커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요인은 슛할 때 공에다 힘을 싣는 능력, 즉 ‘임팩트’가 뛰어나다는 데 있다. 이동국은 유연성을 타고났다. 여기에 자신의 노력을 더해 허벅지 근육의 이완수축력이 다른 선수들을 현저하게 능가하는 지점까지 나아갔다.

    그가 어설프게 찬 듯한 공이 엄청난 스피드로 쭉쭉 뻗어나가는 건 순전히 유연한 몸과 근육의 힘 덕분이다. 압축 스프링처럼 힘을 비축한 몸이 별다른 예비동작 없이 공에 힘을 실어 튕겨내는 능력은 1966년 월드컵 득점왕 에우제비오(포르투갈)가 구현했고, 1968년 올림픽 득점왕 가마모토(일본)가 그토록 도달하기를 염원하던 꿈의 경지다.

    그러나 지난 2년간 이동국이 보여준 플레이 중에서 전문가들이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는 것은 득점 장면이 아니다. 2004년 12월19일 독일과의 친선경기에서 보여준 첫 번째 골 상황이다(물론, 270。 터닝슛을 골대 왼편 구석으로 그대로 꽂아넣으며 한일월드컵 MVP 올리버 칸을 꼼짝 못하게 만든 결승골 장면도 우리 축구사(史)에 길이 남을 명편 가운데 하나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적진 오른편 터치라인 쪽으로 깊숙이 흐른 공을 따라 이동국은 리드미컬하게 이동했고, 공을 몸 가운데 위치시켜 상대의 접근을 막았다. 그리고 두 박자 멈칫멈칫 숨을 고르며 상대 수비를 교란했다. 마침내 3∼4초의 여유시간을 두고 공격수가 받아먹기 좋도록 고도(高度), 비행속도, 휜 각도 모두 10점 만점짜리 크로스를 쏘아올렸다.

    그가 멈칫거린 까닭은 독일팀 골문 근처에 우리팀 공격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동국은 김동현의 쇄도를 기다리며 적절하게 시간을 끌다가 김동현이 달려오던 탄력 그대로 스피드를 죽이지 않고 점프할 수 있도록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지점으로 크로스를 올려주었다. 김동현은 독일 수비진을 향해 육탄돌격을 서슴지 않았고, 이 기세에 눌린 독일 수비진이 공을 걷어내긴 했지만 안전지대로 완벽하게 보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한국 축구 공격진의 세계 경쟁력
    뒤로 바운드되며 흐른 공은 후방에서 전진하던 김동진의 왼발에 제대로 걸렸고, 우리의 미남 수비수가 날린 회심의 일발은 올리버 칸이 지키는 골대 왼편 구석 하단을 정확하게 꿰뚫으며 그물을 출렁였다.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이동국의 부상과 월드컵 결장(缺場)은 그래서 가슴 아프다.

    조재진·박주영 하모니에 달렸다

    그렇다면 이동국의 빈자리를 메울 공격수는 누구인가. 필자 생각엔 아드보카트 감독은 4-3-2-1의 포진을 활용하면서 최전방 원톱과 두 명의 섀도 스트라이커가 순간적으로 자리를 바꾸는 전법을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최전방 공격수가 좌우로 부지런히 움직이며 상대 수비진을 휘저어 빈틈을 만드는 사이, 2선 공격수가 최전방으로 뛰어들며 찬스를 마무리하는 공격법이다. 한국팀이 공격수로서 여러 가지 장점을 겸비한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기에 가능한 작전이다.

    원톱의 적임자는 딱 잘라 말해 조재진이다. 2000년 아테네올림픽 당시 강신우 기술국장은 조재진의 발전가능성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공격수 중 시야가 넓다는 면에서는 조재진이 당대 제일이다. 유연성이 다소 부족하지만, 순간 스피드와 체력을 이용한 돌파력, 파괴력은 수준급이다. 공중볼을 2선으로 떨어뜨린다거나 페널티 에어리어는 물론, 양쪽 코너 근처까지 종횡으로 이동하면서 동료 공격수들을 위해 공간을 만들어주는 그의 능력을 다각도로 활용할 길을 찾아야 한다. 본인의 골 결정력도 대단하지만, 협력 플레이가 가능한 파트너를 만난다면 한국 공격진은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다.”

    그렇다면 조재진과 궁합이 맞는 공격수는 있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한국 축구의 고질 가운데 하나가 ‘문전처리 미숙’이다. 엄밀히 말하면 정확성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침착성이 부족하다. 찰나에 모든 상황이 종결되는데다 공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살아서 꿈틀거리는데 상대 수비수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이런 상황에서 평상심을 잃지 않고 중심을 유지하면서 볼 처리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박주영은 어떤 경우든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공을 처리하는 능력의 소유자다. 그의 슛은 거의 골문 안으로 들어가는 유효슈팅(on-target attempt)이다. 슛을 날리는 와중에도 발목 각도를 미세하게 비틀어 공을 골문 안으로 넣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 강도는 조금 떨어지더라도 일단 정확하게 간다. 약하더라도 정확하게 차면 득점 확률이 있지만 강하게 차더라도 골대를 벗어나면 득점이 안 된다는 이치를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박주영이 슛을 강하게 날리는 능력이 모자란 건 아니다. 자기 파워의 65∼70%만 쏟으면서 정확하게 슈팅을 하는 것이다. 야구로 치면 시애틀 마리너즈의 이치로와 비교할 수 있겠다. 타율을 높이기 위해 정확히 때리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장타가 안 나는 것이지, 파워가 없어 홈런이 적은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드리블에 관해서도 박주영은 일가견이 있다. 그의 드리블의 핵심은 ‘엇박자’와 ‘자유자재의 기어 변속’에 있다. 드리블이든 돌파든 핵심은 상대 수비를 속이든지 헷갈리게 하든지 해서 따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고 정확한 슛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는 것인데, 놀라운 것은 그가 드리블을 할 때(더 놀라운 것은 직선 드리블이 아니라 휘어들어갈 때도) 스피드가 죽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아주 빠르게도 갔다가 느리게도 갔다가, 리듬이 워낙 다양해 수비진이 그를 따라가는 데 애를 먹는다.

    또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서두르는 법이 없는 부동의 평정심은 이창호 바둑에서 느낄 수 있는 기운과 흡사하다. 이러한 플레이를 통해 틈을 만들고, 어떤 경우에는 본인이 직접 해결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패스를 하는, 그래서 그가 다음에 어떤 플레이를 할지를 심지어 우리 편도 예측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최고의 히든카드 안정환

    그를 한 번 더 칭찬하고 싶은 점은 다소 거창하게 말해 도교적인 플레이,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사상을 반영한 플레이를 펼친다는 것이다.

    박주영에게 연결되는 공을 보자. 일반적인 패턴은 일단 공을 자기 앞에 멈춰놓고 드리블을 하든 슛을 하든 패스를 하든 결정하는데, 박주영은 공이 흘러가는 결에 자기의 리듬을 맞춰 공을 건드리지 않고도 전진 후진을 한다. 이건 탁월한 재능이다. 석수(石手)도 돌의 결을 알면 작업하기 훨씬 편하다는데, 박주영은 공이 굴러가는 결을 한눈에 알아보는 능력을 타고난 것인지 공에 발을 대지 않고도 유효한 플레이를 한다. 이건 어지간한 자신감 없이는 펼치기 어려운 기술이다.

    한편으로는, 정말 한 사람밖에 플레이를 할 수 없는 좁은 공간에서 수비수 3명이 압박해오는 상황에서도 몸을 360。 회전하며 발꿈치, 발등, 발바닥 등을 이용해 공을 빼고 돌고 난관을 타개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이제까지 한국 축구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시간과 공간을 매우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박주영은 약점이 없는가. 있다. 몸싸움 능력은 확실히 떨어진다. 그는 수비벽을 우회할 망정, 어지간해서는 정면돌파를 감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재진이 수비를 흔들어주면 박주영의 약점을 자연스레 치유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두 공격수의 호흡과 궁합이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느냐에 한국의 2006년 월드컵 성적이 결판날 터다.

    최전방 공격수라면 안정환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최초의 두 체급 세계제패(1974년 WBA 밴텀급, 1977년 WBA 주니어 페더급)에 빛나는 영원한 챔피언 홍수환은 “어떤 선수가 세계 챔피언이 될 가능성이 높은가”라는 질문에 “링 밖에선 얌전하다가도 일단 링 위에 올라가면 돌변하는 선수”라고 답했다. 자신의 재능과 집중력을 응축시켜 경기장 안에서 폭발시킨다는 건 어느 종목을 막론하고 일류 선수가 간직한 전가(傳家)의 보도(寶刀) 같은 비방일 터다.

    축구로 치자면 바로 안정환 같은 선수가 아닐까. 그는 어떤 경기든 꼭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욕으로 충만하다. 세계적인 강호와 맞붙으면 경기장에 서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긴장이 지나쳐 두 다리에 힘이 빠진다. 그럴 때 선천적 자신감으로 무장한 누군가가 공격을 이끌고 나간다면 그보다 더한 천군만마(千軍萬馬)는 없을 것이다.

    월드컵 16강전 같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결사저지의 정신으로 육탄돌격하는 상대 수비를 오른쪽으로 가볍게 젖히며 침착하게 슛을 날린다는 건 보통의 강심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박주영 못지 않게 안정환의 슛도 낭비가 거의 없다. 큰 경기에서 페널티킥 실패와 연장전 골든골이라는, 천국과 지옥을 오간 적이 있다는 것도 그의 자산이다. 월드컵 같은 큰 무대에서 극한 경험을 한 선수들은 웬만한 상황에서는 흔들리지 않는다.

    안정환은 경기시간을 25분 남겨두고 한국 축구가 세계의 강호들을 향해 도발적으로 던질 수 있는 최고의 히든카드다. 조재진을 정점에 놓고 박주영과 안정환이 번갈아 전방으로 투입되며 득점을 노리는 전략. 2006년 한국의 주 득점포는 이 루트를 따라 가동될 공산이 크다.

    우리에게는 세계 축구계에 내놓을 주무기가 아직도 많다. 지면관계상 딱 한 사람만 더 소개하겠다. 맨유(‘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약칭)의 신형엔진 박지성이다.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에서 뛰던 박지성은 지난해 6월22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4년 계약에 합의했다. 이것은 단순한 이적(移籍)이 아니라 한국 축구의 장엄한 성취다.

    박지성의 끝없는 진화

    세계 최고(最古)의 프로축구 리그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유는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구단이다. 리그 우승 15회, FA컵 우승 11회…. 그래서 홈 경기장인 올드 트래포드는 ‘꿈의 생산공장’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맨유의 경기만 중계하는 방송국이 만들어졌고, 구단 매각설이 나돌자 수만명의 시민이 시청 앞 광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1994년 가을 맨유에 시즌 티켓 신청서를 보냈는데 대기자가 20만명이 넘는다는 답장이 날아왔다. 30년쯤 기다리면 혹시 구입할 기회를 잡을지도 모르겠다.

    박지성의 맨유 입단이 세계 축구계의 관심을 끈 이유는 퍼거슨 감독이 그를 콕 집어 선택했기 때문이다. 선수를 보는 눈에 관한 한, 그리고 원석(原石)의 잠재력을 정확히 판단하는 안목에 관한 한, 이 스코틀랜드 출신의 거장을 따라올 사람이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퍼거슨이라는 세계적인 명장의 마음을 호려놓은 박지성의 장점은 무엇인가.

    아인트호벤 시절 동료들이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는 것 아니냐”고 농담을 했을 만큼 그는 90분 내내 전력투구에 가까운 에너지를 뿜어내는 강철심장의 소유자다. 네덜란드 리그에서 뛸 당시, 활동량 기준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라는 평가를 받은 건 기록이 뒷받침한다. 주행거리가 가장 길면서도 효율적인 플레이를 한다는 점이 퍼거슨이 박지성을 스카우트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 다음에는 멀티플 플레이어, 즉 여러 가지 포지션을 동시에 소화할 수 있다는 특징을 높이 산 것이다.

    한국 축구 공격진의 세계 경쟁력
    아직 젊어 앞으로 10여 년 이상 가용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을 터다. 박지성의 맨유 입단 당시 로이 킨(아일랜드), 라이언 긱스(웨일스) 등 세계적인 미드필더들 사이에서 과연 이 젊은 한국인이 버틸 수 있을까 염려하는 전문가가 많았다.

    ‘아일랜드의 황태자’ 로이 킨은 지난 2002년 축구전문지 ‘월드사커’가 전유럽 감독들에게 ‘만약 돈에 관계없이 한 선수를 보강하고 싶다면 누구를 선택하겠는가’라는 설문을 했을 때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세계 최고의 볼 위너(ball winner)였기 때문이다. 축구 속성상 미드필드에서 우리 편 공도 아니고 저쪽 편 공도 아닌 소유권이 애매모호한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로이 킨은 이런 경우 우리 편으로 소유권을 가장 많이 가져오는 선수, 그리고 경기가 안 풀리거나 뒤져 있을 때 선수단 전체를 견인하는 능력에서 최고로 꼽히는 선수다.

    ‘웨일스의 별’이라 불리는 라이언 긱스를 두고 ‘긱스 부모의 이혼은 영국 축구의 손실 가운데 하나’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긱스의 아버지는 영국 사람, 어머니는 웨일스 사람이다. 그런데 이혼을 하면서 어머니의 성(姓)을 따라 긱스로 바꾸었고, 월드컵 예선전에도 웨일스 선수로 참가했던 것.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를 뽑으면 항상 세 명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그런 대선수를 상대로 박지성은 한 시즌을 주전으로 버텨낸 것이다.

    유럽 제패할 맨유의 신형 엔진

    물론 나이도 중요한 변수이기는 했다. 킨이 서른넷, 긱스가 서른둘, 그리고 공격형 미드필더로 비교적 골도 많이 넣고 잉글랜드 국가대표 붙박이 주전인 폴 스콜스가 서른하나로 맨유 미드필더진이 전체적으로 노쇠한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2005∼2006 시즌 맨유 최대의 강점은 포르투갈의 신성 호나우두와 네덜란드의 반 니스텔루이의 존재였다. 공격수치고는 굉장히 날렵하고 빠른 자원을 보유했다. 그런데 이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미드필더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빠르게 최전방으로 공을 찔러 넣어주어야 한다. 퍼거슨 감독은 ‘노쇠한 미드필더진으로는 안정적인 공격은 할 수 있지만 스피디한 공격은 무리’라고 판단한 게 아닐까. 미드필더진을 한 차원 끌어올리려면 전세계에 박지성만한 선수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주도면밀한 관찰 끝에 영입을 확정한 것이라는 뜻이다.

    항간에 떠돌던 충동구매설, 아시아 마케팅용 선수로 구입을 했다는 설 등은 사실이 아님을 박지성 본인이 실력으로 증명했지만, 다시 한 번 확실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맨유가 어떤 구단인지를 고려하면 이러한 의문은 어불성설임을 알 수 있다. 맨유는 어떤 기준(역사, 성적, 자산규모, 평균 관중)을 적용해도 항상 유럽 톱10 안에 드는 최정상급 구단이다. 이런 구단은 마케팅 차원의 구매나 별도의 고려를 하지 않는다. 최상의 품질을 구입해서 경기에 승리한다는 목표에 매진하는 팀이다.

    최소한 3∼4년에 걸친 관찰이 없었다면 맨유는 박지성을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은 스코틀랜드, 프랑스, 잉글랜드와 연속으로 평가전을 치렀다. 박지성은 세 경기 다 출전해서 프랑스전에서 한 골, 잉글랜드전에서 동점골을 넣었다. 프랑스전에서는 후방에서 연결된 공을 건드리지 않고 바운드에 맞춰 따라가다가 단 한 번의 깨끗한 대각선 슛으로 골문을 갈랐으며 잉글랜드전에서는 최진철이 떨궈준 코너킥 공을 다이빙 헤딩으로 득점에 연결했다.

    그리고 월드컵 본선에서 기록한 빛나는 한 골. 포르투갈전에서 이영표의 공을 가슴으로 트래핑하고 오른발로 아주 강하게 때려 넣은 슛을 기억하시는지. 스페인전에서도 이천수의 슛이 수비수 몸을 맞고 굴절되자 이 공을 그대로 가슴으로 트래핑한 뒤 고난도의 슈팅을 한 바 있다. 비록 골키퍼의 선방에 막혀 득점으로 연결되지는 못했지만.

    박지성이 포르투갈전에서 기록한 골은 당시 영국 BBC방송이 월드컵 예선 라운드에서 기록된 가장 멋진 골로 선정했는데, ‘골의 미학적 완성도가 높다’는 게 이유였다. 우선 이영표로부터 박지성에게 날아간 공중패스의 궤적이 아름답다는 것이고, 박지성이 가슴으로 트래핑하고 재차 허벅지로 트래핑한 뒤 슛을 할 때까지 공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데, 이때 한국팀 골키퍼 이운재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 21명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마치 지휘봉의 움직임에 따라 오케스트라가 반응을 하는 것 같은 축구 미학의 절정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긴박한 상황에서도 몸을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공의 통제권을 계속 유지한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한일월드컵 전부터 퍼거슨 감독이나 맨유가 박지성을 주시하고 있었고, 한일월드컵이 끝나고 박지성이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으로 진출한 다음에는 스카우팅 리포트의 단계를 높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적료를 다소 더 물더라도 유럽리그에 적응할 때까지 기다리면 확실한 검증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약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독일월드컵 빛낼 6대 스타 꼽혀

    박지성의 출장 횟수를 두고도 이견이 있다. 전 경기 출전이 아닐 뿐 아니라 출전시간이 1분 미만인 경기도 있다는 것. 프리미어리그에서 중하위권 팀은 연간 45경기 안팎의 시합을 한다. 하지만 맨유나 첼시, 아스날 같은 최상위 팀은 구조적으로 약 70경기를 치른다. 프리미어 정규리그 38경기 외에 FA컵, 리그컵 같은 국내 타이틀전, 그리고 유럽 클럽대항전까지 매주 평균 두 게임이 넘는 경기를 소화해야 한다.

    축구는 체력이 많이 소모되는 운동이다. 더구나 활동량이 엄청난 공격형 미드필더임에랴. 어웨이 경기가 영국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행기로 세 시간 이상 걸리는 동유럽에서도 열리는 사정을 감안하면 10명 이상의 미드필더가 그때그때 플래툰 시스템처럼 번갈아가면서 출전하는 운영이 불가피하다. 물론 거기서도 특A급, 그러니까 가능한 한 많은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가 있고 이른바 백업 멤버가 있다. 박지성은 아직 특A급은 아니지만 A급으로 미드필더 중에는 출장 횟수가 꽤 많은 편이다.

    박지성이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또 다른 증거도 있다. 퍼거슨 감독은 이미 94∼95시즌에 엄청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폴 잉스(당시 잉글랜드 대표팀 주장), 마크 휴즈(당시 웨일스 대표팀 주장), 칸첼스키스(당시 러시아 대표팀 주전공격수) 같은 주전 선수들을 전원 내보낸 것. 그래서 시민들이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맨유가 다음 시즌의 맨유와 같은 팀이냐”며 격렬히 비난했다. 이때 퍼거슨은 “이 멤버로 국내 리그는 석권할 수 있지만 유럽 리그는 석권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새로운 팀을 만들어야 한다”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들을 대신해 영입한 선수가 당시 19∼20세이던 데이비드 베컴, 폴 스콜스, 게리 네빌 같은 유소년구단 출신의 샛별들이다. 퍼거슨이 박지성을 영입한 것은 그를 중심에 놓고 2008년쯤 유럽 정복이 가능한 새로운 팀을 조립해보겠다는 의지표명이나 다름없다. 박지성의 영입은 전면 개각의 신호탄인 셈이다. 박지성은 한국과 맨유를 넘어 세계 축구계를 견인할 신형 엔진으로 급부상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공식 가이드북에서 그를 이번 독일월드컵을 빛낼 6대 스타로 꼽은 건 지역배려를 고려한 아시아선수 띄워주기가 절대 아니다.

    한국 축구 공격진의 세계 경쟁력
    張源宰
    ● 1966년 서울 출생
    ● 고려대 국문과 졸업, 영국 런던대 석·박사(연극학)
    ●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 現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저서 : ‘속을 알면 더 재미있는 축구 이야기’ ‘AGAIN 2002’


    그렇다면 이번 월드컵 한국팀의 성적은 어떨까.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필자는 농반진반으로 이렇게 답한다. 스위스 감독은 프랑스와 비기고 토고, 한국을 잡아 16강에 가겠다고 했다. 토고 감독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프랑스와 비기는 것이 목표이고, 나머지 두 팀을 물리쳐 16강에 진출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래서 프랑스는 3무승부로 예선탈락이다.

    우리가 조 1위로 16강에 오르면 예상 상대는 스페인. 피레네산맥 넘어 이베리아 반도를 평정하면 8강전에서 로마군단 이탈리아를 만날 가능성이 높다. 2002년의 꿈이 약간 순서를 바꿔 다시 한 번 우리 앞에 펼쳐진다면, 독일의 여름이 대한민국의 잠 못 드는 밤으로 한 달 내내 이어지더라도 아무것도 더는 바랄 것이 없겠다. 오,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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