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호

‘생태적 사유’의 발상지, 콩코드 월든 호수

자연 회귀, 노역의 삶에 경종 울린 두 번째 독립혁명

  •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입력2006-06-12 16:0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고단한 친구, 일상에 찌든 동료의 익숙한 읊조림 “자연으로 돌아가리….” 19세기 초 소로는 프런티어 정신에 갇혀 껍데기만 남은 미국 사회를 반성하며 월든 호숫가로 들어갔다. 단출한 오두막 생활을 통해 그는 자연에 얼마만큼 다가갔을까. 이 질문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우리는 자연에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생태적 사유’의 발상지, 콩코드 월든 호수

    가을의 월든 호수 전경.

    호수는 여전히 맑고 투명했다. 물가로 내려서니 호수 바닥이 잡힐 듯이 가깝다. 들고나는 물줄기 하나 없이 고여 있는 호수의 물이 어떻게 이처럼 맑을 수 있을까. 멀리서 이곳을 찾아온 순례자들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1817∼62)가 ‘신의 눈물방울’이라고 형용한 바 있는 월든 호수의 청정함에 새삼 순례지의 성스러움을 느꼈을 법하다.

    고개를 드니 멀리 서쪽 건너편까지 호수의 전경이 7월의 눈부신 햇살 아래 아스라이 드러난다. 원경 속의 호수 물빛은 짙푸른 청록색이다. 숲으로 둘러싸인 맑고 고요한 호수는 아닌게아니라 푸른 하늘을 쳐다보는 ‘대지의 눈(眼)’을 연상시킨다(‘호수는 대지의 눈, 사람들이 그 안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내면의 깊이를 헤아려보는 눈이다’).

    그 맑은 눈 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수만리 길을 달려온 설레는 마음이 가라앉는다. 한편으로는 그윽하면서도 한없이 친근한 호수의 정령이 있어서 그의 영접을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호수는 그만큼 포근한 느낌을 줬다. 월든은 물론 하나의 상징이요 이념의 표상이다. 그러나 호수는 메마른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안식처 혹은 말로만 전해 듣다가 처음 찾아가본 어머니의 고향 같은 느낌으로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미국 제일의 聖地

    소로의 생일인 7월12일을 전후해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에 위치한 이곳 월든 호숫가에서 매년 미국 소로학회가 열린다. 나는 ‘월든’ 출간 150주년을 기념하는 2004년도 소로학회에 참석차 이곳을 찾았었다. 소로는 월든 호수를 ‘콩코드의 보석’이라고 썼다. 그러나 월든 호수는 이제 콩코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전세계 소로 애독자들이 찾는 순례 명소가 되었다.



    학회 참석자의 면면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럽과 아시아는 물론 멀리 호주와 아프리카에서 자발적으로 참석한 사람이 꽤 많았다. 소로를 생태학적 삶의 전범이요 환경 수호성인(聖人)으로 재평가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하버드대 문학생태학자 로렌스 뷰얼(Lawrence Buell)이 월든 호수를 미국 제일의 성지라고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날 월든 호수는 매사추세츠 주정부에 의해 주립 보존 공원(State Reservation Park)으로 지정되어 있다. 호수를 포함해 411에이커에 이르는 주변의 숲을 주정부가 관리하고 있고, 이 밖에 소로학회를 비롯한 민간단체들 또한 공원의 훼손을 막기 위한 노력에 동참하고 있다.

    호수를 자연공원으로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이 본격화한 것은 1970년대. 이때부터 관리 당국은 방문객 상한선을 정하고, 접근로를 조정하고, 호숫가의 침식을 막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전에 월든 호수는 유흥지였다. 보스턴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서 특히 주말이면 사람들이 몰려와 호숫가에서 놀이를 즐기는 바람에 심하게 훼손됐다. 1990년에 공원 인근에 콘도미니엄을 지으려는 사업 계획이 알려지자 미국 내셔널 트러스트 본부는 월든 호수를 보존이 위협받고 있는 지역으로 설정하고 모금 운동에 나섰다.

    그리하여 호수로부터 최소한 반마일(약804m) 내의 숲에는 상업 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막자는 ‘월든 숲 기획단(Walden Woods Project)’이 발족되고 이 단체가 주동이 되어 모금한 기금으로 인근의 숲을 차례로 사들여 녹지를 넓혀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소로는 만년에 뉴잉글랜드의 각 도시들이 적어도 500~1000에이커 정도의 숲을 공원으로 지정, 보존할 것을 역설했는데, 오늘날 옛 모습을 되찾고 있는 월든 호수는 바로 그런 그의 유지를 받들려는 노력의 소산인 것이다.

    ‘생태적 사유’의 발상지, 콩코드 월든 호수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62).

    월든 호수는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중심가에서 남쪽으로 1.5마일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콩코드는 오늘날에는 월든 호수로 인해 세상에 알려지고 있는 감이 들지만,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역사의 후광이 빛나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보스턴에서 북서쪽으로 약 20마일 지점에 있는 콩코드는 1635년, 매사추세츠 만에 정착한 영국의 이주민들이 그들의 정착지 너머 뱃길이 닿지 않는 내륙 쪽에 건설한 첫 정착 마을이다. 콩코드는 소로가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한 주일’의 서두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듯이, 원래 이곳 원주민 인디언 말로 ‘머스케타퀴드’(Musketaquid, ‘초원’이라는 뜻)로 불렸다.

    영국의 식민자들은 이곳에 마을을 세우고 원주민들과 화평한 관계를 맺어나가길 염원하는 뜻에서 마을의 이름을 이렇게 붙였다. 콩코드가 미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독립전쟁 때다. 1775년 4월19일, 유명한 에머슨가의 목사관(The Old Manse) 근처에 있는, 콩코드 강을 가로지르는 노스 브리지(North Bridge)에서 식민지의 민병대와 영국 주둔군이 무력 충돌하면서 독립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콩코드는 에머슨이 ‘콩코드 송가’에 쓴 그대로 ‘전세계에 울려 퍼진 첫 총성’의 무대로서 미국의 건국과 함께 역사적 명소가 됐다.

    소로의 녹색 혜안

    해마다 전세계에서 60만명 이상이 월든 호수를 찾는다고 안내서엔 적혀 있다. 이들에게 월든은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무엇이 월든 호수를 순례 성지로 만드는 것인가. 이 의문은 물론 소로가 생전에 출판한 두 권의 저서 중 하나인 ‘월든’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떼어놓을 수 없다.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한 주일’(1849)에 이어 1854년에 출판된 ‘월든’은 장르로만 본다면 순문학의 범주에 들지 않는 산문 에세이일 뿐이다. 소로는 총 423문단, 200여 쪽밖에 안 되는 이 한 편의 산문집으로 너새니얼 호손, 허먼 멜빌, 월트 휘트먼, 에밀리 디킨슨과 어깨를 겨루며 19세기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고전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의 사후에 출판된 ‘메인의 숲’(1864), ‘케이프 캇’(1864), 간디, 마틴 루터 킹을 비롯한 저항 운동가들에게 성전으로 읽혀온 ‘시민의 불복종’, 그리고 무엇보다 200만 단어에 이르는 그의 방대한 일기 또한 그가 구축한 정신세계를 살피는 데 마땅히 고려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후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비로소 확고해진 그의 명성은 무엇보다 ‘월든’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작고한 저명한 소로 연구가 월터 하딩(Walter Harding)은 ‘월든’이 적어도 다섯 가지 시각에서 읽혀왔음을 지적한 바 있다. 곧, 자연에 관한 박물학적 기록, 소박한 삶을 권면하는 삶의 지침서, 물질주의에 지배되는 현대적 삶에 대한 비판서, 탁월한 언어 예술 작품, 그리고 정신적 삶의 안내서로서의 시각이 그것이다.

    출판된 지 한 세기 반이 흐르면서 ‘월든’은 이렇게 다양한 해석을 유발하며 지속적으로 호소력을 발휘해왔다. 고전을 시대가 달라지더라도 인간의 삶과 현실을 새롭게 성찰하도록 자극하는 작품이라고 정의한다면, ‘월든’은 정녕 고전이라 불러 마땅하다. ‘월든’이 인생행로를 바꾼 나침반이요 삶을 계도한 등불이었다는 수많은 증언이 그 비평사의 한 자락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초입에 들어선 이 시점에서 ‘월든’의 가장 큰 호소력은 무엇일까? ‘월든’ 출간 150주년을 기념하면서 미국 소로학회 또한 이 점을 의식한 듯, 학회의 주제를 ‘월든: 어제와 오늘’이라고 내걸었다. 주지하듯 소로는 오랫동안 에머슨의 추종자 혹은 그 아류로 평가되어왔다. 에머슨이 초월주의를 창안했다면 소로는 그 충실한 실천자였다고 흔히 말해왔다. 이런 시각에서 월든은 종종 초월주의의 실천적 텍스트 혹은 그 강령을 담은 에머슨의 에세이 ‘자연’의 사례 보고서쯤으로 인식되어왔다. 그 사유의 독자성과 개성적인 언어가 공인된 뒤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초월주의의 자장(磁場)을 벗어나지 못했다.

    소로에 대한 이런 일반적 평가를 바꾼 것은 1960년대 들어 본격화한 환경운동이다. 앨도 리어폴드의 ‘샌드 카운티 연감’(1949),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1964)과 같은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깨우치는 책들이 출판되고, 시에라클럽을 비롯한 환경 단체들이 환경 정화를 부르짖으면서 ‘월든’을 비롯해 소로가 만년에 쓴 글들에 나타난 자연 성찰은 시대에 앞선 탁견으로 주목됐다.

    1980년대 이후로는 소로의 생태적 예지야말로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이라는 주장이 공감대를 넓혀가면서 녹색 소로의 부활이 한층 가속화하는 느낌이다. 내가 소로학회에 참석한 가장 큰 동기도 ‘월든’의 현재적 의미에서 생태적 사유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데 있었다.

    “나날이 새롭게 하라”

    호수와 대면한 설렘이 진정된 후 호수 입구 쪽의 널찍한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북쪽 기슭을 따라 난 작은 길로 들어섰다. 호수의 서북쪽 모퉁이에 있는 오두막 터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호숫가 모래사장에는 여름철이라서 수영하러 온 사람이 꽤 많았다. 연전에 이곳에 처음 들렀을 때 호수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을 보고 놀란 기억이 새롭다. 월든 호수를 고즈넉하면서도 어떤 시원적인 신성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을 것으로 상상하고 있던 내게 이 너무나 일상적인 광경은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호숫가에서 보낸 소로의 삶이 염인증(厭人症)의 발로나 사회로부터의 도피가 아닐진대 그런 탈속적인 정경을 기대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 기대는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환경 수호성인으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소로의 이미지를 탈(脫)문명적인 원시적 자연과 결부시켜온 고정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소로 자신이 이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거의 매일 아침 호수에서 목욕을 했고, 그것을 그가 행한 최상의 일 중 하나로 꼽았다. 그에게 목욕은 갱생의 의식 같은 것이다. 그는 중국 은(殷)나라 탕왕의 욕조에 새겨져 있다는 “진실로 하루가 새롭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라는 ‘대학’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새롭게 거듭날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깨끗하고 맑은 물에서 수영을 해 속진(俗塵)과 일상에 찌든 피로를 떨쳐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호수는 콩코드의 주민들에게 크게 봉사하는 것이리라. 게다가 대지와 하늘이 하나로 합체되는 듯한 ‘하늘 물(Skywater)’에 몸을 담금으로써 자연과의 합일을 맛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소로가 촉구한 생태적 삶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숲의 재탄생

    호수의 사면 중에서 이 북쪽 기슭이 제일 경사가 가파른 편이고, 그래서 호숫가 또한 산기슭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호수 주변의 대부분이 모래흙으로 되어 있어서 토사의 유실을 방지하는 것이 호수를 원래대로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일인 듯하다. 몇 년에 걸쳐서 호숫가를 복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는 관리 당국의 메모판이 눈에 띈다.

    숲으로 들어서니 다람쥐도 눈에 띄고 새소리도 들린다. 나무들 또한 제법 울창하다. 그러나 이 나무들은 소로 시대에 심어진 것은 아니다. 소로는 자신이 오두막 주변에 400여 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 나무들은 수해로 사라진 지 오래다. 소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히코리 등 숲의 대종을 이루는 나무들은 이후 새롭게 조림된 것이다.

    오늘날 보는 콩코드 주변의 울창한 숲도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19세기말 석유가 대중화하기 전까지 건축자재는 물론 각종 생활가구, 연료용 땔감으로 목재의 수요가 많았다. 기록에 따르면 소로가 살던 1850년대에 이곳 콩코드 지역의 경우 산지는 40% 정도에 불과했으며, 그 또한 남벌이 심해 헐벗었다고 한다. ‘월든’ 전편에 걸쳐 있는 물질주의에 대한 경계와 ‘교역의 저주’에 대한 우려는 이런 사정에서 연유한 것이다.

    게다가 1840년대에 철도가 건설되면서 레일용 침목으로 많은 목재가 소용되어 매사추세츠 주는 이 무렵 이미 인근 메인 주와 뉴욕 주에서 목재를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였다. 자연에 대한 소로의 관심은 경제생활의 대부분을 땅에 의존해야 했던 당시에 인구의 증가(당시 매사추세츠 주의 인구는 75만가량이었다)로 주변의 산과 숲이 황폐해지는 상황에서 자극받은 것이기도 하다.

    이윽고 호수의 서북쪽 끝 후미진 소로 만(Thoreau’s Cove)을 지나 오른쪽 언덕으로 올라서니 곧바로 소로의 오두막 터다. ‘월든’에서는 소로가 지은 오두막이 길이 15피트, 넓이 10피트, 높이 8피트라고 밝히고 있다. 네 평 남짓한 그야말로 작은 공간이다. 호수 입구의 안내 센터와 렉싱턴가의 콩코드 박물관 앞뜰에 복원된 오두막을 이미 본 터라 그것을 실감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타성을 돌아보다

    소로는 1845년 7월부터 1847년 9월까지 이곳에서 2년 2개월 2일을 살았다. 이곳이 집터로 확인된 것은 1945년 11월, 소로의 월든 이주 100주년을 기해 고고학자 롤랜드 로빈슨(Roland W. Robinson)이 발굴하면서다. 1947년 미국 소로학회 주동으로 이곳에 돌기둥을 세워 집터였음을 표시하고, 아울러 집터 안 벽난로 밑돌 자리를 찾아 명판을 세웠다. 명판에는 ‘월든’에 인용된 소로의 시에서 따온, ‘자 그대, 나의 향이여, 이제 이 벽난로에서 위로 솟아라(Go thou my incense upward from this hearth)’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집터의 뒤쪽에는 4개의 작은 돌기둥으로 땔감을 넣어둔 헛간을 표시해놓았다.

    ‘생태적 사유’의 발상지, 콩코드 월든 호수

    소로가 월든 호숫가에 지은 오두막.

    ‘생태적 사유’의 발상지, 콩코드 월든 호수

    호수 서북쪽에 있는 오두막 집터.



    소로의 집터에서 눈길을 끄는 또 하나는 오른편 아래쪽 호수로 난 길목에 쌓여 있는 돌무덤(cairn)이다. 이곳을 찾은 순례자들이 소로를 존경한다는 표시로 놓고 간 돌들이 어느덧 돌무덤을 이뤘는데, 그 발단은 소로가 사망한 지 10년이 지난 1872년 ‘월든’의 ‘겨울 방문객’ 장에 시인으로 등장하는 브론슨 올콧이 어느 방문객과 함께 이곳을 찾아왔다가 소로의 집터를 잊지 않기 위해서 몇 개의 돌로 표시 해둔 것이라고 한다.

    월든 호숫가에서의 실험적 삶이 하나의 상징이라면, 소로의 오두막은 상징 중의 상징이다. 도대체 이 오두막에서 보낸 2년여의 삶이 어째서 그토록 큰 문화사적 의미를 띠고,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 전세계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가. 돌무더기 옆 나무판에 새겨 있는 ‘월든’의 유명한 다음 구절에서 그 해답의 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다.

    “내가 숲으로 들어간 것은 삶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 다시 말해 삶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대면해보고자 원했기 때문이다.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고, 그래서 내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헛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인용문에 나타나 있듯 숲 속 생활의 동기는 선명하다. 물질적 안락에 급급하고, 무지, 편견, 혹은 관습의 노예가 된 수동적 생활에서 벗어나서 삶을 궁극으로 몰고가 깊이 있게 살아보기 위한 것이다. 그 새로운 삶은 당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던 것처럼 문자 그대로 서부 프런티어로 달려가야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삶, 필요 이상으로 의식주의 호사를 탐해 노역에 빠진 삶을 단순화해 삶의 근본으로 되돌아가 그것을 삶의 ‘전선’으로 삼는 데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기본만을 갖춘 소로의 오두막은 그래서 허욕을 버린 ‘자발적 가난’의 표상이요, 참다운 삶을 찾기 위한 자기 갱생의 의지이자, 자연 속에서 그런 구극의 길을 찾아 거듭나는 자아의 상징이다.

    1845년 7월4일, 소로는 여기저기서 구한 목재와 벽돌로 자신이 직접 지은, 비바람을 겨우 막을 정도인 오두막에 입주했다. 그가 독립기념일에 삶의 터를 월든 호숫가로 공식적으로 옮긴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사실이 ‘월든’에 퓨리턴 조상들의 신대륙 이주와 연관되어 세 번이나 언급돼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로 인해 소로의 실험적 삶은 그가 표명한 동기를 넘어서서 한층 복합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오직 ‘삶의 근본적 사실들만을 대면하고자’ 결행된 그의 이주는 실존적·윤리적 차원을 뛰어넘어 사회적·정치적 함의를 갖게 된다. 하버드대의 철학자 카벨(Stanley Cavell)이 지적하듯이, 독립전쟁의 총성이 처음 울린 이곳 콩코드 땅에서 그는 말하자면 또 다른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의 이주는 독립한 지 반 세기가 훨씬 지났지만 미국 사회는 건국의 이념이 표방했던 마땅한 삶의 방식을 실현하고 있지 못함을 고발한다. 따라서 습관에 얽매여 사는 이웃사람들의 노역의 삶에 대한 그의 질타는 이제 가까이는 건국의 아버지들의, 멀리는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너온 퓨리턴 조상들의, 소명적 삶으로부터 멀어진 현실에 대한 자성의 탄식으로 들린다. 이처럼 예레미야적 탄가의 수사를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월든’은 미국적인 책이다.

    참삶을 찾아가는 여정

    집터에서 아래쪽으로 난 길을 따라 소로 만 쪽 호숫가로 나왔다. 동편 입구의 모래사장처럼 넓지는 않지만 이곳에도 작은 모래사장이 형성돼 있다. 모래사장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이내 서쪽 숲으로 난 길로 접어들었다.

    “호숫가를 이루는 언덕들은 경사가 매우 급하고 그 언덕에 자라는 나무들의 키가 대단히 커서 호수의 서쪽 끝에서 내려다보면 호수는 숲 속의 어떤 멋들어진 경관을 보기 위한 원형 극장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이곳 서쪽에서 특히 남쪽 호숫가를 바라보면 호수가 자연이 펼치는 향연을 보기 위한 원형극장의 무대가 된다는 소로의 말이 실감난다. 서쪽 호숫가는 굴곡이 상대적으로 심하고 사람이 발길을 덜 탄 탓인지 숲이 한층 울창하고 가까이 다가서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소로는 자연의 장엄한 경관을 보기 위해 자주 호수 한가운데로 배를 띄우곤 했다. 특히 달 밝은 밤에 배를 띄워 월광 속에서 플루트를 불곤 했다. 작은 농어들이 플루트 소리에 맞춰 뱃전을 친다고 그는 적었다. 그런 순간 그는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 느낌에 젖는다고 썼다. 한마디로 ‘월든’은 산업화의 물결에 휩쓸려 사람들이 돈과 기계의 노예로 전락한 19세기 중엽 미국 사회에서 자연과의 만남을 통해 ‘삶의 골수를 빨아들여’ 참다운 삶을 되찾는 과정의 기록이다.

    이런 관점에서 ‘월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물질만능주의에 오염되고 관습에 얽매인 콩코드 사회의 절망적인 체념의 삶을 해부하고 비판하는 전반부와 그러한 노역의 삶에서 벗어나 자연과 교감하며 삶의 궁극적 의미를 발견해 나가는 후반부가 그것이다.

    전자의 경우 초월주의적 관심이 앞선다면 후자는 생태학적 관심이 두드러진다. 이 서로 다른 관심은 ‘월든’에 구조적 긴장감을 부여한다. 소로 연구가들은 일찍부터 텍스트에 내재하는 이 불연속에 주목하고, 이를 그의 변모와 연관시켜 생각하곤 했다.

    1854년 출판된 ‘월든’은 월든 호수로 이주한 1845년을 기점으로 한다면 9년이 걸린 작품이다. 이 기간에 소로는 ‘월든’을 적어도 7번은 고쳐 쓴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긴 퇴고의 과정에서 소로는 에머슨에게서 물려받은 초월주의의 옷을 벗어던지고 자연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달밤에 배를 띄우고 플루트를 부는 소로의 모습은 자연을 매개로 결국 내면의 신성을 탐구하고자 한 초월주의자의 태도와는 분명 거리가 있다.

    소로에게 자연은 무엇이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서 소로에게 큰 영향을 끼친 에머슨의 자연관을 간단히 살필 필요가 있다. 후세에 초월주의의 경전으로 알려진 ‘자연’(1836)에서 에머슨은 인간과 자연 존재의 내밀한 상관성을 강조했다. 인간과 자연이 거울처럼 상응한다는 이 생각은 더 구체적으로 자연을 신적 의지의 발현으로 보는 시각과, 그 신적 의지 혹은 초월적 영이 다름 아닌 인간의 내면에 깃들여 있다는 시각이 합체된 결과다. 그럼으로써 에머슨은 자연을 실재의 현상으로 전락시키는 플라톤적 관념론을 비켜가면서 또한 인간을 타락한 존재로 규정한 전 시대의 청교도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난다. 초월적인 영으로 매개된 인간과 자연은 상응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조화를 이룬 관계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부의 감각과 외부의 감각이 여전히 서로 참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사람, 말하자면 성인이 되어서도 유아기의 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대지와 하늘과의 만남은 그가 먹는 나날의 음식의 일부가 된다. 자연을 앞에 두면, 그는 아무리 슬픈 일이 있더라도 야생의 환희가 온몸을 관류함을 느낀다.”

    에머슨은 그러나 이 환희를 불러일으키는 힘이 자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있음을 분명히 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상찬(賞讚)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결국 자아에 대립하는 대상적 존재임을 숨기지 않는다. 소로가 에머슨과 결별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소로 또한 젊은 시절에는 자연을 정신의 상징으로 보는 에머슨적 자연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눈 가장자리로 보라”

    그러나 소로는 적어도 1850년대 초 ‘월든’ 집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자연을 깊이 응시하면서 그 너머의 한층 고차적인 질서로 성급히 비상하는 것을 경계했다. 자연은 인간의 피상적인 눈으로 그 전모를 포착하기에는 너무나 풍요하고 복잡한 세계라는 것을 그는 깨닫기 시작했다. 자연을 ‘눈 가장자리로 볼(seeing with the side of the eye)’ 필요가 있다는 유명한 언명도 이런 자각의 소산이다. 자연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드러난 형상을 보면서 또한 빛에 가려진 그림자를 곁눈질하고 그 배경에 울리는 메아리 소리 혹은 침묵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에머슨의 자연이 정신의 풍경화로서 봉사하는 대상적 존재인 데 반해 소로의 자연은 그 자체로 의의가 있는 살아 있는 존재다. 에머슨이 자연을 통해 심령을 보았다면 소로는 자연에 깃들인 심령을 발견한다. 그에게 자연은 자아의 귀환을 기다리는 삶의 근원적 터전이다. 그러므로 자연 속을 걷는 자(saunterer)는 소로에겐 성스러운 대지(Sainte-Terre)의 순례자다.

    ‘생태적 사유’의 발상지, 콩코드 월든 호수

    소로우에게 큰 영향을 끼친 랠프 월도 에머슨 (1803~82).

    소로도 물론 자연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그것이 자연을 내면 성찰의 수단으로 대상화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자연 응시는 차라리 나를 들여다보듯이 자연을 깊게 성찰하기 위한 예비적 절차다. 그것은 자연과의 내밀한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자연의 진면목을 보고자 하는 노력이다. 자연 관찰에 거의 대부분을 바친 만년에 소로는 ‘자연의 기록자(the scribe of all nature)’가 되고자 하는 소망을 일기에 자주 토로한다. 자연을 관찰하되 그 자신은 다만 투명한 매개자로서 자연을 인간적인 용훼(容喙) 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 기록하는 존재에 머물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것이 실현 불가능한 소망이라는 생각 또한 그가 만년에 쓴 일기에 자주 내비친다. 만년의 소로는 오늘날 생태학이 당면한 가장 큰 난제인 인간중심주의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의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로가 미국 생태문학의 창시자로 새롭게 평가되고 ‘월든’이 그 선구적 텍스트로 상찬되면서 소로를 에머슨의 아류로 보려는 시각은 이제 많이 불식됐다. 이번 학회에서도 이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소로가 초월주의자인가 아니면 생태주의자인가를 따지는 소모적인 논의보다는 그의 생태학적 사유의 원천을 다각적으로 살피고자 하는 노력이 대세를 이뤘다.

    서쪽 길을 계속 따라가자 모래사장이 사라지고 기슭은 다시 경사가 급해진다. 호숫가에는 동북쪽 기슭에서는 눈에 띄지 않던 수초가 더러 보인다. 물가로 돌출한 돌들도 이곳 기슭에 더 많은 것 같다. 소로는 호수가 월든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재미있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호수 자리에 원래는 높은 산이 있었다. 원주민 인디언들이 이곳에 모여 자주 회의를 했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은 신을 모독하는 말을 했고, 이에 분노한 신이 산을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이 산사태에서 월든이라 불린 노파만이 도망칠 수 있었는데, 호수는 이렇게 살아남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는 것이다.

    이 전설과 더불어 소로는 호숫가에 작은 돌이 많아서 그런 돌들로 ‘둘러싸인 호수(Walled-in Pond)’라는 데서 그 명칭이 비롯됐을 수도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한 편이 신화적 상상력에 의탁한 호수에 대한 신비화라면 다른 한 편은 관찰에 바탕을 둔 산문적 설명이다. 감각적 경험 너머로의 비상과 복귀가 교차하는 이 모순의 행보야말로 소로 세계 인식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길이 오르막을 타면서 동서로 길게 뻗친 호수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호수의 동서 길이는 0.75마일, 폭은 넓은 곳이 0.5마일, 수심은 깊은 곳이 102피트, 호수 전체의 면적은 61.5에이커, 호수 둘레는 1.75마일이다. 사실 월든은 사람을 압도할 만큼 큰 호수도 아니고 우리의 백두산 천지처럼 손쉬운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신비스러움이 깃들여 있는 것도 아니다. 호수의 풍광이 아름답다고 하나 소로가 자인한 대로 장려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월든인가. 그것은 소로라는 한 인간의 예리한 관찰과 공감적 상상력에 의해 그 다면적인 모습이, 그 세세한 박물지가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월든의 유별남이다.

    조금 달리 말해보자. ‘월든’은 월든 호수와의 만남에서 태동했지만, 우리는 그 호수를 ‘월든’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인간에게 어떤 장소란 결코 가치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이념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매개된 공간이다. 서양에서 말하는 장소의 정령이나 동양의 풍수 사상에서 강조하는 명당의 개념도 결국 사람에게 장소란 사회문화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구성된 형상임을 환기시킨다.

    기온이 내려가는 겨울철에 월든 호수는 거대한 빙원으로 변한다. 소로가 몇 년에 걸쳐 꼼꼼히 기록해놓은 바에 따르면 호수는 대개 12월 말을 전후해 얼고 이듬해 3월 말을 전후해 해빙한다. 얼음이 두껍게 어는 한겨울이면 보스턴의 약삭빠른 상인들은 호수에서 얼음을 채취해 기슭에 쌓아두고 그것을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에 팔았다.

    소로는 어느 해, 100여 명의 인부가 동원되어 하루에 1000t이나 되는 얼음을 캐내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썼다. 일정한 크기로 잘라낸 얼음들은 호숫가 공터에 차곡차곡 쌓여 거대한 얼음성을 이루는데, 얼음이 잘 팔리지 않을 경우에는 이 얼음성이 그 이듬해 여름을 나면서도 녹지 않고 남아 있은 적도 있다고 한다. 호수의 서남쪽을 에도는 자그만 기슭을 아이스 포트 만(Ice Fort Cove)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다.

    월든 호수에 퍼진 기적소리

    ‘생태적 사유’의 발상지, 콩코드 월든 호수

    콩코드에 있는 소로의 생가. 소로는 1862년 이 집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얼음성 만을 지나 호수의 남서쪽 코너를 돌아 나오니 숲 안쪽으로 홀연 공지가 열리고 그 너머로 보스턴-피츠버그(Boston-Fitchburg) 철로가 보인다. 1826년 보스턴과 퀸시를 잇는 철도가 개통되면서 미국의 철도 시대는 시작됐다. 뉴욕의 발명가 피터 쿠퍼(Peter Cooper)가 개량한 증기기관차 덕분이었다. 이후 기차는 기존의 육상 교통수단을 급속히 대체하면서 중요 지방 거점 도시를 연결하는 기간 수송 체계로 발전해 미국의 산업화를 가속시키는 견인차가 됐다.

    철도로 표상되는 기술 문명의 도래에 대한 ‘월든’의 반응은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목가적 삶을 흔들어놓은 기계에 대한 불안감과 그것이 표상하는 기술문명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의 교차로 특징지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연 속의 단순 소박하고 조화로운 삶에 대한 동경만도 아니고 기술문명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만도 아닌 복합적인 감정이다. 일찍이 문학사가 리오 맑스(Leo Marx)는 숲 속의 고요함을 깨뜨리는 기차의 기적 소리에 대한 소로, 호손, 에머슨의 반응을 자세히 검토하고, 정원과 기계의 갈등이 빚어낸 이런 모순의 감정이 산업화한 미국 사회의 심층적 체험을 이룬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는 환경 위기가 날로 심각해지는 오늘에 와서 더욱 절실한 진단으로 들린다.

    호수의 남쪽 멀리 소로 만을 마주보는 지점에 이르니, 기슭의 한쪽으로 오리 서너 마리가 유유자적 헤엄을 치고 있는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나는 ‘야생의 이웃’의 끝을 장식하고 있는 코믹하기 짝이 없는 되강오리와의 숨바꼭질 장면을 떠올렸다. 물속으로 잠수했다가 떠올라 의기양양하게 호수의 정적을 깨뜨리며 터지는 되강오리의 ‘악마적인 웃음’이 들려오는 듯하다.

    소로의 의표를 찌르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떠올라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되강오리. ‘월든’의 서반부에서 겨울을 지나 털갈이를 준비하는 봄철의 되강오리는 새롭게 거듭나는 갱생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러 되강오리는 만유의 중심을 자처하는 인간의 오만을 조롱하는 자연의 표상인 것이다(얼마 후 나는 다시 월든 호수를 찾아 밤늦도록 호숫가에 앉아 있었는데, 어디선가 오리들이 홀연 날아 내려와 고요한 정적을 깨뜨리며 이런 웃음을 터뜨리는 것을 들었다).

    “우리는 19세기에 살고 있다”

    호수를 한 바퀴 돌아 다시 동편 모래사장으로 나오니 정오 무렵이다. 햇살이 한결 눈부시다. 그 사이 수영객은 많이 줄어 있었다. 호수를 뒤로하고 콩코드 시내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콩코드 제1교회에서 열리는 주제 강연을 듣기 위해서였다. 연제는 ‘월든의 의미: 2004년(The Meanings of Walden: 2004)’이고 연사는 다름 아닌 리오 맑스였다.

    에머슨의 할아버지 윌리엄 에머슨이 한때 시무했던, 그리고 1862년 소로의 장례식이 치러진 콩코드 제1교회는 더운 날씨에도 초만원이었다. 초빙 연사인 맑스의 지명도와 미국문학계에서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오랫동안 MIT에서 미국문화사 교수로 재직하다가 은퇴한 이 노대가는 작달막한 키에 수더분한 인상이지만 85세의 노인답지 않게 지성미가 번득였다.

    미국 소로학회 회장 밥 헛스페스(Bob Hudspeth)의 소개로 연단에 오른 맑스는 자신과 소로와의 인연을 밝히는 것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그가 소로를 처음 읽은 것은 대학 입학 직전인 1937년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였는데, 이후 소로와 센트럴 파크의 설계자인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ad)는 자신의 영웅이 되었다고 술회한다. 맑스는 ‘월든’의 현재적 의미를 가늠하기 위해서 먼저 ‘월든’이 출판된 1854년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전제하고 그것을 네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생활환경의 악화. 둘째, 기술공학의 급격한 발전. 셋째, 미국의 팽창주의로 인한 전쟁. 넷째, 노예제 폐지를 비롯한 사회개혁 운동. 맑스는 소로의 시대를 위기로 내몰았던 이 네 가지 이슈가 놀랍게도 150년이 지난 오늘날 여전히 미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관심사를 이루고 있음을 ‘월든’을 인용하며 조목조목 지적한다.

    첫째, 소로의 으뜸가는 관심사였던 환경 문제는 더 설명할 필요 없이 오늘의 세계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사회 문제라는 것. 둘째, 기차로 표상되는 기술 문명의 급속한 도래에 대한 소로의 우려 또한 오늘날 인터넷과 디지털 문명의 급속한 확산이 야기한 불안에 상응한다는 것. 셋째, 팽창주의 이데올로기로 야기된 주변국과의 전쟁이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 재연되고 있다는 것. 넷째, 소로가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노예제 폐지 운동의 정신과 사회 개혁 운동이 오늘의 미국 사회에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맑스는 우리는 여전히 소로가 진단한 대로 ‘들떠 있고, 신경과민이고, 하찮은 문제로 부산떠는 19세기’에 살고 있고, 따라서 ‘월든’은 우리의 삶을 비추면서 또한 자극하고 계도하는 살아 있는 텍스트라고 결론짓는다.

    ‘생태적 사유’의 발상지, 콩코드 월든 호수
    申文秀
    ● 1952년 출생
    ● 서울대 영어교육과 졸업·동 대학원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석사(영문학)·하와이대 박사(영문학)
    ● 現 서울대 영어교육과 교수·미국학연구소장, 한국영어영문학회 부회장
    ● 저서: ‘모비딕 읽기의 즐거움’, ‘현대영미소설의 이해’(공저), ‘자연’(역서), ‘미국의 노예제도 & 미국의 자유’(공역) 등


    강연을 듣고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케임브리지로 돌아오는 기차를 타기 위해 콩코드 역을 향해 걸었다. 언젠가 삽화로 보았던, 검은 외투차림으로 사람 키만한 커다란 톱을 들고 눈 덮인 호수에 유령처럼 늘어서서 얼음을 자르는 사람들의 환영이 눈에 어른거린다. 단 몇 푼이라도 받을 수만 있으면 경치라도, 아니 그가 믿는 하느님이라도 시장에 내다 팔려고 할 사람이라고 ‘호수’장에 소개된 플린트 호숫가의 농부도 떠오른다.

    이들은 분명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소로는 중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삶의 향연에 초대하기 위해서는 ‘야성(野性)이라는 강장제’가 필요하다고 외쳤다. 이 야성의 강장제를 구할 우리의 월든 호수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어둠이 깃들이는 콩코드를 뒤로하고 기차에 오르며 나는 이렇게 묻고 있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