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틀을 벗어난 가족 형태를 소재로 한 소설들.
딸이 초등학교 1학년 무렵 문득 물었다. ‘우리 가족? 당연히 엄마, 아빠, 그리고 너지’ 하려다 말문이 막혔다. 내 안에서 ‘가족이 뭐지?’ 하는 원초적인 의문이 고개를 든 것이다.
가족의 사전적 정의는 ‘혈연과 혼인 관계 등으로 한집안을 이룬 사람들의 집단’이다. 쉽게 말해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부부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가족과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식구’는 뭘까. 사전은 ‘같은 집에서 끼니를 함께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풀이한다. 그럼 우리 가족은 모두 몇 명인가?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학교에 제출할 가족 명단을 작성하면서 아이가 망설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필자는 결혼 후 4년 동안 아이를 친정에 맡겨 기르다가 아이 교육을 핑계로 부모님과 살림을 합쳤다. 아이는 태어나서 줄곧 외가에 살았고, 남편은 5년 전 처가살이를 시작했다.
그런데 친정에는 이미 오빠 부부가 들어와 살고 있었다. 올케 처지에서 보면 시부모에 결혼한 시누이 가족까지 한지붕 아래 사는 셈이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에~” 하고 입을 벌린다. 그것이 “그 집 며느리 힘 좀 들겠네” 하는 의미라는 걸 다 안다.
우리 가족은 몇 명인가?
오빠 부부와 우리 부부는 각각 아이를 하나씩 두었다. 사촌인 두 아이는 연년생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할머니 품에서 함께 컸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두 아이를 ‘정말 안 닮은’ 남매인 줄 안다.
아이는 둘이고 어른은 여섯인 집에서 우리는 고모, 고모부, 삼촌, 외숙모 하는 호칭을 그냥 아빠, 엄마로 통일했다. 그래서 조카는, 실은 고모인데 엄마라고 부르는 필자를 자신의 진짜 엄마와 꼭 구분해야 할 때면 엄마 앞에 ‘김현미’라는 이름을 붙여 부른다. 물론 아이들이 크면서 대외용 호칭을 가르치고 있지만 여전히 집안에서는 엄마, 아빠가 먼저 튀어나온다.
점잖은 분들이 들으면 호칭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콩가루’ 집안이라고 혀를 찰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호칭 덕분에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 자꾸 엄마로 불리면 고모가 아니라 진짜 엄마가 된다는 점이다. 우리집에서는 내 새끼, 네 새끼가 따로 없다.
이러니 딸애가 ‘가족’란을 어떻게 채울지 고민할 만도 하다. 엄마 2명, 아빠 2명,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성(姓)이 다른 남동생 이렇게 모두 가족이요 식구인데 가족란에 누구 이름은 쓰고 누구 이름은 안 쓸 수 없지 않았겠는가. 아이에게 더 고민하지 말고 밥상 위에 숟가락이 놓이는 대로, 즉 ‘식구’ 개념으로 가족을 쓰라고 했다.
확실히 가족의 형태는 달라지고 있다. 특히 이혼과 재혼이 늘면서 새롭게 생겨난 이른바 ‘패치워크 패밀리’도 더는 낯설지 않다. 패치워크 패밀리란 재혼하는 부부가 각자 전남편,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데려와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것이 마치 천 조각들을 이은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어버이날을 맞아 장하진 여성가족부 장관은 한 라디오 프로그램과의 인터뷰에서 “2004년 제정된 ‘건강가족기본법’이 가족의 범위를 너무 제한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자, 그에 수긍한다는 답변을 했다.
“가족이라고 하면 일방적으로 부모와 자녀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1인 가구(1인 가족)가 20%를 넘었고 재혼가족, 이민자 가족 등 다양한 가족의 형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모든 것이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는 시대적 추세이므로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사회보장과 세제혜택과 같은 국가 지원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은 붕괴되고 있더라도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우리의 도덕적 잣대마저 바꿔놓고 있다. 그래서 ‘아내가 결혼했다’(박현욱 지음, 문이당) 같은 발칙한 소설이, 미풍양속을 해친 죄로 벌을 받는 대신 ‘상’(1억원 고료 세계문학상 당선작)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일처다부제 향한 거부감 무장해제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소설을 한 마디로 요약해주는 문구는 이것이다.
‘결혼이라는 결정적 한 골을 희망한 남자와 2명의 골키퍼를 동시에 기용한 한 여자.’
소설은 화자(話者)인 남편과 함께 독자를 서서히 일처다부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나중에는 황당한 꼴을 당한 남편이나 그걸 읽고 있는 독자 모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소설은 어느 순간 일처다부제에 대한 거부감을 무장해제 시켜버린다.
두 남자와 따로 결혼생활을 하는 아내. 그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다. 남편은 말한다.
“아내는 투톱 체제의 팀 감독이고 따라서 누가 골을 넣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빌어먹을 투톱 중 하나인 내 생각은 다르다. 언제 벤치 멤버로 전락할지, 또 언제 방출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 가부장제를 이렇게 조롱할 수도 있다니! 이것은 2000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결혼은 미친 짓이다’(이만교 지음, 민음사)보다 한 수 위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는 남편의 집과 애인의 자취방을 아무렇지도 않게 오가며 두 집 살림을 하는 그녀(그러나 남편에게는 비밀이다)가 사뭇 위태로워 보였는데, ‘아내가 결혼했다’에서는 남편도 사랑하지만 애인도 포기할 수 없다며 아예 두 사람과 결혼해버린 그녀가 오히려 편안해 보인다. 요일을 정해 이 남편의 집, 저 남편의 집을 오가는 그녀의 뻔뻔함에 기가 질려서일까.
2005년 스물다섯의 나이로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해서 주목받은 김애란의 작품에도 흔히 말하는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는 보이지 않는다. 김애란이 집요하게 파고드는 주제는 ‘아버지의 부재’다.
표제작 ‘달려라 아비’에서 주인공 ‘나’는 아버지 하면 늘 분홍색 야광 반바지 차림으로 달리는 모습을 떠올린다. 이것은 총각 시절 아버지가 자취방에 찾아온 여자(어머니)와 ‘그걸’ 하기 위해 피임약을 사러 달동네 꼭대기에서 약국까지 전속력으로 달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떠오른 이미지다. 그렇게 해서 ‘내’가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느 날 모녀를 버리고 훌쩍 집을 나갔고 미국으로 갔다 하더니, 십수년 만에 죽었다는 편지로 돌아온다.
아버지가 왜 집을 나갔을까? 소설은 많은 부분을 생략했지만 다음과 같은 대목이 많은 것을 암시한다.
“미안해서 못 오는 사람. 미안해서 자꾸 더 미안해해야 되는 상황을 만드는 사람. 나중에는 정말 미안해진 나머지, 못난 사람보다 나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고 싶었을 만큼 착한 사람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자신이 잘못하고도 다른 사람이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하는 진짜 나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꼭 무슨 짓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미안한 마음이 자꾸 더 미안한 상황을 만들고 결국은 가족에게 돌아오지 못하는 아버지.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도 떠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남은 가족이 연민에 빠지거나 방황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아비 없는 자식이 된 딸에게 미안해하지도, 가여워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모녀는 당당하다. 이것이 ‘아버지의 부재’를 다루는 2000년대 방식이다.
발칙함 뒤에 감춘 깊은 상처
올해 38회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인 ‘17세’(이근미 지음, 동아일보사)는 “딸이 집을 나갔다. 30년 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으로 시작한다. 17세, 나이는 같으나 방식은 다른 모녀의 가출. 어머니는 e메일을 통해 어딘가에 있을 딸에게 자신의 소녀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며 화해를 시도한다. 문학평론가 하응백씨는 소설 ‘17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을 붙인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가족의 해체는 새로운 양상을 띤다. ‘싱글맘’이라는 새로운 조어가 나올 만큼 현재의 한국 사회는 이혼율이 높아지면서 편부 편모 슬하의 아이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크게 보면 이근미의 ‘17세’는 새로운 가족 해체의 시대에 어떻게 가족이라는 끈을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과거의 소설들이 대개 아들이 아버지를 찾는 것이었다면, 이제 그 찾기의 방식은 역전되어 부모가 자식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소설 말미에 나오는, ‘내 딸이에요. 꼭 찾아주세요. 얘 없으면 나 죽어요’라는 어머니의 전단지 문구는 새로운 가족해체 시대의 절규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렇다. 오늘날 소설은 한결같이 가족 이데올로기를 조롱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가족이라는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끊임없이 가족을 무대로 끌어내고 가족이란 무엇인지 의심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최근 내로라하는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의 발칙함 뒤에는 이처럼 쉽게 아물지 않는 깊은 상처가 웅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