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군정기인 1948년에 발생한 제주도 4·3사건은 한국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많은 희생자를 낸 비극이다. 5·10선거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정치적 저항이지만 제주도민의 시각에선 저항보다 수난의 의미가 더 컸다. 대부분의 희생자는 좌도 우도 아니며 정치와 무관한 평범한 주민이었다. 4·3사건은 친일경찰에 대한 반감, 서북청년단(서청)의 전횡에 대한 저항, 인구 급증에 따른 생필품 부족, 미군정의 미곡정책 실패, 단독선거 반대 등이 복합적으로 야기했다. 그해 10월 발생한 여순사건은 4·3 사태 진압을 거부한 군내 좌익세력의 모험주의적인 도발이었다.
제주4·3연구소가 정기간행물인 ‘4·3과 역사’를 통해 처음 공개한 제주도 4·3사건 당시 경비대 총살현장의 미군 입회 사진.
이에 주민들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고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反)경찰 활동을 전개했다. 결국 3월10일 총파업이 일어났는데, 관공서와 민간기업 등 제주도 직장의 95%가 참여한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
이에 미군정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해 3·10총파업의 원인이 3월1일에 발포한 경찰에 대한 반감과 이를 증폭한 남로당의 조직적 선동에 있다는 양비론적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군정당국은 근본 원인을 제공한 경찰을 개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치안유지를 위해 친일경찰 경력자를 기용한 것도 민심 이반의 주요 원인이 됐다.
경찰에 대해선 어떠한 문책도 하지 않고 남로당에 대한 강공만을 추구하자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가 모두 외지사람으로 교체됐고, 경찰과 서청 단원 등이 대거 제주에 내려가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4월3일 사태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이렇듯 선무책으로 민심을 수습하기보다는 강경 일변도로 대응함으로써 주민과의 대립·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특히 공산주의자를 소탕한다면서 일반 주민까지 투옥해 주민의 반감을 샀다. 게다가 1948년 3월에는 일선 지서에서 잇따라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도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을 맞았다.
좌익세력은 주민의 이런 저항의식을 조직화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제주도 좌익세력의 중심인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 노출로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다.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 신진세력은 군정당국에 등 돌린 민심을 이용하고 조직을 지키기 위해 당면한 단선(單選)·단정(單政)을 반대하는 구국투쟁으로서 무장투쟁을 추구했다.
평화협상 깨트린 우익청년단체
이러한 때이른 무장투쟁은 당 중앙과 긴밀하게 협의해 내린 결정이 아니었기에 후일 모험주의적 노선으로 비판받을 여지를 남겼다. 과연 남로당의 유격투쟁 결정은 피할 수 없는 조치였을까? 이 조치만 없었다면 1만명 이상의 무고한 양민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으므로 원초적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비록 주민 저항의 원인을 경찰과 청년단체가 제공했다 하더라도 다른 지역에서는 이러한 원인이 이렇게 무자비한 참사로 연결되지 않았으므로 거사를 결행한 측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학병 출신 이덕구와 남로당 제주도 지구당 총책 김달삼(본명 이승진)이 주동자였다.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350명가량의 좌익 세력은 단선·단정 반대 명분을 내걸고 도내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단 등의 우익단체를 공격했다. 이렇게 무장 시위가 거세지는 과정에 중앙당 차원의 지원은 거의 없었다.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제주도민을 동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희생자 모두 좌익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조용한 섬마을에서 일어난 자연발생적인 사건이 남로당과 연결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돼 대한민국의 국기(國基)를 흔들었다. 당시 제주도 사람들은 좌익의 정치적 슬로건인 단정 반대논리에 비교적 동조하고 있었다. 무장유격대를 조직하고 한라산을 근거지로 해 경찰 및 군인들과 대치했던 것이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선·단정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4·3 직후 미군정은 이를 치안의 위기 상황으로 간주하면서 경찰력과 서청을 증파하면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 단순하게 대응했다. 그러나 사태가 쉽게 수습되지 않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국방경비대에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다.
한편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무장대측 김달삼과 4·28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사태 해결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우익청년단체의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깨졌다. 무장대와 토벌대의 타협은 애초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희생자가 그렇게 많지 않았으므로 이 단계에서 봉합됐다면 갈등의 증폭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므로 아쉬운 대목이다. 4·3습격에 남로당의 책임이 크다면 4·28협상 무산에는 청년단체의 책임이 크다 할 것이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과 24군단 작전참모 슈 중령을 제주도에 파견하고 경비대 9연대장을 교체해 5·10선거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5월10일 실시된 총선거 결과 제주도 총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오직 2개 구에서만 선거가 실시되지 못한 것이다. 제주도민이 4·3사건의 와중에서 좌익의 영향을 받아 선거에 반대했음을 보여준 결과였다.
그러자 미군정은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전개하며 1948년 6월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5월20일에는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해 무장대측에 가담하고, 6월18일에는 신임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부하 대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었다.
이후 사태는 소강국면을 맞는 듯했다. 무장대는 김달삼 등 지도부의 ‘해주 대회’ 참가 등으로 조직 재편의 과정을 겪었다(후일 김달삼은 북한의 국가훈장 2급을 받았다고 함). 군경 토벌대는 정부 수립과정을 거치면서 느슨한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소강상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9월9일 북쪽에 또 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됐다. 이승만 정부는 10월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했다. 그런데 이때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남으로써 또 한번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다.
초토화작전과 대살(代殺)
결국 1948년 11월17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령 제31호로 제주도에 계엄령(제헌헌법 제64조에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계엄을 선포한다’고 규정돼 있는데 우리 계엄법은 1949년 11월24일에 제정 공포됐으므로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 공포의 근거로 삼은 법률은 일제의 계엄법인 셈이다)을 선포했다(1948년 12월31일자로 해제). 이에 앞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주민의 희생이 가장 컸던 시기는 계엄령이 선포된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 동안이었다. 계엄령은 당시 제주도민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돼 공포의 대상이었다. 서청 등 우익세력과 경찰·군대는 무장대를 색출한다며 중산간마을을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 좌익과 아무런 관련 없는 주민이 많이 희생됐다. 중산간마을 주민이 가장 많이 피해를 당했으나 소개령(疏開令)에 따라 해변 마을로 내려온 사람들 중에서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공포에 떨던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추운 겨울을 한라산에서 숨어 지내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심지어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도 집행했다.
이러한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과 관련해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적혀 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된 후로는 진압·선무 병용작전이 전개됐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했다. 이때 많은 주민이 하산했다. 1949년 5월5일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끝났다. 5월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으며 5월15일엔 마무리 토벌을 주도했던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해체됐다. 이어 1949년 6월 무장대 총책 이덕구의 사살로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했다.
그러나 1949년 6월 이후 비교적 평화로웠던 국면도 1년을 가지는 못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던 것이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 조치로 대거 처형됐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됐던 4·3사건 관련자들이 즉결처분됐다. 예비검속에 따른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가 3000여 명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전쟁 전후와 전시에 잔여 무장대의 공세도 있었으나 그 세력은 육지의 산악지대와 달리 미미했으며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됐다. 이로써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로 촉발된 제주도 4·3사건은 실로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27만명의 도민 중 무고한 사람을 포함해 3만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많게는 8만명이 죽었다는 통계도 있으나, 2000년 발간된 제주도의회의 피해자 통계에 따르면 1만4841명이 사망했다. 160개 마을 중 130여 개가 불에 타 없어지고 10만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당초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500명 안팎이었다. 그럼에도 최소 1만명이 넘게 희생됐다는 것은 불가항력의 주민이 많이 죽었음을 방증한다. 예를 들어 유격대 100여 명을 사살했다고 보고된 작전에서 토벌대는 한 명도 희생당하지 않았으며 노획한 무기도 전혀 없었다. 많은 양민이 희생당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다.
대다수 사망자는 불가항력의 주민들
따라서 4·3사건은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제주 4·3 진상규명·명예회복 추진위 범국민회의’가 성안(成案)하고 국민회의 추미애 의원이 대표 발의해 1999년 12월16일 대한민국 국회가 제정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항은 4·3사건을 ‘1947년 3월1일부터 1953년 7월27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력충돌과 사태진압과 관련해 미군정 경찰, 미군정 국방경비대, 국군, 경찰, 미군, 그리고 서북청년단 및 기타 민간단체에 의해 정당한 이유 없이 주민들이 피해를 본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진우 변호사는 ‘월간조선’(2000년 2월호) 기고에서 “4·3 사태 때 군경의 과잉진압 또는 착오, 감정으로 인한 양민희생이 있었으나 그것은 개별적 확인절차에 의해 구제돼야 할 문제”라면서, 4·3사태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2만7719명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이 변호사에 따르면 그 가운데 무장 유격대 피살자가 7893명, 무장유격대 동조자 피살자가 1만5600명이고, 우익인사 피살자 4200명, 무장유격대에 의한 피살자 1300명, 경찰관 순직자 120명, 국군 전사자 150∼200명이다.
이중 우익인사 피살자와 무장유격대에 의한 피살자, 경찰관 순직자 및 국군 전사자는 ‘군경에 의해 무차별 학살된 양민’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이 변호사는 무장유격대 동조자로 추정되는 피살자 1만5600명을 모두 ‘양민’으로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4·3 사태를 군경에 의한 양민 무차별 살상으로 바라보는 것은 문제이며 정당한 군경 토벌대와 불법적인 무장유격대는 동급의 반열에 놓일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의 요지다. 그가 규정한 4·3사태는 ‘1만9000여 빨치산의 7년에 걸친 무장 발호’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초기 무장대가 500명에 지나지 않았음에 비추어 볼 때 지나친 과장이다. 양측의 대립이 격화돼 그 수가 늘어났다 해도 그렇게 많은 수가 빨치산이었다고 보는 것은 냉전적 발상이며 지금의 탈(脫)냉전적 화해 시류를 거스르는 색깔론적 대립론의 산물이라 할 것이다. 초기에 500명이던 무장대 수가 불어난 것은 과잉진압의 반작용이었다. 이러한 역사인식에 바탕을 두고 화해하려고 노력해야지 당시 희생당한 사람 대부분을 좌익동조자니 하면서 또다시 곤경으로 모는 것은 민중의 수난을 외면하는 냉전적 발상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동조자도 있었겠지만, 냉전시대와 마찬가지로 동조 여부를 따지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재단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무고하게 죽어간 양민은 물론 탈법적인 방법으로 처벌된 정서적 좌익 동조자에 대해서도 민주국가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합당한 방법을 동원해 해원(解寃)하고 진혼(鎭魂)함으로써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고 진정한 화합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정통성 없는 친일경찰에 대한 저항
4·3사건이 발생한 시점은 아직 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복수주권(複數主權) 상황이었으므로 국민에게 미군정 치하의 군경에 무조건 침묵하며 순종하라고 요구한 것도 무리라고 할 수 있다. 합법적인 국가기구라도 그에 저항할 최소한의 권리는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국민은 무조건 체제에 순응해야 하고 혁명은 물론 사소한 정치변화도 불가능하다.
좌익 폭도들을 피해 서국교 교정에 모여든 여수 시민들(1948년 10월27일, 이경모씨 제공).
1947년 3·1 발포에 대한 정당방위 성격이 있다 해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국가 건설 과정에서의 폭력이므로 청년단체의 폭력과 동등하지 않다고 폄훼할 수도 없다. 폭력을 독점했던 미군정은 조선인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정통성 있는 정부가 아니었으므로 조선인들이 미군정에 꼭 순응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폭력적으로 저항한 사람들이 애국자로 추앙받는 것을 들먹일 필요는 없을지라도 말이다.
미군정은 미국도 인정했듯이 임시적 정부였으며, 조선인을 근대 주권국가의 국민으로 간주하지 않았으므로 조선인은 주권자의 대우를 받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근대 주권국가의 관점에서 말하면 주권을 위임한 적이 없는 미군정에 복종해야 할 의무는 없었으며 단지 그 물리력에 위협을 느껴 일본 식민지 시대의 신민(臣民)처럼 순응했을 뿐이다.
게다가 미군정이 권력을 위임한 경찰의 경우 1946년 10월 현재 경위 이상 간부 1157명 중 949명, 즉 82%가 식민지 경찰 출신이었으므로(‘대구 10월 항쟁 연구’ 중 ‘군정경찰의 책임을 지고 있던 매글린(W. Maglin)의 보고’) 광복을 맞아 새로 수립될 국가의 경찰상(像)과는 동떨어진 면이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이 정통성 있는 물리력을 가진 경찰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시 상황에 대한 엄밀한 분석이 전제되지 않은 순진하고 현재적인 해석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의 경찰은 우리의 경찰이 아니라 미군정의 경찰이었다. 즉 당시 경찰은 조선인이 복종해야만 하는 정통성 있는 경찰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군정과 경찰이 폭력적 시위대에 행사한 진압이라는 폭력은 건국 이후 국가 공권력의 진압과는 다른 성격으로, 진압이라기보다는 시위대의 폭력과 겨룬 또 다른 폭력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형태상으로는 분명 진압이었지만, 주권자의 통제기제가 없는 폭력이었던 것이다. 또한 외세(미군정)와 구체제 부역세력(친일경찰)이 합작한, 정당성이 극히 취약한 폭력이기도 했다.
“동족상잔 하느니 항명하겠다”
제주도 4·3사건은 여수·순천의 10·19사건으로 이어졌다. 여순사건은 제주 4·3사건과 관련해 출동명령을 받은 국군 제14연대 소속 주임상사 지창수 등 좌익계 사병들이 1948년 10월19일 밤 9시30분 16명의 장교를 사살하고 주변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시작됐다. 이들은 동족상잔을 하느니 차라리 항명하겠다며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했는데, 14연대 작전주임 보좌관 김지회 중위(제주 출신)를 비롯해 일부 장교들도 가담했다.
군내의 남로당원들이 폭동을 계획한 것은 사실이나, 남로당 상부에서 더욱 조직화한 후에 거사하기를 바랐던 점을 감안하면 우발적인 성격이 강했다. 이렇게 발생한 군 내부의 항명사건은 20일에는 순천으로, 20, 21일에는 광양·벌교·구례·곡성·보성·고흥 등 주변 지역으로 확대됐고 지리산 등지의 빨치산과 연결됐다.
제주도 4·3사건과 마찬가지로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따른 조직적인 봉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최초 소요 당시 참가자는 40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틀이 지나지 않아 여수·순천을 장악하면서 지방 공산주의자들이 가세했다. 남로당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흔적은 없지만 이러한 혼란 상황을 이용했다고는 할 수 있다. 이 과정에 여수와 순천의 무고한 주민들 중 일부가 반란 가담자의 멍에를 뒤집어쓰고 희생되기도 했다.
국군은 여수·순천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10개 대대의 병력으로 미군의 지원을 받아 10월21일 본격적인 진압작전계획을 수립했다. 23일 순천을, 27일에는 여수를 탈환했다. 반란군의 일부는 지리산과 광양 백운산 등 산악지역으로 잠입해 유격전을 전개했다.
남로당 지도부가 획책한 것은 이러한 자연발생적인 사건이 아니라 군부 내 세포 조직을 통한 조직적인 봉기였다. 그러나 계획적 봉기에 앞서 다른 성격의 군사반란 사건이 엉뚱한 시점에 엉뚱한 지역에서 발생한 것이다.
남로당 지도부는 조직원의 피해를 우려했으나 일단 지원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입산했던 지창수·김지회 등은 지리산 빨치산 대장 이현상에게 대책과 계획 없이 ‘불만 질러놓고 빠져 나온’ 책임을 추궁 당하면서 ‘군사모험주의’라고 질책받았다.
이 사건은 군부 내 좌익분자들에 대한 조직적이고도 예방적인 숙청을 낳았다. 숙군(肅軍)의 빌미를 제공하면서 좌익은 물론 중도세력까지 남한 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게 하는 데 한몫 했다. 군 반란 주도세력 의도와는 정반대로 대한민국이 반공국가로 자리잡는 데 일정한 구실을 한 셈이다. 또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곧 닥칠 일로 예상됐던 미군 철수가 1949년 6월까지 연기됐다.
반공국가 수립에 걸림돌 제거
제주도 4·3사건과 여순사건은 경찰, 좌익, 청년단체, 미국, 우익 등이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와중에 발생해 많은 무고한 사람이 희생당한 비극이었다. 냉전시대 대한민국에서는 ‘공산당이 사주한 반란·무장폭동’이라는 평가가 주류였지만, 냉전이 해체된 지금은 사건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물론 냉전시대의 유물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는 폭동과 민중항쟁이라는 극단적인 용어가 쓰이고 있지만 말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앞뒤로 일어난 두 사건은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에 큰 상처를 입혔으나 역설적으로 남한의 반공우익 세력을 더욱 공고하게 하는 데 이바지했다. 발생 당시엔 조직적이지 않았으나, 사건이 진행되면서 남로당 등 좌익이 주도하게 됐고, 결국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당하거나 해를 입었다.
4·3사건과 여순사건은 좌우대립으로 비화돼 정치적 권력투쟁(power stru-ggle)으로 귀착된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정치적으로는 좌우익 이데올로기 대립과 관계없는 주민들이 적으로 오인돼 수난을 겪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이데올로기와 그다지 관련이 없던 주민들이 좌익에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다고 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은 두 사건으로 위기를 맞았으나 오히려 이를 기화로 좌익을 소탕해 반공국가 수립의 걸림돌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좌익을 완전히 소탕하지는 못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입산(入山) 투쟁을 전개해 다가올 6·25전쟁의 내전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4·3사건은 미군정 시절에 시작된 것이므로 초기 진압책임은 미군에 있었다. 미국 학자 존 메릴은 많은 인명의 희생을 부른 초토화 작전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라는 점을 들어 미국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미국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에서 제기된 주장이다. 당시 미국의 군사고문은 배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948년 10월8일 미 6사단은 “제주 해안에 붉은 바탕에 별 하나가 그려진 깃발을 단 잠수함이 발견됐다”고 보고했으며 이는 국내언론 보도를 통해 ‘인민공화국기’로 부풀려졌다.
제주도 사태의 북한 연계설은 10월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 신설로 이어졌으며 강경 토벌의 중요한 명분을 제공했다. 이러한 북한과의 연계설은 4·3사건이 거의 마무리될 시점인 1949년 4월1일 미국에 의해 부인됐다. 이에 비춰 미군정 시절 일어난 소요사태의 진압과정에 미국이 질 책임이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임을 알 수 있다.
양민 희생의 역사적 책임 면할 수 없어
또 하나의 쟁점은 제주의 무장 유격대를 진압하는 데 앞장섰던 사설단체 서북청년단에 누가 무기를 주었냐는 것이다. 만약 서청이 극단적으로 진압하지 않았더라면 무고한 희생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쫓겨 왔다. 빨갱이들은 모두 씨를 말려야 한다”고 서청 단원들은 공공연히 말했다.
당초 서청은 민간인 자격으로 제주도에 들어왔다. 처음엔 주로 엿장수를 하다가 점차 세력이 커지자 이승만의 사진과 태극기를 강매했다. 4·3사건이 발발하자 서청은 경찰로, 또는 군인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이 과정에서 서청은 정규군이 아닌 무장 유격대에 맞서 총을 들었는데, 무장 유격대와 마찬가지로 정규군이 아닌 서청 토벌대의 활약은 사태를 극단적으로 악화시키는 데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다.
서청의 동원에 따른 좌우투쟁 격화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당시 남한을 통치하던 미국에 있다 할 것이나 미군정에 자문했던 우익인사들의 책임도 없지 않을 것이다.
고향인 이북에서 공산당을 피해 월남한 인사들의 모임인 서청은 건국의 전사로 자처하며 물리적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치열하게 투쟁했지만, 이후 이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승만의 견제를 받아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한 꼴이 됐다. 이 점에 비추면 이들도 제주도민과 마찬가지로 좌우 이념 갈등 역사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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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을 관장하던 미군정으로선 제주도 4·3사건에 대해 즉각 진압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승만은 힘들게 수립한 대한민국 정부를 지키기 위해 여수·순천 10·19사건을 책임지고 진압한 후 제주도의 무장유격대를 끝까지 소탕할 수밖에 없었다. 좌파가 주도한 소요 사건들이 진압되지 않는다면 상황이 매우 심각하게 변할지 모른다고 미국과 이승만은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이렇듯 나라를 세우고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점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무고한 양민을 희생시킨 것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진압에 동원된 세력의 희생을 기반으로 체제를 유지했음에도 이들을 끝까지 포용하지 못했던 이승만의 자기중심적 정국 운영도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