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호

‘황비홍(黃飛鴻)’

천당이냐 지옥이냐, 대륙이 풀지 못한 100년 묵은 과제

  • 이욱연 서강대 교수·중국현대문학 gomexico@sogang.ac.kr

    입력2006-06-08 16: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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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쉬커(徐克) 감독이 연출하고, 리렌제(李連杰)가 주연을 맡은 영화 ‘황비홍’은 단순한 오락 무술 영화가 아니다. 중국에서 최초로 서구에 문을 연 광저우를 배경으로 19세기말 위협적으로 밀려드는 서구 문명과 중국 전통문화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곤혹스러워하는 중국 민중의 삶을 담고 있다. 한 세기를 넘어 1990년대 초 미국에 대한 중국인의 모순된 감정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황비홍(黃飛鴻)’

    음식문화가 발달한 광저우 시내의 먹자골목.

    광둥성의 성도(城都), 광저우 하면 역시 음식이다. 그래서 “먹는 것은 광저우에서(食在廣州)”라는 말도 있다. 중국인이 워낙 먹는 것을 중시하기 때문에 중국인의 종교는 ‘식교(食敎)’라고 보는 편이 옳다고 하면, 식교의 가장 열렬한 교도가 바로 광둥 사람이다. 중국인 가운데 광둥 사람의 위가 가장 크다고 얘기한다. 날아다니는 것 중에서는 비행기만 빼고, 네 발 달린 것 중에서는 책상만 빼고 다 먹는다는 이야기는 바로 광둥 사람을 두고 한 말이다. 뱀, 고양이, 원숭이, 쥐, 지네, 박쥐까지 죄다 먹는다.

    뱀요리는 광둥 사람이 2000년 전부터 먹어온 광둥의 대표 음식이다. 뱀을 그렇게 다양하게 요리해 먹는 이는 세계에서 광둥 사람이 유일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먹어본 중국요리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광둥요리집에서 먹은 뱀요리다. 닭고기로 국물을 낸 탕이라고 생각하고 먹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뱀 국물이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먹지 않았을 테지만 여하간 맛은 일품이었다. 뱀요리라는 걸 모른 채 다시 한 번 먹어보고 싶을 정도다.

    광둥 사람은 ‘음식이 가장 좋은 보약’이라는 생각에 여러 가지 기이한 재료로 갖가지 음식을 만들어 먹고 보신(補身)한다. 차를 마실 때도 다양한 보약재를 우려낸 ‘량차(凉茶)’를 마신다. 광둥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얌차’ 습관이다. 광둥 사람은 찻집에서 차에 곁들여 죽이나 딤섬을 먹으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한다. 광둥의 죽은 종류가 다양하고 맛이 일품이다.

    광둥요리는 중국요리 중에서 외국인이 즐기기에 가장 좋다. 음식맛이 깔끔하고 담백하다. 더욱이 해외 화교 가운데 광둥 출신이 가장 많아서 광둥요리 역시 세계로 퍼져 나갔다. 오늘날 중국요리가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은 모두 광둥요리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것은 내 것, 네 것도 내 것’



    ‘황비홍(黃飛鴻)’

    1991년 쉬커 감독이 연출한 영화 ‘황비홍’

    광저우는 중국 제일의 부자 도시다. 2005년 중국 도시 거주 인구 1인당 연평균 소득을 조사한 결과 광저우 사람의 소득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광저우 사람은 기질적으로 부자일 수밖에 없다. 우선 광저우 사람은 돈 버는 것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다. 돈 버는 수완이 뛰어나고, 돈 버는 것, 부자가 되는 것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숫자는 8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인이 좋아하는 숫자는 3이나 9다. 그런데 돈 좋아하고 부자가 인생의 꿈인 광저우 사람들이 8을 제일 좋은 숫자로 바꾸어버렸다. 8의 광둥어 발음이 ‘돈을 벌다(發財)’라고 할 때 ‘발(發)’의 발음과 같아서 8을 부(富)를 가져다주는 숫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전화번호, 차번호에 8이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고, 건물을 지을 때 층계 수를 8개로 할 정도다. 광둥인의 이러한 숫자 관념이 차츰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가 지금은 모든 중국인이 8이라는 숫자를 좋아하게 됐다.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사람의 경제관념을 비교한 이런 농담이 있다. 베이징 사람에게는 ‘내 것이 네 것이고, 네 것이 내 것이다.’ 곧 내 것 네 것 구분이 없는 것이다. 상하이 사람에게는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다.’ 내 것 네 것 구분이 확실하다. 반면 광저우 사람에게는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다.’ 광저우 사람은 이기적이다 싶을 정도로 현실적이고, 경제적이라는 이야기다.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고 부자를 부러워하는 것이 광저우의 전통이고, 광저우 사람의 천성이다.

    베이징 사람이 논쟁을 좋아하고, 어떤 일의 동기를 따진다면 광저우 사람은 논쟁보다 현실을, 동기보다는 일의 결과를 중요하게 여긴다. 중국인은 기본적으로 경험주의자다. 어떤 일을 할 때 먼저 돌을 던져보고 그 반응이 어떤지 확인한 뒤에 실행할지 말지를 정한다. 중국 정부가 광저우 일대를 경제특구로 만들어 시장경제 도입을 실험한 것도 먼저 돌을 던져 갈 길을 묻는(投石問路) 중국인의 삶의 태도가 반영된 것이다.

    ‘황비홍(黃飛鴻)’

    광저우 시내 한가운데 있는 중산 기념당. 앞에 있는 것이 광저우 출신 쑨원의 동상이다.

    이러한 신중함이 종종 지나치게 소심하거나 소극적인 기질로 나타나기도 한다.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중국인은 좀처럼 자신이 먼저 나서려 하지 않는다(不敢爲天下先). 한국인처럼 불같이 달려들거나 앞뒤 가리지 않고 부딪쳐보는 도전 정신이 부족하다. 자신이 먼저 실험용 돌이 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경험을 보고난 뒤 길을 가려고 한다.

    중국 최초의 개항장

    그런데 광둥 사람은 다르다. 광둥 사람의 기질을 반영한 광둥 사투리가 있다. 중국어로 ‘나 먼저 가’라고 말하거나 ‘나 먼저 갈게’라고 말할 때, 표준어인 푸퉁화(普通話)의 어순은 ‘我先走’이다. 주어, 부사, 동사의 순서다. 그런데 같은 말을 광둥어로는 ‘我走先’이라고 한다. 동사가 부사보다 먼저 온다. 행동을 먼저 하고 그 결과는 뒤에 따지는 광둥 사람의 기질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다른 지역 중국인과 달리 광둥 사람은 기꺼이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하겠다고 나선다(敢爲天下先). 그래서 광둥 사람을 상징하는 한자로, 흔히 ‘앞 선(先)’자와 ‘빠를 쾌(快)’자를 든다.

    돈벌이와 부를 중시하며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광둥 사람의 기질이 중국 정부의 개혁개방 정책과 만나면서 광저우는 날개를 달았다. 경제특구로 지정된 후 초고속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저우는 중국이 시장경제 시스템을 도입하는 첨병이자,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었고, 그런 만큼 개혁개방의 혜택을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누렸다.

    그러나 멀리 보면 광저우가 지금처럼 발달하게 된 토대는 청나라 때 만들어졌다. 1685년 중국은 영국의 끈질긴 통상 요구에 따라 마침내 외국과의 무역을 위해 광저우를 개방했다. 이로써 광저우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외국에 개방된 항구로 중국이 해양세력, 특히 서양과 만나는 창구 노릇을 했다. 중국 최초의 개항장으로서 서구 근대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광저우는 중국과 서구가 대결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광저우가 근대 이후 숱한 혁명의 발상지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 근대 위기를 가장 먼저, 가장 절실하게 체험한 광저우 일대에서는 청나라를 타도하고 새로운 중국을 만들려는 혁명 운동이 끊임없이 시도됐다. 이곳에서 홍수전(洪秀全)은 중국 전통사상과 기독교를 결합한 태평천국 운동을 시작했고, 쑨원(孫文)은 공화제 혁명을 일으켰다. 캉유웨이(康有爲)는 서구 침략으로 인한 근대 위기에 맞서 유교적 대동사회를 실현해 중국을 개혁하려 했고, 그의 제자 량치차오(梁啓超)는 중국인을 근대적 국민, 민족주의 의식을 지닌 국민으로 만들어 중국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다.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은 광둥에 농민교습소를 차려 농민혁명의 씨앗을 끼웠고, 광둥 코뮨을 세우기도 했다.

    서구의 침략으로 인해 시작된 위기 속에서 저마다 다른 방식의 개혁 실험이 광저우인들에 의해 혹은 광저우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까닭에 광저우 도처에 널려 있는 혁명 유적지를 광저우 사람은 자랑스러워한다. 광저우에서 싹튼 근대 개혁과 혁명의 씨앗들은 속속 내지로 북송되어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그 열매를 맺었다. 근대 정치도 그렇고, 근대 문화도 그러했다.

    쉬커(徐克) 감독의 1991년 히트작 ‘황비홍(黃飛鴻)’은 광저우 이야기이자 중국 이야기다. 중국이 서구와 만나는 창구이자 중국 근대의 발상지인 광저우 일대 지역에서 전설이 된 광저우의 영웅 황비홍(중국어 발음으로는 황페이훙)의 이야기이자, 우주의 중심이라고 자처하던 문명의 제국 중국이 서양 오랑캐에게 형편없이 무너지면서 재기를 모색하는 중국의 이야기인 것이다. 영화 속 황비홍은 광저우의 무술 고수 황비홍인 동시에 중국 자체다.

    기네스북에 오른 ‘황비홍’

    광저우에서 남서쪽으로 30km쯤, 버스로 약 1시간 이동하면 포산(佛山)이다. 바로 황비홍의 고향이다. 2001년 이곳에 새로운 관광명소가 생겼다. ‘황비홍 기념관’이다. 황비홍이 의술을 펴던 중의원 바오쯔린(寶芝林)과 무술을 연마하던 곳을 재현해놓았다. 기념관 안의 모든 것이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지만, 마당에서 무술을 연마하고 있는 자칭 ‘황비홍의 후예’라는 사람들과 황비홍이 이곳 출신이라는 것만은 진짜다.

    ‘황비홍(黃飛鴻)’

    영화 ‘황비홍’은 무술 고수이면서 인격적으로도 훌륭했던 광저우의 실존인물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황비홍은 1847년생으로 알려져 있다. 무술 고수이던 아버지에게서 6세 때부터 무술을 배웠다. 황비홍의 아버지는 포산과 광저우 일대를 돌아다니며 무술을 가르치거나 약을 팔아 생계를 꾸렸다.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무술을 배우던 황비홍은 13세 때 당시 무술계 고수에게서 철선권(鐵線拳) 등을 배워 출중한 무술 실력을 지니게 됐다. 16세가 되자 마침내 광저우로 나와 무관(武館)과 ‘바오쯔린’이라는 중의원을 열었다. 이후 광저우의 민간 자위부대라고 할 수 있는 민단에서 무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만년(晩年)에는 주로 중의원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데 전념하다 1924년에 병으로 죽었다.

    영화 ‘황비홍’은 바로 이런 실존인물 황비홍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첫 작품이 흥행에 성공하자 속편이 6편이나 만들어졌다. 물론 쉬커의 ‘황비홍’ 이전에도 황비홍을 다룬 영화와 드라마는 꽤 많았다. 홍콩에서 그러했다.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를 합쳐서 모두 85편이나 된다. 한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 많이 영화로, 드라마로 만들어진 경우가 없어서 이 방면에서 기네스북에 올랐다.

    황비홍은 왜 이렇게 인기를 누리면서 끊임없이 영화로, 드라마로 만들어진 것일까. 우선 황비홍은 무술의 고수다. ‘황비홍’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황비홍 무술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무술 영화는 가장 대중적인 장르다. 기본적으로 흥행이 보장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황비홍이라는 인물 자체가 지닌 매력 때문이다. 원래 무(武)와 협(俠)은 하나여야 한다. 무는 싸움을 잘하는 것일 터인데, 협이란 무엇인가. ‘사기(史記)’에서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행동은 결과가 있어야 하고, 약속한 일은 어렵더라고 전심전력하여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이행한다.”

    사마천이 말하는 것은 이른바 ‘무덕(武德)’이다. 싸움을 잘하는 것은 물론 사마천이 말한 무덕을 지녀야 비로소 무협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황비홍은 무술실력뿐 아니라 중국인이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격을 겸비했다. 겸손하고 ‘예(禮)’를 차릴 줄 알며, 옳고 그름이 분명하고 정의를 위해 행동하는 ‘의(義)’의 정신, 사람 사이의 정을 중요시하고 남에게 덕을 베푸는 ‘인(仁)’의 정신, 다른 사람을 넓게 품어 감싸는 ‘서(恕)’의 정신을 고루 지녔다.

    물론 황비홍이 진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다. 포산에 있는 황비홍 기념관은 영화 속 황비홍의 이미지에 따라 그의 행적을 꿰어맞춘 인상이 짙다. 황비홍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출생과 사망 연도에 대해서조차 이설(異說)이 많다. 황비홍이 알려진 것은 영화에서 영락없는 돼지 형상을 하고 돼지고기 장수로 나오는 수제자 린스룽(林世榮) 때문이다. 그의 책에 황비홍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단편적인 사실들만 적혀 있어 실제 황비홍이 대단한 영웅이었는지는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들 어떤가. 중요한 것은 적어도 중국 민중, 특히 광저우 일대 중국인의 기억 속에서, 전설 속에서 황비홍은 늘 그런 영웅으로 영원히 살아 있다는 점이다.

    광둥의 영웅이 중국의 영웅으로

    쉬커는 이미 85번이나 재탕이 된 황비홍을 쉬커 식으로 다시 창조한다. 쉬커가 창조한 황비홍의 특징은 두 가지다. 우선 쉬커의 황비홍은 젊다. 젊은데도 그는 이미 무술과 인격 면에서 절대지존이다. 젊은 황비홍은 ‘사부’로서 아버지와 스승 노릇을 제대로 수행한다. 철없는 제자를 다독이면서 사태를 이성적으로 파악하는가 하면 무술 스승뿐만 아니라 정신적, 인격적 스승 역할까지 훌륭히 수행하는 것이다. 미국인의 총에 맞아 부상당한 사람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가 하면 민중에 대한 사랑이 넘친다. 한없이 부드럽고, 자신의 힘을 옳은 일에만 사용한다. 진정한 무협인의 모습 그대로다.

    쉬커가 창조한 황비홍의 두 번째 개성은 이전의 황비홍과 가장 확실하게 구별되는 특징인데, 황비홍을 광둥 일대의 영웅에서 중국인의 영웅으로, 중국 운명의 상징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황비홍이 홍콩에서 끊임없이 재탕되면서 인기를 끈 것은 황비홍이 홍콩과 광둥을 비롯한 이른바 중국 영서지방 문화의 상징 구실을 한 때문이다. 영남지방은 광저우와 선전(深?), 홍콩 등을 포함하는 광둥, 광시(廣西) 지역을 말한다. 영남지방은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화 전통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말이 다르다. 광둥어를 듣다 보면 광둥이 중국 맞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도무지 다른 나라 말 같다. 중국 어느 지방이나 사투리가 있다. 하지만 그 지방 사투리로 방송을 하고, 학교에서도 공공연히 지방 사투리를 쓰는 지역은 광둥이 유일하다. 표준어가 침투하지 못해 광저우에서는 아예 광둥어가 표준어다.

    ‘황비홍(黃飛鴻)’

    사자춤은 광저우를 비롯한 중국 영남 지방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다. 중국인들은 정초에 사자춤을 추면서 악귀를 몰아내고 복이 깃들기를 기원했다.

    사실 광둥어가 표준어가 될 뻔한 적이 있다. 쑨원이 1912년 중화민국 정부를 출범시켰을 때 몇몇 의원이 광둥어를 중화민국의 표준어로 정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국회의원 중 광둥 출신이 과반수였으니 투표를 하면 그대로 통과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광둥성 출신인 쑨원이 동향 출신 의원들을 설득해 결국 없던 일이 됐다. 광둥어가 표준어가 됐다면 그 어려운 광둥 말을 배우느라 고생깨나 할 게 뻔했다. 말이 다른 지역과 워낙 다르다 보니, 생각과 문화도 달라져 중국의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영남지방만의 독특한 개성이 생겼다. 영남지역만의 독자적인 자의식도 생겼다.

    영남지방 사람들에게 황비홍은 영남의 문화와 자존심을 상징했다. 영남 문화권에 속하는 홍콩에서 황비홍 영화와 드라마가 끊임없이 만들어진 것도 이런 영향이 크다. 황비홍은 영남인을 하나로 묶어 상상의 공동체를 만드는 문화적 아이콘이다. 그동안 홍콩에서 만들어진 황비홍 영화가 모두 영남지방 언어인 광둥어로 제작되고, 광둥 지역 민속음악인 ‘시양양(喜洋洋)’이 배경음악으로 자주 등장하는가 하면, 새 기르기, 찻집 문화 같은 광둥 사람들 특유의 생활문화가 많이 들어 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壯志凌雲, 俠氣仲天

    물론 쉬커의 ‘황비홍’ 또한 영남 문화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영화가 사자춤으로 시작하는 것도 그렇다. 사자춤은 이 지방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다. 사자춤은 서역에서 불교와 함께 전래됐다. 삼국시대에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도 전해졌다. 우리나라에선 사자춤이 탈춤의 일부로 들어가지만 중국에서는 독자적인 하나의 연행양식이다. 중국인들은 사자가 위엄과 용맹, 힘을 상징하고, 요귀(妖鬼)와 사악한 것들을 몰아내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새해가 시작되면 정초에 요란하게 북과 징을 치고 사자춤을 추면서 사악한 귀신들을 내쫓고 복이 깃들기를 기원했다.

    사자춤에는 두 가지 유파가 있다. 남방식인 ‘남사(南獅)’와 북방식인 ‘북사(北獅)’가 그것이다. 북방식은 바지까지 완전히 사자차림을 해 사람이 보이지 않고 사자와 사람이 분간이 되지 않아 외형을 보면 흡사 사자 같다. 사자가 작을 경우 한 사람이, 클 경우 두 사람이 들어간다. 이에 비해 남방식은 외형이 훨씬 화려하고 주로 사자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데, 사자탈 속에 들어간 무용수들은 사자 차림을 하지 않고, 중국 전통 복장을 한다. 춤을 추는 사람이 드러나는 것이다. 황비홍의 고향인 포산은 남방식 사자춤의 탄생지다. 광둥을 비롯해 동남아나 미주 등 해외 차이나타운에서 주로 연출되는 사자춤은 대부분 이 남방식이고, 우리가 흔히 접하는 사자춤도 마찬가지다.

    사자춤의 꽃은 ‘채청(采靑)’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시합이다. 사자춤을 추는 무리가 자기 짝의 어깨 위에 올라가 높이 매달려 있는 ‘청(靑)’을 먼저 따내는 것인데, 이때 ‘청’은 돈이나 비싼 물건인 경우가 많다. 영화 ‘황비홍’에서는 채청의 순간, 서양인들이 총을 발사한다. 광둥 사람들이 복을 빌고 악귀를 몰아내며 가장 성스럽고 즐거운 의식을 치르는 순간에 재를 뿌리는 격이다. 채청을 하려던 사람이 총소리에 놀라 떨어지자 황비홍이 대신 나선다. 황비홍은 생전에 사자춤을 잘 춰 ‘사자왕’으로 불렸다고 한다. 명성에 걸맞게 황비홍은 사자 가면을 쓰고 현란한 무공으로 줄을 차고 하늘로 치솟아 ‘큰 뜻은 구름을 뚫고, 정의로운 기상은 하늘을 찌른다(壯志凌雲, 俠氣仲天)’고 적혀 있는 대련(對聯)을 손에 넣는다. 황비홍이 하늘을 찌르는 기개로 큰 뜻을 품고 나서서 악귀들을 물리치고 정의를 수호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암시하는 셈이다.

    쉬커 감독은 영화 ‘황비홍’을 통해 영남 문화의 특징을 보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황비홍을 중국의 상징, 중국 근대 운명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그는 영화 ‘황비홍’에서 서구 근대의 위협 앞에 선 중국의 운명을, 중국 민족이 가야 할 길을 묻는다. 그래서 ‘황비홍’을 광둥어가 아니라 푸퉁화로 만들었고, 홍콩 배우가 아니라 중국 대륙의 대표적인 무협 영화배우 리렌제(李連杰)를 주연으로 썼다. 그리고 중국이 서구 열강에 침략당하면서 중화제국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고 민족위기에 휩싸이던 청년 황비홍 시기를 배경으로 삼았다. 중국과 서구, 전통과 근대 사이에서 곤경에 처한 황비홍을 그린 것이다.

    중국 근현대사의 굴곡

    광저우를 한눈에 보고, 광저우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광저우 웨슈(越秀) 공원에 오르는 것이 제일이다. 광저우를 대표하는 이 공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다섯 마리의 양 조각상이다. 여기에 얽힌 전설이 있다.

    ‘황비홍(黃飛鴻)’

    중국에서 가장 먼저 서구에 문호를 개방한 광저우는 중국 제일의 부자 도시다.

    ‘옛날, 가뭄이 들어 곡식 한 톨 건질 수가 없던 시절에 백성이 밤낮 없이 하늘에 기도를 올리자 하늘이 감동해 신선을 내려 보냈다. 다섯 신선은 오곡을 입에 문 다섯 마리 양을 타고 내려왔다. 신선은 광저우 사람이 다시는 배고픔과 가뭄을 겪지 않도록 곡식을 나눠주고 하늘로 다시 날아갔고, 그들이 타고 온 양은 돌로 변했다. 그후 광저우는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광저우를 양의 도시라는 뜻의 ‘양청(羊城)’이라 부르는 것은 이 전설 때문이다. 화청(花城)이라고도 하는데, 사시사철 꽃이 피는 도시라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공원 안에 있는 전하이러우(鎭海樓)는 지금은 광저우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 올라서면 광저우 시내와 주장(珠江)이 눈에 들어온다. 주장 삼각주는 지금 중국 최대의 경제 벨트다. 광저우가 삼각형의 맨 위 꼭짓점이라면, 삼각형의 왼쪽 변으로 후먼(虎門)과 선전이 있고, 그 아래 꼭짓점이 홍콩이다. 삼각형의 오른쪽 변으로 주하이(珠海)와 마카오가 있다. 선전과 주하이는 중국 최초로 1979년에 경제특구가 됐고, 홍콩과 마카오는 각각 영국과 포르투갈에 조차되었다가 홍콩은 1997년에, 마카오는 1999년에 각각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주장 삼각주는 중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상징한다.

    서구 열강은 이 주장을 타고 광저우로 들어왔다. 이 일대에서 서구와 가장 먼저 충돌이 일어났다. 주장 삼각형의 왼쪽 변에 위치한 후먼은 중국 근대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꼭 들르는 곳이다. 광저우에서 2시간가량 걸린다. 아편을 금지하기 위해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모조리 압수하여 폐기한 이른바 ‘소연지(銷煙池)’가 있다.

    영국은 1715년부터 중국과 본격적으로 무역을 시작한다. 차와 도자기 등을 주로 수입해갔다. 하지만 영국에서 중국에 가져다 팔 것은 별로 없었고 그러다 보니 무역에서 늘 손해였다. 영국의 막대한 양의 은이 중국으로 유출되는 무역역조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아편을 가져다가 중국에 파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은 인도산(産) 아편의 전매권을 갖고 있었다. 차를 수입하는 대신 마약을 가져다 판 것인데, 당시 영국 제국주의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편에 중독된 중국인이 늘어가면서 아편을 사기 위해 영국에 지급하는 은도 늘었다. 광저우 일대에서 시작된 아편이 내륙으로 퍼져갈수록 영국은 떼돈을 벌었다.

    당시 중국은 청나라 정부 1년 예산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돈을 아편 구입을 위해 영국에 지급했다. 결국 중국 정부는 당시 후난(湖南), 후베이(湖北)와 광둥(廣東) 광시(廣西) 지역을 관할하던 후광(湖廣) 총독 임칙서(林則序)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아편을 금하도록 한다. 1939년 임칙서는 아편 반입을 금지하고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압류한다. 그렇게 압류한 아편이 무려 1425t이다. 후먼의 소연지는 이렇게 압수한 아편을 소금물에 넣어 폐기처분하기 위해 판 네모난 연못이다. 아편을 소금물에 넣고 다시 석회를 붓는 등 아편성분을 완전 분해하여 주장에 흘려 보냈다. 압수한 아편을 모두 처리하는 데 20여 일이나 걸렸다.

    서양 근대 문명의 메신저

    일이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영국은 급기야 아편전쟁(1840)을 일으키고 말았다. 영국은 마약 장사를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영국사에 두고두고 치욕으로 남을 일을 저지른 것이다. 끝내 승리하여 그 대가로 홍콩을 빼앗고 광저우와 상하이 등 5개 항구를 개항시켰다. 이후 광저우에 서양인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하고, 사다오(沙面島)는 외국인 전용 거주지역이 됐다. 원래 이곳은 이름 그대로 주장이 휘어 돌아가면서 생긴 모래사장이었다. 그런데 아편전쟁 이후 영국의 조계지가 되면서 서양인 거주지역으로 변모했다.

    영화 ‘황비홍’은 중국과 서양이라는 두 대립항을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중국 쪽이라고 할 수 있는 황비홍의 제자 중엔 서양 귀신, 즉 ‘양귀(洋鬼)’만 보면 무조건 몰아내야 한다며 적개심을 불태우는 푸줏간 주인 세룡이 있는가 하면, 미국에 오래 살다 중의(中醫)를 배우기 위해 온, 중국말을 전혀 못하는 중국인 아소도 있다. 세룡이 고집불통의 폐쇄적인 보수주의자라면 아소는 서구에서 중의학으로 상징되는 중국의 가치를 다시 발견한 인물이다.

    매력적인 여인도 등장한다. 쉬커판 (版)‘황비홍’만의 개성 있는 발명품이자 명품이다. 황비홍과 의형제 사이로 나오는 스싼이(十三伊)라는 여자다. 어린 시절을 황비홍과 함께 보낸 이 여인은 영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왔다. 서양 귀족 부인 차림을 하고,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서양 근대 문명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서양 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이 여인은 황비홍을 사랑한다. 자신의 양복을 만드는 스싼이에게 황비홍이 묻는다. “외국이 그리 좋은가, 왜 그들에게 배워야 하는가?” 스싼이는 “서양은 기관차도 만들고 과학도 우리보다 발달해서 안 배우면 뒤떨어진다”고 말한다. 그러자 황비홍은 나중에 그곳 세상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말한다. 영화에서 스싼이는 황비홍에게 서양 근대 문명을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것이다.

    ‘황비홍(黃飛鴻)’

    광둥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얌차’ 습관이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스싼이가 훨씬 적극적이다. 황비홍에 대한 사랑의 감정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황비홍이 그녀에게 “서양이 그리 좋은데 왜 돌아왔느냐”고 물으니 “그곳에는 보고 싶은 사람이 없다”고 대답한다. 황비홍은 스싼이의 유혹을 짐짓 모른 척하면서 자기감정을 억누른다. 스싼이를 서구 근대 문명의 상징으로 본다면 황비홍은 육박해오는 서구 근대 문명에 한편으로는 매력과 유혹을 느끼면서도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중국의 모습인 것이다.

    쿨리(苦力)와 저화(猪花)

    황비홍은 중국 전통을 상징하는 무술과 중의학을 한몸에 체현하고 있다. 반면 스싼이는 서구 근대문명을 상징하는 카메라를 늘 지니고 있는데, 그녀와 카메라는 이미 하나의 서구 근대문명이어서 황비홍이 그녀만 받아들이고, 카메라를 거부할 수는 없다. 스싼이가 황비홍에게 “중국도 세계의 흐름을 따라야 한다”면서 양복을 입으라고 권하는데도 “중국인이 모두 양복을 입으면 그때 입겠다”며 거부하는 한 황비홍은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고, 두 사람의 사랑이 실현될 가능성도 희박하다. 두 사람을 중국과 서양으로 가르는 이분법적 심연이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중국 쪽엔 중국인이지만 황비홍 편이 아닌 사람들도 있다. 오직 무술만을 생각하는 산둥의 가난한 무술인 엄진동, 미국 잭슨파에 기대어 사익을 챙기는 사하파가 그렇다. 세상 물정 모르고 굶주림 속에서 무술만 생각하는 엄진동은 무술로 황비홍에 도전하고, 사하파는 미국인과 손을 잡고 황비홍의 바오쯔린에 불을 지르고 황비홍을 죽이는 음모에 가담한다. 청 정부 또한 황비홍에게 적대적이어서 황비홍을 감옥에 가둔다. 황비홍은 서구와 중국 내부의 적대자들 사이에서 고립무원이다. 그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감옥에 갇힌 그를 몰래 탈출시켜 잭슨파에게 잡힌 스싼이를 구하고 잭슨 일당과 사하파를 응징하도록 도운 사람들은 다름 아닌 일반 민중이다. 황비홍은 중국 민중의 영웅이다.

    서구쪽 구성은 비교적 간단하다. 영국군과 미국군, 그리고 신부가 등장한다. 영화 시작 부분에서 신부와 신도들이 찬송가를 부르며 중국인 거리를 지나가자 찻집에 있던 중국 전통 악단이 광둥 민속음악 ‘시양양’을 더욱 크게 연주한다. 상대방에게 지지 않겠다는 심산이다. 그런데 신부측과 중국인의 대결은 서양 군함에서 울려나오는 뱃고동 소리로 인해 일시에 그친다. 힘은 그쪽에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는 스싼이나 신부처럼 중국과 서양을 중개해주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중개자의 위치를 잃는다. 신부는 황비홍에게 무관에 불을 지른 사하파를 관에 고발하면 자신이 증인으로 나서겠다고 제안하는 등 서양의 양심 세력을 대변하지만 결국 총에 맞아 죽는다. 불운하게도 잭슨 일파가 황비홍을 제거하기 위해 쏜 총에 맞는다.

    스싼이는 사하파에게 붙잡혀 겁탈당할 뻔하고 미국에 팔려갈 위기에 처한다. 그럼으로써 서양문화 메신저 역할이 불가능해지고, 중국 남자 황비홍의 구조를 기다리는 중국 여인으로 돌아온다. 황비홍이 미국에 팔려 갈 위기에 처한 스싼이를 구하는 것은 연인을 구하는 것이자 중국을 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중국과 서구 사이에 선 중개자들이 사라져 갈수록 중국과 서구, 황비홍과 잭슨 일파 사이의 대립은 불가피해진다.

    영화 ‘황비홍’의 배경은 아편전쟁이 끝나고 45년이 지난 1885년 무렵의 광저우다.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무렵이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을 차지했는데 청나라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흑기군을 베트남에 파견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인다. 중국이 영국, 프랑스와 첨예하게 대립하던 때다. 그런데 영화는 영국이나 프랑스가 아니라 미국인 잭슨 일당을 악의 화신으로 다룬다. 영화 시작에서 영국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서양 세력으로 나오지만,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영국은 인신 무역을 하는 ‘양키’들과 구분된다.

    잭슨 일파는 미국에 가면 일확천금의 황금을 캘 수 있다고 중국인을 속여 미국에 송출하는 일당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중국어로 ‘지우진산(舊金山)이라고 한다. 옛 황금의 산이라는 뜻이다. 미국 서부에 금광 개발이 한창 진행되던 1850년대 무렵부터 중국인은 미국을 황금의 땅이라고 생각했다. 샌프란시스코를 금산이라고 부른 것은 거기서 연유했다.

    많은 중국인이 자의로, 또는 영화에서와 같이 미국인 중개업자들에게 속아서 황금의 산을 찾아갔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채산성 있는 채굴은 모두 끝난 뒤였다. 대다수 중국인이 비참한 하급 노동자 ‘쿨리(苦力)’로 전락했고, 여자들의 경우 성 노예인 이른바 ‘저화(猪花)’로 팔려갔다. 영화에서 스싼이도 황비홍이 구출하지 않았으면 미국으로 끌려가 ‘돼지 꽃’ 신세가 될 뻔했다.

    ‘아메리칸 드림’

    ‘황비홍(黃飛鴻)’

    영화 ‘황비홍’에서 여주인공 스싼이는 황비홍에게 서양 문물을 소개하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

    그런데 영화에서 악의 화신은 왜 영국이 아니고 미국인가. 영국이 여전히 홍콩의 주인으로 남아 있던 1990년대 현실에서, 그리고 대다수 홍콩인이 영국에 우호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는 현실에서 영국인을 주요 표적으로 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에 반해 미국을 표적으로 삼으면 여러 가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1990년대 초반 많은 홍콩인이 홍콩이 대륙에 반환되는 것이 두려워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미국을 새로운 기회의 땅이라고 여긴 것이다.

    중국 대륙에도 비슷한 사정이 있었다. 중국 대륙인들은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1980년대에 미국을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메리칸 드림’에 빠져 있었다. 문화대혁명 동안 중국인은 마오쩌둥의 말대로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선진국인 줄 알았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문을 열고 세계를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중국은 여전히 봉건적인 상태로 낙후되어 있고 미국은 중국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서구보다 형편없이 뒤떨어졌다는 절망감, 이렇게 계속 가면 중국은 도태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중국인을 사로잡았다.

    이런 가운데 중국적인 것을 타파하고, 서구에서 배워서 중국을 서구적인 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중국 지식인들, 체제에 비판적인 지식인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이들은 중국 대 서구라는 이분법 속에서 중국의 모든 것은 어둠이고, 중국 전통은 모두 타도해야 하고 서구의 상징인 미국은 빛이자 중국이 배워야 할 모델이라고 생각했다. 능력 있는 중국 대학생들은 너나 없이 토플(TOEFL)을 보고 기회만 되면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려 했다. 중국에서 1980년대는 전면적이고 급진적인 서구화의 시대였고, 서구 특히 미국은 천당이었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운동의 핵심 인물들 가운데도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꽤 많았다. 톈안먼 사태의 원인은 물론 여러 가지지만 이들의 서구식 현대화와 서구식 개혁 주장이 중국공산당의 정책과 충돌한 것도 한 원인이다.

    그런데 톈안먼 유혈 참극을 겪은 뒤 1990년대 들어 중국 대륙에서는 그런 전면적인 서구화 조류에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미국은 천당이자 지옥이기도 하다는 인식이 서서히 싹 트고, 미국에서 중국 봉쇄론이 나오기 시작하는 가운데 반미(反美) 민족주의, 애국주의 흐름이 생겨난 것이다.

    “금산(金山)이 정말 있을까?”

    쉬커의 ‘황비홍’은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다. 홍콩인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중국 대륙 역시 미국에 대한 인식 조정이 일어나는 지점에서 ‘황비홍’은 미국을 매개로 서구에 대해 묻고, 중국에 대해 묻는다. 역사 속 실제 인물 황비홍이 중국과 서구, 전통과 근대가 충돌하는 시공간을 살았듯이 쉬커의 ‘황비홍’은 1990년대 초반 다시 중국과 서구, 전통과 근대가 충돌하는 가운데 중국의 길, 중국의 선택을 묻는 지점에 서 있다. 역사는 돌고 돌아 중국이 다시 아편전쟁 시기와 같은 전환점에 서 있던 무렵, 또다시 다가온 그 전환점에서 쉬커의 ‘황비홍’이 나온 것이다.

    그 전환점에서 1990년대 쉬커가 창조한 황비홍은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총을 들고 양복을 입는다. 돈과 무술만을 생각하던 산둥의 무술인 엄진동은 잭슨의 총에 죽으면서 황비홍에게 말한다. “아무리 강해도 총알은 못 막아.” 황비홍은 무술이나 총이 아니라 총알을 손으로 튕겨 잭슨을 응징한다. 무공과 총알, 중국과 서구의 기막힌 조화다. 더구나 청 정부 관료와 시종 대립관계에 있던 황비홍은 마지막에 관료들과도 화해하여 국제법을 어긴 잭슨 일당을 해치운다. 그런 뒤 정부 관리와 함께 배 위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며 이렇게 자문자답한다.

    “이 세상에 금산(金山)이 정말 있을까? 금산이 정말 있다면 양인들이 이곳에 왜 왔겠어? 우리가 서 있는 곳이 금산일지도 몰라.”

    황비홍은, 아니 감독 쉬커는 홍콩을 떠나가는 사람들에게, 미국을 천당이라고 여기는 대륙 사람들에게 아마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지금 서 있는 이곳이 황금의 땅일지 모른다고, 아니 황금의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여기서 영화 ‘황비홍’은 홍콩 영화, 중국 영남 지방 문화를 상징하는 영화를 넘어서 중국 영화로 확장된다. 그리하여 중국의 선택, 중국의 운명을 다시 묻는다. 영화 초반, 양복 입기를 거부하던 황비홍은 마지막 장면에서 양복을 입고 스싼이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는다. 무술의 달인인 황비홍도 결국 총 앞에서는 무력했다. 황비홍이 양복을 입었듯이 중국인도 양복을 입고 카메라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그 길이 금산을 찾아 떠나는 서구화는 아니다. 무공으로 총알을 튕겨 잭슨을 제압했듯이, 양복 차림에 중국 부채를 들고 사진을 찍듯이, 그가 여전히 중국 전통무술과 중의를 전수하는 바오쯔린의 사부로 남아 있듯이, 양복 입은 황비홍의 선택은 서구화라기보다는 중국과 서구를 결합한 현대화를 추구하는 길이다. 현대화를 통해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곳을 황금의 땅으로 만드는 일이다.

    100년 묵은 과제

    아마도 그것이 영화 속 황비홍의 꿈이라면 그 꿈을 황비홍의 고향 후대들이 얼마쯤은 실현시키고 있어 보인다. 이제 광저우가 금산이고, 기회의 땅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기회의 땅은 광저우를 넘어 중국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1980년대 중국을 떠나 기회의 땅 미국으로 갔던 중국인들이 최근 들어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다. 거북이 알을 낳기 위해 뭍으로 나갔다가 다시 바다로 돌아오듯이, 미국으로 갔던 젊은이들이 다시 돌아온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다시 조국의 바다로 돌아오는 그런 사람들을 거북이라고, ‘하이구이(海龜)’라고 부른다.

    ‘황비홍(黃飛鴻)’
    李旭淵
    ● 1963년 광주 출생
    ● 고려대 중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중국 베이징 사범대 대학원 고급진수과정 수료
    ● 現 서강대 중국문화과 교수
    ● 논문 및 저서 : ‘중국 지식인 사회의 새로운 동향’ ‘소설 속의 문화대혁명’ ‘개혁 개방 이후 전통 문화의 재평가와 변용’ ‘전환기의 중국 사회’1, 2(공저)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노신 산문선집’ 등


    우리 근대도 그렇지만 중국 근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 또한 중국과 서구, 전통과 근대의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는 일이었다. 중국 근대사의 지난한 역정은 대부분 이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하나의 역사적 전환기에 선 지금 중국이 100년 묵은 이 과제를 이제야말로 제대로 처리할지, 아니면 또다시 파행을 겪을지, 중국을 넘어 세계의 주목거리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이 근대 이후 해묵은 숙제를 이번에야말로 잘 처리하여 더는 중국과 서구, 전통과 근대의 틈바귀에 놓인 황비홍이 아니라 그냥 무술 오락 영화 주인공 황비홍을 볼 날이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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