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호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에게 듣는 개발연대 비화

“광부, 간호사 몸값 갚으려 머리카락 자르고 쥐도 잡았죠”

  •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parker49@donga.com

    입력2006-06-09 15: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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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부, 간호사들은 개발연대 이끈 정신적 씨앗
    • 단발령 내려 가발 제작, 쥐잡기운동 벌여 ‘코리아 밍크’ 수출
    • 박 정권이 서독·일본과 교류 트자 反韓 미국, 우호적으로 돌아서
    • 1970년 도쿄大 곤노 아키라 교수의 예언 “한국은 천혜의 반도체 왕국 될 것”
    • 상대적 빈곤, 집단이기주의, 재벌 부패는 개발연대의 폐해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에게 듣는 개발연대 비화
    노(老) 경제학자 백영훈(白永勳·76)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은 인사를 나누자마자 기자의 손을 잡고 커다란 사진 액자가 군데군데 걸려 있는 방으로 끌고갔다. 가장 먼저 보여준 사진은 1964년 박정희 대통령과 서독의 에르하르트 수상이 대담하는 장면이다. 군인 출신의 47세 대통령과 경제장관 출신의 67세 수상. 두 사람은 지금도 살아 있는 듯 생생한 표정이다. 그들 사이에 앉은 당시 대통령 경제고문이자 통역으로 활약한 백 원장. 그는 지금 42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사진 앞에 서 있다.

    미국의 우려, 박정희의 초조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외국 정상으로부터 국빈 초청을 받았다. 루프트한자 항공기를 타고 14시간을 날아 도착한 곳은 또 다른 분단국 서독. 그곳엔 박 대통령보다 앞서 간 광부와 간호사들이 나와 있었다. 대통령은 한국 경제 발전의 씨앗이 된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만 서독을 방문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겐 명확한, 실패해서는 안 될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사진 속 박 대통령은 에르하르트 수상에게 왼손을 내밀며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회담 내내 박 대통령은 돈 꿔달라는 얘기만 했어요. 나는 입이 아프도록 통역했지. 손을 내민 건 돈 빌려달라는 제스처였어. 박 대통령은 ‘한국 국민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다. 우리도 서독처럼 라인 강의 기적을 일궈내겠다. 군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군사혁명? 그것은 공산주의 이기려고 했다’고 말했죠.”

    1인당 GNP 80달러.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 박 대통령은 국가재건회의 최고의장이던 1961년 11월 미국의 원조를 기대하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찾아갔지만 쿠데타 정권이라는 이유로 문전박대 당했다. 그를 용인하면 아시아 전체로 쿠데타가 파급되리라는 게 미국의 우려였다. 실제로 그 무렵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에서 연이어 쿠데타의 조짐이 일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현시킬 돈줄을 눈이 빠지게 찾고 있었다.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중앙대 교수로 있었는데, 1961년 5월16일 군사정변이 일어났어요. 하루는 자신을 국장이라고 소개하는 중령 몇이서 나를 남산의 한 지하실로 데려갑디다. 그들로부터 혁명정부의 지도이념과 국가관(觀)에 대해 교육을 받았지. 그러곤 ‘경제정책 판단관’이라는 임무를 줬어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서울대 박희범 교수, 이기준 교수, 유진순 교수, 고려대 이창렬 교수와 꼬박 1주일을 함께 지내면서 초안을 작성했어요. 이 계획의 기본 문건은 (1950년대 말) 민주당 정권에서 작성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이었는데, 문제가 많았죠. 자립경제를 외치고 있지만, 돈이 없는데 어떻게 해. 그건 박정희 정권도 마찬가지였어요. 증권파동도 일으키고, 화폐개혁도 했지만 자금을 마련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골자는 고용확대, 수출기반 조성, 중소기업 육성, 농촌 부흥, 기계공업 육성 등이었다. 이를 통해 GNP(국가총생산) 7% 성장을 달성하자는 것이 목표였다. 백 원장 등은 그 무렵 유행하던 ‘해롯 모델(성장률×자본계수=저축률)’을 적용해 필요한 자금을 산출했다. 7% 성장률에 자본계수 3(낮은 수준의 중공업화를 의미)을 곱하면, 21%. 이것이 국민이 담당할 저축률이었다. GNP가 7% 성장하려면 국민의 저축률이 21%는 돼야 한다는 의미였다. 당시 저축률은 3%에 불과해 해외에서 자금을 들여오지 않으면 안 됐다.

    서독에서 불어온 훈풍

    돈을 빌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한국은 지구상에 또 하나의 분단국 서독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서독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한국에 선뜻 돈을 내줄 리 없었다. 정부는 국내 최초로 독일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백 원장을 서독으로 급파했다.

    백 원장은 함께 수학하던 독일 친구의 아이디어로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 4만명을 파견하기로 한다. 이들의 3년치 월급을 독일에 묶어두는 조건으로 1억5000만마르크(4000만달러)의 상업차관을 약속받았다. 사실상 이들을 담보로 돈을 빌린 셈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독에 파견한 광부와 간호사들이 우리나라 개발연대를 이끌어온 정신적 씨앗이었어요. 헌신적으로 일하는 이들에게 서독 국민은 박수를 보냈지. 서독 국회의원들은 대(對)정부 질의에서 한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고, 이것이 박 대통령을 초청한 계기가 됐어요. 그래서 2차 상업차관 2억마르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서독이 한국에 선사한 것은 상업차관만이 아니었다. 돈 꿔달라고 조르는 박 대통령에게 서독의 에르하르트 수상은 만찬 자리에서 매우 귀중한, 향후 한국의 역사를 바꿔놓을 일곱 가지 조언을 했다. 이를 통역한 백 원장은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낱낱이 기록했고, 외무부에 그 기록을 넘겼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박 대통령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경제장관 할 때 한국에 두 번 다녀왔다. 한국은 산이 많더라. 산이 많으면 경제발전이 어렵다. 독일을 보라. 히틀러가 아우토반(고속도로)을 깔았다. 한국에도 고속도로를 깔아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을 달릴 자동차를 만들어야 한다. 폴크스바겐은 히틀러 때 만든 것이다. 자동차가 다니면 고용이 늘고, 새로운 산업이 일어나고 세금이 들어온다.”

    얘기를 듣는 박 대통령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수상이 얘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다. 그러니 제철공장을 만들어라. 정유공장도 필요하다. 자동차 연료로도 필요하지만, 앞으로는 석유화학공업 시대다. 나일론 섬유, 플라스틱 공업 등 연관산업이 일어난다. 독일은 마이스터라고 하는 기능장(技能長) 제도가 있다. 한국도 기술 인력을 육성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한 나라의 경제가 안정되려면 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 우리가 돕겠다. 경제고문을 보내주겠다(실제 박 대통령 귀국 이후 서독은 다섯 명의 경제고문을 한국으로 보냈다).”

    여기까지 단숨에 말한 에르하르트 수상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마지막으로 부탁이 하나 있다”고 했다.

    “일본과 손을 잡아야 한다. 이것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중요한 일이다.”

    이렇게 말하자 박 대통령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그러나 수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얘기를 계속했다.

    애국가, 그리고 눈물바다

    “독일은 프랑스와 32번을 싸웠다. 독일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일이 없다. 그러나 전쟁에선 모두 패했다. 독일인은 지금도 한이 맺혀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서독의 아데나워 수상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을 찾아가 악수했다. 한국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박 대통령은 화난 사람처럼 “우린 일본과 싸운 일이 없다. 매일 맞기만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이 한국을 36년 동안 지배했다”고 반박했다. 그러자 에르하르트 수상은 “지도자는 미래를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 원장은 이 대목을 통역하면서 일본 정부가 서독 수상에게 이 얘기를 부탁한 게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박 대통령은 “일본이 사과하면 받아줄 수는 있다. 우린 아량이 없는 국민은 아니다”라면서 굳은 얼굴을 폈다. 이것이 한일 국교정상화의 씨앗이 됐다. 이듬해 한일협정이 체결된 것. 서독 수상과 나눈 두 시간 남짓한 대화가 한국의 역사를 바꾼 셈이다.

    박 대통령은 독일에 도착한 이튿날 뤼브케 서독 대통령의 안내로 한국의 광부들이 일하는 탄광으로 향했다. 미국도 외면한 경제원조를 서독이 약속하기까지 광부들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을 기다리며 선 500명의 광부는 얼굴에 석탄이 묻고 온통 흙투성이였다.

    “탄가루와 때에 찌든 작업복을 입고 우리를 맞는 광부들을 보자 가슴이 턱 막혔어요. 박 대통령은 이들을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지. 그는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나요. 우린 이렇게 못 살지만 후손에겐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열심히 합시다. 나도 열심히 할게요’라고 연설을 했어요. 그러곤 애국가를 불렀고, 마지막엔 모두 눈물을 흘렸죠. 서독 대통령도 울었고, 박 대통령 곁에 있던 육영수 여사도 울었어. 광부들은 대통령이 탄 리무진 창문을 붙들고 ‘아이구, 아이구’ 하면서 통곡을 해댔지.”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에게 듣는 개발연대 비화

    1964년 박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서독 수상이 대담하는 사진 앞에 선 백 원장. 두 사람 사이에서 통역하는 백 원장은 당시 32세였다.

    광부 파견과 관련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한 토막.

    “혈기왕성한 젊은 광부들을 보냈잖아요. 가족과 떨어져 사는 외로움도 컸지만 청년의 욕구도 참을 수 없었나봐. 그중 몇 명이 동네 독일 여자와 사고를 쳤어요. 자칫하다간 사회 문제가 될 것 같았어. 그래서 서독에 노동관을 파견했죠. 주말이면 광부와 간호사를 버스에 실어 파리로 무료 여행을 보내줬어요. 맘에 맞는 사람끼리 결혼하라고. 그래서 수많은 처녀 총각이 거기서 결혼했습니다. 거의 다 짝을 지어줬어요. 그래서 내가 독일에선 ‘갓 파더(代父)’로 불립니다. 몇 년 전엔 그간 한국에 한 번도 오지 못한 광부, 간호사 400명을 한국으로 초청했고, 이들의 2세도 한국으로 데려왔어요. 내가 보냈으니 내가 책임을 져야죠. 서영훈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도움을 많이 줬습니다.”

    서독 정부에 “비행기 좀 빌려주오”

    서독에서 머문 17일 동안 백 원장은 박 대통령에게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열심히 가르쳤다. 대통령이 현장에서 경험할 수 있도록 히틀러가 닦아놓은 아우토반을 달렸고, 제철소를 견학했다. 독일 국민 특유의 근면성으로 폐허가 된 경제를 다시 살려낸 성공 스토리도 들려줬다. 모든 것이 신기했던 박 대통령은 밤마다 백 원장을 불러 경제강의를 청했다. 그럴 때마다 육 여사는 커피잔을 나르느라 바빴다.

    한국 경제가 초기 도약을 하는 데 서독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반면 미국은 쿠데타 정권이라는 이유로 도움을 주기는커녕 훼방을 놓았다. 미 의회는 박 대통령의 서독 방문 직전에 비행기를 안 빌려줘 하마터면 독일행이 취소될 뻔했다.

    “서독으로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하루는 청와대 회의가 있다고 오래요. 가보니 다들 심각한 표정이야. 장기영 부총리가 5만달러를 주고 20일 동안 미국의 노스웨스트 에어라인을 빌렸는데, 미국 의회가 반대했다는 거예요. 쿠데타로 집권한 한국 군인이 미국 비행기를 이용하면 다른 나라를 자극한다고. 독일 방문 열흘 전이었어요.

    이동원 외무부 장관이 나더러 서독에 가서 비행기를 제공해달라고 요청해보래요. 알아보니 이런 일은 대통령 특사가 나서야 한다고 해요. 그래서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최두선씨를 찾았어. 그이가 일제시대 독일 유학생이었거든. 최씨를 모시고 독일에 갔는데 비행기 구해달라는 얘기를 차마 못 하겠더라고. 입이 안 떨어져요. 그래도 어떻게 해. 서독 대통령과 비서실장, 노동부 차관이 배석한 자리에서 어렵게 얘기를 꺼냈죠. 그랬더니 다들 놀라는 표정이야. 한동안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보더니 일단 돌아가래요. 우린 안 되는 줄 알았죠. 떠나기 사흘 전까지 연락이 없었으니…. 결국 1964년 12월3일 홍콩을 경유해 서독으로 들어가는 루프트한자 여객기가 예정에 없이 서울에 착륙했어요. 비행기에 오르니 1등석은 대통령과 장관들을 위해 비워뒀더군. 우린 서독 사람들과 이코노미 클래스에 탔습니다.”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박 대통령 일행의 서독 방문은 성공적이었다. 기분이 좋았던 박 대통령은 서독을 떠나기 전, 백 원장을 불러 경제비서관으로 발령을 냈다. 서독 수상의 조언대로 경제를 이끌어 가자면 뜻을 공유하는 백 원장 같은 브레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당황했어요. 독일서 박사학위 받을 때 은사이던 폭트 교수와 맺은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폭트 교수는 학위를 받은 내게 ‘한국으로 돌아가면 정부나 기업체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들어올 것이다. 그렇더라도 교수로 남아 있어야 한다. 라인 강의 기적이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다. 학문의 바탕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가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으라’고 거듭 당부하셨거든요.”

    “백 박사, 큰일났어!”

    백 박사는 대통령에게 “이번 방문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은사에게 인사라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은 주머니에서 1000달러를 꺼내주며 은사에게 선물을 하라고 했다.

    “그 돈으로 선물을 사들고 폭트 교수를 만났는데, 노발대발하는 거예요. 경제비서관으로 가면 안 된다며 학교로 돌아가래요. 수많은 유학생을 보고 경험적으로 알았던 거죠. 정부로 들어가면 이용만 당하고 학자로서의 발전은 정체된다는 것을. 나는 은사의 말씀대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서울에 들어와 청와대로 인사하러 갔더니 대통령이 폭트 교수로부터 온 편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백영훈을 학교로 보내달라’는 내용입디다. 대통령은 ‘훌륭한 은사님을 모시고 있다’며 격려하더군요. 이 소문이 청와대에 쫙 퍼졌죠. 그랬더니 청와대에 적(敵)이 없어졌어. 나는 다시 교수로, 그리고 내가 설립한 생산성본부 연구소 소장으로 돌아갔습니다.”

    서독 방문 이후, 박 대통령은 경제발전에 총력을 집중하기로 다짐한다. 그러나 일이 척척 진행되지는 않았다. 경제개발 계획 시행이 지지부진하자 답답해하던 박 대통령은 느닷없이 충무로 대한극장 앞에 있던 생산성본부 연구소를 찾았다. 대통령은 백 원장에게 생산성운동이라는 게 뭐냐고 물었다. 백 원장은 “사용자와 노동자, 소비자가 함께 경제를 일으키는 운동”이라고 답했다.

    20세기 초 영국과 독일은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노후설비를 교체하는 등 산업합리화운동을 전개했다. 그러자 노동계가 고용불안을 이유로 반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산업합리화운동은 생산성운동으로 바뀐다. 이 운동의 핵심은 기업이 생산성을 높여 성과를 올리고, 이를 노동자와 소비자에게 분배하자는 것. 일본이 벤치마킹했고, 한국도 1957년 한국생산성본부를 세웠다.

    “생산성본부를 둘러본 다음날 박 대통령이 불렀어요. ‘백 박사, 큰일났어. 독일서 배운 거 실천하려고 했더니 모두 반대해. 고속도로 건설도 안 된대. 백 박사가 도와야겠어. 연구소 하나 만들어서 각종 사업의 타당성 보고서를 제출해줘.’ 그래서 중앙대 산하기관으로 한국산업개발연구원을 만들었어요. 국내 최초의 민간연구소였죠. 첫 번째 용역으로 경부고속도로 타당성 분석과 운영 활성화 방안을 맡았습니다.”

    재벌 1세들의 과감한 투자

    그해 백 원장은 용역비로 2억원을 받았다. 꽤 큰돈이었다. 백 원장은 경부고속도로의 경제성 분석은 물론 일본으로 건너가 한일 경제협력 방안을 연구했다. 당시 일본과 협력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우선 국민정서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만 해도 일본의 건설장비를 들여와 땅을 파면 대학생들이 “일본 식민지를 만든다”며 반대했다. 밖으로는 미국의 반대, 안으로는 국민의 반대로 박 대통령은 사면초가였다.

    “그땐 정말 아슬아슬했죠. 나는 일본의 앞선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갔습니다. 도쿄대 곤노 아키라 교수를 만난 게 기억나요. 곤노 교수는 이렇게 말했어요. ‘독일이 세계를 지배한 것이 진공관 라디오다. 히틀러가 이것으로 연설했다. 일본이 세계를 지배한 것은 트랜지스터다. 그런데 트랜지스터로는 방송국에서 사용하는 대형 진공관을 만들지 못한다. 앞으로는 전자공업시장이 열릴 것이다. 그러자면 반도체 기술이 필요하다. 한국은 반도체 제작을 위한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고 있다. 청정한 물, 깨끗한 공기는 반도체 제작에 필수다. 일본은 해풍이 불어서 곤란하다. 한국은 전자산업을 육성하는 것이 좋겠다.’

    그의 조언대로 청정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 안동댐을 만들었죠. 우리나라 산은 전부 화강암이어서 비가 오면 깨끗한 물이 내려와요. 곤노 교수는 대한민국의 공기는 ‘국보(國寶)’라고 했습니다. 이걸 이용하라는 거죠. 경북 구미에 35만평을 조성해 산업단지도 만들었어요. 곤노 교수의 조언 덕분에 전자공업육성법도 제정했죠. 이를 계기로 지금의 삼성, LG가 태어난 겁니다.”

    서독 수상의 조언대로 한국은 자동차산업을 육성하기로 했다. 박 정권은 이를 중앙정보부에 맡겼다. 자동차 공장은 경기도 부평에 처음 설립됐다. 한국 최초의 자동차 공장은 국군 공병대에서 30만평의 땅을 밀어 만들었다. 초대 사장은 재일교포 출신이 맡았지만, 정부의 개발자금을 꿀꺽하고 종적을 감췄다. 그후 몇 차례 외국 기술을 도입해 자동차를 만들었지만 빚만 떠안고 쓰러졌다.

    1967년 상공부는 정부 독점 생산체제를 포기고, 자동차산업의 새로운 허가기준을 마련했다. 선진국과 기술제휴를 하면 민간기업에도 자동차 제조를 허가한다는 것.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은 시멘트 공장 확장 일로 워싱턴에 머물고 있던 정세영 상무에게 포드와 제휴를 추진하라고 지시했고, 마침내 자동차산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자금력이나 기술력으로 볼 때 현대의 도전은 무모한 일이었지만, 보란 듯이 ‘포니’를 생산해 국내 시장을 장악했다.

    전자공업육성법 덕을 톡톡히 본 기업은 삼성이었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음을 직감한 이병철 삼성 회장은 일본 내쇼날 나쿠시다 고로세키 회장의 제안으로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었다. 삼성은 막대한 투자비용이 소요되는 반도체 개발에 목숨을 걸었고, 200만평의 부지가 필요하다며 정부에 협조를 요청했다. 백 원장은 “삼성은 정부로부터 싸게 매입한 땅의 일부를 팔아 막대한 부동산 이익도 봤지만, 구미공단에 반도체 공장을 설립해 지금의 삼성을 일궈냈다”고 말했다.

    백 원장은 일본 방문을 통해 한국의 미래 산업을 연구하는 한편, 한일 협력 방안의 문제점, 국제협력 방안, 산업생산의 고도화, 국제경쟁력 강화 방안을 담은 보고서를 청와대에 보고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독일 수상과 일본 교수의 조언은 한국 경제의 발전에 소중한 아이디어가 됐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외부의 조언에 귀를 열어둔 당시 정권의 태도다. 워낙 가진 게 없었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누구의 조언도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실천한 의지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해마다 11월30일은 ‘무역의 날’로 기념한다. 1964년 11월30일 한국 역사 최초로 수출 1억달러를 달성한 게 계기가 됐다. 1963년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들을 보내 상업차관을 도입한 한국은 수출을 통해 번 돈으로 빚을 갚아야 했다. 당시 박충훈 상공부 장관은 백 원장을 불러 한국이 수출할 수 있는 품목이 무엇인지 조사하라고 요청했다. 만일 서독에 빌린 돈을 갚지 못하면 광부와 간호사들은 현지에 억류될 수도 있었다.

    “국내에서 가장 유능하다는 세일즈맨 30명을 모았죠. 이들을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유명 백화점으로 보내 우리가 팔 수 있는 제품이 무엇일지 알아보라고 했어요. 아무리 둘러봐도 우리가 생산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미국 유명 백화점에 흑인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게 보였어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뭔가를 보고 있더라고. 뭔가 했더니 가발이었어요. 저거면 우리도 만들 수 있겠다 싶었지. 그래서 가발을 수출상품 1호로 선택했어요. 대통령에게 가발을 수출하자고 건의했더니, 대뜸 ‘우리나라에 머리카락은 많지’ 하면서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어요.

    “경남지사, 쥐 3만마리 잡으시오”

    ‘코리아 밍크’로 불리는 밍크코트도 주력 수출품이었죠. 밍크는 쥐보다 약간 큰 동물이죠. 우리나라엔 큰 쥐가 많았어요. 그래서 대통령령으로 전국에 ‘쥐잡기운동’을 선포해 잡아들인 쥐의 털을 깎아서 만든 게 코리아 밍크였어. 쥐털을 붙여 밍크코트를 만든 업체가 많았어요. 재미있는 일도 많았는데, 대통령이 직접 도지사들에게 잡아야 할 쥐 숫자를 할당했어요. 경남지사 3만마리, 충북지사 1만5000마리…이런 식으로. 할당량은 인구비례로 정했어요. 또 조화(造花)와 동물인형도 많이 만들어 팔았어요. 그래서 1964년 감격의 1억달러 수출을 달성했습니다. 덕분에 이듬해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 시대를 맞았어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마무리될 즈음, 미국은 한국과 관계 복원에 나섰다. 서독과 일본의 자금과 기술이 한반도로 진출하자 미국은 한국시장을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실제로 지멘스, 만 같은 독일 업체들이 한국에 진출해 전화, 중공업, 시멘트산업을 일으켰다. 이에 미국은 해외 원조를 전담할 USAID(국제개발처)를 통해 한국에 차관을 제공했고, 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을 한국 정부의 요직에 앉혔다.

    “미국이 미웠지만 원조는 절실했지.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와 맺은 ‘브라운 각서’는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첫 단추였어요. 한국이 베트남에 파병하는 조건으로 차관과 토목장비, 건설기술을 제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은 고속도로 건설에 필요한 추가 재원을 마련했고, 베트남에서 토목건설 노하우를 습득했습니다. 이때부터 한국은 급속하게 미국화(化)의 길을 걷게 됩니다.

    남덕우, 이승윤 등 이른바 ‘서강학파’들이 미국에서 앉힌 사람들이죠. USAID가 현재 광화문 미대사관 자리에 있었고, 남덕우, 이승윤 등은 USAID의 자문위원이었어요.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나를 포함해 남덕우, 김만제 등이 추진했죠. 2차 개발은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에서 추진했는데, 이곳이 USAID 옆에 있었어요. 미국파 학자들과 미국 관료가 자주 만나 친분을 쌓았고, 미국은 이들을 정부 요직에 추천했죠.

    상공부와 재무부의 대결

    나는 사사건건 이들과 대립했어요. 예를 들면 울산은 앞바다 수심이 깊어 수출항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그런데 미국에서 남덕우씨를 내세워 정유공장을 건설하겠다며 반대했어요. 나중에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를 지을 때도 싸웠죠. 나는 1988년에 서울올림픽이 열리니까 그때에 맞춰 잠실운동장 옆에 무역센터를 짓자고 했어요. 외국인들이 몰려올 때 전시장 만들어서 물건 팔아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남덕우씨는 무역협회가 부동산 투기한다며 반대했어요. 결국 나익진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 박용학 전 대농회장 등이 내 편을 들어줬지.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반대하던 남덕우씨가 무역협회장으로 간 겁니다.”

    남덕우 전 총리를 위시한 경제기획원 관료들과, 민간경제연구소의 백 원장 및 상공부 관료들 사이에 대립축이 형성됐다. 그러나 힘은 상공부와 백 원장에게 실렸다. 1972년 시작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즉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은 상공부와 백 원장의 합작품이었다.

    백 원장과 상공부에 주도권을 빼앗긴 재무부 관료들은 경제기획원 산하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역전을 시도했다. 1971년 설립된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그것. 이를 통해 자신들의 논리를 가다듬고 대통령에게 올릴 보고서를 작성했던 것이다. 초대 원장은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서강대 교수를 지낸 김만제씨. 이렇듯 두 세력 간의 다툼은 연구소 설립 경쟁으로 치달았고, 정부 각 부처는 정부 출연 연구소를 무더기로 만들었다.

    “그건 남덕우씨의 잘못이기도 하고 내 잘못이기도 해요. 어느 나라가 정부 출연 연구소를 만들어? 연구소는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하고 대안을 내놓아야 해요. 정부 출연 연구소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요? 정부가 원장 임명권을 쥐고 있는데….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에게 듣는 개발연대 비화

    2001년 백 원장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

    이렇게 된 데는 내 잘못이 더 커요. 1차 경제개발 계획 때 나는 한국이 정상적인 경제개발로는 도저히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봤어요. 경제발전 이론으로는 로스토의 경제개발 5단계설과 허쉬맨의 불균형 성장론 두 가지가 대표적이죠. 경제개발 5단계설은 농경사회에서 탈(脫)공업화 사회로 가는 데 5단계가 있고, 각 단계마다 30년씩 걸린다는 얘깁니다. 미국이 200년, 일본이 150년 걸렸다는 거죠.

    불균형 성장론은 정부가 주도해 중화학공업을 선도하고 거기에 맞게 경제 틀을 만든다는 것이에요. 허쉬맨은 경제개발 5단계설로는 후진국은 영원히 선진국이 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린 허쉬맨의 전략을 따랐습니다. 압축성장을 목표로 했고, 그 결과 관료자본주의는 필요악이었어요. 지금처럼 민간의 힘이 커졌으면 사라져야 할 유물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게 오늘날 한국의 문제점입니다.”

    압축성장의 병폐

    백 원장은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관료자본주의를 꼽는다. 개발연대에 정부가 압축성장을 추구하다 보니 정부의 기능이 너무 강화돼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관료중심주의로 변질됐고, 정부 주변기관에 엄청난 기금을 만들어줬으며, 효율적인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국내 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4.7%입니다. 농민은 국민의 7%밖에 안 돼요. 그런데 농민을 지원한다는 기관이 농업협동조합, 농업기반공사 등 14개나 돼요.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만 17만명이죠. 정부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어요.

    이뿐만이 아니에요. 개발연대 당시 아파트를 지어야 하는데 이걸 떠맡을 민간기업이 없었어요. 그래서 주택공사, 토지공사를 만들었지. 그런데 지금은 민간업체들이 다 하잖아요. 이젠 이런 기관이 필요없는 거죠. 국가 기관이 땅장사 한다는 건 시대에 맞지 않아요. KOTRA나 무역협회도 마찬가집니다. 대기업들이 알아서 해외지사 설립하고 그러는데, 이런 조직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당장 정부 출연 기관을 없앤다면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될 게 아니냐”는 반문에 백 원장은 이렇게 답했다.

    “구조조정해야지 별수 없어요. 그럼 여기서 나온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 내겐 대안이 있어. 가령 최근에 민주화운동 세력과 함께 한민족세계화포럼을 만들었어요. 이 포럼을 통해 700만 해외 한민족이 살고 있는 나라에 한국의 공장을 세우고, 이들을 고용하고 싶습니다. 이젠 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도 우리 정부가 책임져야 해요. 한국의 청년 실업자들이나 구조조정으로 퇴출된 샐러리맨을 이곳으로 보내 일하도록 격려해야 하고. 그러자면 민간기업 촉진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중소기업이 해외에서 창업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해요.”

    백 원장이 지난해 펴낸 ‘대한민국에 고함’이란 책에는 개발연대에 대한 반성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절대빈곤의 극복을 위해 모든 걸 쏟아부은 나머지 상대적 빈곤을 과소평가했다는 것, 절대빈곤 다음에 오는 상대적 빈곤을 무시했다는 것, 그에 따라 집단이기주의가 발전했다는 것이다.

    재벌의 부패도 미처 예상치 못했다. “국가가 재벌을 지원했더니 그렇게 번 돈으로 골프장 짓고, 사치하고, 자식들에게 재산 물려주고, 중소기업까지 몽땅 자기들 수중에 넣어버렸다”는 것.

    “자본주의 정신을 제대로 심어주지 못했다는 점도 실패입니다. 지금도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고철과 헌책, 폐품을 모아 학교에 내도록 해요. 독일 사람이 고철이 부족해서 그런 일을 시키는 게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절약을 미덕으로 삼아 올바른 자본주의 정신을 심어주고자 함이죠. 우린 자본주의의 정신적 토양을 쌓지 못했습니다.”

    국적 없는 자본주의

    한마디로 말해 가난에서 탈출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압축성장의 부작용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압축성장의 입안자인 백 원장은 어떤 해결책을 갖고 있을까.

    “제도적 개혁이 절실합니다. 국가기관의 틀을 바꿔야 해요. 국가의 기능을 다시 짜야 합니다. 한국의 관료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공부했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국가경영의 철학이 없어요. 론스타에 외환은행 빼앗긴 거 보세요. 국적 없는 자본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막스 베버는 국적 없는 자본주의는 경제학의 무덤이라고 했죠. 한국 기업들 큰일났어요. 이제 자식에게 기업 물려주기가 쉽지 않아요. 원래 자본주의에선 부자가 3대 못 갑니다. 엄청난 상속세 때문이죠. 이걸 외국인들이 알고 있어요. 그래서 호시탐탐 한국 기업을 인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거지.

    이젠 시민자본주의가 필요합니다. 국민이 기업에 투자하고, 기업은 성과를 국민에게 나눠줘야죠. 독일에서 폴크스바겐이 미국 포드에 넘어가려 하자 시민들이 나서서 주식매입운동을 벌인 끝에 78%의 지분을 매입했어요. 부실하던 폴크스바겐은 회생했고, 지금 중국시장을 재기의 발판으로 삼아 맹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나도 대우자동차를 그렇게 살리려고 했어요. GM이 대우자동차를 인수하기 전에 내가 2조원을 모으겠다며 신한은행에 국민기업 계좌를 하나 터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신한은행이 그건 재경부 장관 승인사항이라서 안 된다는 거예요. 진념 장관을 만나 사정을 했지만 결국 안 해주더라고. 진 장관은 외국 기술이 들어오면 좋다고 합디다.”

    그의 비판이 이어졌다. 이번엔 전력산업과 지방자치단체가 타깃이었다.

    “밤엔 국민을 재워야지”

    “국가 부채 규모가 700조원이 넘었어요. 정부는 200조원이라고 하는데, 단순한 정부 부채만 그 정도예요. 정부 투자기관 부채가 280조이고, 국공채 부채까지 합하면 700조원이 넘어요. 예컨대 한국전력의 투자보수율이 얼만지 알아요? 4.2%예요. 9%는 돼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한국전력 부채가 38조원입니다. 하루에 내는 이자만 130억원이죠. 이건 빚을 후세에 떠넘기는 겁니다. 전기요금을 올려야 해요. 그런데도 밤 10시30분이 넘으면 되레 할인해줘요. 이 때문에 온 나라가 네온사인으로 쫙 깔렸어. 독일이나 영국에 가보세요. 밤이면 다들 불을 끕니다. 밤엔 국민을 재워야 해요. 그래야 생산성이 올라가지. 네온사인이 창궐하면 술집만 흥청망청하죠.

    지난해 3800군데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축제를 벌였어요. 35%쯤 되던 지방의 재정자립도가 15%까지 떨어졌어요. 공무원들이 ‘A프로젝트’ ‘B프로젝트’ 하면서 외자 유치한다고 돈만 쓰고 다녀요. 누구도 간섭하지 않아. 이런 민주주의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이건 망국(亡國)으로 가는 길입니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인터뷰는 점심시간으로 이어졌고, 시계는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마무리를 해야 했다. 40년 넘게 한국 경제의 성장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본 노 경제학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조언했다.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국가가 발전합니다. 첫째, 경륜과 철학, 국가관, 미래관이 있는 리더가 필요해요. 둘째로는 엘리트 집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이 국가의 미래를 설계해야 해요. 아놀드 토인비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역사를 기록한다’고 했어요. 과학자나 정치가는 역사를 만들지 못해요. 역사는 전략적으로 실패한 민족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함정에 빠지면 안 돼요. 셋째, 국운이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하려고 하면 운이 따라와요. 한국은,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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