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호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원로 비교종교학자의 노작(勞作)

  • 류제동 서강대 강사·종교학 tvam@sogang.ac.kr

    입력2006-06-15 17: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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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오강남 지음/현암사/1만5000원

    이책은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불자가 쓴 것이 아니다. 비교종교학자이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저자가 은퇴를 앞두고 자신이 그동안 강의해온 불교 이야기를 일반 독자를 위해서 풀어놓은 책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비교종교학적 시각에서, 특히 그리스도인과 불자의 상호 이해를 염두에 두고 저술된 불교 이야기다.

    저자는 이미 여러 권의 저서로 우리에게 낯익은 캐나다 리자이나대 오강남 교수다. 오 교수는 평이하면서도 깊은 내용을 담은 서술방식으로 많은 독자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그가 비교종교학적 차원에서 우리말로 쉽게 풀이한 ‘도덕경’(1995)이나 ‘장자’(1999)는 이미 많은 독자에게 동양 고전의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해주었다. 몇 년 전에는 ‘예수는 없다’(2001)는 책으로 국내 종교계에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비교종교학적 이해의 풍요로움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에서도 오강남 교수는 깊이 있는 불교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서술해 독자를 책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한다.



    불교사(史)를 전반적으로 개관하기에 앞서 이웃종교로서 불교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이야기하는데, 저자는 친구에게 저녁식사 초대를 받은 아이의 비유를 들어 전개한다.

    식사에서 영양섭취를 가장 중요시하는 집에서 자란 아이는 가족 간의 화기애애한 대화를 가장 중시하는 친구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이 충격에 흥미를 느낀 아이는 다른 친구들의 집도 찾아가고, 찾아가는 집마다 독특한 배울 거리가 있음을 발견한다.

    이 아이가 친구들의 집을 번갈아 찾아간 것은, 그 친구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 집의 아이를 양자로 들여오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열을 따지거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는 것도 주목적이 아니다. 서로의 강조점을 배움으로써 식사가 풍요로워지는 데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이 바로 저자가 강조하는 바다.

    또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그 아이가 자기 집안의 내력을 살펴보니, 오래 전에는 자신의 집에서도 친구들의 집에서 중시되는 것들이 중시된 적이 있더라는 점이다. 그 아이는 자기 집의 전통을 재확인하고 되살리는 성과를 올린 셈이다.

    어떤 독자는 이런 비유가 신성한 종교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불편해할지도 모르겠으나 다수의 독자에겐 요즘 유행하는 ‘웰빙’ 경향과도 어울려 친근한 비유가 될 것 같다.

    이 책의 추천사에서 일본 나고야 긴조가쿠인 대학의 김승철 교수는 일본의 선(禪)학자 스즈키 다이세쓰가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관계를 ‘양경반조(兩鏡返照)’라고 표현했던 것을 떠올리는데, 딱 어울리는 말이다. 마주 보는 두 거울 사이에 사물을 놓았을 때, 두 거울이 무한히 서로를 반사하면서, 그 사물의 상이 무한하게 전개되듯이, 두 종교의 대화와 상호 이해는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무한히 풍요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오 교수가 마련한 이 두 종교의 대화는 서로 ‘거울을 들어주는 것’과 같아서, 각자 상대방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저자는 이러한 ‘환기식 독법(evocative reading)’으로 서로 상대를 이해해보자고 독자를 초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웃종교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더욱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면서.

    화엄사상과 그리스도의 부활

    이렇게 상대를 서로 무한하게 풍요롭게 해준다는 모티프는 불교, 특히 화엄(華嚴)사상 인드라망의 비유와 맞닿는다.

    인드라망이란 하늘에 있는 인드라 신(神)의 그물망에 달린 보석들이 한 면으로는 각각 자기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또 다른 한 면으로는 서로 무한히 반사하면서 그 정체성이 중첩되는 것을 말한다.

    서양사상에도 정통한 저자는 이러한 화엄사상적 사유가 불교와 직접 대면하기 이전의 서양에서도 여실히 발견된다는 것을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1757~1827)나 존 던(John Dunne·1572~1631)의 시구(詩句)를 예로 들어 명시한다.

    예컨대, ‘모래 한 알에서 세계를 보고, 들꽃 한 송이에서 하늘을 보기’나 ‘아무도 외딴 섬일 수 없는 것. 모두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일부일 뿐’과 같은 시구는 화엄사상과 매우 유사한 느낌을 준다. 이 책의 독자는 불교의 이해에 더하여 동서양 사상사(史)의 진수를 감상할 기회를 아울러 얻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한걸음 나아가 직접적으로 성서의 구절들을 화엄사상으로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예컨대, 신약성경 마태복음에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를 화엄의 원리에 비추어 보면 우리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곧 하느님에게 하는 일과 같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마태복음의 말씀은 화엄적 이해를 통해서 더욱 절실하게 우리에게 환기될 수 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이 ‘이것은 나의 몸’이라고 하면서 떡을 떼어주거나 ‘이것은 나의 피’라고 하면서 포도주를 나누어주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우리가 분리되고 고립된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화엄사상에 비추어 볼 때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상징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나 자신의 죽음이나 부활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적 제안이다.

    선(禪)과 예수의 대화 방식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대해서도 저자는 틱낫한 스님의 말을 인용하면서, 화엄이 가르치는 불이(不二)의 개념에 비추어 볼 때 원수는 더 이상 남으로서의 원수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오늘날의 생태문제나 환경문제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적용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화엄사상임은 물론이다.

    화엄사상을 그리스도교에 적용하는 저자의 혜안도 날카롭지만, 선(禪) 전통과 그리스도교 전통을 비교하는 대목 또한 눈을 떼기 어렵다. 선은 특히 말이나 개념을 넘어서는 경지라고 이야기되기에, 저자가 이 부분에서 어떻게 독자를 매료시킬 수 있을지 자못 궁금했는데 저자는 역시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대부분의 독일 교회가 히틀러 정권에 고개를 숙였음에도 끝까지 저항하다 목숨을 잃음으로써 독일 그리스도인에게 양심의 사표(師表)가 된 본회퍼(Bonheoffer·1906~45)가 체포되기 전 지하신학교에서 제자들을 훈련할 때, 성경을 이성적으로 분석하려 하지 말고 그냥 염두에 두고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일정 기간 차분히 관찰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나 슈바이처 박사가 자기의 윤리사상을 대표할 말 한마디를 찾으려고 고심하던 중, 강을 따라 배를 타고 가다가 강 옆으로 나무가 빽빽이 서 있던 밀림에 한순간 훤히 길이 트이며 마치 무거운 철문이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평생의 소중한 경험

    선불교에서 선수행을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모기가 주둥이를 들이대고 구멍을 뚫으려는 것에 비유하곤 하는데, 슈바이처 또한 그와 같은 경험을 했던 것이 아닐까.

    저자에 따르면 하버드대에서 수십년 동안 예수에 관해 가르쳐온 신학자 하비 콕스도 예수의 훈육방법이 듣는 이들의 고정관념이나 인습적 관행을 뒤흔듦으로써 스스로 문제의 실마리를 찾도록 하는 방식이어서 선승의 공안참구(公案參究)와 흡사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자 비교종교학자로서 저자가 자신의 평생의 소중한 경험을 담아 불교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은 한두 번 읽고 말 책이 아니라, 여러 번 곱씹어 읽어야 할 책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다만 목차만 보아서는 한국불교의 전개에 대해서 소략하게 다루는 것 같아 아쉽게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용을 통독해보면 그런 염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할 것이다. 한국불교를 주제로 하고 있는 곳 외에도 책 곳곳에서 한국불교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더러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 예컨대 현재 한국 조계종의 종조(宗祖) 문제 같은 경우 어느 한쪽의 처지에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여겨질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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