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호

백수가 자유인이 되는 프로젝트

  • 고승철│저널리스트·고려대 강사 koyou33@empal.com│

    입력2009-09-04 10:5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백수가 자유인이 되는 프로젝트
    고전 평론…. 말만 들어도 골치가 지끈지끈 아프지 않은가? ‘고전’이 뭔가. ‘중요하다 하지만 사실은 거의 읽히지 않는 곰팡내 풀풀 나는 책’ 아닌가. ‘평론’은 어떤가. 현학적인 수사(修辭)가 뱀꼬리처럼 길게 이어지는 평론이라는 장르보다 더 따분한 글이 있기는 한가?

    고전평론가 고미숙. 이런 전문직 타이틀을 내세운 분의 글은 어떨까.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의 극치’일 것이라 지레짐작하지 마시라.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을 펼치면 홍명희 작 대하소설 ‘임꺽정’을 새롭게 해석하는 유쾌·상쾌·통쾌한 언어의 대향연을 만끽할 수 있다. 이런 평론이라면 누구나 질펀한 이야기 몇 마당을 읽는 묘미를 느끼겠다.

    먼저 조선시대의 큰 도둑 임꺽정이 주인공인 대하소설 ‘임꺽정’에 대해 살펴보자.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린 벽초 홍명희(1888~1968)가 쓴 역작이다. 신문에 장기간 연재한 작품인데 책으로 묶여 나온 분량이 10권이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 소설을 ‘민족문학의 최고봉’이라 상찬한다.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시대의 풍속사를 잘 그렸기에 민속, 언어 연구에도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벽초가 북한으로 넘어가 부수상까지 지냈기에 이 작품은 오랫동안 금서(禁書)로 낙인찍혔다. 책을 낸 출판사 대표가 구속되기도 했다. 그래도 몰래몰래 읽혔다. 한번 잡으면 놓기 어려운 마력을 지닌 소설이다. 김창현 국문학 박사는 청년 시절 ‘임꺽정’ 읽는 재미에 빠져 끼니를 빵과 두유로 때우며 1박2일 만에 다 읽었다고 한다.

    한국 고전문학을 전공해 학위를 받은 고미숙 박사는 연암 박지원 작 ‘열하일기’의 의미를 오늘날 시각으로 분석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라는 저서를 내 이목을 끈 바 있다. 그는 이 스테디셀러에서 220여 년 전에 쓰인 ‘열하일기’에 통통 튀는 요즘 언어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저자의 놀라운 스토리 텔링 재능에 독자는 넋을 잃는다.



    저자는 ‘임꺽정’이란 긴 이야기를 주제별로 분류하면서 경제·공부·우정·사랑과 성·여성·사상·조직 등 7개 키워드를 뽑았다.

    책 제목에 달린 ‘길 위에서 펼쳐지는’이라는 표현에서 ‘길’은 직업 없이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떠도는 공간을 상징한다. 청년 실업, 비정규직, 정리해고, 조기 정년퇴직 등으로 길 위에서 헤매는 슬픈 영혼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첫째 키워드 ‘경제’를 설명하는 장(章)에서는 ‘임꺽정’의 주요인물 대부분이 백수임을 강조했다. 임꺽정은 직업이 백정이지만 그가 소 잡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임꺽정의 처남 황천왕동이는 장기판에 코를 박았고 떠돌이 소금장수 길막봉이는 장사보다는 술 마시고 유랑하는 게 주업이었다. 저자는 이들을 ‘노는 남자들’이라 명명했다. 이들은 친지 집에 빈대 붙어 살면서 여행길에 나설 때는 남의 집에서 하룻밤 과객으로 묵는다. 그러다 청석골에 인디언 공동체 같은 마을을 만든 이후엔 화적질로 밥벌이를 한다.

    우정의 경제학

    노는 남자들이지만 ‘공부’에 심혈을 기울인다. 글 공부가 아니라 갖가지 재주 수련이다. 임꺽정은 칼쓰기와 말타기, 이봉학이는 활쏘기, 박유복이는 표창, 배돌석이는 돌팔매, 황천왕동이는 달리기, 곽오주는 쇠도리깨질 등의 분야에서 달인 경지에 올랐다. 이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양주팔은 백정, 갖바치(가죽신 장인), 스님 등을 거치면서 끊임없는 정진 끝에 생불(生佛) 경지에 오른다.

    저자는 “공부를 통해 새로운 경계로 진입한다는 건 낡은 권위와 습속으로부터 탈주하는 일인 동시에 생사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행위이기도 하다”면서 “‘평상심이 도(道)’라는 건 이런 의미에서다”라고 말했다.

    청석골 7두령은 임꺽정, 박유복이, 이봉학이, 길막봉이, 황천왕동이, 곽오주, 배돌석이 등이다. 임꺽정, 박유복이, 이봉학이는 어릴 때부터 어울리던 친구 사이다. 이들은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하는 장길산, 홍길동, 일지매 같은 의적이 아니다. 사농공상 신분 시대에 농공상에도 끼지 못하는 천민이지만 기죽지 않고 살아가는 자유인이었고 도둑질은 전업이 아니라 비정규직의 ‘알바’ 성격이었다.

    ‘우정’이란 키워드로 접근해보자. 주인공들은 피보다 진한 우정을 나눈다. ‘싸우면서 정분난다’는 말이 있듯이 이들은 몸으로 부딪치면서 친해진다. 서로 속내를 모두 털어놓는다. 저자는 “우리 시대는 대화의 소중함을 강조하면서도 실상 주고받는 이야기들은 참 빈곤하기 짝이 없다. 친구들끼리 나누는 이야기란 게 주로 두 가지다. 남을 헐뜯는 거 아니면 자기 자랑하는 거. 그나마도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주로 남의 이야기나 나랑 상관없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영화나 인터넷, 개그 프로에서 본 것들이 거의 전부다. 자신에 대한 깊은 이야기는 정신과병원에나 가야 겨우 꺼내놓는다”고 꼬집었다.

    저자는 ‘우정의 경제학’이란 개념을 제안했다. 가난한 친구, 친지를 위해 지갑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명품을 사서 장롱에 묻어둘지언정 일가친척에게 나가는 돈 한두 푼을 아까워하는 세태를 개탄하면서 “경제적으로 서로 소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백수 친구를 위해 밥과 용돈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것. 물론 받는 친구 역시 주는 친구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저자는 이런 우정의 경제학이야말로 청년실업의 훌륭한 해결책이라고 설파한다.

    1970~80년대만 해도 운동권 친구에게 용돈을 쥐어주는 직장인이 적잖았다. 돈을 받는 백수 친구는 민주화 투사라는 자부심에 당당하게 어깨를 펴는 반면 넥타이 차림으로 돈 봉투를 내미는 친구는 현실과 타협했다는 자책감에 고개를 숙였다.

    ‘사랑과 성’에서는 조선 민중의 야생적인 성생활을 파헤쳤다. 저자는 “온갖 잔머리에 매뉴얼까지 동원해서 줄다리기를 하지만 정작 사랑이 시작된 다음엔 뭘 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는 우리 시대의 연애와는 얼마나 다른지. 쩝!” 하면서 몸과 몸이 직접 접촉하는 건강한 사랑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

    원작 ‘임꺽정’에서 입담의 달인 오가라는 인물이 곽오주에게 여성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 한 부분을 옮겨보자.

    “혼인 갓 해서 여편네는 달기가 꿀이지. 그렇지만 차차 살림 재미가 나기 시작하면 여편네가 장아찌 무쪽같이 짭짤해지네. 그 대신 단맛은 가시지. 이 짭짤한 맛이 조금만 쇠면 여편네는 시금털털 개살구루 변하느니. 맛이 시어질 고비부터 가끔 매운맛이 나는데 고추 당초 맵다 하나 여편네 매운맛을 당하겠나. 그러나 이 매운맛이 없어지게 되면 쓰기만 하니.”

    조선 여성들은 위풍당당했다. 곳간 열쇠를 쥐고 집안 살림을 도맡았으므로 ‘CEO 역할’을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를 쫓아내는 소박은 남자만 하는 게 아니었다. 여자가 좀팽이 남자를 팽개치는 것을 ‘외소박’이라 했다. 아들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자 그 호랑이를 잡아 죽여 원수를 갚아달라고 떼를 쓰는 억척 어멈이 ‘임꺽정’에 등장한다.

    저자는 조선 여성 대부분이 남편에게 순종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작품 분석을 통해 밝힌다. 게으름뱅이 사위를 윽박지르고, 복수를 위해 몸을 던지는 맹렬 여성이 수두룩함을 강조한다.

    철학적 비전과 신체적 능력

    ‘임꺽정’에서 주인공은 임꺽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 아니다. 수많은 조연이 주연 이상으로 핵심 역할을 한다. 유·불·도(儒·佛·道)에 통달한 갖바치도 그런 인물이다. 그는 한국 도교사의 큰 인물인 이천년에게서 도학을 배웠고 유학 이념에 바탕을 둔 개혁정치가 조광조와 교유했다. ‘임꺽정’에 등장하는 학자는 퇴계 이황, 남명 조식, 하서 김인후, 화담 서경덕 등이다. ‘임꺽정’이 조선 지성사의 한 부분도 다루었다는 점에서 작가 벽초의 시야가 얼마나 넓은지 가늠할 수 있다.

    저자 고미숙 박사는 사주명리학으로 벽초의 삶을 풀이해 눈길을 끈다. 벽초는 우뚝 솟은 갑목(甲木) 운세인데다 불기운이 그득한 편이다. 인복과 활동범위가 매우 넓다는 뜻이란다. 충북 산골에서 출생했으나 어린 시절부터 중국, 싱가포르, 대만 등지를 돌아다녔기에 큰 역마살이 낀 운명대로 살았다. 41세에 임꺽정 집필을 시작해 10년간 쓰고 그만두었다. 51세, 61세에 대운(大運)이 돌아오는 운세인데 실제로 51세에 벽초의 마음이 문필에서 조직으로 이동했고, 61세엔 우연히 북한에 갔다가 고위직을 맡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결론 부분에서 청년 백수를 위한 케포이필리아(Kepoiphilia)란 개념을 제시한다. ‘공부, 밥, 우정의 향연’을 뜻하는 말로 “백수가 자유인이 되는 프로젝트”라고 설명한다. 백수가 자유인이 되려면 철학적 비전과 신체적 능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백수라는 상황을 긍정하는 철학을 익히며 시간의 노예가 아니라 시간을 부리는 달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확보한 자유 시간을 자신의 재능을 연마하는 데 써야 한단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청년실업 해법은 당사자에게 상상력을 확장시켜 난관을 스스로 헤쳐나가도록 돕는다. 취업을 위해 도서관에 앉아 ‘스펙의 노예’가 된 젊은이들에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워줄 수 있는 내용이다. 저자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진행된 임꺽정 강의에서 ‘박사 백수’로 마음을 앓다 당당한 자유인으로 거듭난 자신의 체험을 전수하는 명강의를 펼쳐 백수 수강생들로부터 열띤 호응을 얻기도 했다.

    이 책을 읽고 입맛이 당기면 벽초의 ‘임꺽정’ 완독에 도전해봄직하다. 표지와 본문 곳곳에 실린 이강훈님의 일러스트 작품은 해학적 재치가 돋보여 눈을 즐겁게 한다.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고미숙 지음/ 사계절/ 340쪽/ 1만2000원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