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최장수, 최고 시사종합지 ‘신동아’가 지령 600호를 맞이했다.
- 신동아는 일제 강점기에 창간되어 파란만장한 격동의 현대사를 기록하면서 시대의 변화를 유도하고, 권력의 탄압에 저항하면서 독자와 함께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왔다. 정치 사회 전반에 대한 감시 기능을 잃지 않고, 독자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온 78년의 역사를 정리했다.
잡지 지령이 100호를 넘겨도 신문 문화면에 뉴스로 취급되던 시대가 있었다. 지령 10호를 넘기기도 어렵던 시절의 일이다. 100호 발행의 기록을 깨는 잡지들은 1969년 말까지 20여 종이 나왔다. 시사 종합잡지 ‘사상계’를 비롯하여 학생잡지 ‘학원’, 여성 교양지 ‘여원’, 문학잡지 ‘현대문학’, 대중오락지 ‘아리랑’ 같은 잡지였다.
1950년대에서 60년대에 걸치는 시기를 대표하던 사상계는 1969년 12월에 지령 200호의 고지를 넘었으나 이듬해 5월 205호를 끝으로 강제폐간 당했다. 17년 동안 최장기의 발행실적을 남긴 종합잡지였지만 권력의 손에 목숨이 끊어졌던 것이다. 월간 ‘세대’(1963.6 창간)는 1971년 11월 통권 100호를 발행하였으나 1979년 1월부터 발행을 중단하여 20년을 넘지 못했다. 우리의 잡지 발행 여건이 매우 어려웠음을 증언하는 아쉬운 사례들이다.
위 잡지 가운데 지금까지 발행되는 잡지는 현대문학이 유일하다. 1955년 1월에 창간된 현대문학은 2004년 12월에 지령 600호를 넘어섰고, 이듬해 1월에 창간 50주년을 기념한 장수 잡지다. 2009년 8월 현재 지령 656호를 발행하고 있지만 종합잡지로서 600호를 발행하는 것은 신동아가 처음이다.
신동아는 일제 강점기에 창간되어 1936년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폐간되었다가 28년의 공백기를 거친 뒤에 다시 살아났으니 현존하는 종합지 가운데 가장 먼저 태어난 잡지이기도 하다. 힘든 장정(長程)을 걸어오며 잡지사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신동아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서 잡지 저널리즘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의미를 짚어본다.
일제의 만주침략 직후 창간
신동아는 1931년 11월에 창간되었다. 일제가 만철선(滿鐵線) 폭파사건을 조작하여 만주사변을 일으킨 날은 창간 직전인 9월18일이었다. 만주사변은 1929년부터 불어닥친 세계의 경제공황을 타개하는 한편으로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었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침략전쟁의 전초전이었다.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독재정권을 수립하는 등 세계는 점차 전쟁의 위협으로 인한 긴장과 불안이 고조되는 상황이었다.
동아일보 사장이자 신동아 발행인이던 송진우는 창간사에서 “조선 민족은 바야흐로 대 각성, 대 단결, 대 활동의 이른 새벽[曉頭]에 섰다”고 말하고 신동아의 사명은 ‘특색 있는 모든 사상가, 경륜가의 의견을 민족대중의 앞에 활발하게 제시하여 비판하고 흡수케 하여 민족대중이 공인하는 가장 유력한 민족적 경륜이 발생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민족이 나아갈 길의 대 경륜을 제시하는 전람회요 토론장이라는 것이었다. 신동아는 개인의 주장이 논조를 좌우하는 소규모 잡지와는 달리 동아일보의 사시를 반영하는 제작방침을 견지했다. 또한 당시의 다른 민간 신문사들의 잡지발행을 자극하여 이른바 ‘신문잡지시대’를 선도하였다.
창간호는 발매 부수가 2만부를 돌파하여 당시로선 파격적인 판매실적을 올려 절판되었고, 제2호는 3판까지 발행하여 1만5000부 내외, 제3호부터는 9000~1만부 선에 고정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발행해오던 잡지들의 발행부수는 많아야 2000~3000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동아일보를 포함한 일간지들의 발행부수가 10만을 넘어본 적이 없었던 사정과 비교한다면 이 같은 잡지 판매 부수는 놀라운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 여세를 몰아 동아일보가 1933년 1월 여성지 ‘신가정(新家政)’을 창간하자 신동아 등 두 잡지의 제작을 위해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하게 되었고, 신동아 창간 2주년이던 1933년 11월 두 잡지를 제작할 잡지부를 신설했다. 일간지가 발행하는 독립된 첫 잡지부였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이광수(李光洙), 편집국장대리 설의식(薛義植)이 있었고, 잡지부에는 주요섭(朱耀燮), 이은상(李殷相), 고형곤(高亨坤), 변영로(卞榮魯)를 비롯한 문인, 언론인, 미술가들이 근무했거나 거쳐갔다.
신동아 독자 투고란을 거쳐 문인이 된 사람 가운데는 이화여전을 졸업한 모윤숙(毛允淑), 이화여전 재학생 노천명(盧天命), 평양 숭실학교 3학년 황순원(黃順元)도 있었다. 그러나 만 4년2개월 통권 59호를 발행한 신동아는 1936년 8월26일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정간 당하여 더 이상 잡지를 발행할 수 없게 되었다. 자매지 신가정도 함께 폐간되었다.
동아일보 사장이자 신동아 발행인이던 송진우의 신동아 창간사.
그러다 폐간 28년 만인 1964년 9월 신동아는 복간되었다. 이 해는 6·3사태를 비롯하여 정치적으로 격렬한 파동이 많았다. 그 전해 12월17일 제 5대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하여 제 3공화국이 출범하였고, 1964년 2월에는 이른바 ‘3분폭리(三粉暴利)’ 사건이 정치문제화되었다. 3월에는 민정당과 삼민회(三民會)가 공동으로 대일(對日) 저자세외교반대 범 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전국유세를 시작했다.
6월에는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데모가 격렬한 가운데 6월3일을 기해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전국의 대학은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7월28일 비상계엄은 해제되었으나 8월2일 심야국회에서 야당인 민정당 의원이 총퇴장한 가운데 언론윤리위원회법을 통과시키자 언론계의 거센 반발로 언론파동이 시작되었다.
5·16 이후 언론과 정권이 정면에서 맞닥뜨린 이 파동은 우여곡절 끝에 9월8일 언론계 대표가 유성에 머물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언론윤리위원회법의 시행보류를 요청하고 박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38일 만에 일단 수습되었다. 그러나 언론탄압의 소지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신동아 초대 주간은 편집국장 천관우(千寬宇)가 겸임했고 월간부장은 권오철(權五哲)이었다. 신동아는 193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언론계에 조용하면서도 중요한 변화를 몰고 왔다. “종합지로서의 중후한 맛, 그러면서도 누구나 쉽사리 가까이 할 수 있는 부드러운 체재”(복간 제2호, 1964년 10월호 편집후기)를 지향한 편집의도가 적중해서 3만부를 찍은 복간호는 이틀 만에 모두 팔렸고, 재판 1만부도 3일 만에 매진되는 성공을 거두었다. 독자들이 보내온 ‘독자카드’를 집계한 결과 가장 재미있게 읽은 기사는 ‘일군(日軍) 탈출기’(신상초-250장), ‘육사 8기생’(강인섭-220장), ‘정치자금’(이웅희·김진현-200장) 순이었다. 3건은 원고지 200장(200자 원고지 기준, 이하 동일) 이상의 긴 글이었고, 필자는 모두 현역 언론인이었다. 강인섭, 이웅희, 김진현은 동아일보 소속이었고, 신상초는 중앙일보 논설위원이었다. 교수들이 쓰는 논문 스타일보다는 저널리스트들의 글에 대한 독자의 호응이 컸던 것이다.
신동아는 이른바 제 2 ‘신문잡지 시대’를 열었다. 유력한 신문사가 월간지와 주간지 발간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신동아 복간과 같은 때인 1964년 9월27일 한국일보는 ‘주간한국’을 창간했는데 동아일보의 월간지와 한국일보의 주간지 창간은 다른 일간신문의 잡지 발행을 자극했고 1960년대 중반 이후 신문사가 발행하는 잡지가 잡지계를 석권하게 되었다.
중앙일보와 경향신문이 이 무렵에 다투어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1980년 4월 조선일보사가 ‘월간조선’을 창간한 이후에는 신동아·월간조선이 쌍벽을 이루는 시대가 되었다. 여기에 경향신문이 발행하는 정경문화(1976. 6 창간, 1986.11 월간경향으로 개제, 1989. 2월부터 발행 중단)까지 가세하여 비슷한 여건에서 발행하는 종합잡지가 3파전을 벌였다.
1987년 9월25일 민주당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왼쪽에서 두 번째)이 전두환 정권의 신동아 탄압사태에 맞서 농성 중이던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들을 찾아 격려하고 있다.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출판국 기자들을 격려했다(오른쪽 사진에서 맨 왼쪽).
1970년대 이전의 종합잡지는 외부필자의 청탁원고가 주류를 이루는 편집 경향이었다. 잡지사 자체에서 취재한 기사는 별로 없었다. 종합지와 교양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정치상황을 다루더라도 특종 발굴 형식이 아니라 분석적인 방법을 택하였고, 필진은 대학교수가 많았다.
그러나 신동아는 심층보도 기사와 논픽션에 비중을 두고 현실문제를 분석적으로 파고드는 편집으로 잡지 저널리즘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필진도 한 사람이 쓴 기사도 있지만 2인 공동집필, 또는 정치·경제·체육부 등 부서 명의로 집필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동집필을 통한 심층취재로 신문이 다루지 못하는 영역을 깊이 있게 파헤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시도였다.
분량도 원고지 200장이 넘는 기사들을 과감하게 게재하여 종전의 잡지 스타일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긴 글을 처리할 수 있는 충분한 지면을 활용하되 기사를 지루하지 않게 엮어낼 수 있는 필자를 확보할 수 있었고, 높은 수준의 글을 읽을 수 있는 독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회적 여건을 잘 활용한 것이다. 신동아의 이러한 보도와 해설기능의 확대로 인해 일어난 권력과의 마찰이 1968년의 신동아 필화사건이다.
1968년 신동아 필화사건은 전체 언론계에 큰 충격과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동아일보의 발행인이 바뀌고 중진 언론인들이 신문사를 떠나야 했던 후유증으로 권력에 대한 언론의 균형이 크게 훼손되었다. 문제된 기사는 김진배(金珍培), 박창래(朴昌來) 두 기자가 12월호에 공동 집필한 ‘차관(借款)’으로 원고지 250장에 달하는 기사였다. 특혜와 폭리가 말썽 되어 국민의 지탄으로 특별 국정감사까지 받게 된 차관업체들의 실태와 정부의 외자도입정책의 공과를 분석한 심층보도였다. 일부 업자만 치부할 수 있는 특혜를 베풀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혜택 받은 업자로부터는 그 시혜의 반대급부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을 공급받고 있다는 의혹을 파헤친 내용이었다.
이 기사로 필자 김진배와 박창래는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취재와 집필 경위를 조사받았고 신동아 부장 손세일(孫世一), 기자 심재호(沈在昊), 이정윤(李正允) 등도 조사를 받았다. 관련자 5명 외에도 중앙정보부는 동아일보의 논설위원 겸 신동아 주간 홍승면(洪承勉)과 정치부 차장 유혁인(柳赫仁)도 출두를 요구하거나 연행하여 조사하였다.
1987년 신동아 탄압사태의 종결을 알리는 동아일보 9월28일자 기사.
언론계와 야당은 크게 반발했으나 정보부는 수사를 확대하여 동아일보 발행인 김상만과 주필 천관우도 연행하면서 더욱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하는 수 없이 동아일보는 12월11일자로 관련간부의 전면적인 인사개편을 단행했다. 주필 천관우를 비롯하여 홍승면, 손세일(신동아 부장) 등 3명의 간부를 해임했다. 천관우는 동아일보와 소년동아 신동아 여성동아의 편집인직을 모두 사임하였다. 이어 18일에는 발행인 김상만이 발행인 지위를 고재욱에게 넘기고 부사장만 맡게 되었다. 동아일보 최고간부진의 퇴진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어 홍승면과 손세일은 인사가 있기 전, 구속 3일 만인 12월9일 석방되었다.
1974년 말에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된 권력의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탄압은 신동아의 광고 수주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신동아는 굴하지 않고 권력의 탄압을 심층적으로 다루는 글들을 실어서 독자와 함께 싸우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다. 광고탄압이 끝나지 않았던 1975년 5월호에는 김대중, 김영삼, 양일동 세 정치인의 ‘민주회복·야당통합의 길’이라는 좌담회 기사를 실어 신동아를 지원하는 동시에 격려광고를 게재해 잡지의 권위를 드높였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시민, 교수, 필자들이 격려광고를 보내왔다.
1984년 9월호는 ‘신동아’ 복간 20주년과 통권 지령 300호가 겹치는 달이었다. 이를 위해 편집진은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이르는 격변의 시대를 걸어온 신동아의 발자취를 되새기면서 ‘대토론 1988년’을 마련했다.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등 4개 분과의 전문가들이 모여 여러 문제를 토론했다. 신동아가 미래 지향적인 자세로 국가의 진로를 모색하는 편집경향을 지녔던 상징적인 사례였다. 주제논문 4편은 9월호에 실렸고, 힐튼호텔에서 열렸던 공개토론의 내용은 10월호에 싣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당국의 제재로 실리지 못하고 말았다.
잡지 저널리즘의 위력 과시
1980년대는 월간지의 독자가 소수의 지식층에서 다수 대중으로 확산된 시기였다. 고도성장의 물결을 타고 잡지구독이 부담스럽지 않은 소득계층이 형성되었고, 교육의 확산으로 고학력자가 늘어났다는 원인도 있었다. 정치적 파장이 컸던 큰 사건의 숨겨진 역사적 사실을 잡지매체가 파헤쳐서 국민의 궁금증을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에 독자가 늘어난 측면도 있었다. 긴 글을 쓸 능력을 지닌 새로운 필자들을 동원했던 것도 잡지 저널리즘의 저변확산을 도와준 큰 요인이었다. 이리하여 월간지는 폭발적인 부수의 증가를 기록했고, 신문과는 다른 독특한 잡지 저널리즘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신군부의 등장과 제 5공화국 출범 이후 1982년 초반부터 신동아를 비롯한 잡지들은 이전까지는 금기시되었던 제 5공화국 이전의 정치비화들을 발굴하면서 판매 부수가 급격히 신장되었다. 1983년 3월호 신동아에 실린 ‘미국이 본 5·16군사정권’은 5·16 당시의 서울발 ‘뉴욕타임스’ 기사를 줄기로 하고 ‘타임’과 ‘뉴스위크’의 당시 보도 논평을 중간 중간에 삽입하여 450장 분량으로 정리한 기사였다. 같은 달에 월간조선은 조선일보 연재를 위해 준비했던 기사를 ‘도큐멘터리 5·16군사혁명’이라는 제목으로 500장을 게재하여 두 잡지의 경쟁은 독자의 관심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4월호에는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던 날’(500장)을 신동아 편집실의 특별취재로 게재하면서 장영자 사건을 특집으로 다루어 ‘장 여인 광풍의 모든 것’을 실었다.
5월호 ‘역사는 5월에 바뀐다’는 장면정권의 몰락과 5·16을 총 700장 분량의 대형특집으로 내보냈다. 500장 또는 700장 기사는 일간신문이 소화하기 어려운 분량이지만 잡지는 한 호에 이를 모두 실을 수 있었기 때문에 독자의 궁금증을 단번에 해소할 수 있었다.
5·16 이후의 인물과 정치적인 대사건은 몇 차례에 걸쳐서 연재되는 경우도 있었다. ‘박정희 장군과 이종찬 장군’(강성재, 1985년 1월부터 4회 연재), ‘철저취재 김재규 연구’(1985.6~1985.7 김대곤), ‘유신쿠데타의 막후’(1985.10~1986.1 이경재) 등이 신동아가 연재한 대표적인 비화물이었다. 필진도 동아일보와 신동아 기자에 국한하지 않고 다른 신문에 재직 중인 언론인과 프리랜서 언론인을 고루 망라했다.
1984년 7월호부터 신동아의 부수는 처음으로 10만부를 돌파했다.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맡았던 장도영(張都暎)이 ‘나는 박정희를 신임했다’는 회고록을 연재하면서 잡지사상 드문 기록을 세운 것이다. 이어서 10월호부터 1985년 1월호까지는 제2공화국 장면정부의 외무부 장관을 지낸 정일형(鄭一亨)의 미공개 유고가 연재되었다. 이러한 내용들로 1985년 3월에 20만부, 7월에 30만부를 뛰어넘는 급격한 신장세를 보였다. 30만부 돌파는 우리 잡지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신동아의 발행부수는 이후락(李厚洛) 증언을 실은 1987년 10월호가 40만부를 돌파하였을 때에 최고를 기록하였다.
전성기 발행부수 40만 돌파
1980년대 초반에 신동아는 하나의 테마로 400장 또는 500장짜리 긴 글을 흥미 있게 엮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필진을 발굴하여 등장시켰다.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잡지 저널리스트들을 탄생시킨 것이다. 학계 인사들 가운데는 사회비평 내용을 기고하거나 정치상황에 관한 논평을 실은 사람도 있었다.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였던 노재봉(盧在鳳)은 정치문제에 관한 좌담, 정담, 대담 등에 자주 초청되어 지면에 무게를 더했다. 그는 후에 국무총리가 된 인물이다. 유신치하에서 게재가 금지된 필자였던 김동길(金東吉)도 자주 등장하는 필자였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는 점차로 대중적 흥미 위주의 기사로 변질되었다는 비판도 일기 시작했다. 특히 비화, 증언, 회고 따위의 기사로 신뢰도가 떨어지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언론자유 신장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던 사건이 6·29선언 직후에 일어난 ‘이후락 증언’기사를 둘러싸고 벌어진 ‘신동아·월간조선사태’였다. 1987년 10월호에 실린 ‘이후락 증언-최초로 밝힌 김대중 납치 내막’을 싣지 못하도록 당국이 제작을 방해한 사건이었다. 신동아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요구가 분출되기 시작했던 1984년에서 1987년 9월까지 당국으로부터 편집진과 기자가 연행되어 조사를 받거나 기사의 삭제나 수정과 같은 탄압을 20건이나 받았다. 구체적으로는 연행조사 4건, 전면 삭제 7건, 부분삭제를 포함한 수정이 9건이었다.
그러나 신동아 사건은 이전까지 관행이 되어왔던 정보부의 언론탄압 또는 협조요청을 물리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권력과 언론 간의 공방이 언론의 자율제작으로 귀결됐던 것이다. 1968년의 신동아 필화는 정치권력이 언론탄압에 성공을 거두었던 사건으로 볼 수 있었지만 20년 뒤 6·29선언 이후에 일어난 신동아 사태는 언론의 자유를 신장하는 기폭제로 작용했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신동아 이종각(李鍾珏) 기자가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이후락을 만나 취재한 기사의 요지는 ① 박정희 대통령은 이 사건을 사전에 전혀 몰랐으며 모두 자신이 했다 ② 김대중을 납치한 배가 일본을 출발한 후 대통령에게 알리니까 대단히 노했다 ③ 처음부터 김씨를 한국에 연행할 계획이었지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월간조선 기자 오효진도 같은 내용을 100장 분량으로 작성하여 두 잡지가 10월호에 게재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후락 증언과 신동아 사태
정보부는 제작마감을 며칠 앞둔 9월12일부터 두 잡지의 기사를 삭제하도록 요청하기 시작했다. 이날 이후 신동아 제작팀은 정부 당국과 팽팽한 대립을 벌이면서 기사삭제를 거부하다가 9월21일부터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 80여 명은 ‘신동아 제작탄압을 즉각 중지하라’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기자들은 농성과정에서 1984년 이래 당국에 의해 제작이 탄압 받은 사례를 밝혔다.
대표적인 사건은 앞에서 언급한 ‘대토론 1988년’의 토론 내용을 비롯하여 1986년 5월17일 안기부는 6월호 ‘개헌 대토론’ 특집기사 가운데 ‘김대중씨가 말하는 개헌 방향’의 삭제를 요구하였으나 신동아가 거부하자 수사요원 4명을 인쇄처인 동아인쇄공업㈜에 파견하여 인쇄공정을 중단시키고 기사를 삭제토록 했다.
같은 해 7월23일 오전 11시 반 출판국장 남시욱과 신동아 부장 이정윤이 ‘박정권의 용공 좌경조작 시말’(이상우) 기사 관계로 안기부에 연행된 사건도 있었다. 1987년 1월호에 실렸던 김한조의 코리아게이트 증언 ‘나는 박대통령의 대미 밀사였다’(이경재)를 삭제하라는 안기부의 압력에 따라 기사 28면을 삭제하고 표지와 목차를 지우고 다시 작업하여 발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까지 있었다.
이후락 증언에 대해 정부 측은 처음에는 국가기밀누설, 외교상의 문제 등 국익침해의 개연성이 높다는 이유로 게재금지를 요청했지만 신동아가 이에 응하지 않자 인쇄소를 점거하여 제작을 물리력으로 방해했다. 정부의 압력이 노골화된 9월23일부터는 동아일보사의 모든 기자와 간부진이 철야농성에 돌입하고 공권력의 횡포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면서 언론탄압의 철회를 요구했다.
신동아 사태 해외서도 집중 보도
신동아 사태가 동아일보를 통해 알려지자 AP, CBS, 아사히신문 등 외국 언론이 이 사실을 집중보도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사히는 9월22일자 석간 3면 톱으로 신동아와 월간조선이 안기부의 방해로 발행이 지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동아와 월간조선에 대한 탄압은 정치문제로 비화했다. 민추협 공동의장 김대중과 김영삼은 이 사태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했고 9월28일에 열린 국회 문교공보위원회는 문화공보부 장관 이웅희를 불러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결국 정부는 두 잡지의 기사 게재는 자율에 맡긴다는 방침을 밝히고 물러나 사태는 신동아와 월간조선의 승리로 끝이 났다. 신동아는 발행일자가 1주일 정도 늦은 후에 발행되었다. 동아일보는 9월28일자에 이후락의 증언 요지를 한 페이지 전면을 할애하여 요약 보도했다. 정부의 압력을 물리친 다음 달인 1987년 10월호 편집후기는 “지난달 본지는 앞으로 우리나라 언론사를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하나의 ‘자료’를 남겼다.”고 썼다.
“독자들의 열렬한 성원 속에 정부 측의 일단 후퇴로 끝을 맺은 이 ‘사태’는 언론의 권력에 대한 굴복 거부라는 것 외에도 국가이익과 국민의 알 권리라는 극히 민감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신동아는 이때의 용기 있는 투쟁으로 관훈클럽이 수여하는 관훈언론상을 수상하였고 9월28일에 열린 동아일보사 기자들의 신동아 사태 결산총회를 계기로 동아일보사의 노조결성 준비작업이 본격화하였다. 그로부터 50일 후인 11월18일 저녁 한국일보사에 이어 언론사에서는 두 번째로 노조를 결성하였는데 동아일보의 노조결성이 있고 나서 중앙일보(12. 1). MBC(12.9) 등으로 언론노조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가로쓰기와 편집의 변화
1980년대 후반부터 신동아의 외형적인 체재와 편집내용에 변화가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1988년 1월부터 단행한 가로쓰기 편집이었다. 창간 이래 고수해오던 세로쓰기 체제를 전면 가로쓰기로 바꾼 것이다. 동아일보는 10년 뒤인 1998년 1월1일부터 가로쓰기로 바꾸었다. 출판계가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 편집으로 전환한 시기는 대개 197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일간지는 아직 가로쓰기와 한글전용을 과감하게 도입할 수 없었으나 잡지와 일반 출판물을 비롯한 광고 분야는 민중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한글사용이 늘어나고 있었다. 한글전용을 가장 먼저, 그리고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잡지는 ‘뿌리깊은 나무’였다. 1973년 3월에 창간된 이 잡지는 한자로 된 단어를 한글로 고쳐 쓰면서 쉬운 우리말을 사용하여 독자의 호응을 얻었다. ‘뿌리깊은 나무’에 이어 ‘마당’과 같은 잡지가 한글을 전용하면서 1970년대 이후 대부분의 잡지와 단행본들이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로 이행했다. 지령이 오래된 문예지들도 1983년 무렵부터 체제를 가로쓰기로 바꾸었다. 현대문학(1982년 12월, 지령 336호), 문학사상(1983년 1월, 지령 123호), 한국문학(1983년 6월, 지령 116호)의 순으로 거의 같은 시기에 가로쓰기를 채택했다. 가로쓰기 편집은 대세였다.
신동아는 가로쓰기로 체재를 바꾸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행되는 인쇄물은 일간신문과 극히 일부의 출판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로쓰기를 채택하고 있다. 가로쓰기 책으로 성장한 세대가 독서층의 주류를 이뤄가는 현실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지만, 인체생리학적으로나 전세계적인 독서관습으로 보아 가로쓰기가 더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탓이다. 독자들로서는 당분간 눈에 익지 않겠지만, 지면혁신을 통한 참신한 편집과 알찬 내용을 약속드림으로써 변화에서 오는 낯설음을 보상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1996년 1월부터는 판권에 편집진의 이름을 기재하기 시작한 것도 하나의 변화였다. 이전까지는 발행인, 편집인, 인쇄인의 이름만 밝혀왔는데 이때부터는 발행, 편집, 인쇄인 외에 편집의 최고 책임자인 출판국장을 필두로 신동아 편집장에서 기자, 출판사진부, 출판미술부, 출판영업국을 포함한 모든 직원의 이름을 기재했다. 업무에 따르는 책임과 자부심을 지닐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볼 수 있고, 잡지사와 출판사의 추세를 반영한 조치이기도 했다. 창간 65주년에 실시된 변화였다.
원고 한 건당 분량은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1980년대에는 원고지 200~300장 또는 그 이상의 긴 글을 과감하게 실으면서 이처럼 무게 있는 글이 실려 있다고 자랑스럽게 선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긴 글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풍조가 자리 잡으면서 잡지 기사도 짧은 쪽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긴 기사를 읽지 않는 독자들이 많아질 뿐 아니라 자료 성격을 지닌 긴 글은 데이터베이스나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는 시대로 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확히 시기를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2000년대에는 100장을 넘는 기사도 발견하기 어려워졌다. 길어야 70장 정도이고, 1980년대에 500장 이상 긴 글을 과감하게 싣던 편집은 보기 어려운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잡지의 부피가 줄지는 않았다. 오히려 부록을 포함하면 늘어나는 경향을 보여왔다. 2007년 11월호는 창간 75주년 기념으로 644쪽에 부록(‘내 손 안의 영어를 위한 명문장 명표현’)이 238쪽이었으므로 합하면 882쪽 분량에 달하는 부피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호는 644쪽과 특별부록(‘한국의 핵 주권’) 240쪽을 합하면 884쪽이었고, 2008년 12월호는 본지 640쪽과 부록(‘CEO 꿈꾸는 당신이 읽어야 할 경영서 49’) 305쪽을 합하면 945쪽이 되었다. 같은 해 창간 77주년 기념 특대호는 660쪽에 부록(‘대한민국의 미래 글로벌 경기(京畿)’) 200쪽을 더해서 860쪽이 되었다.
자료 가치 큰 별책부록
신동아는 복간 이래 매년 1월호는 부록을 발행하는 관례를 지켜왔다. 별책으로 발행한 부록은 무게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는 방침을 고수하여 읽고 버리는 책이 아니라 보관하면서 참고하는 자료라는 정평이 있었다. 근세사와 관련되는 자료를 비롯해서, 철학·사상·예술 등의 문제를 독자가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왔다.
1965년에 ‘광복 20년 기념 연표·주요 문헌집’(149쪽)을 시작으로 1966년에는 ‘근대한국 명논설집, 100년간의 한국을 만든 33편’(175쪽)으로 이어지는 부록을 발행하였고, 이를 보완하여 단행본으로 만들어 판매해도 손색이 없는 것들이었다. 다음 부록들은 단행본으로 만들어 시중에 판매한 책이었다.
1970년 한국근대인물 100인선
1972년 한국현대 명논설집(1919~1944)
1974년 일정하 동아일보 압수 사설집
1975년 세계의 인권선언
1977년 일정하의 금서 33권
1978년 현대세계의 예술가 129인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는 신년호에 부록을 싣는 전통을 바꾸어 창간 기념호, 또는 12월호에 부록을 발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용도 역사적인 문헌 중심에서 실용적인 것으로 변화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신동아는 잡지계를 대표하는 언론매체의 지위를 누려왔다. 종합잡지의 수명 78년에 지령 600호 발행은 초유의 일이며, 이와 같이 오랜 기간에 걸쳐서 영향력을 유지하는 잡지는 신동아 외에는 없었다. 이는 신동아 편집진의 공정하고 용기 있는 제작 태도와 동아일보의 후광에도 힘입은 바 크다. 신동아는 역사적 사건의 사료로 활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국회의 청문회나 국정조사 등에 증거물로 제시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최근 2년 사이에 국회 대정부 질의 때에 신동아를 인용한 사례를 대강 찾아보아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다.
2007년
4월2일(임종인 의원, 미군 주둔비 분담금 문제),
8월31일(최병국 의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에 신동아 인터뷰 인용 질문)
10월20일(이주영 의원, 대검찰청에 대한 2008년도 국정감사에서 신동아 인용 질문)
10월31일(원혜영 의원, 대통령실에 대한 2008년도 국정감사에서 신동아 10월호 인용 질문, 같은 날 이재오 의원은 신동아 2008년 3월호, 2005년 9월호 인용 질문)
11월7일(유기준 의원, 민주당 한화갑 대표의 선거비용을 초과 지출했다는 인터뷰 인용 질문)
2008년
2월9일(서종표 의원, 신동아 3월호 기사 인용 공군 이한호 참모총장에게 질문)
2월19일(최규성 의원, 농림부장관 후보자 청문회에 신동아 김형오 의장의 인터뷰 인용 질문)
이 밖에 모두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인용이 있었을 것이다. 신동아가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자료이며 국정 수행에도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영향력은 신동아에 기고한 필진과 독자의 성원에 힘입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신동아 80년은 독자와 함께 기뻐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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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는 일제 강점기(1931~1936)에 발행된 시기를 제 1기로 본다면 제 2기는 복간에서 유신치하(1964~1979)로 잡을 수 있다. 이 시기는 국가의 진로를 제시하는 전진적 기능이 두드러져 보이고, 제 3기(1980~1987)에는 역사적 사실을 발굴하고 보도하는 시기였다. 마지막으로 제 4기에 해당하는 1987년의 6·29 선언 이후에는 정치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파헤치고 발굴하여 정치, 사회 전반의 문제를 감시하는 기능이 두드러진 시기였다고 규정할 수 있겠다. 신동아가 무궁한 발전으로 우리나라 잡지 문화 향상에 기여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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