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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신동아 600호

‘민족의 지성’ 신동아 600호의 언론사적 의미

역사적 진실 밝히는 보도와 국가의 진로 제시한 78년

  • 정진석│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사 presskr@empal.com│

‘민족의 지성’ 신동아 600호의 언론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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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지성’ 신동아 600호의 언론사적 의미

동아일보 사장이자 신동아 발행인이던 송진우의 신동아 창간사.

새로운 잡지 저널리즘 창조

그러다 폐간 28년 만인 1964년 9월 신동아는 복간되었다. 이 해는 6·3사태를 비롯하여 정치적으로 격렬한 파동이 많았다. 그 전해 12월17일 제 5대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하여 제 3공화국이 출범하였고, 1964년 2월에는 이른바 ‘3분폭리(三粉暴利)’ 사건이 정치문제화되었다. 3월에는 민정당과 삼민회(三民會)가 공동으로 대일(對日) 저자세외교반대 범 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전국유세를 시작했다.

6월에는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데모가 격렬한 가운데 6월3일을 기해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전국의 대학은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7월28일 비상계엄은 해제되었으나 8월2일 심야국회에서 야당인 민정당 의원이 총퇴장한 가운데 언론윤리위원회법을 통과시키자 언론계의 거센 반발로 언론파동이 시작되었다.

5·16 이후 언론과 정권이 정면에서 맞닥뜨린 이 파동은 우여곡절 끝에 9월8일 언론계 대표가 유성에 머물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언론윤리위원회법의 시행보류를 요청하고 박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38일 만에 일단 수습되었다. 그러나 언론탄압의 소지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신동아 초대 주간은 편집국장 천관우(千寬宇)가 겸임했고 월간부장은 권오철(權五哲)이었다. 신동아는 193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언론계에 조용하면서도 중요한 변화를 몰고 왔다. “종합지로서의 중후한 맛, 그러면서도 누구나 쉽사리 가까이 할 수 있는 부드러운 체재”(복간 제2호, 1964년 10월호 편집후기)를 지향한 편집의도가 적중해서 3만부를 찍은 복간호는 이틀 만에 모두 팔렸고, 재판 1만부도 3일 만에 매진되는 성공을 거두었다. 독자들이 보내온 ‘독자카드’를 집계한 결과 가장 재미있게 읽은 기사는 ‘일군(日軍) 탈출기’(신상초-250장), ‘육사 8기생’(강인섭-220장), ‘정치자금’(이웅희·김진현-200장) 순이었다. 3건은 원고지 200장(200자 원고지 기준, 이하 동일) 이상의 긴 글이었고, 필자는 모두 현역 언론인이었다. 강인섭, 이웅희, 김진현은 동아일보 소속이었고, 신상초는 중앙일보 논설위원이었다. 교수들이 쓰는 논문 스타일보다는 저널리스트들의 글에 대한 독자의 호응이 컸던 것이다.



신동아는 이른바 제 2 ‘신문잡지 시대’를 열었다. 유력한 신문사가 월간지와 주간지 발간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신동아 복간과 같은 때인 1964년 9월27일 한국일보는 ‘주간한국’을 창간했는데 동아일보의 월간지와 한국일보의 주간지 창간은 다른 일간신문의 잡지 발행을 자극했고 1960년대 중반 이후 신문사가 발행하는 잡지가 잡지계를 석권하게 되었다.

중앙일보와 경향신문이 이 무렵에 다투어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1980년 4월 조선일보사가 ‘월간조선’을 창간한 이후에는 신동아·월간조선이 쌍벽을 이루는 시대가 되었다. 여기에 경향신문이 발행하는 정경문화(1976. 6 창간, 1986.11 월간경향으로 개제, 1989. 2월부터 발행 중단)까지 가세하여 비슷한 여건에서 발행하는 종합잡지가 3파전을 벌였다.

‘민족의 지성’ 신동아 600호의 언론사적 의미

1987년 9월25일 민주당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왼쪽에서 두 번째)이 전두환 정권의 신동아 탄압사태에 맞서 농성 중이던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들을 찾아 격려하고 있다.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출판국 기자들을 격려했다(오른쪽 사진에서 맨 왼쪽).

‘차관(借款)’ 기사 필화사건

1970년대 이전의 종합잡지는 외부필자의 청탁원고가 주류를 이루는 편집 경향이었다. 잡지사 자체에서 취재한 기사는 별로 없었다. 종합지와 교양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정치상황을 다루더라도 특종 발굴 형식이 아니라 분석적인 방법을 택하였고, 필진은 대학교수가 많았다.

그러나 신동아는 심층보도 기사와 논픽션에 비중을 두고 현실문제를 분석적으로 파고드는 편집으로 잡지 저널리즘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필진도 한 사람이 쓴 기사도 있지만 2인 공동집필, 또는 정치·경제·체육부 등 부서 명의로 집필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동집필을 통한 심층취재로 신문이 다루지 못하는 영역을 깊이 있게 파헤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시도였다.

분량도 원고지 200장이 넘는 기사들을 과감하게 게재하여 종전의 잡지 스타일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긴 글을 처리할 수 있는 충분한 지면을 활용하되 기사를 지루하지 않게 엮어낼 수 있는 필자를 확보할 수 있었고, 높은 수준의 글을 읽을 수 있는 독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회적 여건을 잘 활용한 것이다. 신동아의 이러한 보도와 해설기능의 확대로 인해 일어난 권력과의 마찰이 1968년의 신동아 필화사건이다.

1968년 신동아 필화사건은 전체 언론계에 큰 충격과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동아일보의 발행인이 바뀌고 중진 언론인들이 신문사를 떠나야 했던 후유증으로 권력에 대한 언론의 균형이 크게 훼손되었다. 문제된 기사는 김진배(金珍培), 박창래(朴昌來) 두 기자가 12월호에 공동 집필한 ‘차관(借款)’으로 원고지 250장에 달하는 기사였다. 특혜와 폭리가 말썽 되어 국민의 지탄으로 특별 국정감사까지 받게 된 차관업체들의 실태와 정부의 외자도입정책의 공과를 분석한 심층보도였다. 일부 업자만 치부할 수 있는 특혜를 베풀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혜택 받은 업자로부터는 그 시혜의 반대급부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을 공급받고 있다는 의혹을 파헤친 내용이었다.

이 기사로 필자 김진배와 박창래는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취재와 집필 경위를 조사받았고 신동아 부장 손세일(孫世一), 기자 심재호(沈在昊), 이정윤(李正允) 등도 조사를 받았다. 관련자 5명 외에도 중앙정보부는 동아일보의 논설위원 겸 신동아 주간 홍승면(洪承勉)과 정치부 차장 유혁인(柳赫仁)도 출두를 요구하거나 연행하여 조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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