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호

대한민국 수퍼맘과 그리스 여신 데메테르

최첨단의 모성과 신화 속의 모성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입력2009-09-08 17: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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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 수영하러 가도 되요?”“그래, 귀여운 딸아.옷은 꼭 나무에 걸려무나. 하지만 물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거라.” - ‘엄마 거위 노래’ 중에서
    대한민국 수퍼맘과 그리스 여신 데메테르

    딸 페르세포네를 지하세계에 빼앗긴 여신 데메테르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엘레우시스의 왕궁에 들어가 보모 노릇을 한다.

    2009년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제패한 두 명의 엄마가 있다. 일일시청률 1위를 고수하며 ‘아침드라마의 블록버스터’라 불린 ‘하얀 거짓말’의 신정옥 회장(김해숙 분),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의 ‘도준 엄마’ 김혜자.

    신정옥은 굴지의 백화점 회장직을 맡고 있을 정도로 대단한 수퍼맘이다. ‘마더’의 ‘엄마’는 단 한번도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그저 ‘도준 엄마’로 불린다. 그녀는 찢어지게 가난하고, 울타리가 되어줄 남편도 없지만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자신의 마지막 양심까지 희생한다. 신 회장과 도준 엄마는 공교롭게도 ‘최상층의 엄마’와 ‘최하층의 엄마’를 대변하는 듯한 캐릭터로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들이 전혀 다른 계급적 기반을 갖고 있음에도, 서로 각기 다른 세상의 극단에 존재하면서도 소름끼치도록 똑같은 모성의 패턴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신 회장은 발달장애와 자폐 증상을 보이는 아들이 절대로 ‘장애인’ 취급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들을 바깥세상과 철저히 격리시킨다. 아픈 아들이 간호사 은영을 사랑하자, 그 여인(신은경)을 ‘아들이 원하는 장난감’으로 인식한다. 신 회장에게 은영은 아들의 보필을 위해 제조된 인조인간과 다를 바 없다. 신 회장의 모토는 “내 아들,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줄 거야”다. ‘마더’의 ‘도준 엄마’는 형편이 어려워 도준(원빈)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줄 순 없지만, 남보다 ‘조금 모자란’ 아들이 행여 다칠까, 사고 칠까, 핍박당할까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신 회장과 도준 엄마의 핵심적인 공통점은 인간으로서는 철저히 실패하고 단지 모성으로만 성공하는 여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으로서 실패했기에 결국 모성의 정당성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자기 아들을 제외한 모든 인간에게는 ‘부덕한 인간’이 되고 단지 자기 아들에게만 ‘최고의 엄마’가 되는 이 어머니들 말이다. ‘사회적으로 부도덕하고 가정에서는 수퍼맘’인 어머니들의 서사가 범람하고 있다. 그녀들의 모성은 단지 ‘집착’을 넘어선 수준이며, 더 이상 ‘광기’와 구분되지 않는다.

    세상 끝의 엄마들



    이제 더 이상 ‘아버지=가부장’이라는 도식이 성립하지 않는 세상에서, 엄마들은 엄마의 역할뿐 아니라 아버지의 역할까지 도맡고 있다. ‘신(新)모계사회’라고까지 불리는 현대사회의 새로운 가족 지형은 엄마에게 자식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하는 문화의 패턴을 낳고 있다. 게다가 점점 허약해지는 ‘사회적 안전망’은 ‘엄마에게 모든 것을’ 맡기려는 사회적 분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이는 단지 ‘부성의 결핍’에서 도래하는 문제가 아니다.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유능해도 ‘아이들의 디테일’에 대해서는 마치 유능한 연예인 매니저처럼 아내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풍토가 확산되는 중인 것이다. ‘돈은 내가 벌어줄 테니, 어떻게든 내 아이들을 의대나 법대에 보내달라’는 식의, 부성과 모성의 확실한 분업 시스템이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도 보편화되어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0교시부터 야간자율학습까지, 이제는 ‘학파라치’의 눈치까지 보면서, 끝없이 사교육시장의 빈틈없는 스케줄에 10대 시절을 헌납해야 한다.

    10대들뿐만이 아니다. 대학시절에도 아들딸의 학점과 강의 스케줄까지 책임지는 ‘헬리콥터맘’의 활약은 눈부시다. 다 큰 아들딸의 주변을 헬리콥터처럼 빙빙 선회하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휴대전화’라는 엄마용 리모컨으로 감시하는 엄마들. 우리 아들의 학점이 왜 B-밖에 안 되느냐며 교수에게 항의하는 엄마들, 아들딸의 ‘스펙’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대학생이 되어서도 각종 취업용 사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엄마들은 다 자란 아이들을 끊임없이 ‘캥거루족’으로 길들여간다.

    대중문화에서든 일상생활에서든 ‘수퍼맘’은 바야흐로 ‘모성’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아가는 듯하다. 모든 면에서 아이들을 완벽하게 ‘케어(care)’하는 수퍼맘의 이미지는 조금 더 극적으로 진화해 ‘알파맘’이라는 신조어도 만들어냈다. 알파맘이란 아이가 배 속에서 자라날 때부터 이미 ‘아이를 위한 맞춤 교육’을 실시하는 엄마를 지칭한다. 모든 면에서 아이의 미래를 철저히 계산하고 예측하는 ‘기업형 엄마’ 알파맘은 아이가 채 걸음마도 떼기 전에 아기를 위한 향후의 모든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알파맘은 단지 ‘학원 가라’‘공부해라’라고 강요하는 엄마가 아니라 아이의 수업내용을 요점정리해줄 뿐 아니라 아이와 ‘함께’ 공부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홈 스쿨링’까지 겸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알파맘은 아이의 교육에 ‘CEO 마인드’를 도입해 가정교육도 기업경영처럼 극단적인 효율성을 추구하는 형태다. 그저 최선을 다해 양육을 책임지는 ‘수퍼맘’에서 한 단계 진화한 형태라고 하지만, 왠지 등줄기로 서늘하게 식은땀이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얼마 전에는 ‘엄마 안티 카페’라는 당혹스러운 인터넷 카페가 생겨 대중의 지탄을 받았다. “소중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고귀한 ‘어머니’라는 칭호는 이미 타락되었다”라는 모토가 버젓이 걸린 엄마 안티 카페는 10대 여중생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자식을 상처 입혀 괴롭히는 부모가 부모인가. 우린 너희의 노예가 아니야”라는 식의 어머니에 대한 비난과 저주로 가득한 카페의 글들을 보고 네티즌의 반응은 대부분 ‘패륜의 극치’라는 쪽으로 쏠렸다.

    ‘Daemon7’이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은 “학업성적=사회계급이라는 등식이 아이들을 악몽으로 내몰고 있다”며 엄마 안티 카페의 충격적인 감수성을 부분적으로 옹호하기도 했다. 사안이 워낙 심각한지라 오히려 빠르게 잊히는 경향이 있지만 엄마 안티 카페는 모성의 현주소를 정면으로 질문해야 할 때가 왔음을 알리는 불편한 신호탄이 아닐까. 엄마 안티 카페에 가입한 아이들의 엄마들은 왜 아이와의 소통에 실패한 것일까. 그 엄마들이 정말 아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식을 노예로 생각하는 주인일까.

    대한민국 수퍼맘과 그리스 여신 데메테르

    드라마 ‘하얀 거짓말’의 신정옥 회장은 아픈 아들이 사랑하는 여인을 아들이 원하는 장난감’으로 여긴다.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로 시작되는 모녀, 모자가 그 누구보다 끔찍한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역전되는 이 비극은 어디서 연원한 것일까. 자식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불의도 파렴치도 만행도 서슴지 않겠다는 이 잔혹한 모성의 기원은 무엇일까. 모성은 처음부터 이토록 배타적인 애정과 집착을 정당화하는 것인가.

    모성의 신화적 기원을 찾아서

    풍성한 수확을 관장하는 대지와 모성의 여신 데메테르. 그녀에게는 다른 여신들처럼 애틋하거나 파격적인 러브 스토리가 없다. 그녀 또한 수많은 ‘제우스의 여인’ 중 하나였으나 이오나 레다나 다나에처럼 드라마틱한 러브 라인을 형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데메테르는 남성과의 로맨스 못지않게 절절한 ‘딸 사랑’으로 유명하다. 데메테르는 최초의 유능한 싱글맘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부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도록 아름답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던 딸 페르세포네. 그녀는 들판에서 친구들과 함께 꽃을 따며 놀다가 아름다운 수선화를 발견하고는 꽃을 따려고 가까이 다가간다. 그 순간 땅이 갈라진다. 검은 말들이 이끄는 황금 마차를 타고 혜성처럼 등장한 죽음의 신, 하데스. 죽음을 관장하는 신 하데스는 아름다운 소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기 위해 몸소 지상으로 외출을 감행한 것이다.

    페르세포네는 제우스에게 도와달라고 절규했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메아리로 울리는 페르세포네의 외침을 듣고 데메테르는 미친 듯이 페르세포네를 찾기 시작한다. 아흐레 밤낮 쉬지 않고 모든 땅과 바다를 샅샅이 뒤졌다. 잠도 음식도 거부한 채. 휴대전화도 GPS도 없던 시절 데메테르는 오직 자신이 가진 감각의 힘으로 딸을 찾아야 했다. 그녀는 아직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었다. 딸 찾아 삼만리를 나선 지 열흘 째, 데메테르는 달의 여신 헤카테를 만난다.

    데메테르의 슬픔에 공명한 헤카테는 데메테르에게 태양신 헬리오스를 만나러 가자고 제안한다. 태양신 헬리오스는 드디어 페르세포네의 소식을 알려준다. 죽음의 신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해 페르세포네는 ‘원치 않는 신부’가 되었다고.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해 강간했다는 엄청난 소식까지. 헬리오스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데메테르에게 이미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슬픔에 빠지지 말라고 충고했다. 하데스 정도면 그다지 ‘스펙’이 달리는 사위도 아니니까. 결론은 이미 하데스의 신부가 되어버린 페르세포네를 데메테르의 힘으로는 데려올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모성의 블랙홀

    그러나 절대적 모성의 화신이었던 데메테르의 사전에 타협이란 없었다. 이때부터 데메테르는, 하데스는 물론 그 어떤 도움의 손길도 뻗치지 않는 제우스를 증오한다. 제우스에게 강간당하거나 제우스와 사랑에 빠졌던 다른 여인들과 달리, 데메테르는 제우스와 정면대결을 시작한다. 최고의 신 제우스에게 정면 도전하는 데메테르는 모성의 이름으로 기꺼이 세상 모든 권력과 싸울 준비가 된 투사형 모성의 원형이다. 지상의 풍요를 관장하여 세상 모든 생물을 먹여 살리는 데메테르가 사상초유의 총파업을 시작한 것이다.

    데메테르는 올림푸스 산을 떠나 평범한 노파로 가장하고 부랑자가 되어 떠돌았다. 어느 날 엘레우시스에 도착해서 우물가에 앉아 있는 노파 데메테르를 엘레우시스의 통치자인 켈레오스의 딸들이 발견한다. 아무리 꼬부랑 할머니로 변장해도 어쩔 수 없이 풍겨 나오는 여신의 품위와 아우라에 반해 그들은 그녀에게 다가간다. 데메테르는 자신을 보모자리를 찾고 있는 할머니라고 소개한다. 켈레오스의 딸들은 어머니 메타네이라에게 데메테르를 데려간다. 메타네이라에게는 귀여운 늦둥이 데모폰이 있었다.

    데메테르는 마치 페르세포네에게 주지 못한 모성애의 대리물을 찾으려는 듯이 데모폰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한다. 데모폰에게 신의 음식을 먹이고 데모폰을 신성한 불에 그을려 불멸의 생명을 주려고 하는 순간, 마침 메타네이라가 들어와서 아기를 태우려는 줄 알고 비명을 지른다. 그제야 데메테르는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노파로 변장했던 데메테르의 본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잘 익은 벼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황금빛 머리카락, 그녀가 내뿜는 생명과 모성의 향기가 집안을 그득하게 채웠다.

    데메테르는 자신을 위해 신전을 지어달라 명령한다. 이제 본격적인 파업투쟁에 들어간 것이다. 그녀는 신전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아 1인 시위를 시작한다. 이제 땅에서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으며 어떤 새 생명도 태어나지 않는다. 데메테르의 총파업으로 때 아닌 가뭄이 덮쳐오고 인류 멸망의 순간이 초읽기에 들어간다.

    데메테르의 모성은 절절하지만 그녀는 딸 하나를 위해 지구 전체를 버릴 수도 있는 ‘모성의 블랙홀’을 증언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모성애라는 삶의 중심이 생기면 그 어떤 인간관계나 기존의 의무나 다른 감정들은 깡그리 망각될 수 있다. 오직 내 아이만을 생각하기에 타인은 굶어 죽거나 다치거나 꼴등을 해도 나 몰라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드디어 제우스가 나선다. 데메테르가 제우스의 회유에도 꿈쩍하지 않자 올림피아의 모든 신이 번갈아 그녀를 방문해 선물을 바치면서 그녀를 설득한다. 데메테르는 요지부동이다. 페르세포네가 돌아오지 않는 한 절대로 올림포스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지상에 어떤 생물체도 자라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요구조건이었다.

    마침내 제우스가 항복한다. 헤르메스를 하데스에게 보내어 페르세포네를 되찾아오도록 명령한 것이다. 풀죽어 지내던 페르세포네는 제우스의 전령 헤르메스를 보자 뛸 듯이 기뻐한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내를 순순히 보내줄 하데스가 아니다. 하데스는 페르세포네에게 달콤한 석류씨를 주어 남편의 정을 표시한다.

    페르세포네의 비밀 다이어리

    드디어 돌아온 페르세포네. 엄마와 딸은 얼싸안고 기뻐한다. 데메테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혹시 지하세계에서 음식을 먹지 않았는지 묻는다. 하데스의 회심의 유혹을 담은 석류씨를 먹은 덕분에 페르세포네는 ‘영원히’ 돌아올 수는 없게 된다. 1년의 3분의 2는 어머니인 데메테르와 함께, 3분의 1은 지하세계에서 하데스와 함께 보내게 된 것이다. 이제 데메테르는 땅에서 곡식이 자랄 수 있게, 지상에 생명체가 태어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녀는 지치고 피곤한 엄마들이 각종 음담패설과 유쾌한 농담으로 마음껏 스트레스를 풀고 모성의 연대감을 확인하는 축제 ‘엘레우시스 제전’을 마련한다. 이 거대한 모성의 축제는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죽음 또한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는, 여성들만의 카니발이었다.

    대한민국 수퍼맘과 그리스 여신 데메테르

    영화 ‘마더’의 ‘도준 엄마’는 모자란 아들이 행여 다칠까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데메테르의 입장에서 하데스는 최악의 사윗감이다. 제우스와 포세이돈에 맞먹는 권력을 갖고 있었으나 납치라는 최악의 방법으로 딸을 훔쳐갔으니.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을 모성의 근원적 딜레마로 바라본다면 이 신화는 조금 다르게 읽히지 않을까. 어차피 이 세상에서 어떤 ‘엄친아’가 나타나도 자기 딸이 가장 아까운 모든 엄마의 입장에선, 아무리 대단한 사윗감도 하데스처럼 괘씸하게 보이지 않을까.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는 연인 못지않게 친밀하고 애틋한 엄마와 딸의 관계였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달콤한 모녀관계에 ‘흠집’을 낸 하데스는 곧 ‘엄마에게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딸을 앗아가는 지상의 모든 사위’의 은유 아닐까. 이 신화에서는 딸 잃은 엄마 데메테르의 우울증을 다루느라 페르세포네의 상처 입은 마음은 거의 부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페르세포네의 입장에서 이 신화를 재구성해본다면 어떨까. 하데스는 그녀에게 그저 ‘흉악한 납치범’이기만 했을까.

    페르세포네는 하데스와의 만남 이전까지 데메테르라는 완벽한 모성의 보호관찰 아래 평화롭게만 살아왔다. 그녀들의 친밀감을 방해하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평생 동안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아마 그녀가 하데스에게 납치라도 당하지 않았으면 평생 엄마의 그늘 밑에서 ‘이것이 세상의 전부야’라고 생각하며 안온하게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페르세포네는 평생 엄마의 보호망을 뚫고 나가지 못하는, ‘과잉보호’의 희생양을 상징하는 원형적 딸의 이미지를 지닌 것이다.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는 서로에게 의존하고 서로를 도움으로써 오직 서로를 통해서만 존재의 소중함을 확인할 수 있는 배타적인 관계였다. ‘나는 타인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행복을 느끼는 관계 지향적 태도는 여성의 창조적 에너지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딜레마가 될 수도 있다.

    특히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처럼 오직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존재들은 더욱 더. 제우스와의 관계 이후 연애 따윈 담 쌓고 지낸 듯한 데메테르와 엄마의 과잉보호로 인해 ‘남자’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했던 페르세포네. 두 사람은 남성에 대한 거부감 혹은 무지로 인해, 그리고 모녀관계를 제외한 다른 타인과의 관계 부재로 인해 서로에게 갇힌 연대의 대상이 된다. 하데스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는 페르세포네는 처음에는 하데스를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했겠지만 점차 ‘어머니 바깥의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을 것이다.

    도준(원빈)이 자기 없이는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마더’의 엄마(김혜자)는 결국 파괴적 광기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자식이 늘 어리고 선하고 바보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엄마가 없으면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거라는 믿음 때문에 아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으며 엄마의 무한한 애정을 ‘당연한 필수품’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식에 대한 히스테리컬한 집착을 보이는 엄마들은 ‘자식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자식을 통해서 보상받으려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어머니가 자식에 대한 완벽한 보호막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자식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엄마의 책임이라는 강박이 마마보이를 양산하게 하는 심리적 요인인 셈이다. 자식의 모든 행동을 치밀하게 감시하고 ‘휴대전화’를 자식을 조종하는 ‘리모컨’처럼 사용하는 어머니들. 자식의 일거수일투족이 오직 자기 자신의 지휘와 감시 아래 이루어져야 하는 ‘하얀 거짓말’의 형우 어머니 같은 사람은 자식의 자유를 담보 삼아 자식을 사육하다시피 하다가 결국 그를 후천적 자폐아로까지 키우게 된다.

    자식의 부정, 자식의 잘못을 발견했을 때 가장 괴로워하는 존재는 데메테르처럼 절대적인 모성을 발휘하는 여성들이다. ‘마더’에서 결국 아들이 살인자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자신이 아들과 함께 동반자살하려 했던 것을 아들이 기억했을 때, 가장 괴로운 것은 그녀 자신의 ‘불완전한’ 모성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수퍼맘의 신화

    좋은 어머니가 되려는 욕구가 너무 강하면 부정적인 측면을 사유하는 균형감각이 떨어지고 온 세계를 향해 방어적이 될 수밖에 없다. 히스테리컬한 매니저 어머니와 고분고분한 여배우 딸처럼, 엄마는 끊임없이 딸의 완벽한 스케줄 관리를 위해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딸은 어머니의 감시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어머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엄마의 관심이 지나친 경우 딸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하고 강자에게 기대어 간접적으로 욕망을 성취하는 잔기술을 습득하게 된다. 자신의 욕망을 깨닫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기에 타인이 만든 상황에 갇혀 우울증에 빠지기 쉬운 것도 페르세포네형 소녀다. 페르세포네는 엄마 몰래 남자친구와 첫날밤을 보내고 온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고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페르세포네가 일기를 썼다면 아마도 이런 문장을 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데스의 납치는 불가항력이었지만 석류씨를 먹은 것은 나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하데스의 달콤한 유혹이 담긴 석류씨는 엄마가 내게 한 번도 허락하지 않은 종류의 쾌락이었다.’

    페르세포네가 어머니인 데메테르와 다시 만났을 때 어머니의 첫 질문은 “너 지하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느냐?” 였다. 페르세포네는 “몇 개의 석류씨를 먹었다”고 대답하고는, 하데스가 강제로 먹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먹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 그녀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아무런 힘이 없고 따라서 책임을 질 수 없는 듯한 인상을 풍기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씨를 삼킴으로써 페르세포네는 일정 시간을 하데스와 같이 보내는 것을 보장받게 된다.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진 시노다 볼린 지음, 조주현·조명덕 옮김, 또하나의 문화, 2008, 298쪽)

    빈 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

    혹은 공소 증후군(空巢 症候群)을 앓는 중년 여성이 늘어나고 있다. 아이들이 성장해 자신의 품을 떠나면서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황량하게 맞닥뜨리는 어머니들이 겪는 엄청난 공허감. 마치 텅 빈 둥지를 아무런 보람 없이 지키고 있는 듯한 허전함과 절망감. 이것은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겪지 않으면 안 될 인생의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모든 어머니는 데메테르의 고통을, 딸을 사위에게 빼앗긴 어미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자식이 결혼이나 취직, 유학 등으로 자신 곁을 떠날 때, 묘한 질투심과 공허함을 느끼지 않는 부모가 있을까.

    수퍼맘의 신화는 그래서 엄마에게 모든 책임을 떠맡기는 편리한 해결방식인 것이다. 세상 그 누구도 네 아들딸을 도와주지 않으니 네 자식은 네가 건사해라는 식의 철저한 개인주의. 엄마도 자식을 지휘하는 CEO와 같은 것이니 모성에도 ‘과학’과 ‘경영전략’이 필요하다는 식의 철저한 자본주의적 해결 방식. 수퍼맘의 신화는 ‘대단한 엄마’와 ‘평범한 엄마’의 구별 짓기를 통해 ‘정말 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르겠다’는 ‘지극히 정상적인 고민’에 빠져 있는 이 세상 모든 엄마에게 열패감을 안겨주는 것이 아닐까.

    모든 엄마에게는 이렇게 ‘모성의 또다른 멘토’가 되어줄 수 있는 조력자, 헤카테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가족은 물론 친구와 동료와 주변의 모든 사람이 이 ‘무거운 모성’을 함께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지친 엄마들에게 ‘엘레우시스 제전’에 맞먹는 멋진 ‘모성의 카니발’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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