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흐와 베토벤(오른쪽) 음악은 영화에서도 자주 차용된다.
고전파 시대에는 천재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음악을 최고로 표현한 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대한 이야기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 ‘아마데우스’는 ‘신의 은총을 받은 아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이 곧 제목이 된 이 영화는 그의 경쟁자였던 살리에리-적어도 살리에리는 그렇게 생각했다-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드라마틱한 가설을 영화화했고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너무나도 잘 만든 영화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최고의 음악영화로 군림하고 있다.
‘아마데우스’에는 모차르트의 오페라가 특히 많이 사용되었다. 장모의 잔소리를 듣고 영감을 받아 ‘마술피리’에 등장하는 고음역의 아리아를 작곡했다는 재미있는 설정, 살리에리가 빈사(瀕死) 상태인 모차르트가 흥얼거리는 ‘레퀴엠’을 받아 적는 장면 등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또 귀가 들리지 않는 장애를 극복한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의 음악은 영화 속에서도 그의 인생처럼 운명의 전환점에 등장한다. 모든 감정행위가 금지된 미래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퀄리브리엄’에서 주인공은 난생 처음으로 음악이라는 것을 듣고 감정이 흔들린다. 그때 골동품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이다. 마지막 합창 부분이 아니라 1악장의 첫 부분이다. 듣는 이를 항상 긴장시키는 조용한 시작부분을 사용한 것이다.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의 2악장은 유명한 장송행진곡으로 세상의 종말을 다룬 영화 ‘노잉’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태양의 일부가 폭발하면서 지구가 순식간에 사라지기 직전, 혼돈스러운 세상을 비추는 화면과는 달리 음향은 베토벤의 음악만을 들려준다. 평소에도 심오하다고 느낀 이 음악이 이렇게 심오하게 사용된 적은 없었다.
베토벤의 일생을 직접 다룬 영화들도 빼놓을 수 없다. 게리 올드만이 주연한 ‘불멸의 연인’에는 피아노 소나타가 많이 등장하고, 에드 해리스가 주연한 ‘카핑 베토벤’에는 인류 최고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들과 합창교향곡이 감동적으로 등장한다.
왈츠를 사랑한 영화들
왈츠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Johann Strauss II)라는 왈츠의 왕이 등장했다. 그의 음악 중 가장 유명한 곡은 역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일 것이다. 큐브릭은 이 곡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았다. 그만큼 클래식 음악을 영화 속에 적절하게 사용한 감독은 보기 드물다. 스탠리 큐브릭의 화제작 ‘2001년 오딧세이’에서 우주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주공간에서 날아다니며 일하는 장면에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잔잔하게 흐른다.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에 왈츠가 삽입되어 다소 코믹한 분위기가 연출되었고, 후배 감독 여럿이 이 장면을 오마주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사용된 음악은 또 다른 슈트라우스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웅장한 트럼펫 서주다. 이 관현악곡은 유인원이 처음으로 도구를 사용하며 인간으로 발전하는 의미심장한 장면에 흐른다. 니체의 철학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음악으로 만든 곡이 이 장면에 삽입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이 때문에 이종격투기 선수나 마이클 잭슨이 등장할 때 어울릴 정도로 웅장한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새까만 고릴라가 저절로 생각나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선정적인 장면들로 인해 한때 상영되지 못했던 ‘아이즈 와이드 셧’은 큐브릭의 유작인데, 그는 여기서 또 하나의 왈츠를 히트시켰다. 바로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모음곡 2번에 포함되어 있는 왈츠다. 이 곡은 한국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와 많은 CF에 삽입되기도 했는데 그 어렵다는 현대음악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를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구실을 했다.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8 1/2’에서도 삽입된 바 있는 바그너(Richard Wagner)의 ‘발퀴레의 비상’은 ‘니벨룽의 반지’라는 거대한 4부작 오페라에 들어있는 곡이다. 유난히 전의를 불태우게 하는 이 곡은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에서도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헬기를 타고 해변에 융단폭격을 하는 장면에서 한 장교가 이 음악을 틀어놓는다. 이 전쟁광은 심지어 전투 중에 서핑을 즐긴다. 히틀러가 좋아했던 바그너의 음악은 결국 영화에서 인간성의 몰락을 표현하는 데 쓰인 것이다.
현악기의 악마적 매력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린 파가니니(Niccolo Paganini)는 천재적인 명인의 실력을 갖춘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다. 그는 짓궂게도 자신만이 연주할 수 있을 정도의 어려운 곡을 많이 작곡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곡이 독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다. 이 중에 마지막 24번째 곡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 삽입되었다. 보는 이를 상당히 불편하게 할 정도로 인간의 추악한 면들을 보여준 이 영화에서 날카로운 바이올린 소리는 묘한 생동감과 희열을 느끼게 해준다.
인간, 그리고 종교의 추악한 면들을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준 폴 토마스 엔더슨 감독의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도 바이올린 음악이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절정에 오른 연기를 볼 수 있는 이 영화에서는 브람스(Johannes Brahms)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3악장이 등장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가장 충격적인 엔딩 중 하나로 손꼽힌다. 평생 자신을 괴롭히던 위선적인 목사를 살해한 주인공이 중얼거린다. “이제 다 끝났다”라고. 화면이 암전되자마자 신나는 바이올린 협주곡이 연주되기 때문에 관객은 폭발적인 통쾌함을 느끼거나, 강한 거부감을 표현하며 극장을 나선다. 음악이 선사하는 극단적인 감정의 대비일 것이다.
누구나 좋아할 만한 첼로음악도 영화에서 불편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한때 ‘신이 내린 걸작’이라고 평가받은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퐁네프의 연인들’을 기억하는가? 지하철역에서 혼자 첼로를 연주하는 남자. 그는 헝가리의 작곡가이자 교육자였던 코다이(Zoltan Kodaly)의 ‘무반주 첼로를 위한 소나타’를 연주하고 있다. 첼로의 현 네 줄 중에서 아래 두 줄을 반음 더 내려서 조율하고 연주하는 독특한 곡인데, 첼리스트들에게 난곡으로 알려져 있다. 너무도 멋지고 강렬한 이 음악으로 영화가 시작되지만, 정작 연주하던 그는 첫 장면부터 자신이 배신한 여인에게 살해당한다. 그가 주인공이 아니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