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호

미국행 탈북 난민들의 무너진 ‘아메리칸 드림’

“빌어먹더라도 잘사는 나라에서 빌어먹는 게 낫잖겠습니까”

  • 김형덕│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장 www.cyworld.com/hdk74│

    입력2009-09-10 10:4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2004년 북한인권법 제정 이래 미국에 입국하는 탈북 난민의 숫자는 꾸준히 증가해 올해 100명 선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렵사리 ‘기회의 땅’을 찾은 탈북자들에게 고도자본주의 미국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은 가혹하기 이를 데 없다. 탈북자 출신으로는 최초로 국회 정책비서관을 지낸 김형덕씨가 미국 현지에서 북한에서 온 난민들을 도우며 느낀 경험담을 ‘신동아’에 보내왔다.
    미국행 탈북 난민들의 무너진 ‘아메리칸 드림’

    2008년 8월, 중국 정부의 탈북자 검거 및 강제북송 중단을 촉구하며 워싱턴 주미중국대사관 앞에서 단식 시위를 벌인 탈북자 조진혜씨. 조씨는 베이징 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의 보호를 받다가 2008년 3월 미국에 입국했다.

    미국에 입국하는 탈북자 수가 늘고 있다. 물론 한국을 택한 이들에 비하면 아직 그 숫자가 현저히 적지만, 증가 추세는 이제 뉴스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다. 미국에 입국하는 탈북자는 대개 두 부류다. 하나는 중국이나 동남아국가의 미국대사관에서 난민 판정을 받아 입국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일단 한국에 정착한 후 다시 캐나다나 멕시코 등을 경유해 밀입국하는 사람들이다.

    이 가운데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전자다. 일단 한국에 정착했다가 미국에 오는 경우는, 법적으로 엄격히 따지자면 한국 국민이 미국에 입국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 정착했던 탈북자들 가운데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학업이나 취업 목적으로 입국하는 이들도 드물지만 이따금 있다. 이러한 공식 허가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미국에 밀입국하게 된다.

    얼마 전 필자가 살고 있는 미국 뉴욕 주 로체스터 시에 탈북자 일가족 네 명이 도착했다. 필자는 우연히 그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들의 생활을 자세히 관찰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우선 그들을 만난 계기부터 말해둬야겠다. 로체스터 시에 거주하는 한인 수는 3000명 정도 된다. 이 도시에는 모두 네 개의 한인교회가 있는데, 한 한인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필자의 가족은 현지 미국교회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한인교회 목사님의 전화는 의외였다.

    그는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의 유학생에게서 필자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고 했다. 로체스터 시에 탈북자 일가족이 오는데 그들을 공항에서부터 마중하고자 하며, 필자가 이들에게 통역과 생활안내를 해줄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문득 이런 정보를 어디서 알게 됐고 어떻게 관여하게 됐는지가 궁금했다. 목사님은 ‘가톨릭패밀리센터’라는 난민지원센터에서 협력요청을 받았다고 했다.

    미국에는 북한 외에도 많은 나라에서 난민이 입국하고 있고, 이들의 정착을 돕는 일은 전적으로 민간단체가 주도하고 있다. 한국이 정부 주도로 탈북자 문제를 다루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들 난민센터에서는 난민이 입국하면 해당언어를 구사하는 공동체에 협력을 요청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로체스터 시의 한인교회에 도움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사실 언어문제 외에도 미국의 평범한 시민이 탈북자에 대해 갖는 태도는 다른 제3세계 국가 출신 이민자에 대한 태도와 다르지 않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한국 사람들이 탈북자에 대해 갖는 태도가 동남아국가 이주민에 대한 태도와는 꽤 다른 것과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있다. 심지어 정착지원을 돕게 된 한인교회조차 한국 내 보통 교회가 탈북자를 접촉했을 때와는 다르게 반응한다. 한국의 교회들은 탈북자란 사실을 알게 되면 가정방문을 하고 자신들이 출석하는 교회에 나올 것을 권유하지만, 이곳의 교회들은 그렇지 않다. 교회에 나올 수 있느냐고 물어보긴 해도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국처럼 뜨겁지는(?) 않다고 할까.

    ‘일을 해야 살 수 있는 나라’

    일단 목사님의 요청에 따라 공항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스무 살과 스물세 살의 두 아들을 둔 50대 초반의 장모씨 부부였다. 일단 난민지원센터에서 나온 자원봉사자와 함께 미리 준비해둔 임대주택으로 그들을 데려가 기본적인 생활안내를 해주었다. 2~3일 지난 후 한 자원봉사자가 생활비와 지원품을 가지고 장씨 가족을 찾았다. 그는 이후에도 그들을 만날 때마다 “미국은 일을 해야 살 수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또 자신에게 할당된 업무 외에 사적인 요청을 하면, 예를 들어 근처에 있는 시장까지 차를 좀 태워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거나 하면, 자신은 자원봉사자로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며 분명히 선을 그었다고 한다. 식량배급표 전달이나 전화 설치 신청 같은 공식적인 지원업무를 제외하고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해외생활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 특히 영어가 원활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런 간단한 일도 처리하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필자가 알고 지내던 한 교회에서 선뜻 장씨 가족을 위해 협력해주기로 했다. 교회 관계자들은 장씨 가족에게 고추장, 된장, 김치 등 한국인이라면 필요한 음식을 마련해주었다. 장씨가 추가로 요청한 비타민 영양제도 챙겨줬고, 일요일에는 예배에 데리러 오기까지 했다.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갈 수 있도록 차량을 제공하는 교인도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 필자는 며칠에 한 번씩 장씨 가족에게 들렀다. 미국 사회에 적응하는 데 숙지해야 할 주요 사항들을 설명해주고 대형 할인마트나 약국, 기타 상점에 데리고 가서 이용하는 방법도 알려줬다. 때로는 인근에 있는 온타리오 호수에 함께 가서 그곳에 즐비한 별장과 요트를 즐기는 미국인들의 풍요로운 모습도 보여주고, 거꾸로 다운타운에 밀집한 빈곤의 현장도 안내했다. ‘이것이 미국입니다’라는 기분으로.

    다음 페이지 표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의 난민지원 정책은 ‘기초적인 지원은 제공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서 난민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한국의 경우 탈북자들은 그 사회적 신분이 바로 확정되지만, 미국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꾸준히 관찰한다. 그 기간 적응에 실패해 문제를 야기할 경우에는 본국으로 추방한다는 원칙도 세워두고 있다.

    미국에 입국한 탈북자들 역시 대체로 중국 등지에서 상당기간 체류한 경험이 있어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사회적 물의나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강도 높은 노동을 견뎌내는 역량은 상당히 약한 편이다. 미국의 난민지원 정책은 현금성 지원을 거의 하지 않는다. 일정금액 이상의 돈을 사용하려면 스스로 노동을 해야만 한다. 한국 정부가 탈북자에게 정착금을 지급하는 것과는 다른 부분이다.

    박필립 전 시러큐스 한인회장은 탈북자들의 미국 정착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경험을 갖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뉴욕 주 시러큐스 시의 난민센터에는 이미 15명 남짓의 탈북자가 난민으로 입국한 바 있다. 박 전 회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탈북자들은 영어는 물론 상대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자본주의 노동환경에도 적응하는 데 고충을 겪습니다. 한 직장에 지속적으로 근무하는 것을 어려워하다보니 자주 직장을 옮기는 경향이 있고, 일부는 3~4년이 지나도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해 미국 정부가 저소득계층에 지원하는 푸드스탬프(무료급식 교환권)로 생활합니다. 물론 이는 탈북자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미국에 거주하는 난민들이나 저소득계층인 흑인, 멕시코계, 일부 백인들도 힘들게 일해 최저임금이나 다름없는 돈을 벌기보다는 정부의 복지정책에 기대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자율적 통제나 숙련된 기술에 약한 탈북자들의 자립을 도우려면, 강제적으로라도 기술교육을 시키거나 아예 처음부터 기본적인 지원도 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어중간하게 도와주면 의존심만 커지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박 전 회장은 “한국에서 살다가 밀입국한 탈북자가 미국 사회에 더 잘 적응한다”고 말했다. 이미 자본주의 사회를 경험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 그의 설명에 따르면 시러큐스시 난민센터에 왔던 탈북자 대부분은 다른 도시로 이주했고, 2명의 여성만이 남아 한인가게에서 일하고 있다. 탈북자들이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는 데는 상당한 도전이 요구되는 것이다.

    보상받지 못한 꿈

    필자가 만난 장씨 가족의 경우 미얀마에서 8개월간 미대사관에서 주선한 안전가옥에 머물렀다. 그 과정에 한국대사관 관계자로부터 한국행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장씨 스스로 미국행을 결정했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옆에서 듣던 장씨의 큰 아들이 “빌어먹더라도 잘사는 나라에서 빌어먹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장씨는 입국과정에서 긴 시간을 기다림으로 보냈기 때문에 미국에 입국한 후 바로 일하기를 원했다. 다행히도 필자가 연결해준 교회 교인이 운영하는 한인가게에서 장씨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금전적인 지원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하루빨리 용돈이라도 벌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장씨는 채 열흘도 되기 전에 일이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가게의 사장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법정근로시간인 8시간을 넘겨 일하는 것도 자신에게는 참기 어려운 노동 강도라고 했다. 장씨는 “불법 체류자 신분이던 중국에서는 주어진 조건에 절대적으로 순응하고 때론 부당한 대우와 임금체불도 감수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중국에서 머문 10년간 건설현장에서 철근을 나르는 등 육체적으로 부담이 큰 일을 했지만, 그런 환경에서도 아프지 않던 허리가 지금은 자주 아프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에 힘든 상황을 참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필자가 보기에 장씨는 불가항력적인 사회적 신분 때문에 억눌려 지내야 했던 중국에서의 삶이 미국 입국으로 상당부분 보상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미국이라고 특별한 사회일 리는 없다. 미국에서도 누구나 적은 비용으로 많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사업을 벌이고, 고용주는 고용인에게 지급하는 임금에 비례해 보다 생산적인 노동력을 제공받기를 원한다. 고용주가 중국인에서 미국인으로 바뀌고 임금 수준은 향상되었을지 몰라도 근로환경이나 장씨의 사회적 신분이 절대적으로 바뀐 건 아니라는 뜻이다. 필자는 장씨에게도 이 점을 강조하면서, 영어 실력이 일정수준에 도달하고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때까지는 정보의 주요 취득경로인 한인 공동체에 좋지 않은 인상을 줄 필요는 없다고 얘기해주었다.

    장씨는 자녀를 대학에 진학시키고 싶어하지만, 필자는 그러자면 한국으로 가는 게 옳았을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의 아들들은 알파벳을 겨우 이해한 초보적인 수준의 영어실력을 갖고 있다.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 북한 농촌지역에 거주했던 그들은 생계의 어려움으로 인해 소학교(초등학교) 과정마저 제대로 이수할 수 없었고, 한글조차 낯설어했다. 그런 그들에게 미국의 대학교육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욕망, 낮은 역량

    한국에서는 대안학교나 검정고시를 통해서라도 고등교과과정을 마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 탈북자에게는 대학입학에서 특별입학 기회를 제공함은 물론, 나 홀로 탈북자일 경우에는 일부 생활비까지 제공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영어 문제를 극복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학비를 제공하는 학교도 드물고, 입학 과정에서 한국처럼 특별혜택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직업전문학교과정에 입학하도록 돕는다거나 이를 위해 영어능력 향상을 도울 자원봉사자를 알선하는 것이 전부다.

    장씨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모든 일을 점진적으로 해결하길 권유했지만, 가족들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일단 일정시간 일을 해 수입을 확보하면서 언어를 습득하고 차차 공부를 할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권유하자, 점차 필자의 말을 이해하는 듯 보였다.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현실을 수용할 것인지가 가족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는 사실을 비로소 체득해나가는 듯했다.

    미국에 온 탈북자들을 보면서, 생존원리가 본능적으로 체득돼 있는 남한 사람이나 미국인에 비해 탈북자들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인식과 대응역량이 현저히 낮음을 실감하곤 한다. 폐쇄적인 사회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이 자유주의 사회에 진입하면서 나타내는 첫 번째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의 역량에 비례해 욕구를 조절하는 능력의 결여’다. 다시 말해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나 욕구에 비해 지니고 있는 역량이 낮거나 미처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경우 이를 수용하고 관리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일 것이다.

    이는 비단 탈북자뿐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주해온 사람들, 혹은 저발전국가에서 미국 같은 고도자본주의 사회에 진출하는 모든 이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욕구조절에 실패한 이들은 곧 현실부적응에 빠지고, 이는 사회를 향한 분노나 폭력성 표출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문제가 개인에 한정될 때는 그 영향력이 미미하겠지만, 집단의 힘으로 표출되면 커다란 사회문제로 연결된다.

    만약 북한이 급격히 붕괴해 흡수통일이 이뤄질 경우, 그간 억눌려왔던 북한 주민들의 다양한 욕구는 질풍노도처럼 팽창할 것이다. 한국은 과연 그러한 상황에 대비할 만큼 경제 혹은 사회적 역량이 준비되어 있을까. 이는 북한의 변화가 점진적인 방식으로 이뤄지도록 유도하고 관리해야 할 절대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과 한국의 탈북자 지원 프로그램
    프로그램 미 국 한 국
    난민 심사 심사기간은 사안마다 다르며 대체로 6개월 이상 소요 심사기간은 짧은 편이지만, 재외공관과 주재국의 교섭상황에 따라 혹은 국내 정착교육 시설의 수용능력에 따라 입국 시기 조정
    난민지위 인정 난민지위 인정과 동시에 미국입국 허용 재외공관을 통해 도움을 요청하면 수용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일부 거절되는 사례도 있음
    난민지원 주관단체 민간단체 주도, 지역사회 협력 정부 주도, 민간단체 협력
    주거 및 생활지원 6개월간 주택 임차금, 수도, 전기, 가스, 전화요금(시내전화로 제한) 지원 영구임대·국민임대주택 입주기회 제공
    처음 6개월간 1인당 월 100달러어치의 푸드스탬프 지급(극빈자 지원금에 준하는 수준) 임대보증금 및 정착금 지급, 중요정보 제공자에게는 추가포상금 지급, 6개월간 최저생계비 지원
    의료지원 6개월 동안 의료보험을 제공하고,이후에도 일정소득 이하일 경우는 계속 지원(단, 의료보험 적용 항목에 제한이 있음) 취업 이전에 의료급여 1종 수급권이 제공되며, 장애자와 노약자의 경우 의료급여 1종 수급권 지속
    취업지원 경력과 역량을 고려해 3회 이상 취업을 알선하지만, 대체로 법정 최저임금에 근접한 직종에 한정 노동부 취업지원센터를 통해 직업교육과 취업을 알선하지만, 법정 최저임금에 근접한 직종에 한정
    교육지원 연령에 따라 고등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 가능하며 직업전문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알선. 교육비 지원이나 입학허가 결정 여부는 해당 학교 측의 고유권한 취학연령에 따른 교육보호 가능하며 성인의 경우 만 35세까지 대학교육비 및 생활비 지원.각 대학이 정원외특례입학제도를 통해 탈북자를 입학시킬 수 있도록 함
    기타 난민으로 입국한 후 1년이 지나면 영주권 신청자격이 부여되고, 범법사실이 없으면다시 5년 후 시민권 신청자격을 부여 정보기관 합동조사가 끝나는 시점에 주민등록증 부여
    난민으로 입국한 후 영주권 취득 이전이라도제3국에 있는 배우자, 부모, 형제, 자녀에 한해 미국 초청이 가능 주재국과의 교섭상황에 따라 국외체류 중인 가족 입국지원
    IMO(유엔국제이주기구)가 지원한 입국의 경우항공료를 매월 35달러씩 상환해야 함 입국 시 항공료는 정부 부담
    ※ 미국 뉴욕 주 시러큐스 시의 난민지원 현황을 나타낸 것으로 다른 주정부나 뉴욕 주 내 다른 도시의 난민지원 내역과는 다를 수 있다.

    미국행 탈북 난민들의 무너진 ‘아메리칸 드림’

    장씨 가족과 함께한 필자. 왼쪽부터 장씨 부인, 장씨, 필자, 둘째아들, 첫째아들

    필자가 사는 도시의 로체스터 대학은 미국 내에서 대학 종합순위 30위권에 드는 학교다. 이곳에 입학하는 외국 학생들은 각기 자국에서 최고 순위를 다투는 학교를 졸업한 경우가 많다. 대부분은 영어 구사능력이 상당수준에 달하고, 수학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미국인보다 훨씬 높은 학업성취도를 나타내는 성적표를 제시해야 입학이 허가된다.

    북한 붕괴가 악몽인 까닭

    이렇듯 치열한 경쟁을 거쳐 입학하고 또 졸업하지만, 외국인이 미국 사회에서 중간 정도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직업군에 취직하기도 쉽지 않다. 미국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여력은 제한되어 있고, 개개인이 가진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가 요구하는 역량을 충분히 지녔다고 할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쟁과정에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다수는 자신들의 목표를 조정해 현실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마련이다.

    미국행 탈북 난민들의 무너진 ‘아메리칸 드림’
    金亨德

    1974년 북한 자강도 희천 출생

    1993년 탈북,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국회 정책비서관, 대성그룹 기획팀 근무

    現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 소장

    2008년 9월부터 미국 뉴욕주에서 연수 중


    그렇지만 절대 다수의 탈북자는 이러한 전문적인 교육이나 치열한 경쟁의 과정이 생략된 채 한국이나 미국 사회에 편입된다. 사회가 이들을 수용하는 데 더 많은 난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가 분노하고 또 상처 받지만, 스스로의 역량을 고려해 실현가능한 계획을 세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물론 더 나은 목표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필자가 장씨 가족을 포함해 미국 사회에 정착하려는 탈북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준 것은 그 때문이다. 어디를 가든 끝에는 결국 자기 자신이 관건이라고, 자기 자신을 이겨내는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