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사도, 악수도 하기 전에 그는 고개부터 숙였다. 8월12일, 로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돌아온 지 닷새째 되던 날이다. 서울 송파구 송파동 ‘노민상 수영연구소’에서 마주 앉은 노민상(53) 감독은 피곤해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마른 체구에 눈이 퀭했다. 로마에서 돌아와 하루도 맘 편히 못 쉬었다고 했다. “시차 적응은 다 했느냐”고 묻자 “이런저런 고민하느라 원형탈모가 생겼다”고 한다. 한가로이 ‘시차’나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주고받는 대화 가운데 계속 “내 책임이다. 다들 얼마나 실망하셨겠느냐. 죄송한 마음뿐”이라는 사과가 끼어들었다.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로마에서도 그랬다. 박태환 선수의 경기가 끝나고 처음 전화가 연결됐을 때 그는 연거푸 “죄송하다”고 했다. 한국 와서 만날 약속을 그때 잡았다. “돌아가면 혼날 건 혼나고 맞을 건 맞고 새로 시작하겠다”고 하는 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노 감독은 지난해 올림픽을 마치고 뜻 맞는 수영계 후배 한 명과 연구소를 열었다. 자택에서 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이름은 번듯하지만, 실상 보니 초라하다. 주택가 한편, 1층엔 식당, 2층엔 보습학원이 있는 건물 3층에 조그맣게 그의 ‘연구소’가 있었다. 바로 옆 사무실은 ‘대박유통’이 쓰고 있는, 그런 장소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벽마다 붙어있는 박태환의 사진이 이곳이 ‘노민상 수영연구소’임을 알려줬다.
박태환은 노 감독에게 단순한 제자가 아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13년 전. 당시 박태환은 천식을 앓는 초등학교 1학년생 꼬마였고, 노 감독은 수영계 주류에서 한없이 떨어져 있는 무명 지도자였다. 학창 시절 수영을 했지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한 그는 고등학교 중퇴 후 지도자 생활에 나섰다. 주목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수영팀과 크고 작은 수영클럽 코치를 전전하며 ‘변방의 잡초처럼’ 떠돌았다. 운전을 하다 다른 차에 들이받혀 갈비뼈와 쇄골, 양쪽 발까지 부러지는 대형사고도 당했다. 몇 년간 힘겨운 재활훈련 끝에 간신히 다시 수영장에 섰을 때, 마흔 살 그의 앞에 나타난 꼬마가 박태환이다. 그때부터 박태환은 그에게 꿈이자 미래이고 열정의 대상이었다.
▼ 계속 죄송하다고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도자인데 결과가 안 나왔으니 책임져야지요. 귀국 기자회견 때도 말했지만, 이건 제 잘못입니다. 이런저런 얘기하기 전에 먼저 그거부터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요.”
첫 훈련하던 날 “큰일 났구나” 느껴
▼ 로마에 갈 때 이런 결과를 예상했나요?
“(함께 훈련할) 시간이 없었고 촉박했고…. 최선을 다했지만 너무 쫓겼어요. 태환이가 태릉에 6월15일에 들어왔습니다. 그러고는 7월17일에 출국했으니 도리가 없었지요.”
두 이야기가 묘하게 뒤틀린다. 노 감독이 계속 ‘제 책임’이라고 하는 건, 역설적으로 그의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번 세계선수권대회 결과에 대해 ‘노 감독 탓’이라고 하기는 좀 어렵다. 베이징올림픽 이후 그는 박태환을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다.
널리 알려졌듯 지난해 10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박태환을 위해 SK 후원의 ‘전담팀’이 구성됐다. 전용 밴과 사무실, 웨이트 트레이닝을 전담하는 박사, 마사지 스태프까지 지원됐다. 박태환은 수영연맹에 태릉선수촌 밖 개인훈련 의사를 밝혔고, 연맹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올해 두 차례 미국 전지훈련을 가서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수영팀의 데이브 살로 감독에게 지도를 받았다. 노 감독은 이 기간 박태환의 훈련 계획, 훈련 결과 등에 대한 정보를 거의 받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 태릉에 들어오기 전 훈련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씀이군요.
“미국에서 전지훈련을 했다고는 하는데…. 태릉 들어온 뒤 태환이 상태 보고 데이브 살로 감독을 의심했습니다. 그렇게 세계적인 감독님이신데, 아이 몸 상태가 무산소역치라든지 내성훈련 같은 걸 체계적으로 받은 몸이 아니었거든요. 큰일 났구나 싶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