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호

좌파논리로 우파정책에 반기 든 정형근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윤증현 식으로 영리병원 허용하면 정권에 혼란 온다”

  • 송홍근│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9-09-11 10: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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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건강보험은 미국이 본받으려는 제도”
    • 1등 도맡은 엘리트
    • “통일부 장관? 기회 닿으면…”
    • “남북 경쟁은 끝났다. 지금은 소통할 때”
    좌파논리로 우파정책에 반기 든  정형근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좌’에서 ‘우’로 이념, 정책을 바꾼 사람은 많다. 그런데 ‘우’에서 ‘좌’로 움직인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정형근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은 독특하다.

    “시대가 바뀌었어요.”

    그는 딱 잘라 말했다. 뭐가 바뀌었다는 걸까.

    “1970년대 북한은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보다 많았습니다. 1975년까지 그랬을 거예요. 기계공업은 한국이 근처에도 따라가지 못했죠. 조총련 공작원이 일본 유학생을 간첩으로 포섭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한국의 국민총소득이 북한보다 40배가량 많습니다. 북한은 더 이상 게임이 안 되는 구조예요. 남북이 소통하면 남쪽은 영향 받지 않지만 북쪽은 무너집니다. 서구의 좌파는 빨갱이, 친북과는 개념이 다릅니다. 좌파의 의견도 좋은 건 흡수하고 필요한 건 받아들여야 해요.”

    “윤증현 식으로 하면 큰일 난다”



    기획재정부는 서비스산업 선진화의 일환으로 영리병원을 허용하고자 한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신동아’ 5월호 인터뷰에서 “영리병원 허용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기득권을 유지하자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수장으로서 그는 기획재정부의 의견에 어깃장을 놓았다. “윤증현 식으로 하면 큰일 난다”면서. 이회창 후보를 내세워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두 번이나 패한 건 서민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해서란다.

    ▼ 영리병원 허용에 어깃장을 놓은 건 좌파적이지 않은가요? 국민건강보험공단을 맡지 않았어도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국회에서 일할 때도 전면적 영리법인화는 문제가 많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지난해 총선 때 공천 받지 못했다.

    ▼ 낙천했을 때 섭섭했죠.

    “처음엔 충격이 상당했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이었고 서열도 강재섭 대표, 이재오 최고위원 다음이었습니다. 정치인으로 굉장히 뛰어나다고 생각은 안 했지만…. 국회 보건복지위원으로 4년간 일하면서 국민건강보험공단을 들여다봤지만 여기로 올 거라곤 생각 못 했습니다.”

    ▼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이 자랑할 벼슬은 아니라고 말했다면서요?

    “예. 맞습니다.”

    ▼ 국민의 일상에 끼치는 영향이 상당하지 않은가요?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람을 느껴요.”

    1등 도맡은 엘리트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엘리트다. 1등을 도맡아 했다. “지난해 총선 낙천은 삶에서 두 번째 좌절”이라고 그는 말했다. 1945년 경남 거창군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수재였다. 경남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해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사법연수원과 군법무관 생활을 거쳐 1970년부터 검사로 일했다.

    하지만 검사, 법조인으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검사(8년), 변호사(5개월) 생활이 짧은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경력이 사람들에게 각인됐기 때문이다. 그는 1983년 안기부 대공수사국 법률담당관으로 파견된 뒤 대공수사국 수사2단장, 기획판단국장, 1차장(1994)을 역임했다.

    “안기부가 처리한 간첩사건이 고문했다, 뭐했다면서 대법원에서 무죄가 나오니까 전두환 대통령이 가장 똑똑한 검사를 골라서 안기부에 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안기부, 검찰, 법무부가 1등에서 10등까지 10명의 검사 리스트를 만들었는데 제가 세 곳 모두에서 1등을 했어요. 그렇게 해서 안기부로 갔습니다.”

    그의 정보기관 경력은 공안검사들의 경력 관리 차원을 넘는다. 국정원에 파견 돼 그처럼 오랫동안 근무한 검사는 없다.

    “원래는 1년가량 있다가 검찰에 돌아가는 스케줄이었는데 제가 성격이…. 안기부에선 6급이 최하위직인데, 그 친구들하고 허구한 날 밤을 샜습니다. 장충동에서 족발 사 먹고, 충무김밥 사 먹고 그랬죠. 그 직원들이 지금도 ‘저런 인간은 처음 봤다’고 말합니다.”

    국회의원 시절 그는 철저한 준비로 유명했다. 안기부에서도 그랬던 모양이다.

    “장세동 안기부장 때 수사2단장을 맡았습니다. 안보수사라고 해서 장관, 언론인도 관리하던 곳이죠. 안기부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이었습니다. 장세동 부장이 수사2단장을 물색하는데 그때 제 나이가 서른여섯인가, 서른일곱인가 그랬습니다. 당시 안기부 계장 나이가 평균 50세였습니다. 안기부장이 여론을 살펴보는데, 직원들이 ‘만날 밤새워 일한다’ ‘저런 놈 처음 본다’면서 저를 추천했습니다. 그 덕분에 법률보좌관으로 파견됐다가 지휘관에 올랐습니다.”

    좌파논리로 우파정책에 반기 든  정형근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지난해 11월26일 국회에서 열린 쌀직불금국정조사에 참석한 정형근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오른쪽).

    ▼ 그렇군요.

    “안기부에서 가장 많이 일했습니다. 기획판단국장 때 일입니다. 국장 앞으로 하루 2000건 넘는 첩보가 올라와요. 과장들도 자기 과가 생산한 첩보를 다 읽지 않습니다. 계장이 추려준 것만 훑어보죠. 저는 날마다 2000건을 다 읽었습니다. 그래서 문철만 보면 그 안에 어떤 정보가 담겼는지 다 압니다. 직원들이 놀라죠. 겁을 내고요. 글을 딱 읽어보면, 아~ 이 놈은 사우나 하다가 4시쯤 돼서 어디서 보고 베꼈구나 다 알죠.”

    ▼ 신문 몇 개 겹쳐서….

    “이건 신문 몇 개로 짜깁기한 거구나, 아, 이건 고민하고 쓴 진짜 첩보구나, 읽어보면 곧바로 드러납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와서도 건강보험에 관련한 모든 책자를 다 구해서 읽었어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의료개혁 방안이 담긴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도 모조리 읽었습니다. 아, 저 사람이 알고 지시하는 거구나, 나보다 더 알고 있구나, 이런 것이 리더로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리더가 공부를 게을리 하거나 열심히 안 하면 누가 따르겠습니까?”

    “모조리 읽었다”

    그가 배석한 직원에게 “책자 하나 좀 가져와봐”라고 말했다. 직원이 가져온 책은 두툼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의료개혁과 관련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는 부임 후 한동안 조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들여다보기만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의료정책을 다룬 책과 보고서를 섭렵했다. 좌파 성향의 책, 보고서도 탐독했다고 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의사, 치과의사, 약사, 교수를 상대합니다. 그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많이 알아야 해요.”

    그는 오바마식 의료개혁의 이데올로그(ideologues) 격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의 의견을 이렇게 평가했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크루그먼은 부시 정권과 보수주의자를 향한 공격수로 잘 알려진 진보주의 학자죠. 미국은 극소수의 억만장자가 과거보다 더 많아져 평균소득이 올라갔을 뿐이고, 불평등과 양극화가 되레 심화해 골고루 잘 살지 못한다는 게 그의 분석입니다. 그는 저서 ‘미래를 말하다’에서 현재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면 재정·금융정책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전 국민 의료보험 보장을 비롯해 사회복지 정책을 확대하고 임금 인상을 통해 노동자의 구매력을 높이는 게 긴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는 미래의 이상적 국가는 중산층이 중심인 사회로 그런 국가를 만들려면 사회안전망을 넓히고 불평등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부자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걷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는 선진국 중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가 없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크루그먼이 주장하는 정책은 보수와 진보를 떠나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갈등을 치유하고 국민을 통합하면서 취약계층 소외계층을 돌보는 게 국가의 기능입니다. 패자가 승자로 부활하게끔 도와줘야죠. 이것이 사회보장제도의 궁극적 목표, 신성한 가치라고 여깁니다. 서민이 돈이 없어서 치료시기를 놓치거나 포기하는 일이 없게끔 보살피는 게 건강보험의 구실입니다. 사회보장제도는 국가의 밑바탕이에요. 건강보험, 기초생활보장제가 있기에 우리가 지금 경제위기를 극복해나가는 것입니다.”

    주홍글씨

    ▼ 그런데 첫 번째 좌절은 뭐였나요?

    “1995년 난생 처음으로 참담한 좌절을 맛봤어요. 김영삼(YS) 대통령 때인데 제가 여러 가지를 살펴보니까 좁은 국토에서 시·구의원까지 선거로 뽑으면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방자치제도 실시와 관련해 여론조사를 해보라고 각 지부에 문건으로 지시했는데 어느 지부에서 그 문건을 김대중 총재 측에 넘겼어요. 그걸 ‘동아일보’가 톱으로 보도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별일도 아니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도덕 기준이 굉장히 높은 어른입니다. 기사를 보고는 노발대발해서 누가 이걸 했느냐, 그 사람 구속하라고 역정을 냈습니다.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했다. 다른 사람은 책임이 없다’면서 사표를 썼습니다. 원래는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으로 옮기기로 돼 있었는데….”

    그는 1995년 권노갑 당시 의원이 안기부가 작성한 지방자치제도 연기 문건을 언론을 통해 공개하면서 안기부 경력에 마침표를 찍었다. 안기부의 2인자인 국내담당이던 그가 야당의 폭로로 일격을 맞은 것이다. 그가 책임지는 자세를 보인 걸 YS가 높게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4개월 뒤 김영삼 대통령이 선거에 나가라고 말씀하더군요. 그렇게 정치판에 입문한 겁니다.”

    시국사건의 핵심에서 활약한 안기부 경력은 ‘정치인 정형근’에겐 마이너스로 작용했다. 용공조작, 정치공작이란 말이 이름 석자 뒤에 따라붙었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승리한 뒤 그는 수난기를 보낸다.

    “과거의 간첩사건 중엔 문제가 있는 것도 있겠죠. 북한이 우리의 모가지를 베어가고, 간첩을 남파하고 그런 상황에서 벌어진 일을 지금 잣대로 재단하는 건 잘못입니다. 그건 안 되는 거죠. 지금 잣대로 6·25 직후의 사건을 들여다보면 거의 모두가 무죄거나 잘못된 판결일 겁니다.”

    김대중 정부 때 안기부의 후신인 국정원은 ‘정형근 파일’을 언론에 흘렸다. ▲1992년 홍사덕 후보 비방 흑색 유인물 살포사건 ▲서경원 간첩사건 수사 및 가혹행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그가 연루됐다는 거였다. 정형근 파일은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고, ‘의혹’ ‘시비’로만 역사에 기록됐다.

    ▼ DJ 정부 때 공격을 많이 당했잖아요.

    그는 대답 없이 웃었다.

    2000년 2월 15대 국회 임기 종료를 앞두고 검찰은 ‘언론대책 문건’과 관련해 고소·고발된 그가 23차례에 걸친 소환 요구에 불응하자 긴급체포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수난은 기회로도 작용했다. 반(反) DJ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그는 정보맨 출신의 초보 정치인에서 유권자에게 주목받는 대중정치인으로 성장했다.

    ▼ 무서울 만큼 공격당했던 것 같은데요….

    “그때 잡혀갔으면, 여권이 준비를 다 해놓았으니까 구속되고 끝장났을 건데, 어쨌든 여러 과정을 겪어가면서 정치도 해보고 그랬습니다만….”

    그는 말머리를 돌렸다.

    “어느 분야 안 중요한 게 있습니까? 안보도 중요하고, 노동도 중요하고, 교육도 중요하지만 의료분야는 참 중요한 분야입니다. 인사할 때도 ‘건강하십시오’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두들겨 맞은 이사장

    그는 지난해 9월22일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 노동조합 눈치 보는 자리라던데요.

    “제가 다섯 번째 이사장인데 박태영 이사장 때는 노조한테 이사장이 두들겨 맞고, 옥상으로 끌려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회보험노조가 민주노총의 핵심이지요. 그런데 내가 와서 보니까 노조가 공부를 많이 했고, 실제로도 많이 압니다. 우수한 인력이 노조에 많아요.”

    ▼ 조직을 장악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공공기관, 공기업을 신이 내린 직장이라고 합니다. 공공기관은 부도가 날 염려가 없어요. 문제가 생기면 정부가 재정을 대주거든요. 그런데 공무원 조직과 유사한 공공기관, 공기업이 한국에서 가장 센 노동조합을 가졌습니다. 그건 잘못된 거죠. 전임 정권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권의 전리품으로 측근을 수장으로 임명해놓고 쟁의, 파업이 생기면 원인 찾을 생각은 안 하고 기관의 장한테 해결해라, 해결 못하면 책임지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기관장들은 책임을 회피하려고 노조의 요구에 굴종, 굴복했습니다. 그래서 이 모양 이 꼴이 된 겁니다. 노사문제는 첫째로 기관장이 원칙을 갖고 임해야 해요. 둘째로 수장한테 비리, 약점이 없어야 합니다. 승진 채용 납품과 관련해서 이권에 개입해 노조에 약점을 잡혀선 안 되죠. 자리보전에 연연하는 태도도 옳지 않습니다. 자리를 지키려다보면 원칙을 고수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직원의 대다수가 권익을 지켜주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건 경영진이 아니라 노조라고 여기더군요. 노조가 수호천사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정권의 전리품으로 온 사람들이 전횡하고 비리를 저지르다보니 경영진에 줄이 닿지 않는 직원들은 박탈당하고, 불이익당하는 기분을 느낀 겁니다.”

    ▼ 어떤 모습인지 그림이 그려집니다.

    “조직문화를 바꿔야 노조문제가 풀려요. 경영진이 조직의 비전을 명확하게 제시해야 해요. 그래야만 아, 저 사람을 따르고 믿으면 조직이 발전하고 내가 잘되겠구나라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봅시다. 의사협회가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를 요구합니다. 지금은 모든 의료기관이 국민건강보험공단과 무조건 계약해야 하죠. 의사협회는 다른 보험회사와 계약하고 싶다는 겁니다. 이런 주장이 제기됐을 때 이사장이 나서서 우리의 의견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문제를 해결해야죠.”

    “영리병원 허용은 위험한 선택”

    영리병원을 무한정 허용하면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위태로워진다. 당연지정제는 병의원을 개설할 때 자동적으로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계약돼 병원이 건강보험 진료를 거부할 수 없도록 한 제도다. 의사협회뿐 아니라 보험업계도 공세, 로비를 강화하고 있다. 건강보험을 보완하는 민영보험을 허용해달라는 것이다.

    ▼ 영리병원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좌파적 발상 아닌가요?

    “전 국민 건강보험은 좌파의 정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유럽에선 국가가 의료를 책임집니다. 사회보험도 아니고 국가보험인데 이건 완전히 좌파의 논리죠. 전 국민 건강보험은 제도 자체가 좌파의 논리로 설계된 것입니다. 한국의 건강보험은 유럽과는 조금 다릅니다. 정부가 의료를 전부 통제하는 건 아닙니다. 국가가 건강보험을 관리하면 국민이 돈을 안 내고 병원을 이용하는 건 좋은데 접근성에서 문제가 나타납니다. 치료를 받으려면 6개월, 1년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생기죠.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유럽 국가들이 민간보험을 10~15% 도입한 겁니다. 자본주의 메카인 미국이 지금 전 국민 의료보험을 도입하려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시장에 방임했더니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전면적으로 영리법인을 도입하면 상당히 큰 문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 경제자유구역 같은 곳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하자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명의(名醫)로 꼽히는 7명의 의사와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다. 의사들은 하나같이 “의료정책에서 한국은 사회주의국가”라고 지적했다. 영리병원을 허용하면 서비스의 질이 높아지고 외국환자 유치를 통해 국부가 늘어난다는 거였다.

    ▼ 영리병원을 도입하면 유발 효과가 클 것 같은데요.

    “병원에서 치료받는 건 사실 어떤 면에서 시장에서 경쟁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영국 프랑스 같은 민주주의 국가가, 그야말로 피의 항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확보한 나라가 오랜 역사를 거쳐오면서 아, 이것은 시장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고 결론짓고 규제하는 겁니다. 미국에 전 국민 의료보험이 없는 건 독특한 문화적 배경 때문인데, 결국 그것이 큰 문제를 일으켜서 지금 개혁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 의료산업화는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입니다. 산업과 공익의 접점은 어느 수준이어야 할까요? 윈▼ 윈하는 방법은 없나요?

    “영리병원은 점진적으로 허용해야 해요. 너도나도 마음대로 영리병원을 세우면 어떻게 될까요? 삼성화재, 삼성생명, 현대해상화재, LIG보험이 앞 다퉈 늘씬한 병원을 지을 겁니다. 그러곤 연봉 5억, 10억원을 주고 의사들을 모셔오겠죠. 영리병원은 필수 의료를 등한시하고 돈 되는 진료에 주력할 겁니다. 영리병원 허용은 의료비의 급격한 증가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수익성 높은 고가 의료서비스가 확대돼 의료 자원과 서비스 배분에 왜곡도 나타납니다. 병원들이 수익성이 떨어지는 필수 의료, 저소득층 진료를 기피해 의료 양극화가 발생할 수도 있고요. 사실 영리병원을 도입했다고 의료서비스의 질이 높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영리병원은 연구, 교육 투자에 소극적이어서 선진국일수록 유능한 의사는 영리병원을 기피한다고 합니다. ‘유에스뉴스앤월드리포트’가 해마다 병원을 평가하는데 비영리병원들이 상위권을 차지합니다. 국민건강보험제도의 근간을 훼손해서는 안 돼요. 당연지정제를 확고히 유지하고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더욱 강화해야 합니다.”

    ▼ 한국의 건강보험제도는 전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제도라더군요.

    “얼마 전 뉴질랜드에 다녀왔습니다. 우리는 마음대로 삼성병원, 서울대병원에 가는데, 뉴질랜드 사람들은 반드시 1차병원에 먼저 들러야 해요. 1차병원이 문지기 구실을 하는 거죠. 그런데 1차병원은 의료보험 적용이 안 됩니다. 교포들한테 여쭤보니 감기로 병원 가면 7만원, 8만원 든답니다. 비싸서 병원에 잘 못 간대요. 물론 2차, 3차는 치료비가 공짜지만요. 한국은 의료의 천국입니다. 저도 병원에 이따금 갑니다만 약국 가서 약 타면 깜짝 놀라는 게 3500원, 5000원만 내면 끝이에요.”

    독특한 제도

    ▼ 마트 가듯이 병원 가기는 합니다만….

    “우리 제도를 자꾸 발전시켜야 해요. 자칫 잘못해서 이게 무너지면 발생할 사회적 문제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 영리병원 허용이 정치적으로도 위험한 선택이라고 여기는군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자랑이 접근성입니다. 야밤에 병원 응급실에 가보세요. 돈 없고 남루한 사람도 박대받지 않습니다. 막노동자, 부자가 똑같습니다. 차별이 없어요. 현재의 미국 같은 제도를 도입하면 정권은 물론이고 사회에 큰 혼란이 온다고 생각해요.”

    ▼ 한국의 건강보험은 접근성은 높지만 보장성은 떨어집니다. 보장성을 높일 복안은 갖고 있습니까?

    “미국은 4600만명이 의료보험에 가입해 있지 않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모든 국민이 적절한 비용으로 의료 이용이 가능한 의료 보장체계를 구축하려고 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추구하는 의료보험은 한국이 20년 전부터 시행해온 ‘전 국민 건강보험, 단일보험 체계’를 지향하는 겁니다. 1890년 우리에게 서양 의료기술을 전파한 미국이 이제는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을 배우려고 합니다. 캐슬린 시벨리우스 미국 보건부 장관이 ‘한국의 건강보험제도에 대해 미국이 배울 게 많다’고 언급할 만큼 건강보험제도는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제도로 인정받고 있어요. 건강보험은 낮은 비용으로 세계 최고의 의료접근성과 양질의 보편적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지속적으로 보장성이 강화되고 있고요. 보장성을 강화하려면 보험재정을 안정적으로 확충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보험료를 인상해야 하고 국고를 지원받아야 합니다. 담배, 주류에 건강부담금을 부과하는 등의 방법으로도 추가 재원을 확보할 생각입니다.”

    ▼ 청와대도 친(親)중산층·친(親)서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참 좋은 백그라운드를 갖고 있습니다. 서민 중의 서민 아닙니까? 청소부 출신이 대통령에 오른 겁니다. 한국이 발전하려면 기업이 잘돼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친기업 정책 쪽으로 드라이브하다보니 야당, 국민이 일부 오해를 하는데 그런 게 아닙니다. 이 대통령은 전 재산을 사회에 내놓았습니다. 돈 안 아까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낮은 곳을 찾아가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어요. 좀 전에도 말했지만 정부는 광대한 비전을 제시한 뒤 약자가 패자부활전에서 이기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기초생활수급자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건 일종의 혁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좋은 제도 아닙니까. 의약분업도 마찬가지고요. 노무현 대통령은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를 도입했고요. 저는 쌍용차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직원을 함부로 자르는 건 참 신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잘린 직원들이 허허벌판에 나가면 어린 자식을 어떻게 키우겠습니까? 해고를 당하면 갈 데가 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대응한 거죠. 한국의 실업급여가 3~4개월에서 8개월까지로 이뤄졌을 겁니다. 급여의 50% 정도로 알고 있는데, 저는 실업급여를 급여의 70,80%로 올려서 2, 3년은 보장해주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지금 말씀은 유럽 사회민주주의자가 할 말 같은데요.

    “크루그먼도 비슷하게 주장했는데 그런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근로자가 해고당하면 두 살, 네 살짜리를 데리고…. 사람을 완전히 밖으로 던져놓아서는 안 돼요.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정 이사장도 이 대통령처럼 가난하게 자랐다. 굶어본 적도 있고, 집안 형편 때문에 학교를 쉰 적도 있다. 돈이 없어서 가족이 병원에 못 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란다.

    “세상이 바뀌었다”

    그는 남북관계에서도 정통 우파와는 다른 색을 드러낸다.

    ▼ 어떤 스님의 영향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법륜스님입니다. 좌파는 아닌데 진보적인 아주 훌륭한 스님이 계십니다. 남북관계 일도 많이 하시는데 추앙받는 분입니다. 전향적 사고가 굉장히 훌륭합니다. 남북관계와 관련해 그분하고 가깝게 지내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사정이 어떻든 많이 접촉하고, 대화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잘 안 되면 비선을 통해서라도 풀어야죠.”

    ▼ 법륜스님이 정부 지원이 끊겨 고생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좌파라는….

    “좌파는 절대 아니에요. 자기희생이 철저한 분이죠.”

    그는 2007년 한나라당의 대북정책인 ‘한반도 평화비전’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한나라당이 바뀐 것으로 보면 됩니다. 북한은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지원이 끊길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데, 그건 오해입니다. 새 정책은 지킬 건 지키고 지원할 건 지원하자는 겁니다. 북한 체제를 인정한다는 뜻도 담겨 있고요. 한나라당 지지층인 정통 보수세력도 이젠 바뀌어야 해요. 북한의 핵 폐기가 전제되지 않아도 경제협력과 지원 등 대북접촉 기조를 유지할 겁니다.”

    ▼ 함세웅 신부를 통해서 평양 방문도 추진했었죠?

    “안기부에서 일할 때 함세웅 신부는 저와 적대적인 관계였는데 나중엔 여러 가지 뜻이 같아서 ‘함께 가자’ 이렇게 된 겁니다. 남북문제는 개인적이든 공식적이든 기회 있을 때마다 공부를 하고, 역할을 할 생각을 갖고 있어요.”

    당시 북한은 그에게 초청장을 발급해주지 않았다. 보수단체는 변절자라면서 그에게 달걀세례를 퍼부었다.

    ▼ 2008년 7월 향군회관에서 달걀 세례를 받았을 때는 기분이 어땠나요?

    “박세직 재향군인회장 시절인데 탈북자, 강경파가 저한테 달걀을 던졌습니다. 얘기 나온 김에 생각을 말해보겠습니다. 이회창 총재가 대선에서 두 번 실패했습니다. 미국 공화당, 민주당도 비슷해요. 공화당은 연거푸 선거에 지고 난 뒤에 영원히 집권 못할 수도 있다고 여기고 한나라당이 천막당사 할 때와 비슷한 정신으로 국민과의 약속을 만들어냈습니다. 공화당이 강점을 가진 시장경제, 작은 정부를 계속 주장해나가되 이민자 문제, 흑인 문제, 저소득층 문제는 민주당의 주장을 차용해서 선거에서 이슈가 안 되도록 차단해야 한다는 거였죠. 그렇게 해서 공화당의 조지 W 부시가 두 번 연속 집권합니다. 국민이 한나라당을 재벌당, 교수당, 변호사당, 돈 있는 당, 강남을 위하는 당이라는 식으로 여기면 선거에서 이기기 어렵다고 봅니다. 공천할 때도 만날 변호사 교수를 뽑으면, 이게 교수당이냐 변호사당이냐는 비아냥거림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빈민층 지도자, 신망 있는 사람을 공천해야지 우리가 집권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잘 안 가려고 하는 상임위원회가 보건복지와 환경노동입니다. 대권에 야심 있는 유시민, 손학규, 이해찬은 보건복지, 환경노동 분야에서 일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쪽으로 가겠다는 사람이 없어요. 대북문제에서도 항상 강경합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가장 보수적인 집단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저는 생각이 달라요. 제가 무슨 영합하려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이젠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을 마지막 공직으로 여기는 건 물론 아니겠죠?

    “뭐…. 저는.”

    ▼ 예전엔 통일부 장관에 관심이 있지 않았나요?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면, 저는 우리가 풀어야 할 국가적 어젠다가 큰 틀에서 남북통일, 즉 남북문제와 저출산 대책이라고 여겼습니다. 국가가 갈라진 나라가 또 있습니까? 역사의 흐름은 통합 쪽으로 이어질 텐데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의 한구석에서 주역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 게 꿈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책도 몇 권 쓰고 건국대에서 5년간 강의도 했어요. 남북문제를 다루고 싶은 생각은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 바람을 접은 건 아니군요?

    “뭐…. 그렇죠. 살다보면….”

    “한번 하면 끝장내는 성격”

    ▼ 지난 대선 때 이명박 후보를 역량만큼 안 도와줬다는 평가가 많더군요. 100쯤 도울 수 있는데 70,80만 도왔다는….

    “살아온 과정을 비롯해 여러 가지로 볼 때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지선언을 했습니다. 다른 의원들을 설득하기도 했고요. 모함을 받고, 오해를 산 건 최고위원으로서 경선을 완벽하게 관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캠프에서 일하는 것보다 경선이 끝까지 가게끔 하는 게 중요했어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말할 기회가 있겠습니다만 오해를 받고 낙천된 데는 그런 게 원인이 됐죠.”

    그는 늘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다. 안기부에서 일할 때도, DJ 저격수 구실을 할 때도 그랬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을 열심히 한 게 거꾸로 족쇄, 낙인이 되기도 했지만. 국민건강보험공단 직원들은 일을 향한 그의 열의에 혀를 내두른다.

    “매주 금요일 오전 7시 반에 금요조찬회를 열어요. 9시 반까지 집중토론을 합니다. 보건의료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조찬회일 겁니다. 공단에 비판적인 분도 모십니다. 매주 토요일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 반까지 아주 무거운 주제를 골라서 서너 꼭지를 다룹니다. 토요일에 나오는 걸 직원들이 처음엔 힘들어했어요. 지금은 직원들도 공부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전국의 본부, 지사로 세미나가 번져 나가면서 전체 직원의 지식수준이 올랐습니다.”

    그가 1등을 도맡아 한 건 IQ150의 두뇌 덕분만은 아닌 듯하다.

    “2004년 총선 때 여론조사를 매일 했습니다. 열린우리당 이철 후보 쪽은 선거운동 마지막 날 여론조사 결과를 본 뒤 만세 부르고 선거운동을 끝냈어요. 저는 혼자 들어앉아서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면서 1200명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결국 7% 이겼어요. 한번 하면 끝장내는 성격입니다. 절대로 지지 않습니다. 내가 책임자로 있는 한 우리 조직은 세계 최고의 보장기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직원들 수준이 굉장히 높아요. 우리 조직은 지지 않습니다.”

    그는 깐깐하거나 고집스럽기보다는 소탈하면서도 자기확신이 강했다. 그런 성격이 정보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평가도 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좀 전에 했던 말을 또 했다. 그는 또박또박 말했지만 머뭇거리는 표정이었다.

    “기회가 닿으면 남북문제를 다뤄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가 바람을 이룰지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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