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호

“우리가 슬픈 노래 부르면 그는 눈물을 흘렸다”

[단독 인터뷰] ‘김정일의 여인’이 밝힌 김정일 사생활

  • 주성하│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

    입력2009-12-04 13: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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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자 중에서 자신을 ‘김정일 기쁨조’ 출신이라고 밝히는 여성들이 간혹 있다. 국내외 언론 인터뷰 기사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실체를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김일성대 출신으로 북한 전문기자인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가 ‘실체’를 직접 확인한 여성을 최근 인터뷰했다. 이 여성에 따르면 북한에는 ‘기쁨조’라는 말 자체가 아예 없다고 한다.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해 그의 실명은 공개하지 않는다. <편집자>
    “우리가 슬픈 노래 부르면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에게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얽힌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꽤 오래전이었다. 김정일의 기쁨조 일원이었다고 주장한 여성은 이전에도 여럿 있었고 새로 들어오는 탈북자 중에서도 자기가 기쁨조였다고 주장하는 여성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는 것은 팩트의 차이다. 아무리 책에서 본 내용을 짜깁기하고 없는 사실을 꾸며대더라도, 자신이 모르거나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런 말은 조금만 들어봐도 어설프다.

    또 하나. 특히 이러한 주장에는 단 한 곳도 손댄 흔적이 없는 자연적인 미모와 날씬한 몸매, 매력과 같은 결정적인 ‘증거’가 따라야 한다.

    그녀가 그렇다. 그녀는 현대의학의 혜택과는 연관이 없는 미인이다. 북한에서 중앙당 소속 사진사가 찍어주었다는 10대 시절 사진 속의 그녀는 더욱 아름다웠다.

    그녀는 그동안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정일의 와병설이 터진 올 초부터 심경에 변화가 일어난 듯했다. 이 글은 그녀와의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정리한 내용이다. 김정일의 사생활은 늘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이지만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 지금까지 김정일과 관련됐었다는 사실을 저에게 숨기지 않으면서도 기사화는 굳이 피했던 이유가 있나요?

    “우선 기쁨조였다며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마치 김정일의 성노리개였던 것처럼 바라볼까봐 두려웠죠. 저는 잠자리를 같이하지는 않았거든요. 그게 싫어 남한에 입국해 조사받을 때 김정일과 있었던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도 않았어요. 사실 북한에는 기쁨조니, 만족조니 하는 말조차 없어요. 여기서 다 지어서 붙인 것이지요. 그리고 김정일 옆에 더 있기 어려운 일이 제게 일어났을 때, 그가 저는 특별히 살려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했어요. 원래 저같이 그의 옆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들은 사람은 살아서 그곳을 벗어나기 힘들거든요. 어쩌면 김정일이 저에게 자비를 베풀었고, 저는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볼 수도 있죠. 예전에 어떻게 하다보니 해외 언론에 한번 나간 적이 있어요. 그 나라 말을 모르다보니 그곳 언론에 어떻게 소개됐는지 알 리 없었죠. 훗날 한번은 사실을 왜곡한 기사가 나가 항의했더니 “그럼 소송 거세요. 여긴 외국이라 이기려면 아마 수십 년이 걸릴 걸요” 하는 거예요. 정말 화가 나더군요. 그런 체험을 통해 언론 기피증도 생겨난 것 같아요.”

    ▼ 그렇다면 지금은 언론에 나가도 되는가요.

    “늘 기사를 쓰고 싶어했잖아요? 제가 결국 항복한 거죠.(웃음) 대신 너무 캐묻진 마세요. 사실 이것이 국가를 위해 중요한 정보도 아니고, 그냥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데 불과하잖아요. 제가 입을 열 필요도 없어요. 어차피 지금도 시시콜콜 다 이야기하고 싶진 않네요. 그냥 김정일이 병에 걸려 수척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보니 인생무상이란 말이 떠오르더군요. 어차피 그가 죽은 뒤에 다 공개될 일인데 지금 말하면 어떻고, 말하지 않으면 어떻고, 아무튼 전 아직 잘 모르겠어요. 제 말이 누구에게 도움이 될지도…. 그리고 이제는 시간도 많이 흘러갔어요. 제가 김정일 옆을 떠난 지 벌써 12년이 지났어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5과’에 뽑히다

    ▼ 김정일 위원장 옆에는 어떻게 가게 됐나요.

    “저는 5과에 뽑혔습니다. 5과 선발은 중앙당에서 전국 학교를 돌면서 예쁜 여자들을 뽑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지방, 평양, 중앙당을 거치면서 1,2,3차까지 시험을 보죠. 얼굴과 성격, 심성, 목소리, 키, 처녀성 검사 등 온갖 깐깐한 검토를 거쳐 최종 10명 정도 선발됐습니다. 키는 158~165㎝ 사이에서 뽑습니다.”

    ▼ 5과 선발 중앙당 시험을 통과한 이후 어떻게 됐습니까. 거기서부턴 아직 알려진 사실이 없거든요.

    “최종 합격까지 선발 과정이 1년 넘게 진행됩니다. 최종 시험이 끝난 뒤 집에 내려가 있게 하는데 나흘 뒤인가 중앙당에서 차가 왔습니다. 남이 볼까봐 밤에 옵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딸을 조국을 위해 큰일을 하게끔 훌륭하게 키워 감사하다는 내용의 글이 적힌 감사패를 줍니다. 특기할 점은 돈도 주는데, 당시 노동자 월급과 비교해보면 거액이었어요.”

    ▼ 그러고는 어디로 데려가던가요.

    “비밀 학교로 데려가 교육을 시킵니다. 하지만 학교에 가기 전에 충성서약식을 합니다.

    서약식 과정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길이 70㎝, 너비 50㎝ 정도 되는 대형 책을 하나 내놓더군요. 표지는 검붉은색이고, 가장자리에 금테를 둘렀어요. 겉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5과’라는 글씨 옆에 무슨 숫자가 있는데 아마 우리 기 번호인 것 같습니다. 여러 사람의 명부가 있는 것 같은데, 다른 사람 것은 모르겠고, 제게 할당된 것은 세 장 정도 됩니다. 첫 장에는 가족사항, 학교평점, 성적 등 인적사항이 적혀 있고, 셋째 장에는 3차 시험까지의 평가와 신체검사 결과가 있는 것 같았어요. 둘째 장에는 사진 5장이 붙어있어요. 정면, 옆모습 등 다양한 각도의 사진이 위에 붙어있고, 전신사진은 첫째 사진 아래에 붙어있어요. 사진이 붙어있는 모양은 ㄱ자를 돌려놓은 것과 같은 구도죠. 그리고 사진을 붙이고 남은 공간에 불러주는 대로 글을 쓰라고 하더군요. 충성 맹세였어요. 글을 예쁘게 잘 쓰라고 자꾸 강조하던 것이 생각나요. 아마 김정일에게 올라가는 책이었을 거예요. 다 쓴 뒤 그 아래에 혈서를 쓰게 해요.”

    발탁 앞서 혈서 썼다

    ▼ 혈서까지 쓰게 한단 말인가요?

    “예, 처음에는 혈서를 써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먼저 이렇게 물어요. ‘가장 소중한 손가락은 어느 것인가요. 만일 손가락 하나만 남긴다면 어느 손가락을 남기고 싶습니까.’ 저는 고심하다가 검지를 골랐어요. 그랬더니 한 뼘 정도 길이의 외제 칼을 소독 솜으로 쓱쓱 문지르고 주는 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혈서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어요. 하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칼로 긋긴 했는데 피가 적게 나는 거예요. 다시 하라고 해서 이를 악물고 다시 그었죠. 그 손가락으로 제가 충성맹세를 쓴 아래쪽에 그 간부가 불러주는 대로 ‘충성으로 복무함’이라는 일곱 글자를 썼죠. 그 다음 간부가 무슨 도장을 꽝 찍었어요.”

    ▼ 비밀 학교라면 눈을 싸매고 들어가는 그런 곳을 연상시키는데요.

    “눈은 안 싸매요. 혈서 쓰고 벤츠를 타고 가는데, 운전기사가 앞에 있고, 뒷좌석엔 저와 안내인이 함께 탔어요.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엔 레이스가 달린 커튼이 있어요. 그리고 옆에도 다 커튼이 쳐 있고요. 그러니 밖을 내다볼 수도 없거니와 운전기사도 저의 얼굴은 볼 수 없는 구조예요. 물론 커튼은 닫았다 폈다는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승인 없이 그렇게 할 수는 없잖아요. 이후에도 제가 타고 다닌 벤츠에는 거의 다 커튼이 쳐 있었어요. 물론 커튼 색깔이랑 두께는 차마다 달라요. 외국 정상이 북한을 방문하면 타는 리무진도 탄 적이 있어요. 학교는 평양 교외에 있어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밖에서는 볼 수 없는 곳입니다. 거기에 층고가 높은 3층짜리 건물이 하나 있었어요. 지하로도 3개 층이 있습니다. 건물 모양은 만경대학생소년궁전처럼 둥근 반달 모양입니다. 그 가운데 김정일 동상이 있고 동상의 대리석 받침판에 학교 이름이 적혀 있죠. 김정일 동상은 살면서 거기서 첨 봤어요. 건물 길이는 100m가 넘어요. 아마 중앙당 5과 건물인 것 같아요.”

    ▼ 신분이 달라졌으니 으리으리한 방이 기다리고 있었겠네요.

    “아닙니다. 처음 안내된 방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요. 화장실과 이불만 있고 정말 하나도 없어요. 아주 작은 뙤창문이 하나 붙어있는데, 제 키로는 밖을 내다볼 수 없었어요. 밤에는 밖에서 이상한 새소리들과 벌레 소리들이 나서 무서웠어요. 어떤 남자가 밥을 날라 올 때만 사람을 볼 수 있는데 그나마 말도 못해요. 매일 책을 가져다 줘요. 김일성·김정일 노작, 혁명역사 등 밖에서도 봤던 책들이고 소설책도 있었어요. 책을 읽고 반드시 감상문을 써야 해요. 책 하나를 놓고도 감상문을 몇 가지로 쓰라고 해서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책을 받쳐놓고 서면 창밖을 내다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방의 천장에 감시 카메라까지 붙어있어 그럴 엄두를 못 냈어요. 이건 뭐 감옥과 똑같았죠. 머리가 정말 복잡하더군요. 남들이 다 좋은 데 간다고 했는데 내가 왜 이런 데 와 있나,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나 정말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랬어요. 다행히 끼니때마다 예전엔 구경도 못했던 세계 여러 나라 음식을 다 갖다주어 감옥은 아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간첩으로 키워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왜냐면 학교 이름이 ○○군사학교이기 때문이죠. 학교 이름은 쓰지 마세요. 이름이 알려지면 아마 여기 출신이라고 사칭하는 사람들이 나올 거예요.”

    ▼ 감금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졌나요.

    “한 달입니다. 한 달쯤 지난 뒤 어떤 방에 데려갔는데 그 자리에 여자애 10명이 있었어요. 얼굴을 처음 보는 애도 있었고 3차 시험 때 본 애도 있었어요.

    모두 전국에서 고르고 골라 뽑아온 나름 개성 있는 미인이죠. 외국 여자같이 생긴 애도 있어요. 제가 제일 어린 또래 같지만 서로 정확한 나이는 몰라요. 사적인 말을 못하게 엄격히 통제하거든요. 2년 동안 서로 거의 말을 안 하고 살았어요. 그리고 선배도 후배도 없어요. 한 기수를 졸업시키고 그 뒤에야 새로 받는 것 같았어요. 그 자리에서 학교 입학식을 한다고 하면서 군복을 내주었어요. 넥타이를 매는 인민군 협주단 군복 비슷한 것을 주더군요. 입학식이 끝나고 다시 제가 있던 방으로 돌아갔지만 생활에 변화가 있었어요.”

    ▼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우선 외출이 허용됐어요. 일주일에 한두 번씩 평양 시내에 데리고 나갑니다. 아주 멋진 양복차림으로 나가요. 좋은 곳도 구경시켜주고 고급식당도 데려가죠. 옥류관에 귀빈용 방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어요. 향만루 같은 고급 식당도 갔는데, 가기 전에 미리 방을 다 예약해서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게 하지 않아요. 다시 한 달 지나서부터 사진을 엄청 많이 찍어요. 화장 안 하고 찍고, 화장 진하게 하고 찍고 그러는데, 아마 김정일에게 보내나 봐요. 그리고 사진사가 인심 좋게 이건 보관하고 있으라면서 사진을 주기도 해요. 그때 받은 사진을 남한에 몇 장 갖고 왔어요.”

    ▼ 학교생활은 어땠나요. 이를테면 교육과정이라든가 하는 것 말입니다.

    “공부도 하고 사격이나 수영도 시키고, 비디오도 보고, 예능 훈련도 하고, 식사예절 등등 아무튼 여러 가지를 배우죠. 상세히 말하려면 끝이 없어요. 저희 10명을 가르치는 언니는 모두 3명이었습니다. 제가 있던 건물은 구조가 아주 특이해요. 공부하러 갈 때는 같은 층에 가면서도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면서 가요. 한마디로 구조를 알 수 없는 미로처럼 만들었죠. 실제 있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상상이 안 돼서 그 구조를 그리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건물의 방음이 너무 잘돼 있어 조용해요.”

    ‘장군님 보위하리’ 컴퓨터 게임

    ▼ 계속 아무것도 없는 그 방에서 생활했나요.

    “아니요. 석 달쯤 됐을 때 저를 2층의 다른 방으로 데려가더군요. 예전에 머물던 방은 건물의 날개 부분에 위치했는데 옮겨간 방은 건물 중심 쪽에 있었습니다. 이전 방보다 훨씬 크고 침대는 없지만 장도 있고, 책상도 있고, 컴퓨터도 있고 그랬어요. 심심할 땐 컴퓨터 게임도 했는데, 이런 게임도 있어요. 게임 제목이 ‘장군님 보위하리’인가 그런 것인데, 적을 죽이면서 미션을 수행하고 끝까지 가면 머리가 곱슬머리이고 점퍼를 입고 배가 나온 작은 사람이 나와서 ‘짝짝짝’ 박수를 치고 손을 흔들어요. 누가 봐도 그 캐릭터가 김정일인 걸 알죠. 박수를 치면 주변 배경음악으로 ‘만세’하는 소리가 들리고. 아무튼 게임까지 충성심을 유도하는 것이라니깐요. 그게 1990년대 중반인데 그런 게임이 있었다는 것은 아마 상상도 못하실 걸요.”

    최종 2명에 발탁

    ▼ 그 방에도 혼자 있었나요.

    “아니요. 새 방으로 옮겨간 다음부턴 미옥 언니와 한방에서 지냈어요. 저희들을 가르치는 3명의 선생 중 조장 격이었어요. 미옥 언니는 소좌(소령)였어요. 그렇지만 군복은 안 입어요. 언니와 나는 누구나 친자매 같다고 할 정도로 정말 비슷하게 생겼어요. 키도 둘이 거의 비슷하고요. 언니랑 같이 산 다음부턴 김정일을 만날 때를 포함해서 어딜 갈 때마다 그 언니와 항상 함께했어요. 저희 기 10명 중에 교관 언니와 함께 생활한 것은 함흥예술학원에서 성악을 전공한 영미라는 애와 저 두 명뿐이었어요. 영미와 저는 2층에서 언니들과 있었고 나머지 8명은 1층에서 살았습니다. 영미와 함께 있던 언니 이름은 미소였어요. 미소 언니보단 미옥 언니가 상관이었습니다. 이후 김정일을 만날 때는 언니들과 나, 영미 이렇게 4명이 늘 만났습니다. 물론 저와 미옥 언니만 만날 때도 있었고요. 아마 10명의 사진을 엄청나게 찍어서 올려간 뒤 김정일이 저희 두 명을 최종 낙점했고 그래서 저희만 언니들과 특별히 생활한 것 같아요.”

    ▼ 김정일을 처음 본 것이 언제죠.

    “1995년 늦은 여름쯤 됩니다. 학교생활을 시작해 반 년이 안 됐을 때입니다. 갇혀서 지내다보면 시간 개념이 없어져요. 이틀 전에 미옥 언니가 저와 영미를 불러다 ‘너희들은 장군님을 곁에서 보필하는 일을 맡아서 할 것이다’고 아주 엄숙하게 이야기 해주었어요. 여러 주의사항도 자세히 알려줘요. 과잉반응하지 말고 차분하게 행동하라는 것, 장군님의 말씀이 끝나면 자기가 하는 대로 따라서 박수를 치라는 것 등등을 말해줍니다. 저는 어렸을 때 설맞이공연에 참가해 김일성과 김정일 앞에서 공연을 한두 번 했었습니다. 영미는 그런 경험이 없었어요. 영미에게 더욱 조심하라 당부하더군요. 그날 저는 한숨도 못 잤어요. 말해준 그날부터 마사지를 받게 하고 머리도 손질시키고 그랬어요. 당일 날에 분장을 다 시켜요. 저는 10대이니 그 나이에 맞게 화장도 아주 살짝 하죠. 학교에선 매일 아침 입을 옷을 지시해줘요. 그런데 그날은 옷을 새로 가져다주었어요. 저희 신체 사이즈는 이미 다 파악돼 있기 때문에 훗날 말만 하면 어디서 제 몸에 딱 맞는 옷을 만들어 와요.”

    첫 만남

    ▼ 어디에서 만났나요.

    “커튼을 친 차를 타고 가다보니 정확하겐 모르지만 지하는 아니었습니다. 도착해보니 저까지 모두 다섯 명이 와 있었어요. 미옥 언니와 저, 미소 언니와 영미, 그리고 또 한 애가 있었는데, 그애는 함께 온 언니가 없었어요. 그리고 이후에 저희가 김정일 만날 때 다신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마 김정일이 사진을 보고 저희 두 명은 물론 그 애까지 한번 보자고 했던 것인데 결국 최종 낙점이 되진 않았던 것 같았어요. 물론 그 애도 미모는 출중했고, 어딘지 모르게 북한 영화배우 오미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애였어요. 그 다섯 명이 입은 옷은 다 달랐어요. 아마 각자 개성에 맞게 입게 한 것 같아요. 어떤 방문 앞에 이르더니 미옥 언니가 먼저 들어갔다 나왔어요. 그리고 우리도 함께 들어갔습니다. 김정일이 어떤 사람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던 중이었는데 우리가 들어가자 그 사람은 나갔어요.”

    ▼ 처음 만날 때 많이 긴장하지 않았나요.

    “아시다시피 북한에선 태어나서부터 김정일을 신처럼 생각하게 우상화 교육을 받지 않습니까. 그를 보기만 해도 눈물을 쏟을 정도로 말이죠. TV에서 보면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다 만세를 외치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를 보자마자 미리 주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만세를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 마음이 조마조마해 망설여졌어요. 하지만 언니들은 자연스럽게 악수를 나누는 것이었어요. 저도 언니가 하는 대로 상당히 긴장한 상태로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6인용 테이블에 앉았어요. 그가 가운데 앉고 그 양옆에 언니들이 앉고, 우리 셋은 그 맞은편에 앉았어요. 밥을 먹는 와중에 미옥 언니가 저에 대해 설명하고, 미소 언니가 영미를 설명하고 했어요. 그런데 김정일이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저희더러 차례로 일어서서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떨리는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했어요.”

    ▼ 그날 뭘 먹었습니까.

    “이탈리아 요리가 나왔어요. 스테이크와 스파게티 이런 거요. 와인도 마셨어요. 참 특이한 것은 메인이 이탈리아 음식인데도 상어 요리가 나왔어요. 요리마다 참 맛이 있었어요. 생전 그렇게 맛있는 요리는 처음입니다만, 저는 너무 긴장해서 얼굴도 제대로 못 들고 밥을 먹었죠.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였어요. 다만 미옥 언니와 미소 언니는 아주 편안하게 이야기를 했어요. 김정일은 연신 우리들에게 자상한 목소리로 ‘마음 편히 가지고 천천히 많이 먹어’하고 말했어요. 우리 표정이 굳어있으니 자기도 불편한 듯한 기색이었습니다.”

    ▼ 김정일을 직접 앞에서 본 느낌이 어땠습니까.

    “직접 코앞에서 보니 이웃집 아저씨처럼 평범했어요. 그동안 TV나 사진에서 봐온 모습과는 달리 몹시 수척하고 웃음이 없는 우울한 표정이었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표정은 점점 나아졌습니다. 그리고 얼굴에 검은 점 같은 얼룩도 많고, 이는 누렇고 아무튼 그때까지 갖고 있던 신비스러웠던 환상이 많이 깨졌어요. 그렇지만 참 자상하게 잘 대해주었어요. 그리고 밥을 먹던 와중에 김정일이 무슨 훈시 같은 말을 하면 미옥 언니가 먼저 박수를 치고 우리도 따라 치고 그랬어요. 떠날 때는 선물도 주었어요. 초콜릿과 중국 월병 비슷한 것이 들어간 세트와 함께 김정일의 이름이 새겨진 시계도 주었어요. 김정일 특유의 흘려 쓴 자필 글씨가 새겨져 있었어요. 사실 북한에선 명함시계라고 해서 김일성의 이름이 새겨진 시계는 있지만 김정일의 이름이 새겨진 시계는 민간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어요. 그리고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진주목걸이와 화장품을 선물로 받았어요. 저와 영미만 받고 언니들은 받지 않았어요. 미옥 언니가 김정일이 선물 줄 때쯤을 미리 짐작하고 밖에 나가서 선물들을 가져와요. 그럼 김정일이 저희에게 그 선물들을 안겨주는 것이죠.”

    ▼ 두 번째로 만났을 때는 어땠나요.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밥을 먹고, 가라오케 방에서 노래도 부르고 그랬어요. 만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도 나중엔 아주 허물없이 우리를 대했어요.”

    김정일의 ‘혁명 방귀’

    ▼ 허물없다고 하면 어떤 정도를 말하는 건가요.

    “음,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 나중엔 방귀도 서슴없이 뀌었어요. 아무리 우리 앞이라 해도 처음엔 안 그랬거든요. 그의 방귀는 ‘혁명적’으로 뀐다고 표현하면 아마 적절할 걸요. 아무튼 아주 서슴없었어요. 그럴 정도로 허물이 없었죠. 냄새가 나도 저희는 표정이 달라질 수도 없고 숨을 참아서도 안 되고 하니 그냥 웃으면서, 아무튼 그래요. 우리 앞에서도 처음에 그렇게 조심했으니 김정일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져도 아랫사람들 앞에선 체면을 중시하는 것이죠.”

    ▼ 아까 노래를 불렀다고 했는데 노래방 분위기는 어땠나요.

    “저랑 영미에게 노래를 시켜보는 자리 비슷한 거죠. 영미는 성악과를 졸업해서 노래를 참 잘했어요. 영미는 ‘장군님 찬 눈길 걷지 마시라’라는 노래를 불렀어요. (※참고로 이 노래의 2절은 이렇다. 장군님 찬 눈비 맞으시면서/험한 길 더는 걷지 않게/날마다 기쁨을 드리는 길에/이 한 몸 바치렵니다/우러러 바라는 간절한 소원입니다/장군님 장군님 부디 안녕하시라) 영미는 성악한 애답게 후렴구에 가서 ‘장군님, 장군님’을 부를 때는 막 눈물을 흘리면서 목소리에 감정을 가득히 담았어요. 북한에서 성악을 하면 얼굴 표정을 오버하는 습관이 생겨요. 북한 예술단 공연을 보면 그렇잖아요. 저는 영미를 보며 ‘참 잘 부르네, 칭찬받겠네. 나도 저렇게 해야 할 텐데’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의외로 김정일은 별로 기뻐하는 표정도 없고, 무덤덤하게 ‘잘했어. 목소리가 참 고와’ 이러는 거예요. 제 차례가 됐는데, 저는 노래는 영미보다 못해요. 저는 일본 노래 ‘미치즈레’를 불렀어요. 일본어로 부르고 북한에서 번역된 가사도 부르고 했어요. (※참고로 번역된 가사는 대략 이렇다. 물위에 떠서 사는 부평초 보고/이 밤도 이내 신세를 말하였더니/이슬 맺힌 눈으로 말없이 날 보며/우리 모두 같은 신세라 고개만 끄덕이네/그대는 그대는 나의 길동무라) 부르고 나니 김정일은 노래와 내 몸동작이 매우 자연스럽게 잘 어울린다면서 하나 또 불러보라고 하더군요.”

    ▼ 일본 노래를 서슴없이 부르다니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일본 노래는 어디서 배웠나요.

    “일본 노래는 다 배워요. 일본 노래뿐 아니라 남한, 중국, 러시아 등 각 나라 노래들을 다 배워요. 테이프로 이런 노래들을 다 들려주고 자기 마음에 드는 곡을 고르라 해요. 학교에 남한 노래방과 똑같은 시설이 있어요. ‘미치즈레’는 사실 미옥 언니가 장군님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라고 귀띔해줘서 배웠어요. 언니 노래책을 보고 배웠는데 일본어를 모르니 한국어로 적어서 외웠어요. 언니가 저보고 외국어도 많이 배워야 한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언니도 외국어 공부를 매우 열심히 하고 있었어요. 제가 학교에서 맨 처음 배운 한국노래가 ‘감수광’이었는데 언니들이 그 노래가 제게 제일 잘 어울린다고 했어요. 거기에 일단 들어가면 어떤 노래를 부르든지 그건 전혀 상관없어요. 그날 김정일도 노래를 불렀어요. 미옥 언니가 ‘장군님도 한곡 하십시오’하고 박수를 치면서 리듬을 맞추어 ‘장군님, 장군님’하고 외치니 우리도 다 같이 ‘장군님, 장군님’하면서 박수를 쳤죠. 김정일이 기분 좋은 얼굴로 일어나 노래를 불렀어요. 러시아 노래를 러시아어로 불렀는데, 미옥 언니가 말하길 러시아에서 아주 유명한 노래라고 했어요. 김정일은 음치는 아니지만 음색이 이상하다보니 썩 잘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어요. 그가 제일 듣기 좋아하는 노래는 일본 노래입니다. 한번은 저보고 일본노래 ‘스바루’를 불러보라 해서 불렀더니 ‘너는 ‘미치즈레’가 더 잘 어울려’라고 하더군요.”

    北에 기쁨조는 없다

    ▼ 기쁨조는 원래 외국노래 많이 한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것 때문에 외국노래 열심히 배우게 한 것 아닐까요.

    “저희는 다른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공연하고 그런 적은 없어요. 아마 춤추고 노래하고 하는 그런 애들은 따로 있을 거예요. 사실 북한엔 기쁨조라는 이름이 없어요. 안마하는 여성들도 따로 있는데 머리 담당, 발 담당 하는 식으로 다 세분돼 있다고 들었어요. 혈을 정확히 찾아 누르고 조그마한 실수도 없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는 저희 네 명을 다른 사람들 앞에 공개하지 않았어요. 꼭 자기 혼자만 있을 때 불렀어요. 간혹 다른 사람이 있을 때도 있는데, 저흰 그가 누군지 몰라요. 또 다른 점은 저희에겐 가무를 집중적으로 가르치지도 않았어요. 물론 저희는 예술고 출신이니 기본기는 돼있지만 전문 훈련은 하지 않았어요. 대신 김정일은 블루스 추기를 매우 좋아해서 그건 연습했어요.”

    ▼ 일본에 후지모토 겐지씨라고 김정일의 요리사를 하다가 나온 사람이 있어요. 그가 쓴 책에 보면 김정일이 다섯 명의 기쁨조에게 다가가 옷을 벗게 한 뒤 알몸인 그들을 다른 간부들과 춤을 추게 했다는 내용이 나와요. 그럴 가능성이 있나요.

    “그럴 수도 있겠죠. 만취한 상태에서 벌어진 상당히 이례적인 일일 겁니다. 그는 과음하면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잘 모를 때가 있어요. 들은 소리긴 하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해요. 한번은 만취하도록 마시기에 부관이 ‘그만 마시라’고 만류한 적이 있었대요. 그러자 ‘이 놈을 당장 감옥에 처넣으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 부관을 찾았어요. 감옥에 넣었다고 하니 ‘내가 어제 그랬나’하더니 당장 다시 부르라고 했다더군요. 술 먹으면 그도 여느 주정뱅이와 다름없이 취하죠. 하지만 저희 앞에서 추태를 부린 적은 없어요. 술 먹고 우리 앞에서 울긴 했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슬픈 노래를 부르면 눈물을 흘린 적도 있어요.”

    ▼ 후지모토씨가 6년 전에 쓴 ‘김정일의 요리사’라는 책을 읽어봤나요.

    “보지 못했어요. 김정일이 저희랑 만날 때는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물론 저희를 안내해주고 가는 부관으로 추정되는 남자는 두 명 정도 있었지만 요리사는 본 적이 없어요. 그가 초밥을 참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래서 저희도 자주 먹었는데 어쩌면 그가 만든 것일지 모르겠네요. 다른 음식들도 매우 맛이 있지만 특히 초밥이 정말 맛있어요. 한국에 와서 살면서 내로라하는 초밥집에 자주 갔는데 아직 그렇게 맛있는 초밥은 먹어본 적 없어요. (※그녀가 ‘김정일의 요리사’를 읽어본 적이 없다고 하기에 10월 말 그 책을 구해서 전해주었다. 그녀는 기자 앞에서 앞 부분 몇 페이지를 읽어보았다. 거기엔 김정일의 1주일 식단이 실려 있었다. 그것을 보더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도 상어요리가 많이 나오네요. 상어도 많이 먹었어요. 처음 만났을 때 이탈리아 요리가 나왔는데 그때도 상어요리가 따라 나왔으니 말이죠. 한번은 그가 먹으라고 추천하는 것을 집어먹는데 그가 웃으며 ‘그게 뭔지 아냐’고 묻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모르겠습니다’고 했더니 그는 상어 생식기라고 했어요. 그 순간 저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토할 뻔했어요. 그러자 껄껄 웃더군요. 돌아올 때 미옥 언니한테 ‘다른 좋은 것 참 많은데 왜 그런 것 먹느냐’고 물었더니 언니가 그런 것을 먹으면 남자는 정력에, 여자는 미용에 참 좋다고 대답하더군요. 이 책엔 밥이 백미밥이라고 나오는데, 제가 있을 때는 5~6가지가 섞인 잡곡밥을 먹을 때가 많았어요. 저는 그때 처음으로 잣과 호두를 넣고 밥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참, 스테이크에 조금 따라 나오는 밥은 백미밥이 맞네요. 처음 만났을 때인가, 절 보고 무슨 음식을 제일 좋아하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어요. 제가 ‘냉면을 좋아합니다. 하루 세끼 먹어도 질리지 않습니다’했더니 김정일은 ‘우리 아버님이 너처럼 냉면을 그렇게 좋아하셨지. 그런데 난 썩 좋아하진 않아’라고 대답하더군요.”

    ▼ 김정일과는 평양에서만 만났습니까.

    “아니요. 많이 다녔어요. 지방 별장들도 가고, 사냥터도 가보고 했어요. 어딘지 모르는 별장도 많아요. 학생 때는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데 그때 미옥 언니가 ‘네가 졸업해 중앙당에서 일하게 되면 여기가 어딘지 자연히 다 알게 된다’고 말했어요. 다른 곳에 갈 때는 대개 그가 가기 하루 전, 늦어도 몇 시간 전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죠. 별장 얘기까지 다 하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겠네요. 그리고 그는 자기가 숨겨둔 별장 이야기하는 것을 가장 싫어할 겁니다.”

    자동차로 지하로만 40분 걸리는 별장

    “우리가 슬픈 노래 부르면 그는 눈물을 흘렸다”

    최근 당국이 위성사진을 통해 확인한 김정일 호화별장. 평양 외곽에 있는 이 별장에는 수영장과 워터슬라이드도 보인다.

    ▼ 그럼 가장 기억에 남는 별장 하나만 이야기해주시죠.

    “천천히 달리긴 했지만 차를 타고 지하로만 40분 정도 가는 별장도 있어요. 지하차도는 1차선이고 너무 좁지도 않고 넓지도 않고 적당해요. 거긴 모든 것이 다 지하에 있어요. 그래서 기억에 남아요. 미옥 언니가 ‘이곳은 장군님이 특별하게 여기시는 곳이고 장군님과 우리들 외에는 다른 사람들이 올 수 없다’고 했어요. 지하에 각종 오락실, 수영장, 침실, 식당 등이 정말 화려하게 꾸며져 있어요. 그의 별장들은 여기서 볼 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북쪽 기준에선 정말 화려해요. 실례로 그가 오기 전날 지하 수영장에서 수영을 했는데 그 바닥엔 타일로 큰 김정일화가 새겨져 있어요. 김정일화 중심부위는 번쩍번쩍 황금빛이 나는 타일로 조각돼 있어요. 돈이 엄청 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침실도 정말 화려하고 그래요.”

    ▼ 지하에 있는 별장이 많나요.

    “그럼요. 별장보단 지하 아지트라는 표현이 적절하죠. 그리고 실례로 인민대학습당이나 광복백화점 이런 민간 빌딩 아래 김정일의 아지트들이 있어요. 방음 장치도 철저해서 민간인은 그 아래 그런 곳이 있을 줄 절대 상상도 못하죠. 그렇지만 아지트에는 그 빌딩과 연결된 탈출구가 있어요. 이라크전 때 보니 후세인 궁을 마구 폭격하던데, 북한엔 그런 방법이 안 먹힐 거예요. 민간 빌딩을 위에 이고 지하에 숨어버리면 폭격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도처에 그런 비밀장소가 있고 지하로 연결돼 있어서 어디에 있는지 찾기도 힘들 거예요. 지하차도를 전담해 지키는 부대가 있는데, 그곳 군인들은 특혜를 받습니다. 제대해도 외부에 내보내지 않아 비밀을 지키죠.”

    ▼ 궁금한 것이 사냥터에 가면 다른 사람도 총을 휴대합니까.

    “저희랑 갔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없었어요. 김정일 혼자만 총을 휴대하죠. 미옥 언니에게도 총은 주지 않아요. 저희도 사격훈련은 하지만 실제 김정일 앞에서 총을 쏴본 일은 없어요. 호위병들은 멀찍이 떨어져 있습니다. 한 50~100m 떨어진 곳에서 원거리 경호를 해요.김정일은 사격을 잘해요. 사냥이 끝난 저녁에는 대개 그날 잡은 꿩고기로 버섯 샤브샤브, 완자, 만두 이런 것들을 주로 만들어 먹어요. 엄청 맛있어요. 맨 처음 사냥터에 갔을 때 김정일은 저에게 이름을 붙여주었어요. 제 원래 이름이 촌스럽다면서 저에게 ‘미향’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어요. 아름다운 ‘미’와 매혹적인 ‘향’을 겸비했다고 하면서 붙여준 이름입니다. 그때부터 북한에서 나올 때까지 저의 이름은 미향이었습니다. 저희들에겐 중앙당에서 발급하는 특수 증명서가 있는데 거기도 다 미향으로 돼 있어요.”

    김정일에게 받은 이름 선물‘미향’

    ▼ 그러고 보니 미옥, 미향, 미소, 영미 등 모두 ‘미’자가 들어간 이름이네요.

    “예, ‘미’자를 좋아했어요. 미소 언니는 웃을 때 모습이 참 고왔어요. 그래서 미소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 같아요. 영미도 나중에 미애로 고쳤어요. 그는 술에 취하면 했던 말을 자꾸 반복하는 버릇이 있어요. 이름을 직접 지어주고는 자꾸 헷갈려요. 술이 좀 들어가면 손가락을 들고 ‘네가 미옥? 미향?’이냐고 수시로 묻습니다. 그러고는‘ 미향이었지’하고는 좀 있다가 그 말을 또 반복해요. 이러기도 해요. ‘옥이 무슨 뜻인 줄 알지. 미와 옥 같은 피부를 가졌다는 의미야’라고 말하고는 좀 있다가는 또 ‘미옥이 무슨 뜻인 줄 알지. 미와 옥구슬 같은 목소리란 뜻이야’ 이런 식으로 이름에 대한 해석이 매번 달라져요.”

    ▼ 미옥이라는 여성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언니는 김정일과 잠자리도 함께하는 애인이지만 비서 역할도 합니다. 김정일을 허물없이 대하지만 반말은 안 합니다. 언니도 평양 여자인데 중앙당 안에 김정일이 하사한 아주 크고 번듯한 자기 집도 갖고 있어요. 하지만 5과 건물에 와서 자게 된 것은 아마 제가 과도기를 쉽게 보내고, 김정일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도록 붙여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저랑 함께 행동해야 하니 그런 것도 있겠고요. 자주 혼자 밖에 나갔다 와요. 술을 마시고 새벽에 올 때도 있고 낮에 올 때도 있고요. 김정일이 하사한 벤츠를 직접 몰고 집에 가서 자고 올 때도 있어요.”

    ▼ 미옥 언니에 대한 추억도 많겠네요.

    “우리가 슬픈 노래 부르면 그는 눈물을 흘렸다”

    1980년대 초반부터 김정일의 비서로 일해온 김옥.

    “언니가 김정일의 애인이었으니 언론에서 관심 가질 만한 이야기가 많죠. 저랑 한방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잔 사이기 때문에 들은 소리가 참 많습니다만 더 말하고 싶지 않아요. 언니가 걱정돼서요. 언니는 저를 자기 후계자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질투도 하지 않고 참 친동생 대하듯이 잘 대해주었어요. 그 안에선 저도 외로웠지만, 언니도 외롭긴 마찬가지였어요. 언니는 자주 나를 품에 안고선 ‘넌 내 뒤를 따를 거야. 너랑 나랑은 외롭게 살아야 해’라고 했어요.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언니의 목소리는 슬펐어요. 언니는 참 착했어요. 원래 학교에선 ‘미옥 동지’라고 불러야 하지만 방에 돌아와 둘이 있으면 저보고 언니라고 부르라고 해요. 언니에겐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참 많이 그리워했죠. 언니의 장에는 김정일이 준 선물이 많았어요. 제가 어떤 때는 ‘이것 정말 예뻐요’하면 언니가 ‘너에게 주고 싶지만 장군님이 주신 선물이 돼서 못 주겠구나’ 그랬어요. 그러면서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집엔 엄청 많아. 너도 이제 장군님 모시게 되면 나처럼 큰 집도 받고 온갖 선물도 받을 거야’라고 말했어요.”

    ▼ 언니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우리는 26~27세면 제대를 해요. 제대할 쯤이면 소좌나 대위 정도가 되죠. 하지만 김정일과 그런 사이였던 여성들은 이후에도 독수공방을 해야 해요. 봉건시기 궁녀처럼 말입니다. 물론 최고의 대우는 해주죠. 제대한 뒤에 김정일의 사랑을 받으면 비서로 계속 옆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미옥 언니도 김정일의 각종 심부름과 잡무를 대신해서 하는 일이 많았는데, 분명 제대하지 않고 계속 김정일 옆에 남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사랑도 신임도 두터웠거든요. 관계가 너무 깊이까지 들어가지 않은 여성들은 호위국 군관 등과 결혼시켜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하죠. 김정일도 최소한의 도덕은 있어요. 저만 해도 머리를 쓰다듬거나 손을 만지고 그러긴 했지만 학생인데다, 스무 살이 넘지 않아서인지 따로 부르진 않았어요. 제가 조금만 더 오래 있었다면 그랬겠죠.”

    ▼ 김정일 위원장 최측근이라는 김옥이라는 여인에 대해 들어보셨죠. 혹시 미옥이라는 그 여성이 아닌가요.

    “한국에 와서 김옥이라고 하는 여인의 사진은 봤는데 북에서 본 적은 없어요. 사진을 보니 귀엽고 발랄한 스타일이더군요. 그렇지만 미모로 따지면 미옥 언니가 훨씬 예쁩니다. 그리고 김옥이란 여성이 그와 반말을 하는 사이라고 하던데 저는 그 보도가 믿어지진 않습니다. 그는 순종적인 여성을 좋아해요. 문고리 정치니 뭐니 하면서 김옥이란 여성의 역할을 몹시 대단하게 보던데, 저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그는 절대 여성과 권력을 나눌 사람도 아니고, 그런 상황까지 가게 만들 사람도 아닙니다. 미소 언니는 약간 야심도 있고, 질투도 있었는데 김정일이 그런 건 별로 좋아 안 했어요. 그렇지만 미모로만 판단할 수도 없어요. 한번은 어디 갔더니 미옥 언니가 서른 살이 넘은 한 여성에게 깍듯이 대하는 거였어요. 누구냐고 물었더니 ‘장군님의 신임받는 비서로 대단한 여자’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보건대 그 여성의 미모는 별로였어요.”

    김정일, 향수 뿌리는 법 가르쳐줘

    ▼ 김정일의 여성에 대한 취향은 어떻습니까.

    “글쎄요. 간단히 대답하기 어렵군요. 그냥 저의 느낌대로 말할게요. 일단 눈을 가장 중요하게 봐요. 그리고 눈과 머리카락의 조화를 따지죠. 그는 제 머리가 숱이 많고 까만데, 눈동자도 까맣다고 좋아했어요. 눈동자가 갈색이면 머리도 갈색이어야 하고, 눈동자가 까맣다면 머리카락도 까매야 한다는 게 그의 미학관입니다. 다음엔 입을 봐요. 특히 아무리 예뻐도 입술이 얇으면 무조건 싫어해요. 코는 오뚝해야 하죠. 아무튼 그의 취향은 상당히 섬세해요. 제 손가락을 잡고 자세히 살펴보면서 손가락이 긴 것을 보니 감수성이 풍부하겠다고 그랬어요. 화장을 진하게 하면 싫어해요. 한번 속눈썹을 붙이고 나갔더니 싫어해서 다신 달고 나가지 않았어요. 향수 뿌리는 법도 가르쳐줄 정도로 우리에겐 자상하게 잘해주었어요. 미소 언니가 한번은 향수를 많이 뿌리고 들어갔더니 향수는 허공에 먼저 뿌리고 거기에 몸을 갖다 대야 한다고 알려준 적도 있어요. 우리가 쓴 화장품은 전부 프랑스제였어요. 샤넬도 있고 다른 것도 있고 그래요. 저희에겐 굽 높이가 5㎝ 이상인 신발은 주지 않았어요. 그의 키가 작아서 그랬나 봐요. 여성이 자기보다 키가 크면 좋아 안 해요. 그가 제일 좋아하는 치마는 밑에만 주름이 있는 그런 치마였어요. 그래서 우리가 입는 옷도 그런 것이 많았어요. 아무튼 그것도 얘기하려면 길어요.”

    ▼ 남한의 탤런트들이 북한에서 태어났다고 가정했을 때 김정일에게 뽑힐 확률이 가장 높은 여성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기준이 달라서요. 여기선 보통 키가 커야 탤런트가 되고 카메라를 잘 받으려면 성형수술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두 가지는 결정적 결격사유죠. 성형 여부를 따지지 않고 뽑는다면 음, (그는 한참을 생각했다) ○○○이 뽑혔을 것 같습니다. 아담하면서도 참한 이미지니까요.

    북한 탤런트 누구누구가 김정일의 애인이란 소리도 많이 나옵니다. 1970년대엔 그랬는지 몰라도 5과가 생긴 이후론 그렇지 않다는 것이 개인적 생각입니다. 전국에서 정말 고르고 골라 뽑은 미인들을 숨겨두고 있으면서 굳이 말이 새나갈 수 있는 여자들을 애인으로 삼을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습니다.”

    ▼ 김정일이 지어준 미향이라는 과거 이름과 당시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밝혔는데, 괜찮을까요.

    “어차피 제가 누군지 다 알지 않겠습니까. 김정일의 옆에 있다가 남한까지 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럴 일도 없어요. 저말고는 또 나오기 힘들 겁니다. 본인뿐 아니라 가족까지 최고의 대우를 받는데 탈북할 이유가 없어요. 다만 5과에서 제대하면 자기 고향엔 못 가게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예전에 해외 언론에 나가 제 과거 이야기를 잠깐 한 적은 있었는데, 그때는 제 이름도, 주변 인물 이름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교육받던 건물도 밝히기 싫어 대충 말했어요. 그들은 선정적인 데 관심이 많아 ‘기쁨조’나 ‘만족조’가 있느냐 뭐 이런 것을 집요하게 따지는 바람에 그냥 있다고도 했습니다. 상세하게 밝히기 싫어 얼렁뚱땅 넘어간 까닭에 과장된 것이 많아요. 그러나 지금은 제가 이름까지 다 밝히고, 그냥 있었던 사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뿐입니다.”

    ▼ 그렇다면 얼굴이 나가는 것은 왜 거절하십니까. 어차피 저쪽에서 다 알고 있을 텐데요.

    “제가 이 인터뷰를 하는 이유가 뜨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죠. 처음에 한국에 와서는 그런 생각도 있었지만 지금은 ‘과거 기쁨조 미향’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 제 사진이 나가면 성가신 일이 많아지겠죠.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지고요. 그리고 한국은 안전한 곳이 아니잖아요. 이한영 피살사건 때 보시다시피 저들은 마음먹으면 실행할 능력이 있어요. 그래서 저도 만약의 경우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저를 없애도 제가 따로 남긴 상세한 이야기가 다 공개돼 책으로 나간다면 암살이 별 효과는 없을 거예요. 오히려 테러국가라는 이미지만 더욱 각인될 겁니다. 그렇긴 해도 굳이 얼굴을 공개할 생각은 없어요.”

    ▼ 왜 남한에 오게 됐는지 독자가 궁금해 할 것 같아요.

    “사람마다 다 나름의 사연과 아픔이 있습니다. 조용히 가슴에 묻어두고 싶은 것일 수도 있죠. 그냥 아주 간단히 말씀드리면 저의 가족이 북한에선 용서 못할 역적이 돼버렸습니다. 역적의 딸을 김정일의 옆에 둘 수는 없잖아요. 미옥 언니가 저를 붙안고 ‘넌 이제 살기 힘들 거다. 다시 못 보겠구나’하면서 몹시 슬퍼했어요. 언니가 ‘너 죽지 않게 내가 최선을 다할게’ 그러면서 돈도 많이 주었어요. 헤어질 때 저도 엄청 울었어요. 1997년 저는 중앙당 보위부에 갇혀서 참 오랫동안 심문을 받았어요. 그렇지만 제가 할 이야기가 뭐가 있겠습니까. 어느 날 보위부 사람이 이야기하더군요. ‘장군님 말씀에 따라 목숨만은 건졌으니 감사하라’고요. 그 순간 미옥 언니가 생각났어요. 저는 깊은 산골 오지의 혁명화 구역으로 추방돼 한동안 세상과 격리됐어요. 이해되지 않는 게 추방 나갈 때 김정일이 준 선물을 뺏지 않고 다 갖고 나가게 해요. 유배 중에 은인이 생겨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그가 알려준 선을 따라 몇 달 뒤 북한을 벗어나 남한까지 오게 됐습니다. 다시 떠올리긴 싫지만 그 과정을 써도 아마 두꺼운 책 하나는 나올 거예요. 에피소드 하나 이야기할게요. 중국에서 북한 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 북한 식당에 간 적이 있어요. 나름 안경을 쓰는 등 변장을 하고 말이죠. 그런데 그 식당에서 일하던 한 여인이 저를 자꾸 쳐다봐요. 저는 그녀가 낯은 익은데 선뜻 생각은 안 났어요.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제가 다가와서 조용히 ‘실례지만 혹시 아무개 아닙니까’하고 묻는 거예요. 심장이 멎는 것 같았어요. 그는 5과 시험 볼 때 나랑 함께 3차까지 올라왔고, 최종 시험 때는 같은 호텔에서도 생활했던 애였는데, 왜 중국에 나와 있는지 모르겠어요. 5과에는 뽑혀도 최종까지는 못 간 미모의 여자애들은 따로 교육시켜 호텔에 상주시키면서 외국 요인들을 접대하게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해외까지 나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곤 음식을 다 먹지 못하고 도망치듯 나왔어요. 그게 벌써 10년 넘었군요. 요즘 해외 북한 식당 종업원들은 권세 있는 간부집 자식 중에서 선발된다고 들었어요.”

    “우리가 슬픈 노래 부르면 그는 눈물을 흘렸다”
    주성하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김일성종합대 졸업

    북한군 예비역군관

    2002년 한국 입국

    2003년 동아일보 입사


    ▼ 남한에 잘 왔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제가 오고 싶어서 온 길은 아닙니다. 운명이 이끈 것이죠. 그리고 남한에서의 삶에 대해 벌써 결론을 낼 수는 없다고 봅니다. 30대에 ‘인생을 잘 살았습니까’ 하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듯이 말이죠. 잘 왔

    는지는 몇십 년 뒤에 대답할 문제가 아닐까요. 아마 북한에 있었다고 해도 그렇게 행복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행복이란 별것 아니구나 하고 느끼죠. 결국 행복이란 자기가 느끼는 감정 아닌가요. 김정일과 있었던 일은 제 일생의 일장춘몽일 뿐입니다. 살아갈 날은 그 순간의 몇십 배입니다. 앞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목표와 꿈은 잃고 싶지 않습니다. 꿈이 뭐냐고요? 훗날 북한에 돌아가 부모 잃은 애들을 돌보는 고아원 원장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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