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 여행에서 돌아와 아내에게 말한다. “여보, 내 생각에는 말이야. 지구는 평평해.” 콜럼버스가 수평선 너머를 처음 항해한 뒤 세계가 둥글다는 것을 입증한 지 500여 년 만에 ‘세계는 평평하다(The World is Flat)’라는 새로운 화두가 던져진 것이다. 프리드먼의 ‘세계는 평평하다’는 2005년 ‘파이낸셜 타임스’와 골드만삭스가 제정한 ‘올해의 비즈니스 도서’로 선정되었고, 국내에서도 번역 출판되어(창해) 많은 화제를 뿌렸다. 오랜만에 ‘세계는 평평하다’의 핵심 메시지를 다시 정리해보자.
프리드먼의 ‘세계화’ 그 후
‘세계는 평평하다’<br> 토머스 L.프리드먼 지음/ 김상철, 이윤섭, 최정임 공역/ 창해/ 832쪽/ 2만8000원
이처럼 지식과 자본이 자유롭게 분리되고 생산되고 다시 합쳐지는 과정이 세계를 평평하게 한다는 것이 프리드먼의 기본 구상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도 다음과 같이 ‘평평한 세상’에 기대를 걸었다.
“30년 전에는 미국 뉴욕 주에 있는 인구 3만의 소도시 포킵시 같은 곳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과, 뭄바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 근처에서 천재로 태어나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사람들은 아마 포킵시를 선택했을 것이다. 평범한 재능이지만 거기서는 윤택하고 품위 있는 생활을 하게 될 가능성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세계가 평평해졌고, 수많은 사람이 어디서든 사업을 시작하고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물리적 거리보다 재능이 더 중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이라면 포킵시에서 평범한 아이로 태어나는 것보다 중국에서 천재로 태어나는 걸 택하겠다.”
그러나 프리드먼이나 빌 게이츠의 기대처럼 언제 어느 곳에서나 ‘평평한 세계’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미시간 주립대학 지리학과의 하름 데 블레이 교수는 ‘세계는 평평하다’는 생각이 시기상조라고 말한다. 상하이 하얏트 호텔이나 뭄바이 오베로이 호텔, 두바이 힐튼 호텔 전망 좋은 방에 머물며 비행기 일등석에 앉아 랩톱 컴퓨터로 업무를 처리하고, 전세계 외주 제작사와 일하는 ‘현대판 유목민’들에게는 이 세계가 평평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 세상의 다수는 여전히 울퉁불퉁한 세계에서 ‘공간의 법칙(지역적 환경적 속박)’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중심부와 주변부의 벽, 더 높아졌다
‘아틀라스 세계는 지금’<br> 장 크리스토프 빅토르 지음/ 김희균 옮김/ 책과함께/ 269쪽/ 1만9800원
그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인구통계학과 경제력을 반영한 지도다. 오늘날 세계 중심부에 살고 있는 약 15%의 사람들이 전세계 연간 총소득의 75%를 벌어들이고 있다. 반대로 주변부에 살고 있는 85%의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소득은 25%에 불과하다. 그래서 세계 중심부는 합법적 이민자에서부터 망명자, 불법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주민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이들의 이동은 미국 국경을 넘는 수백만명의 멕시코 이주민이나, 중국을 우회해서 남한으로 오고자 하는 탈북자의 행렬에서 보듯이 목숨과 같은 값비싼 대가를 요구한다. 프리드먼의 희망과 달리 세계 중심부와 주변부는 경제, 문화, 정치적, 지리학적 유사점보다 차이가 더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블레이는 ‘평평화’의 반대로 ‘울툴불퉁’이라는 시각적 표현을 쓴다. 중심부가 평평해지는 것만큼이나 가난한 주변부는 더 울퉁불퉁해지고 있다. 또한 평평한 중심부에서 지식과 자본과 개인이 자유롭게 이동하지만 가난한 주변부의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공간의 물리적 문화적 한계에 속박되어 평생을 살아간다. 이러한 불평등한 현실을 블레어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구 위 70억에 가까운 사람들의 행운과 불운에 미치는 공간의 영향력을 생각할 때, 아무리 이동의 시대가 왔다고 해도, 자기가 태어난 나라 바깥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2억에 불과하며 세계 인구의 3%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일부 학자들은 오늘날을 ‘이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수치는 그와 다른 사실을 드러낸다. …초국적 이주 및 이문화 간 이주에 대한 제약은 여전히 강력하며 어떤 점에서는 유연해지기보다 더욱 강화되어, 세계를 평평하게 하기는커녕 더욱 울퉁불퉁하게 만들고 있다.”(‘공간의 힘’에서)
지도의 이면을 보라
‘분노의 지리학’<br> 하름 데 블레이 지음/ 유나영 옮김/ 천지인/ 447쪽/ 2만원
아프리카의 수많은 나라가 겪고 있는 기근과 식량 부족, 영양결핍의 원인이 알고 싶다면 분쟁 지역 지도와 겹쳐보면 된다. 놀랍게도 기근을 겪고 있는 지역과 분쟁 지역이 대부분 겹친다. 앙골라와 모잠비크, 소말리아, 라이베리아, 에티오피아 이런 나라들이 겪고 있는 만성적인 식량부족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지 않는 하늘 탓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 탓이다. 이제 지도 위의 유전 지대를 따라가 보라. 유전이 있으면 그걸 둘러싸고 경쟁이 벌어지고 분쟁이 생긴다. 해협은 통과의 지점이면서 감시의 지점이다. 민족들이 국경 이쪽저쪽에 흩어져 살면 당연히 국경을 두고 분쟁이 생긴다.
때로는 지도를 다른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다. 과거 미국과 소련이 왜 그처럼 첨예하게 대치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면 북극을 중심으로 지도를 다시 그려보라. 미국과 소련이 얼굴을 맞댄 이웃나라라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이 방법은 블레이도 2005년에 펴낸 ‘Three Challenges Facing America: Climate Change, The rise of China, and Global Terrorism’(한국에는 ‘분노의 지리학’이라는 제목으로 출간, 천지인)에서 사용한 바 있다. 블레이는 ‘분노의 지리학’에서 대규모 기후 변화의 위험성, 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충돌 가능성,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무슬림의 테러리즘, 옛 소련의 해체 이후에도 계속 ‘독립국가연합’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러시아의 욕망, 미래 아프리카에 거는 희망까지 지리학적 도구들을 활용해 인류의 현재와 미래를 설명해 각광을 받았다. 물론 이 책은 매우 미국 중심적인 관점, 즉 어떻게 하면 ‘미국의 세기’를 유지해나갈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이 책의 제7장 ‘떠오르는 붉은 별: 중국의 지정학적 도전’에서 미국 본토와 중국 지도를 겹쳐보는 전략을 구사했다. 미국인들은 중국이 훨씬 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두 나라는 면적이 거의 비슷하며(알래스카까지 합치면 오히려 미국이 중국보다 약간 더 크다) 위도 상으로도 거의 일치한다. 이러한 지리적 위상은 곧 힘의 경쟁으로 이어질 수 있고, 충돌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래서 블레이는 두 나라 사이에 상호 유대가 필요하며, 특히 미국인들은 중국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이 배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처럼 지도에는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고,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다가올 세계’를 예측케 한다. 그래서 지리학자들은 우리가 맞닥뜨린 수많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지도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왜 이란은 핵보유국이 되고 싶어하는 걸까? 유럽연합의 국경은 어떻게 될 것인가? 중국은 정말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 될 것인가? 테러로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알고 싶다면 지도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