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징 컨센서스에 필적할 ‘서울 컨센서스’구축해야
- 과학과 복지의 이중주 : STOPIA(Science Technology Utopia)
- 분권화한 지식집약형 강소국
■ 장 소 :코리아나호텔
■ 사 회 :박 진 미래전략연구원 원장 /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 패 널 :손병권 미래전략연구원 거버넌스전략센터장 / 중앙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이세준 미래전략연구원 과학기술전략센터 연구위원 / 과학기술정책연구원 기획행정실장
정종호 미래전략연구원 사회문화전략센터장 /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한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왼쪽부터 정종호, 박진, 이세준, 손병권
이세준 우리 사회가 변해가는 모습은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특징으로 글로벌화를 들 수 있고요. 둘째는 양극화입니다. 셋째는 고령화로 상징되는 인구 구조의 변화입니다. 넷째로는 IT기술의 발전을 꼽고 싶습니다. 기술의 발전은 변화의 동인으로 작용합니다. 끝으로 에너지·환경 문제를 꼽겠습니다. 지구온난화가 대표적이죠. 이러한 변화의 방향은 무엇보다도 융합(convergence)의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 기술 발전에 기반을 둔 ‘융합’은 시간과 공간상의 경계(frontier)를 넘어서는 변화를 유도할 뿐만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5가지의 ‘미래 특징’과 맞물리면서 트렌드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합니다.
박 진 이세준 박사께서 토론의 첫 문을 잘 열어주신 것 같습니다.
손병권 국내정치를 하나의 트렌드로 묶어낼 개념은 마땅하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불확실성 혹은 유동성이 증가한다고 봐야 합니다. 미래의 트렌드를 보자면 지금까지의 트렌드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국내정치를 보면 선거는 지역주의를 바탕으로 이뤄졌습니다. 정당은 후보자 중심으로 굉장히 유동적이었죠. 권력구조를 보면 한국은 대통령이 권력과 재원을 장악한 채 의회는 권한이 별로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아온 미국 정치시스템은 예산 법률주의에 따라 의회가 예산 편성권을 강하게 행사하는 덕분에 다수당, 소수당 간에 거래(bargain)와 타협(compromise)이 이뤄지면서 정당 간 갈등이 조정됩니다. 그러나 한국은 국회 내에서 여당과 야당이 논의하고 타협할 대상으로서의 자원이 거의 없어서 여당의 총수 격인 대통령과 야당이 갈등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졌어요.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선거 민주주의 확립 등 권위주의로 회귀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민주주의가 공고해졌다고 봐야 합니다.
박 진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일까요?
손병권 민주주의를 심화하는 것입니다. 덧붙여 한국 사회가 앞으로 어떤 트렌드로 나아갈 것인지를 예측해보면, 인터넷 등 사회적 미디어의 등장으로 의사소통 수단이 다양해지고 있으며, 젊은층의 투표 행태가 굉장히 비전통적 양식으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선거제도와 정당정치의 유동성이 더욱 커지고, 불확실성이 증가할 것입니다. 지금 개헌 논의도 나오고 있습니다만, 권력구조도 결국에는 대통령과 행정부에 치중된 권력을 국회 쪽으로 움직여가는 방식, 중앙정부에서 지방으로 권력을 분산하는 방식으로 변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시민의 권리의식이 날로 성장함에 따라 기존 전통과 통념에 기준을 맞춘 법질서 개념도 변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박 진 손병권 교수께서는 정당, 선거, 권력관계, 시민 행태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정종호저는 사회 문제에 포커스를 두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양한 트렌드를 얘기할 수 있겠지만, ‘미래 한국’의 인구구성과 관련해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트렌드는 저출산, 고령화입니다. 고령화는 심각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될 것입니다. 고령화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저출산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한국은 출산율이 세계 최하위권입니다. 우리보다 출산율이 낮은 홍콩은 사실상 국가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동구의 몇몇 국가를 제외하면 국가다운 국가 가운데는 한국의 출산율이 가장 낮습니다. 물론 저출산, 고령화는 우리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고령화 속도는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는 데에 특수성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너무 빨리 늙는 것이지요. 2018년 무렵 고령사회(전체인구 중 65세 이상 고령자의 비중이 14% 이상)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2026년엔 초고령사회 그러니까 65세 넘은 사람이 전체 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단계에 진입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이렇게 급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다보니 이에 대한 준비가 너무나 안 돼 있다는 데에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저출산, 고령화와 관련해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한국 경제와 상관관계가 밀접한 중국도 빨리 늙는다는 겁니다. ‘미부선로(未富先老)’란 말이 요즘 중국에서 나돕니다. ‘부유해지기도 전에 늙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수출 대상국인 중국이 빨리 늙는 것은 우리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래 한국’의 인구구성과 관련한 두 번째 트렌드로는 한국으로의 초국경 이주 증가 및 이에 따른 다문화 사회의 등장입니다. 이 역시 우리만의 추세는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의 다문화 추세는 매우 불균형하게 진행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인구학적으로는 다양성이 증가하는 데 반해 문화적이나 사회적인 측면에서 인식과 수용은 제한적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이미 100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인구학적으로는 급속히 다문화 사회로 변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나 허용은 이에 못 미치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면은 말할 것도 없고요. ‘미래 한국’의 인구구성과 관련해 끝으로 계층 격차의 고착화를 언급하겠습니다. 얼마 전 정부 산하 연구원 발표에 따르면, 상위 10% 계층의 소득비중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하위 10% 계층의 소득비중은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소득분배의 불균형 정도를 의미하는 지니계수 역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고요. 다른 나라도 이 문제를 겪었지만 한국은 계층의 격차가 확대되고 고착화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박 진 계층이 고착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종호 1970년대 경제개혁을 할 때도 이러한 문제는 있었습니다만, 당시만 해도 노동자도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며,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이 수월했습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대기업 오너 자제나 정치 엘리트 자제 역시 일반 사람과 같은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같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으며, 같은 TV 드라마를 보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자본주의 경제의 글로벌화로 인해 IT 및 금융 부문을 중심으로 한 고급인력과 단순노동자 간의 임금 격차가 심화하고 있으며, 사교육비 증가로 인한 교육 양극화는 계층 상승의 기회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급속한 글로벌화의 진행은 계층 간 문화적 격차 역시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세준 부연하면 과거엔 똑같은 안경을 끼고, 똑같은 시각으로 사안을 보는 것이 익숙했으나 지금은 획일성에서 다양성으로 나아가는 단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박 진 좋은 주제들을 제기해주셨습니다. 그중 인구 문제에 대해 좀 더 깊이 논의해보면 어떨까요? 저는 미래를 위해 인구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에 다소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인력 투입을 통해 성장하던 1970년대와는 달리 앞으로는 생산성 향상을 통해 성장을 도출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적은 인력에 집중 투자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종호 무척 재밌는 말씀입니다. ‘고령화’는 대한민국호(號)가 달려가는 방향입니다. 특정한 시간대에 묶어놓으면 박진 원장님 말씀도 설득력이 있겠지만 시간의 흐름을 고려하면 경제인구가 퇴출하면서 사회의 피부양인구가 늘어납니다.
박 진 적절한 지적입니다. 따라서 경제활동 인구의 정년을 연장하거나 정년 제도를 폐지해야겠지요. 경제활동이 가능한 연령의 상한선을 지금보다 높여야 해요. 현재의 정년은 기대수명이 지금보다 20세 낮았던 30년 전에 만들어졌습니다.
정종호 경제가 발전하려면 어느 정도는 내수가 받쳐줘야 합니다. 저성장, 저인구라면 소비시장으로서 내수시장의 의미가 줄어듭니다.
박 진 내수가 크면 경제의 안정성이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나 한국은 내수시장에 의존해 성장해온 나라가 아닙니다. 지금 추세라면 2050년 인구가 600만명 정도 줄어든다고 합니다. 인구도 공급이 적으면 출산의 수익률이 높아져 정부개입 없이도 시장원리에 따라 자연히 인구 감소폭도 줄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400만명 정도 준다고 보면 될 겁니다. 6000만명 될 인구가 절반인 3000만명으로 줄어들고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거죠. 400만명 인구 감소로 경제성장이 좌우되는 일은 없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인구는 네덜란드 스웨덴 스위스 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 인구를 다 합한 것과 같습니다. 인구밀도 높은 비좁은 국가에서 인구 문제를 지나치게 걱정하기보다는 동북아 경제통합에 매진해서 중국 시장을 크게 개척하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요. 더구나 우리에겐 통일이라는 중요 변수가 있어요. “인구가 4000만명 밑으로 떨어지는 것 아니냐”라고 걱정하는 날이 오기 전에 통일이 돼 있을 겁니다. 인구를 늘리려는 정책에 목을 매달지 말고 인구 감소를 전제로 정책을 짜자는 게 저의 의견입니다.
정종호 무척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지금 말씀한 대로라면 사회가 동력을 잃어버릴 겁니다. ‘늙어버린 대한민국’이 과연 활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세준
박 진 지금의 70세는 건강이나 생산성이 예전의 60세 전후와 비슷합니다. 앞으로는 ‘노인’을 규정하는 기준도 달라질 겁니다.
정종호 지금의 40대가 70대가 되면 예전의 40~50대라는 거군요?
박 진 지금의 40대는 기대수명이 90세가량 될 겁니다. 80세 초반에도 지금의 60대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58~65세에 일을 그만두는 건 가혹한 일입니다. 나이 든 사람은 생산성이 낮을 수 있습니다만 그렇더라도 우리는 사회가 늙고, 느려지는 것에 적응해야 합니다. 성장률이 낮고 활력이 떨어진 사회가 불가피한 우리의 미래입니다. 물론 두려워할 필요는 없겠지요. 지금의 유럽이 바로 그런 모습 아닌가요. 다행히 유럽과 달리 우리는 통일을 통해 ‘젊은 피’를 수혈할 기회도 가졌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종호 일반적으로 고령화 문제에 대한 해법은 출산장려를 통해 새로 진입하는 경제 인구를 늘리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었습니다. 그런데 박 원장님은 경제활동 인구의 정년을 연장하거나 정년 제도의 폐지 등을 통해 경제활동이 가능한 연령의 상한선을 지금보다 높임으로써 경제활동에서 퇴출되는 인구를 줄이자고 말합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이라고 여깁니다.
박 진 일을 더 하게끔 하자는 거죠. 국민연금제도도 30년 전 수명 기준으로 설계돼 있어요. 수명은 크게 늘었는데 정년은 그대로인 겁니다.
정종호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정년 연장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결국은 출산장려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 진 출산장려책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지금은 청년실업 등의 이유로 정년연장이 너무나 무시되고 있습니다.
정종호 경제 인구의 퇴출 시기를 늦춘다는 건 좋은 생각입니다. 75세 정도로 정년을 연장하면 고령화 부담을 덜 수 있겠군요. 그렇지만 이를 위해서는 사회제도의 재구성이 필요합니다. 즉 임금피크제, 정년연령 조정, 유연성 있는 노동시장, 수령 연령 조정 등을 포함한 국민연금제도 개선 등 고령화 사회에 맞는 사회제도 개선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손병권 사회가 고령화하면 보수적 유권자가 늘어나 사회가 보수화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양극화와 관련해 이야기하자면, 1970년대에도 산업화 과정에서 계급은 존재했지만 남북 대치상황과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인해 계급에 기반을 둔 정당 균열 구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소득 격차의 증대에 따라 계급 혹은 계층이 정말로 고착화한다면 최근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대중정당론이 좀 더 부각되어 후보자 중심정당론과 경합하는 환경이 창출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극화 현상은 인정할 수 있으나 양극화가 진행되면서 계급 혹은 계층이 실제로 고착화할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박 진 토론 초반 고령화라는 주제가 중점적으로 논의됐습니다. 꼭 결론을 낼 필요는 없지만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려면 출산 장려책을 펼치는 것과 동시에 고령자가 노동시장에 오랫동안 남아서 경제활동을 하게끔 해야 한다는 점에 우리가 공감했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손병권 예. 그렇습니다.
정종호 공감합니다.
한국에 다가올 미래의 기회와 위협은
박 진 ‘대한민국호’가 달려가는 방향을 추상적인 단어 하나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제가 먼저 말씀드리면 경제적으로는 ‘불확실성’ ‘유동성’이라는 단어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또한 경제 주체 간의 관계는 ‘부정형화’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기업과 노동자의 관계가 평생고용에서 프로젝트 중심으로 바뀌는 게 그 예지요.
이세준 과학기술 부문의 특징을 기준으로 말씀드리자면 대한민국호가 당면할 또 하나의 방향은 ‘개방성’입니다.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이란 말이 있습니다. 내가 모든 걸 다 하는 게 아니라 가진 장점을 발휘하면서 갖지 못한 부분을 다른 곳에서 가져다 쓰는 시스템을 꾸려야 합니다. 오픈 이노베이션의 특징에 부응하는 제도 개선이 필요합니다.
손병권 고령화 사회가 가진 정치적 함의는, 정치 과정의 공동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정치적 무관심이 고조할 수 있어요.
정종호
박 진 걱정하지 말고 ‘동지’들만 믿으면 된다는 거군요. (모두 웃음)
이세준 과학기술 쪽에서 보면 ‘미래 먹을거리’가 가장 중요합니다. 신성장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는 겁니다. 개발연대 때 한국이 가진 게 뭐가 있었습니까? 인력 자원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엔 이공계로 우수한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화학공학, 기계공학의 인기가 대단했죠. 그 사람들이 중화학공업을 일궈냈습니다. 1990년대 이후엔 의대로 학생이 몰렸는데, 그 직전엔 물리학과, 전자공학과로 우수한 인재가 몰렸습니다. 그 사람들이 현재의 IT(정보기술) 강국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우수한 이공계인력은 대부분 의대, 치대, 한의대 등으로 빠져나가고 나서야 물리, 전자 등 이과 및 공과대학의 정원을 채웁니다. 문제는 의대, 한의대 등으로 진학한 인재들이 BT(생명기술) 분야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국내에서도 외국 환자를 치료하는 기업형 병원을 비롯해 의료기술을 글로벌비즈니스로 육성하려고 노력하고는 있습니다만 아직은 걸음마 단계입니다. 주요 선진국으로부터 시작된 저출산, 고령화 문제가 향후 개도국을 비롯한 전 지구적인 문제로 대두될 것임을 감안할 때 BT기술은 오랫동안 각광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의대, 한의대 등으로 몰린 우수 인재를 활용해 BT 기술을 국가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육성하는 전략을 국가가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박 진 그렇다면 다가올 미래에 어떤 기회와 도전이 있을까요? 그 기회를 잘 활용하고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정종호 위협과 기회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예컨대 통일은 위협이면서 기회입니다. 고령화 사회 및 다문화 사회의 형성도 위협이자 기회입니다. 한국은 지금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인구 문제를 그저 사회 문제의 하나로 봐서는 안 됩니다. 죽고 사는 문제라는 생각을 가져야 해요. 다문화 사회는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다문화 사회를 외국인에 대한 용인 혹은 배려라고만 생각합니다. 배려가 아니라 필연이라는 걸 모두가 직시해야 해요. 다문화 사회와 관련해 ‘코리아 이니셔티브(Korea Initiative)’가 이뤄져야 합니다. 통일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통일 문제에서 ‘코리아 이니셔티브’를 만들면 그것이 글로벌한 소프트파워의 어떤 전범이 될 수 있어요. 이러한 성과는 ‘워싱턴 컨센서스’ ‘베이징 컨센서스’에 대비되는 ‘서울 컨센서스(Seoul Consensus)’의 콘텐츠가 됩니다. ‘서울 컨센서스’는 산업화, 민주화를 이뤄낸 뒤 글로벌화, 다양화, 그리고 통일을 이뤄낸 우리의 경험을 모범으로서 세계에 제시하는 것입니다.
(‘베이징 컨센서스’는 ‘권위주의체제 아래서의 시장경제 발전’을 일컫는 말이다. 정치적 자유화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자유시장 요소를 도입한 중국식 발전국가 모델을 가리킨다. 정부 주도의 점진적 경제개혁과 균형발전을 강조한다. 2004년 골드만삭스의 고문이며 중국 칭화대 겸임교수인 조슈아 레이모가 처음 개념화했다. 일부 학자들은 중국이 최근 30년 만에 국내총생산(GDP)을 3배 넘게 증가시키면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의 개발도상국에 제시한 ‘베이징 컨센서스’가 민주화, 무역자유화, 탈규제, 공기업 민영화 등 자유시장 경제를 강조하는 ‘워싱턴 컨센서스’보다 더 호응을 얻는 것으로 평가한다.)
손병권
이세준 5000년 역사에서 지금 가장 국운이 상승하고 있다고 말하면 비판하는 분이 있겠지만 제가 보기엔 국운의 절정기인 것 같습니다. 미국, 중국, 일본과 어깨를 겨룬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위협요인이 상존하고 있어요. 이러한 위협요인에 대처하고 기회를 활용하려면 무엇보다도 ‘정책의 과학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게임의 법칙을 서로 지키는 사회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 진 경제 쪽에서 보면 동북아 경제통합과 통일이 가장 큰 기회이자 도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동북아 경제통합 논의는 최근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거론된 후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중국, 일본이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는 것은 어려운 일로 보입니다. 따라서 한중일이 FTA를 비롯해 특정한 형태의 경제협력 관계를 맺으면 한국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진영과 한중일 진영의 연결고리가 됩니다. 중국, 일본에 미국은 여전히 중요한 교역 파트너입니다. 일본의 경우 대(對)중국 수출이 상당하지만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한국이 동북아와 미주대륙을 연결하는 FTA의 고리가 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려면 중국, 일본에 매달리기보다는 오히려 밖으로 뛰어야 합니다. 중국, 일본은 한국이 대외적으로 중요해졌을 때 우리를 존중합니다. 한미 FTA 협상이 완료되자 중국이 FTA를 맺자고 다가온 게 대표적이죠.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세계무대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중국, 일본이 더욱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동북아 경제통합에 동참해달라고 요청할 것입니다. 또한 기술 공여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여야 합니다. 개발도상국을 돌아다녀보면 그들이 돈이 없어서 발전을 못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자본을 가진 나라는 꽤 많아요. 그런데 자본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릅니다. 또 기술이 없는 겁니다. 우리가 지식과 기술 지원에 나서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같은 노력이 많이 부족해요.
손병권 한국은 경제적으로는 높은 발전을 이룩했음에도 국제적 기여도는 낮은 나라로 인식됩니다. 이러한 이미지를 바꿀 국가 전략, 즉 이미지 역전 전략(image reversal strategy)이 요구됩니다.
이세준 옛날에 우리가 미국, 일본을 벤치마킹했듯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을 벤치마킹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배우려는 것은 우리의 최첨단 기술이 아닙니다. 그들은 미국이나 일본 같은 기존 선진국은 따라잡을 국가로 아예 생각을 안 합니다. 에티오피아, 필리핀 등에서 온 연구자들이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에서 실시하는 교육과정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1960년대 이래 한국의 개발경험, 그중에서도 과학기술을 어떻게 발전시켰고, 그것이 경제발전에 어떻게 이바지했는지를 알고 싶어 하더군요. 한류열풍과는 별도로 한국의 발전경험을 세계에 퍼뜨려야 합니다. 이것이 정종호 교수님이 말한 ‘서울 컨센서스’의 핵심이 아닐까요. 덧붙여 한국의 발전모델을 개발도상국에 전수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나라의 국가발전모델이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미래 성장엔진의 기능을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어떤 나라로 만들어야 하는가
정종호 아프리카의 독재국가들은 중국의 ‘베이징 컨센서스’에 매력을 갖습니다. 정치적 권위주의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제발전을 하려면 한국식보다는 중국식에 더 눈길이 갈 겁니다. 따라서 ‘서울 컨센서스’는 단순히 경제발전에만 포커스를 둬서는 안 됩니다. 좀 전에 말했듯 산업화, 민주화를 이룬 뒤 글로벌화, 다원화로 나아갔으며, 또한 통일을 이뤘고, 고령화 문제를 해결했으며, 양극화도 풀었다는 내용이 ‘서울 컨센서스’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박 진
이세준 이전에 ‘스토피아(STO-PIA)’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습니다. STOPIA는 ‘과학기술 유토피아(Scien-ce · Technology Utopia)’를 줄인 표현입니다. STOPIA를 비전으로 삼아서 미래로 달려가 봅시다. 과학기술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봅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훌륭한 인적자원과 IT인프라를 가졌습니다. 둘을 적절하게 조화시키면서 캐치업(catch-up) 시대의 패러다임을 ‘탈(脫)추격형’으로 바꿔야 합니다. 탈추격형을 ‘포스트 캐치업(post catch-up)’이라고도 부르는데요. 그 중심엔 창의성이 있습니다. 창의성 구현의 주체는 인적 자원입니다.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기보다는 5년, 10년, 20년을 내다보고 인프라를 구축해야 합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비율이 4% 수준까지 올라갔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2012년까지 그것을 5% 수준까지 올릴 계획입니다. 세계적으로 GDP 대비 R·D 투자비율이 높은 나라가 3.5%, 3.8% 수준입니다. 5%라는 목표는 상당히 도전적인 것입니다. 한국은 그동안 ‘선택과 집중’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포트폴리오를 지금보다 넓혀서 구성해야 합니다. 기초연구와 응용개발은 지금까지 5 대 5, 또는 4 대 6 정도로 이뤄졌습니다. 앞으로는 7 대 3 아니면 6.5 대 3.5 정도로 원천연구의 비율을 높여야 합니다. 물론 기초연구 비중을 높이더라도 ‘캐시 카우’에 대해선 집중투자를 해야겠지요.
박 진 탈추격형 전략으로 창의성이 넘치는 국가를 만들자는 거군요. 그런데 창의력도 하나의 수단 아니겠습니까? 창의적인 국가를 통해서 달성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요?
이세준 결국은 살기 좋은 나라가 목표가 돼야 하겠지요. 과학이 경제성장을 이끌어가면서 복지 같은 것도 함께 발전하는 그런 나라 말입니다.
박 진 기술로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살기 좋은 사회를 청사진으로 제시한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손병권 우리는 국토의 규모는 작지만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도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고색창연한 문화유산을 가졌고요.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창조적 수용자 혹은 전달자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국민은 근면하고 교육열이 높습니다. 이런 여건을 고려할 때 한국은 분권화한 권력체제 속에서 지식산업 집약형 국가로 가야 합니다. ‘강소국’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군요. 하지만 걸림돌이 적지 않습니다. 마지막 냉전의 현장인데다 북한의 위협이 상존합니다. 국내적으로는 지역대결, 이념대결이 거셉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면을 안은 채 새로운 그림을 그려내야 합니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공동의 안보위협을 기반으로 한 한미 동맹을 비롯 동북아 안보체제를 글로벌한 문제로 수용하고 해결해가는 21세기형으로 새로 만들어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정종호 바람직한 미래상이 뭐냐고 질문하셨는데, 그것에 대해 답하기 전에 그동안 우리가 걸어온 길을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산업화를 거치면서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났습니다. 민주화를 이루면서 권위주의의 구속을 벗어던졌고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화에 나서면서 국경이라는, 즉 기존의 민족국가라는 경계에서도 벗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개인주의, 자유주의가 확산했으며, 그를 통한 성취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잃은 게 있습니다. 공동체적 가치가 그것입니다. 자유주의가 확산하면서 약해진 공동체를 되살리는 게 우리가 나야가야 할 방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앞으로의 공동체는 5000년 역사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형태가 될 겁니다. 지금처럼 고령화한 사회는 한반도에 일찍이 없었습니다. 다문화 사회도 처음 경험해보는 것이고요. 사회계급이 고착화하고 있으며, 통일이라는 변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요소를 오롯이 담아낼 공동체를 꾸려야 합니다. 기존의 정책으로는 공동체를 재구성하기 어렵습니다. 앞서 말했듯 다문화는 선택이 아닌 필연입니다. 초국경 이주 및 외국인 정책에 대한 기본법 제정과 이를 종합적으로 총괄 조정할 기구의 설치가 시급합니다. 또한 인구 확대는 투자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 격차를 줄이려면 배려가 필요하겠고요. 그래야만 ‘코리아 이니셔티브’가 가능하고 ‘서울 컨센서스’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한국은 살고 싶은 나라, 국제사회에 기여하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박 진 지난 40년 동안 우리는 물질적 풍요를 얻고자 달려왔습니다. 앞으로는 정신적 풍요를 얻으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한 노력을 통해 ‘신뢰가 넘치는 사회’ ‘질서가 있는 사회’ ‘서로 협력하는 사회’를 만들어냈으면 합니다. 그러려면 신뢰를 깬 사람에겐 철퇴를 가하고 질서를 훼손한 사람에겐 벌을 줘야 합니다. 한국은 지금보다 ‘엄한 사회’가 돼야 합니다. 그래야만 신뢰, 질서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신뢰와 질서를 위반하면 손해 본다는 인식이 개개인에게 싹터야 합니다. 자신이 이익을 보려면 신뢰를 유지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적 자본의 요체라고 생각합니다. 2020년엔 대한민국이 모두가 부러워하는 나라가 돼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토론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1년간 미래전략연구원과 미래전략 토론을 공동기획해주신 ‘신동아’ 측에도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12월호를 끝으로 ‘미래전략 토론’을 마무리합니다. 애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