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은행이 1조원 가까이 투자해 인수한 해외 은행을 제대로 경영할 수 있을까. 국민은행은 이런 의문을 잠재우고 있다. 카자흐스탄 5위의 시중은행 BCC를 인수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오히려 차별화된 실적을 내는 비결과 국민은행의 해외 사업 전략.
BCC의 알마티 지역본부 내부. 창구는 맞춤 상담이 가능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11월5일 오후 카자흐스탄의 경제 수도 알마티 시내에는 때 아닌 가을비가 내렸다. 쌀쌀한 겨울 날씨를 예상하고 잔뜩 움츠러들었던 기자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중심가의 센터크레디트은행(BCC·Bank Center Credit) 알마티 지역본부에서 만난 우라늄 생산업체 켄 달라.KZ사 재무책임자 아브잘 아키메자노프씨 얘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한국인이라는 자부심도 생겨났다.
고객 예금 몰리는 BCC
아브잘씨 얘기대로라면 이곳에서 국민은행은 선진 은행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외환위기 직후 우리나라 은행들이 선진 일류 은행의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던 이유를 이곳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아브잘씨는 “한국이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하는 만큼 BCC를 통해 한국 진출을 모색하고 싶다”는 뜻도 밝혔다. 켄 달라.KZ사는 BCC의 주요 기업 고객 700여 곳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업체로, 우라늄을 생산해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으로 수출하고 있다.
알마티 지역본부 말리크 누그마노프 본부장은 “국민은행의 투자 이후 개인 및 법인 고객의 예금이 늘고 있다”고 자랑했다. 평생 모은 자산을 떼이지 않기 위해 모두 우량은행으로 몰렸던 외환위기 직후 우리나라 상황을 상기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또 “카자흐스탄에 진출한 삼성건설, 우림건설 등도 BCC와 거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역본부는 우리나라 은행의 대형 지점에 해당한다. 지역본부는 산하에 소규모 지점을 거느리고 있다. BCC의 지역본부와 지점은 각각 20개, 140개다. 알마티 지역본부의 산하 지점은 42개. BCC 내에선 가장 큰 지역본부다. 누그마노프 본부장은 “산하 지점까지 포함해 950명의 직원이 법인 고객 1만명, 카드 고객 20만명을 관리한다”고 설명했다.
현재 알마티 지역본부의 부실은 중소기업 여신보다는 가계 여신에서 발생하고 있다. 전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대출금을 제대로 상환하지 못한 데 따라 생긴 현상이다. 누그마노프 본부장은 “BCC 규정상 모든 여신은 담보를 설정하기 때문에 이를 처분하면 은행이 부담하는 손실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은행에 대한 현실적인 기대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는 “국민은행의 투자 이전에는 BCC가 중급 은행이어서 직원들의 임금 수준이 다른 은행보다 낮더라도 별다른 불만이 없었지만 이제는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카자흐스탄에서 은행의 안전성이 갑자기 부각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금융위기 이후 실질적으로 지급 불능 상태에 빠진 은행에 유동성을 지원하기 위해 BTA은행(2008년 말 기준 자산 1위)과 알리안스은행(자산 5위)을 국유화하고, KKB(자산 2위)와 할리크은행(자산 3위)에 대해서는 각각 공적자금 3억달러, 5억달러를 투입했다.
국민은행이 파견한 BCC 최동수 상임이사는 “지난해 8월 말 국민은행이 BCC 지분을 인수한 직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져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BCC의 유동성과 건전성이 부각되면서 위기를 기회로 삼고 있다”고 설명했다. BCC는 올 6월 말 기준 알리안스은행을 제치고 자산 기준 5위 은행으로 올라섰다.
카자흐스탄의 메이저 은행이 어려움에 빠진 이유는 무리한 외형 성장 정책에있었다. 은행은 원래 고객이 예금한 돈을 재원으로 대출을 해주고 그에 따른 예대 마진을 수익원으로 삼는다. 그러나 카자흐스탄 은행들은 예금보다는 외국 은행에서 빌려온 외채를 재원으로 건설업체 등에 무차별 대출을 해줬다.
카자흐스탄 은행의 예대비율만 봐도 이들 은행의 무리한 확장 정책을 확인할 수 있다. 2008년 기준 카자흐스탄 상위 5개 은행의 예대비율은 평균 250%나 된다. 반면 BCC는 150.5%여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자금 조달 구조를 갖고 있다. ‘예금 범위 내 대출’을 원칙으로 하는 선진 은행에서는 100% 이하가 일반적이다.
카자흐스탄 은행의 예대비율은 한국의 일부 은행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에서도 일부 은행이 은행채를 발행하거나 외채를 빌려 조달한 자금으로 대출 경쟁을 벌이다 금융위기 이후 한때 유동성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결국 우리 정부도 일부 은행의 외채에 대해 지급 보증을 해주거나 자본확충펀드를 통해 자본을 수혈해줌으로써 금융 불안을 잠재울 수 있었다.
보수적 경영 고수한 BCC
카자흐스탄 은행들도 마찬가지였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외국 은행들이 대출 기간을 연장해주지 않고 오히려 상환을 요구하자 정부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던 것. 카자흐스탄 정부는 이들 은행을 국유화하거나 공적자금을 투입함으로써 일단 급한 불은 껐다. 현재는 이들 은행이 채권자인 외국 은행과 채무 조정 협상을 벌이고 있다.
카자흐스탄 은행의 유동성 위기는 곧 건전성 위기를 불러왔다. 올 2월 카자흐스탄 정부가 텡게(KZT)/달러화 환율 목표치를 120텡게에서 150텡게로 평가절하한 것은 불난 집에 기름 부은 격이 됐다. 외화로 대출을 받았던 가계나 기업의 원리금 상환 부담이 그만큼 커지면서 연체 비율이 높아진 것. 이에 따라 부실채권이 크게 증가했다.
다행히 최근 들어 카자흐스탄 은행 산업에 대한 국제적인 신뢰가 살아나고 있다. 최근 유럽재건개발은행(EBRD)이 카자흐스탄 2위 은행인 KKB의 유상증자에 참여해 4000만달러를 청약한 것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카자흐스탄 정부가 올 2월 경제 안정화 조치의 일환으로 국민총생산(GDP)의 18%인 180억달러를 순차적으로 투입하겠다고 밝히는 등 경제위기에 적극 대응한 덕분이다.
BCC가 돋보이는 것은 카자흐스탄의 다른 은행이 외형 성장을 추구하는 상황에서도 보수적인 경영으로 일관했다는 점. BCC의 티무르 이시무라토프 국제본부장은 “다른 은행들이 2002년 이후 자산을 늘리기 위해 대출을 급격히 확대해왔지만 BCC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사실 다른 은행의 외형 확대 경쟁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2006~07년 국내 은행이 너도나도 성장 드라이브를 걸었을 때를 돌이켜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BCC에선 과거의 ‘아픔’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티무르 본부장의 설명이다.
“BCC는 1998년 부실에 빠진 정부 소유 은행 두 곳을 매입해 합병하면서 탄생했다. 당시 두 은행은 주택 담보 대출을 많이 해 연체율이 높은 상태였다. BCC도 경영을 잘못해 부실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언제든 다른 은행에 매각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때부터 경영진은 BCC가 이런 불행을 다시 겪지 않도록 절대 공격 경영을 하지 말자고 다짐해왔다.”
BCC의 이런 경영 방침은 금융위기 상황에서 뒤늦게 빛을 발한 셈이 됐다. 티무르 본부장은 “다른 은행에 비해 외채가 많지 않은데다 충당금도 충분히 쌓아놓았고, 국민은행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었기 때문에 유동성과 건전성에서 전혀 문제가 없어 정부의 지분 투자 제안을 거절했다”고 자랑했다.
특히 BCC는 건설업 대출 비중이 낮아 주택 가격 하락에 따른 충격도 상대적으로 덜 받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카자흐스탄 은행의 평균 건설업 대출 비중은 28.7%나 된다. 반면 BCC는 16.5%에 불과하다. 다른 은행들이 아파트 건설 붐을 타고 건설업체에 돈을 쏟아 부었으나 BCC는 거품이 꺼질 것에 대비해 리스크 관리를 철저히 한 셈이다.
‘코드’가 맞는 국민은행과 BCC
최동수 이사는 “건설 붐을 타고 아파트 수요가 아무리 늘어난다고 해도 카자흐스탄 전체 인구가 1600만명에 불과한 상황에서 건설업의 장기 전망은 썩 좋지 않을 것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알마티 시내에서는 시공 회사의 부도로 아파트를 짓다만 현장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BCC의 경영 현황에 대한 설명을 듣다보면 강정원 행장(KB금융지주 회장 직무 대행 겸임)이 이끄는 국민은행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예감하게 된다. 두 은행의 경영 스타일이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BCC 경영진이 보수적인 경영 스타일로 금융위기 상황에서 재평가받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강 행장의 경영 철학이 뒤늦게 평가받고 있다.
강 행장은 2006~07년 당시 국내 은행의 자산 확장 경쟁 대열에 합류하지 않아 행내에서 비난 대상이 됐다. 당시 임직원들은 “다른 은행이 성장 정책을 펴면서 국민은행 고객을 다 빼앗아가는데 행장은 도대체 뭐하고 있느냐”고 공공연히 불만을 터뜨렸다. 그럼에도 그는 “경제성장률 이상의 자산 성장은 항상 은행 부실을 초래한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이런 소신 때문에 한때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지난해 9월 KB금융지주㈜가 출범할 때 황영기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에게 회장 자리를 ‘뺏기고’ 만 것. 그러나 지난해 말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상황은 역전됐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다른 은행이 외형 성장정책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는 것을 보면서 뒤늦게 강 행장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며 “황 회장이 우리은행장 시절 투자한 금융 파생상품 손실 책임 때문에 낙마한 직후 KB금융지주 이사회가 바로 강 행장을 회장 직무대행으로 선임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본사의 워크아웃에도 불구하고 계속 시공하고 있어 현지에서도 호평을 받는 우림건설 알마티 시내 애플타운 공사 현장. BCC의 거래 기업이기도 하다.
올 6월 말 현재 국민은행의 BCC 지분은 30.5%. 향후 추가로 인수할 9.6%의 지분에 대한 투자금까지 감안하면 총 투자비는 7억4100만달러다. 당초 국민은행 단독으로 50.1%의 지분을 확보하려던 계획을 바꾼 셈이다. 대신 세계은행 산하 국제개발금융기관인 IFC가 BCC 지분 10%를 보유할 계획이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지난해 말 기준 BCC에 투자한 금액은 7840억원으로, 최악의 경우 약 12%(1000억원)의 손실이 발생할 수 있으나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이 안정되면서 그 가능성이 희박해졌다”고 설명했다. 최근 들어선 국제 유가가 상승하면서 카자흐스탄 경제도 호전 조짐을 보이고 있어 최악의 투자 손실을 가정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현재는 오히려 투자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KB국민은행연구소에 따르면 BCC의 주당 순자산가치는 2007년 말 547텡게에서 지난해 말 654텡게로, 다시 올 6월 말엔 729텡게(잠정치)로 상승하고 있다고 한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이런 회계상 이익도 중요하지만 해외 현지 은행에 대한 자산 투자라는 점에서 무형의 투자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국민은행과 BCC가 만난 것은 양쪽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BCC로서는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 전략적인 파트너를 필요로 했다. 때마침 국민은행은 국내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고 판단해 해외 진출을 적극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은행이 금융 선진국에 진출해 초일류 은행과 경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나라보다 금융산업이 발전하지 않은 동남아시아나 독립국가연합(CIS) 등을 연결해 ‘금융 트라이앵글’을 만들자는 강 행장의 구상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곳 은행에 리스크 관리 및 심사 능력, IT기술 등 국민은행의 핵심 역량을 전수하자는 전략인 셈이다.
해외 시장은 ‘블루오션’?
국민은행은 이미 올 상반기 캄보디아의 크메르유니온뱅크 지분 51%를 인수해 KB캄보디아은행(Kookmin Bank Cambodia)으로 상호를 바꾼 뒤 손자회사로 편입했다. KB캄보디아은행은 대한전선, 경안전선, 포스코건설 등 현지에 영업망이 있는 국내 기업이 지난해 7월 공동 출자해 설립한 곳으로, 총자산 1300만달러(약 170억원) 정도의 소규모 은행이다.
국민은행이 카자흐스탄을 주목한 것은 이 나라의 잠재력 때문이었다. 카자흐스탄은 면적만 해도 세계 9위의 규모로, 한반도의 12배에 달한다. 현지에서 만난 이양구 알마티 주재 총영사는 “카자흐스탄은 석유 가스 우라늄 등 자원의 보고로, 카스피해 유전 하나만 개발해도 1일 원유 생산량이 현 생산량 140만배럴의 2배가 될 정도로 잠재력이 크다”고 설명했다.
물론 투명성 부족 등 문제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현지에서 만난 한국 기업 관계자는 “시장을 규율하는 법과 제도는 유럽 못지않은 선진 수준이지만 실무 관료들은 공공연히 뒷돈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고 귀띔했다. 또 에너지 의존형 산업구조를 갖고 있어 국제 원자재가의 향방에 따라 카자흐스탄 경제가 요동치는 점도 약점이라고 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자흐스탄의 미래는 밝아 보였다. 무엇보다 1991년 독립 직후 미국 등 선진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30, 40대의 ‘젊은 피’들이 일류국가 건설 의지가 높기 때문이라고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 관계자들은 말한다. BCC만 하더라도 본부장급은 30~40대였다. 최동수 이사의 말이다.
“국민은행은 BCC를 10년 내에 카자흐스탄에서 가장 우량한 은행으로 키운다는 목표를 갖고 인수했다. 이를 통해 카자흐스탄 경제발전에도 기여할 생각이다. 이렇게 되면 BCC는 국민은행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카자흐스탄과 국민은행에 모두 도움이 되는 ‘윈 윈’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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