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은명
“잘 모시고 가십시오.”
나는 목이 메어 말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혀가 입천장에 닿아 점 하나 찍고 숨이 막힌다. 가슴에 저릿한 파동이 인다. 내 배 속에서 나온 자식을 다시 가슴속 깊이 묻는다.
함께 일을 봐준 형제와 친척들이 고마웠다. 그렇다고 그들의 위로가 도움이 되진 않는다. 아예 기대하지도 않았다. 대구 사는 친척과 서울 사는 언니와 남자조카, 그리고 질녀가 연화장에 오겠다는 걸, 그럴 필요 없다고 한다. 주검의 잔영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지켜보기가 고통스러운 법이다. 그들에게 그토록 버거운 심적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부산 사는 남동생은 막을 수가 없었다. 전화통화에서 낌새를 챈 동생은 내가 귀국길에 오르기 전, 미국에 들어왔다. 홀로 사는 불쌍한 누나를 부축하기 위해서였다.
서울 사는 친구의 소개로 도곡동 아파트를 2주 동안 빌린다. 내 집처럼 아늑한 공간이다. 2주간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구비돼 있다. 책상과 화장대, 침대 2개와 이불, 편하게 앉을 소파, 옷장, 부엌살림 일체, 그리고 텔레비전과 인터넷도 설치되어 있다. 친척집에 불편을 끼치는 것보다 훨씬 편리하고 자유롭다.
부산에서 올케가 상경했다. 동생의 아내다. 올케는 2주 동안 밥을 해주려고 고추장, 간장, 된장을 준비해왔다. 올케가 직접 담근 고추장과 된장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오밀조밀 꾸려왔다. 올케의 손맛은 환상적이다. 나는 여러 번 올케가 끓인 된장국에 취해 고향의 정감을 느낀 적이 있다. 편하게 받아먹으며 시누이의 위치를 누린 적도 있고. 못난 시누이에게 올케는 헌신적이다. 내 수족처럼 붙어 여러 가지 일을 돕는 날개 없는 천사다.
우리 집안일이라면 늘 발 벗고 나서 가족처럼 도와주시는 용인에 사는 권 목사님의 인도로 이장예배가 끝났다. 용인 공원묘지의 일꾼들이 무덤을 파고 흙을 뒤지며 유골을 집어 올린다. 올케는 내 팔을 꼭 붙잡고 있다. 18년 전 내가 혼절한 것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올케는 눈을 지그시 감는다. 유골을 보는 사실이 끔찍했을 것이다. 시부모도 아닌 시누이 일로 버겁고도 처참한 광경을 보이게 되어 참으로 미안했다. 올케는 눈을 감은 채로 계속 기도를 한다.
주검의 피와 살과 나무관은 이미 흙으로 돌아가고 흔적이 없었다. 18년 세월에 남은 것은 머리칼과 건강한 유골뿐이었다. 이것이 죽음이 보여주는 실체였다. 존재의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을 왜 사유의 집착으로 힘들게 살았을까 싶었다. 금지옥엽으로 키운 내 자식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회의가 가슴 바닥으로 쏴~밀려온다.
“선생님들, 유골을 한 점도 남김없이 찾아주세요.”
“네. 염려마세요.”
땀 흘리며 수고하는 일꾼 3명에게 2만원씩을 더 드렸다. 나의 생명이고 뼈 같은 유골을 건져 올리는 것은 그들의 손이다. 작업하시는 그분들의 손이 귀하게 느껴졌다. 그 귀한 손에 내 작은 정성을 표현할 길은 그 것밖에 없는 듯. 18년 만에 다시 한번 저승 노잣돈을 그들의 손바닥에 놓는다.
뼈들을 만진다. 가슴의 피가 혈관을 타고 손끝으로 흐른다. 내 피가 신의 기적이 되어 유골 속에 스며들어 어긋난 뼈들이 자리를 잡아 일어났으면 하는 간절한 심정이다. 가슴이 저리고 시려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말이 없는 용인의 하늘은 잿빛이다. 산새 한 마리가 내 머리 위로 맴돌다 날아간다. 유빈의 영혼이 내게 인사하고 가는 걸까?
우리는 권 목사님의 승용차로 수원연화장으로 향한다. 차 안은 한동안 주검처럼 조용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권 목사님은 운전을 하시며 나를 위로하신다. 그 어떤 위무의 말도 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차창 너머에 전개되는 자연의 전시장 같은 푸른 나무와 숲, 연화장으로 가는 길옆에 그림처럼 누워있는 호수도 그저 무심코 지나갈 뿐이다.
수원연화장에 도착한다. 화장 수속은 동생이 맡아주었다. 용인 처인구청에서 이장 신청을 할 때 들었던 말을 수원연화장에서도 똑같이 듣는다. 윤5월이면 바빠서 며칠 전 예약은 불가능하다나. 윤5월이 아닌데도 구청이나 연화장은 붐볐다. 병원에 가면 수많은 환자가 있다. 화장터에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죽어 한 줌 가루와 연기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곳곳에서 가족을 잃고 오열하는 소리가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같이 처절하게 연화장 안에 울려 퍼진다.
“사모님 댁은 행운이세요.”
직원이 개장유골 화장 증명서를 발급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3호실로 정해졌다. 직원의 친절은 이 평범하지 않은 일을 치르기 위해 연화장을 찾은 이들의 마음에 위로가 된다. 긴장된 마음을 조금은 느슨하게 해준다. 직원은, 대기실에서 기다리며 화면을 점검하라고 자상히 일렀다.
분향실: 3호.
고인 명: 폴 유빈 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수골 중인 유가족은 분향실로 오십시오.
화면의 글을 확인하는 순간 내 심장에 면도날이 지나간다. 미국에서 자란 우리 폴이 왜 이곳 수원의 화장터에 와 있단 말인가? 나는 갑자기 넋 나간 사람처럼 멍청해졌다. 올케가 오른팔을 잡고 부축한다.
우리 일행은 분향실 3호로 간다. 윤5월이 아니라 다소 조용하다고 하는데, 분향실 1호부터 8호까지 꽉 찼다. 분향실마다 눈물바다였다. 통곡의 강이었다. 울음소리가 없는 곳은 우리 3호실뿐이다. 개장유골의 화장이라, 막 임종한 시체를 화장하는 것과는 경우가 달랐다. 순간순간 울컥 올라오는 감정의 고비를 잘 넘기면, 슬픔을 잠재울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오랜 세월 끝에 생겨난 면역력이다.
분향실에서 예배의식이 진행된다. 권 목사님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읽고 나를 위로해주신다. 권 목사님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따뜻한 분이시다.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우리는 고인의 영혼이 평강을 누리도록 기도한다. 고인의 영혼은 이미 18년 전에 안식하게 되었다고 믿는다. 물론 형식상의 절차에 불과했지만, 형식을 통해 내 마음이 순간순간 위무가 된다. 목사님의 말씀 중에 나는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을 입고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폴의 혼도 다른 사람의 태에 옮아 출생이 가능한 것일까? 그럼 누군가의 태를 빌려 이 땅에 다시 태어났을까? 지금쯤 어느 외계에서 살고 있을까?
나는 정박아같이 생각이 분주했다. 올케가 나를 흔들자 정신이 돌아온다. 함께 슬픔을 나눌 골육과 지인이 있음은 보화처럼 귀한 것이었다. 특히 남편의 누나를 위해 지극 정성을 다하는 올케가 고마웠다. 시누이의 일이 정말 저렇게 가슴이 아플까? 고맙다가도 문득문득 밀려오는 의문이 고개를 들어 올케의 표정을 살핀다. 시누이의 상처를 통해 자기의 아픔에 위안이 된다면 다행일 것이다. 사실 올케는 내게 친여동생같이 아껴야 할 소중한 사람이다. 시어머니는 일찍 저세상으로 가시고 안 계신다. 호랑이 훈장이라 불린 까다롭기로 소문난 서당 훈장이셨던 시아버지를 오랫동안 잘 섬겨준 보화 같은 존재가 올케이다. 그런데 내 예민하고 의심 많은 성격은 시도 때도 없이 변덕이 죽처럼 내 가슴을 끓게 한다. 올케와 동생을 미워하면 결국 내 가슴이 더 아픈 것을 알면서도 난 바보처럼 미움이란 단어를 버릴 줄 몰랐다. 사랑으로 품어야 할 형제들이 미운 것은 내 깊은 상처 때문일까? 아니면 우울증 같은 질병일까?
말의 돌출
망해(亡骸)를 가슴에 안고 2주간 빌린 도곡동 아파트로 돌아온다. 18년 전 장례식 때처럼 기절하지 않아서 감사한다. 내가 정신을 잃으면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고생할까. 생각할수록 내가 쓰러지지 않았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했다.
나는 아들을 옷장 속에 넣는다. 답답하겠지. 그러나 땅속보다는 덜하겠지. 입속말을 씹으며 동생부부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곳을 택했다. 흰 보자기에 싸인 유해를 보고 가슴아파할 동생부부를 배려해서였다. 나름대로 신경을 썼지만 올케와 동생의 얼굴이 불편해 보인다. 동생부부는 나의 무너진 가슴을 생각하며 무거운 표정들이다. 하긴 아픈 사람보다 지켜보는 사람이 더 고통스러울 때가 있지 않는가. 날카로운 내 심경을 건드리지 않으려 애쓰는 눈치다. 우리는 서로 눈치만 살피며 별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올케의 휴대전화와 동생의 휴대전화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울린다.
서울에 사는 동생의 두 딸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래 일 잘 마쳤다. 저녁에 고모에게 인사하러 온다고? 형님, 첫째가 인사하러 온다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으응, 오라 그래.”
“둘째도 오겠다는데.”
이번에는 동생이 묻는다.
“룸도 복잡한데 한 번에 한 명씩 오라고 하지.”
오랜만에 만나는 조카들이건만 반갑지 않다는 투의 말이 튀어나온다. 솔직히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심중을 감추지 못하는 미숙한 내 자신이 싫을 때가 많다. 오래 떨어져 있던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오겠지. 고모한테 인사는 무슨, 모두가 귀찮았다. 동생부부는 딸들과 손자가 보고 싶겠지. 생때같은 내 새끼는 죽어 한 줌의 재가 되어 옷장 안에 갇혀 있는데 조카들이 온다고 뭐가 그리 반가울까. 아무도 내 무너져버린 가슴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맞아주지 못해 미안했다.
서울대 측에서는 유빈의 심장에 이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난 너무 억울해 부들부들 떨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 분해 미국대사관에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다. 대사관에서는 부검해서 밝히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상담해주었다.
아들의 가슴을 메스로 가르는 부검을 허락하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죽은 아들을 다시 한 번 죽여야 하다니. 하지만 기막힌 운명은 현실이었다. 유빈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한 치의 누명이나 오해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운구는 한독병원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졌다. 그때 경황이 없어서 아들의 건강한 장기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에게 기증하지 못했던 것은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부산에서 올라와 나의 일을 수습해주던 동생이 조카의 부검을 감독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운구를 따라갔다. 부검 결과 아들의 사인은 감전사로 밝혀졌다. 당연한 사실을 뒤집어보려는 서울대 측의 억지 때문에 유빈은 두 번이나 죽어야 했다. 불쌍하고 가엾은 내 아들.
그 당시 안타까운 마음으로 여러 일을 도와주셨던 어학연구소 소장 박남식 교수님과 우리 유빈을 직접 지도하신 문희자 교수님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물론 모두 다 기억이 안 나지만 고마운 분이 많았다. 유빈의 무덤에 빨리 푸른 잔디가 자라게 하기 위해, 관절염이 심해 다리를 절룩이면서도 개울물을 양동이로 나르던 박남식 교수님이셨다. 난 작은 보답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캐나다 부차드가든에서 꽃씨를 사서 보내드렸다. 서울대 어학연구소와 기숙사 주변에 심어달라고. 유빈이의 영혼이 꽃으로 피어나게.
새끼 잃은 어미의 절규는 시가 되어 모아졌다. 서울대 어학연구소의 도움으로 ‘하늘로 치미는 파도’가 1년 만에 책으로 출간됐다. 사람들이 출판기념식도 마련해주었다. 고마웠다. 사고가 일어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내 가슴속은 찢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아픔은 새록새록 깊게 자라났다. 1년을 멍청하게 살다가 정신이 조금씩 들면서 아픔이 점점 깊어졌다.
서울대 기숙사, 내 사랑하는 아들이 숨진 곳. 내가 그곳 기숙사에서 며칠간 문희자 교수님과 작품 교정을 보며 편집을 의논할 때였다.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그곳에 있기가 곤혹스러웠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아들을 느끼려 애썼다. 내 자신이 무척 이율배반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유빈이가 엄마가 쓴 책으로 다시 태어나리라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었다.
문희자 교수님과 며칠을 함께할 때 난 유빈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교수님으로부터 얘기를 들으며 내 무너진 가슴의 피와 살이 다시 요동쳤다. 하지만 우리 유빈을 추억할 수 있어 행복했다.
“교수님! 열심히 한국어 공부해서 A학점 받아 우리 엄마 기뻐하시는 모습 보고 싶어요.”
“유빈이 학생은 효자구나. 어머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종강 때 서울에 축하해주러 오시겠대요.”
“유빈은 좋겠구나.”
“네. 부산 외삼촌 집에도 가고 의왕에 계신 이모 집에도 가고. 어머니가 여행하자고 했어요. 그리고 미국에 가서는 어머니가 캐나다 여행도 가자고 했어요. 대학 가기 전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서울대로 연수를 보내던 로스앤젤레스공항이 아들을 본 마지막 공간이 될 줄이야. 그 후 가끔씩 부지불식간에 공항 쪽으로 차를 달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마지막 정담을 나누던 공항의 카페테리아를 뒤지며 아들의 흔적을 찾았다. 그 당시 나는 반쯤은 정신 나간 여자였다.
나는 아들과 시간을 함께하던 곳을 찾아 폴의 이름을 불렀다. 김소월 님의 시,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초혼’을 기억하며 펑펑 울었다. 그림자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샌타모니카와 말리부비치, 베니스비치, 마리나델레이 해변으로 미친 사람처럼 헤집고 다녔다. 서울을 방문할 때는 버스에 붙은 ‘서울대’란 글자만 보아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픔을 통해 배운 것들
서울대로 연수를 가지 않겠다던 아들을 억지로 보낸 어미. 서울대말고도 연수 프로그램을 가진 다른 좋은 대학이 있었다. 이왕이면 최고로 좋은 학교에 보내야겠다는 나의 일류병과 명문대학병 때문에 아들을 서울대에 보내 사고가 일어났다. 왜 많은 사람이 서울대를 못 보내 안달일까? 서울대 출신이 아니더라도 대통령도 되고 그런다. 다른 사람은 잘 모르지만, 내 경우는 일류를 좋아하는 허영심 때문이었다. 결국 그 허영심이 아들을 잃게 했다. 아무튼 아들이 떠난 후 나는 일류니 명문이니 하는 단어를 내 삶에서 지웠다. 언제 어디에서든 최선을 다하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란 것을 아들의 죽음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의 영혼과 이름이라도 위로하려고 장학재단을 운영했다. 지역사회를 위해, 공부는 잘하지만 환경이 어려운 학생을 도와야겠다는 그런 기본적인 지각은 내겐 없었다. 물론 장학재단을 운영한 이유가 아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들을 향한 죄의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나의 몸부림이었다.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장학재단 운영을 통해서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온갖 체험을 할 수 있음은 값진 공부였다.
유빈이 또래의 사람들을 볼 때마다 심장에 소금이 뿌려지는 것 같았다. 의견과 생각이 다를 뿐이었지만…. 그 당시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식을 잃은 어미 앞에 어떻게 죽은 아들 또래의 자기네 자녀들을 데려올까? 그뿐이 아니었다. 공부 잘하는 자식 자랑, 성공한 자식 자랑, 결혼식 초대장까지 보내온다. 상대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없었다. 결혼식장에 가서 새신랑을 보면 내 아들이 오버랩됐다. 가슴은 미어졌지만 친구를 기쁘게 해주려고 자리에 앉아 고통을 참아냈다. 배추가 저려지는 듯한 심정이었지만 거절 못하고 참석해서 미소를 짓는 내가 이중성의 일인자로 느껴졌다.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내가 바보, 등신, 병신 같았다.
모르는 사람들은 모르니까 그런다고 이해가 간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처절한 고통 속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하루하루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죽지 못해 밤마다 와인과 수면제의 도움을 받아 잠이 들었다. 아침에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가까운 사람들이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빌려달라는 사람도 늘어났다. 장학금을 내놓았다는 기사를 읽은 한 사람은 자기에게 그것을 줬으면 평생을 보살펴주었을 것이란 말도 한다. 인간이 우선이어야 하는데, 물질이 먼저인 세상에 나는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주변사람들로 인해 내면세계가 괴로웠다. 아는 사람들이 전혀 없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을 때가 많았다.
내가 아는 이들로부터 인간적인 존재로 비치지 않는 것이 슬펐다. 물질만 소유한 존재로 부각된다는 것을 희미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시간과 물질을 갖고 봉사를 해도 죽은 자식 등에 업고 유명해지려 환장한 년이란 소문이 들려온다.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인가? 나는 바보, 등신처럼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혼자서 통곡하며 안으로 삭이며 살았다. 내 존재가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다. 먼저 내가 나를 보듬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함을 깨닫기 시작했다.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자식은 희망이고 아름다운 그리움이어야 하는데…. 자식을 잃은 내게는 일상이 불 꺼진 창이었다. 삶의 지붕과 울타리가 없는 나는 광야의 사나운 들짐승들에게 시달리는 형국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리움에 갇혀 통곡하는 길고 긴 나날이 계속되었다.
유빈이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봉사를 많이 했다. 병원, 교회, 샌타모니카 경찰서 등.
해마다 아껴 쓴 용돈과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모아, 노숙자들을 위해 이불과 컵라면 박스를 잔뜩 준비해 샌타모니카 경찰서와 로스앤젤레스 렘파트 경찰서에 기증한다. 아들이 보람을 느끼며 했던 일이라 내가 대신 해주려고 나섰다가 그만두었다. 죽은 자식 등에 업고 유명해지려 환장한 년이란 소름끼치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국세청과 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한없이 원망스러웠지만, 난 그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주는 법을 주님을 통해 배웠다.
자식 잃고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어미가, 유명해지는 건 또 뭐고, 재물은 무슨 의미며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난, 억울한 말을 외면 못하고 내면으로 받아들여 자신을 괴롭히는 그런 바보였다. 내게 찾아온 새로운 친구는 눈물이고 우울증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진혼곡을 틀어놓고 내가 진혼곡이 되어 펑펑 울었다. 서울 질녀 집에 있을 때는 화장실 싱크대의 물을 틀어놓고 남몰래 울고 또 울었다. 우는 것이 직업이 된 여인 같았다. 질녀가, 이모가 눈물로 호수를 만들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울었기 때문에 살아낼 수 있었다. 눈물은 슬픔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했다.
나는 부동산업을 정리하고 많은 세금을 낸 뒤 은퇴했다. 언젠가 하늘나라의 가족에게 갈 수 있다는 확실한 꿈이 큰 위안이 되었다.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에는 발길을 끊었다. 봉사를 하면 할수록 온갖 구설에 오르는 게 거북했다. 나는 큰일을 할 수 없는 아주 작은 질그릇이란 것을 깨달았다. 내 존재를 드러내는 일은 모두 그만두었다. 남은 생을 죽은 듯이 조용히 기도하며 살고 싶었다.
앞으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사업도 정리해버렸는데.
죽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숨진 아들의 몫을 대신 잘 살아주는 것이 의무이고 어미가 된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몸이 천근만근이나 무거웠다. 인간은 비전과 꿈을 먹고 사는 존재인데…. 나의 꿈이고 희망이던 아들, 친구이고 연인 같던 나의 유빈, 바라만 보아도 행복했던 유빈을 잃고 무너져버린 내 인생. 나는 다시 추슬러 일어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나는 때때로 하나님 앞에 쓰러져 통곡하며 내 자신을 아주 작게 만들어갔다.
시인 조병화 선생님
여행길에 내 인생을 실었다. 미국 여행사를 주로 이용해 내가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끼어 동유럽과 이스라엘로 나그네같이 세상을 떠돌았다. 그러던 어느 해 부산에서 동생이 왔다. 적십자병원의 출장으로 왔다가, 온 걸음에 불쌍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누나와 여행을 함께 하려고 시간을 여유 있게 내어 왔다고 한다. 우리는 ‘라디오코리아’에서 주관하는 남미 여행길을 선택한다.
문학 강연으로 초대된 시인 조병화 선생님과 조우한 것이 그 여행에서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예수동산과 코파카바나 해변의 갤러리에서 만났다. 동생이 여행 중에 읽던 내 산문시집을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다음 날 선생님은 나를 찾으셨다. 선생님 생애에 읽은 책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슬픈 내용이라 하신다. 선생님은 내게 당부하셨다.
“이 선생, 소설을 쓰시오. 시나 수필도 좋지만 체험소설이 힘이 있으니 소설을 써서 한국의 젊은이들과 엄마들에게 모자간의 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읽혀졌으면 좋겠소.”
“네. 노력해볼게요. 선생님, 권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브라질 여행은 내게 꿈을 주었다. 아니, 조병화 선생님이 큰 동기가 되어주셨다.
소설 쓰는 실력이나 재능이 없어서 힘이 들었다. 자신의 체험을 쓰는 것인데도 소설 쓰기란 체력과 정신력을 함께 요구하는 노동이었다. 논픽션 한 편을 겨우 끝낸 후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앞으로 소설가를 만나면 무조건 큰절부터 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나는 소설을 쓰기 위해 창작론과 작문법에 많은 책을 여러 권 읽었다.
조병화 선생님은 작고하시기 전 완성된 내 자전소설에 추천의 말씀도 써주셨다. 그런데 선생님의 뜻대로 한국의 젊은이들과 어머니들은 읽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자비로 책을 냈기 때문에 미국에 사는 교민들에게 조금 읽혀졌을 뿐, 결국 한국어로 쓴 소설은 유빈의 죽음처럼 무덤이 되어 영영 묻혀버렸다.
내 인생의 멘토가 내 책을 읽은 후 영어로 번역했으면 좋겠다고 번역가를 소개했다. 번역가의 손에서 1년이 지나갔다. 번역된 소설은 500쪽 분량으로 두께가 상당했다. 소설의 줄거리를 2쪽으로 요약한 뒤 약 20곳의 미국 출판사에 보냈다. 반은 무소식이었고, 반은 거절 편지를 예의 바르게 써서 보내왔다.
그중 단 한 곳에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나는 아는 선배와 함께 샌디에이고에 있는 출판사를 찾아갔다. 인쇄비는 내가 부담하고, 프로모션은 출판사가 하겠다는 계약을 하고 돌아왔다. 프로모션할 내용과 표지 등을 디자인해 보내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이후 출판사에서 소식이 없어 전화를 해보았다.
출판사 사장 부인이 전화를 받는다. 남편은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 있고, 출판사는 문을 닫게 되어 미안하다고 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솔직히 말해주어 계약금은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 미련을 갖지 않게 돼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속이 많이 상했다. 문을 닫게 된 출판사가 왜 계약을 하자고 했을까? 정직한 사람은 어디에 가야 만날 수 있을까?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신의를 느낄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온갖 사건으로 인해 내가 점점 불신의 숲을 키우는 것이 두려워졌다.
나는 테이블 위에 있던 다른 원고 뭉치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돌아서서 버려진 원고뭉치를 힐끔 바라봤다. 아들의 인생이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었다. 죄책감에 쓰레기통에서 원고뭉치를 도로 꺼냈다. 옷장 안에 옮겨놓은 뒤 입지 않는 헌옷으로 덮었다. 원고가 꼴도 보기 싫었다. 책을 출간한다는 것이 이렇게도 힘든 일인가. 영어책 출판은 깨끗이 포기했다. 돈을 떼였음에도 나는 출판사 오너가 건강을 회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은퇴 후 대학 입학
밀레니엄. 새천년과 함께 나는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싶었다. 집시 같은 방황의 여행을 끝내고 1999년 봄 한인타운 근교 행콕팍으로 거처를 옮겼다. 매일 태평양 바다를 보며 조깅하던 즐거움이 없어지자 답답함이 심해졌다. 좋아하던 바다를 잊고 산을 사랑하기 위해 아침마다 할리우드 뒷산에 올랐다. 숨이 가쁘고 힘이 든다.
자투리 시간엔 햇살을 받으며 마을 주변의 주택가를 산책한다. 행콕팍은 나무가 많은 부촌이다. 나는 하우스가 아닌 오래된 낡은 아파트에 산다. 새, 다람쥐와의 만남이 즐거웠다. 집집마다 개성시대에 뒤지지 않으려는 듯, 정원을 특이하게 가꾸어놓았다. 건물들은 예술적 감각이 두드러져 보이는 고풍스러운 설계다.
부촌의 그림 같은 정원을 감상하며 걷노라면 어느새 시간은 쏜살같이 달아난다. 걷는 시간대가 달라서일까? 아니면 고급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는 덕분일까?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만나기가 쉽지 않다. 대신 큰 개를 몰고 나온 개의 메이트(Dog Mate)들과 가끔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다. 개를 아주 사랑하는 이들은 개를 돌보는 도우미(Dog Mate)를 둔다.
어느 날이었다. 작은 학교만큼이나 큰 저택에서 한 젊은 여인이 짙은 브라운 색깔의 큰 개를 데리고 나온다. 나는 그녀와 개에게 먼저 인사를 한다. 그녀는 자기 이름 대신 지미라는 이름을 가진 개를 먼저 소개했다. 그녀는 멕시코에서 온 이민자였다. 이름을 듣기는 했으나 기억할 수 있는 쉬운 이름이 아니었다. 내 이름은 리사 리. 얼마나 쉬운가. 미국시민권을 받던 날 미국 시민권자로서 나를 보증해준 사람이 만들어준 이름이다.
나는 그녀를 지미 누나라 불렀다. 그녀는 지미의 식사를 챙겨주며, 배설물을 치우고, 목욕을 시키며, 산책을 시켜주는 개의 메이트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난 개에게 말했다.
“나는 솔 메이트도, 하우스 메이트도 없는데 지미는 나보다 팔자가 좋구나.”
내 말에 지미 누나가 깔깔거리며 웃는다. 지미도 웃음소리에 꼬리를 흔들며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그때였다. 다른 멕시칸 여인이 덩치가 큰 흰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우리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온다. 지미 누나가 “하이, 록시!” 라며 개에게 인사를 한다. 나도 따라서 “하이, 록시!” 하며 개에게 인사를 하자 록시가 꼬리를 둥글게 흔들며 나를 반겼다. 수놈인 지미보다 암놈인 록시가 더 상냥하고 귀엽게 굴었다. 지미 누나와 록시 언니는 다음 날 학교에 갈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궁금증이 발동한 나는 어느 학교에 다니며 뭘 전공하느냐고 물었다.
“LACC (Los Angeles City College)에서 보육학을 전공해요.”
록시 언니와 지미 누나는 동시에 대답한다.
“나도 은퇴하고 다시 LACC에 입학했는데….”
우리는 알고 보니 같은 칼리지를 다니고 있었다. 록시 언니와 지미 누나는 주인이 저녁에 대학을 보내주어 개 메이트 직업이 나쁘지 않다고 한다. 지금은 비록 개의 식모로 일하고 있지만, 머잖아 대학을 졸업해서 당당하고 떳떳한 직업인이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여기고, 열심히 공부하며, 게으르지 않은 그들이 좋았다. 부지런히 살아가는 자세가 나의 친딸처럼 자랑스러웠다. 그들이 성공하기를 바라며 맘속으로 축복을 빌어주었다.
2000년 봄 학기에 나는 12학점을 신청했다. 그림, 사진, 피아노, 그리고 영어기초를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부터 시작한다. 영어가 가장 중요하다. 소통이 잘 돼야 다른 강의 내용을 습득할 수 있기 때문에. 피아노는 매일 연습이 필요해 계속하기가 힘들었다. 소질도 없었다. 한 학기만 B학점으로 마치고 그만두었다.
미술과 사진은 재밌었다. 전문 과목을 선택해야 할 시점에서 고민하다가 미술로 결정을 내렸다. 부산에서 동아대에 다니던 시절 범일동에 있는 현대미술학원에 다닌 게 도움이 됐다. 나이 들어 하는 공부는 결코 쉽지 않았다. 무척 힘들었다. 학기마다 여러 차례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나에게 ‘너 은퇴했잖아?’ ‘공부해서 취직할 것도 아니잖아?’ ‘왜 그렇게 스트레스 받아 건강을 해쳐가며 악착같이 하는 거야?’ ‘뭘 위해서?’라고 속삭인다. 근사한 이유와 달콤한 향기가 때때로 나를 유혹했다. 그럴 때마다 자신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게 가장 힘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내 가슴에 묻은 아들을 생각하며 견뎌냈다.
아들이 살아 있으면 엄마의 사진 숙제, 피겨드로잉클래스 숙제를 위해 멋진 모델이 되어줄 텐데. 때때로 유빈이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영어로 해내야 하는 역사, 수학, 과학 등 교양 과목은 나의 적이었다. 마치 전투병처럼 사생결단으로 끝까지 싸워 결실을 얻어낸다. 기본 실력이 없는 나는 2년제 대학을 6년6개월 만에 졸업했다. 칼리지에서 보낸 6년여 세월은 드라마 한 편을 쓰고도 남을 희로애락이었다. 그중 가장 좋은 기억은 칼리지를 다니며 쓴 논픽션 영문 소설이다.
영문 소설
영어 에세이 숙제로 나는 이민자의 애환을 그린 나와 아들의 이야기를 써냈다. 옷장 속에 잠자고 있는 원고 이야기도 적었다. 숙제를 내고 1주일이 지났을 때, 라이언 교수님이 수업 끝난 뒤 나를 잠깐 보자고 하셨다.
“리사, 그 잠자고 있는 원고를 깨워 데려올 수 있겠어요?”
“네. 그럼요. 버렸던 원곤걸요.”
원고를 갖다드리고 여러 달이 지난 후 라이언 교수님은, 그 원고 그대로는 출판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내게 전했다. 장소와 시제에 연결성이 없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글이라 한다.
라이언 교수님은 내게 다시 쓰라고 권했으나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내 영어실력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데 영어로 소설을 쓰다니…. 내가 영어 소설을 쓰면 그것은 거짓과 교만일 터였다. 하늘과 땅도 웃고 개와 소도 웃을 일이었다. 독자를 속이는 것은 물론, 나를 속이는 일이다. 교수님은 그 후에도 강의가 끝날 때마다 아직도 결심이 서지 않느냐고 물어오셨다.
한국식으로 두 손바닥을 싹싹 빌며 정말 할 수 없다고 수없이 나의 무능함을 밝혔다. 라이언 교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다. 에세이처럼 하루 한 장씩 써오면 교수님이 교정을 하겠다고 하셨다. 교수님이 원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리사, 책을 만들어 내가 강의하는 클래스의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싶어요. LACC 학생들 대부분이 이민자잖아요. 리사의 체험은 대학생들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용기를 줄 수 있는 내용이거든요.”
그때 포기하지 못하시던 교수님의 집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가방을 던지고, 파트타임 일을 나갔던 유빈이. 자기가 번 것과 용돈을 모아 노숙자를 돕던 폴의 봉사정신과 짧은 인생. 그리고 내 수난의 이민생활이 대학생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모티브가 된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한번 도전해보겠다고 결심한다. 마음이 정해지자 난 지옥의 통로를 걸어 들어가는 기분으로 에세이 형식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책을 쓰면서 영어가 어려워 고통스러웠다. 아들의 죽음이 되살아나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때마다 고난을 피해 동굴 속으로 깊숙이 도망치고 싶었다. 아들 곁으로 따라가고 싶은 유혹마저 느꼈다. 부모와 부부는 죽으면 산에 묻어도, 자식은 영원히 가슴에 묻는다는 말의 뜻이 세월이 흐를수록 실감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남편은 의식에서 까맣게 잊혀도 자식은 그렇지가 않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산의 그림자처럼 시도 때도 없이 내려와 나를 덮치곤 한다. 나는 우울증이란 늪 속으로 깊이 침몰해갔다. 너무나 힘들고 어려워 중간에 여러 차례 포기하려 했다. 그러나 라이언 교수님의 친절한 배려와 칭찬이 때때로 힘을 실어주었다. 통한의 시간을 견디고 원고를 완성하는 데 4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라이언 교수님은 교정을 보시면서 중간 중간 대학생들에게 나의 에세이를 가르치며 학생들의 반응을 보았다. 반응은 좋았다. 나에게도 학생들의 위로와 감사의 편지가 끊임없이 날아왔다. 무엇보다 보람을 느꼈던 것은 나의 책에서 얻은 모티브와 용기로 앞으로 어떤 어려움도 나처럼 이겨내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을 때였다. 대학생들의 편지를 읽으며 힘들었던 것만큼 보람도 컸다. 나는 이 친구들의 롤 모델이 되기 위해서도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
AIU 편입과 런던 연수
LACC를 졸업한 그해 가을, 나는 4년제 대학 3학년에 편입한다. 오티스아트스쿨, 캘리포니아주립대(리버사이드), AIU(American International University)로부터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나는 학교 수준보다 로컬 운전이 가능한 대학을 골랐다. 아들을 잃은 고통을 잊기 위해 소주를 마시고 운전하다가, 대형 교통사고를 낸 적이 있다. 그 후유증으로 운전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학교는 AIU였다. 이사를 가지 않고 로컬로 학교를 다닐 수 있어서 좋았다.
전문 과목이 시작되자 나는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자유로웠다. 밤낮으로 그래픽과 오일페인팅으로 그림을 그렸다. 낮에는 학교에서, 저녁에는 학원에서 그리고 틈틈이 집에서 그림에 몰입해 살았다. 전시회를 준비할 때는 하루에 16시간을 그려도 지치지 않았다. 그림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림을 사랑했다. 창고와 온 집안에 그림이 쌓이기 시작한다. 압구정동에 사는 친구가 갤러리 오너를 소개해 주겠다면서 서울에 나와 개인전을 열라고 권유한다.
나이가 들고 머리가 좋지 않은 나 같은 사람도 “하면 된다”는 사실을 영문 논픽션 책을 내면서 실감했다. 나는 은퇴 후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아픔과 외로움을 극복했다. 공부하는 일이 스트레스인 적도 있었으나 20대의 클래스메이트들은 모두가 자녀 같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힘들고 어려운 숙제는 친구들이 해결책을 구해주었다. 모든 것이 태산 같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2006년 5월 어느 날 AIU-LA의 리처드 교수님의 전화를 받았다. 올A로 졸업하게 됐으니 축하한다 하시면서 졸업생 대표로 연설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서 괴성을 지를 뻔했다. 졸업생 대표로 스피치까지. 나는 일어나서 할렐루야를 부르며 혼자서 춤을 추었다. 헨델이 할렐루야를 작곡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감사를 표현하는 의식을 노래와 춤으로 신나게 했다. 그래야 실감이 나니까.
영국으로 해외연수 갈 준비를 해야 했고, 다른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졸업생 대표 스피치를 준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학생에게 스피치를 양보했다. 젊은 학생들은 졸업생 대표로 스피치 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대학원을 가거나 직장을 구하는 이력서에도 올릴 만한 일이 아닌가. 나는 1년 만에 2년 코스를 마치고 올 A로 BFA(Bachelor of Fine Arts) 학위를 받았다.
2006년 6월 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논픽션 영문 소설이 출간됐다. 라이언 교수님과 칼리지의 도움으로 수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근사한 이벤트도 가졌다. 연합뉴스의 장 기자도 참석해서 축하해주었다. 특파원 생활 3년 동안 우리 모자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그의 기사를 읽고 감격했다. 축하는 당연히 라이언 교수님이 받아야 했다.
켈리포니아주립대 학생인 대학신문 기자, 라스트는 앞으로 꼭 내 책의 내용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한다. 라스트 기자는 쌍둥이 동생과 함께 나의 출판기념식에 참석해서 출판기념식을 순서대로 DVD에 담아 선물했다. 너무나 감사했다. 라이언 교수님의 책 읽기와 연설이 있기 전에 내 영어 스피치가 있었다. 나는 너무 떨려 책 제목까지 까먹는 해프닝을 벌였다. 내 실수로 웃음이 터지면서 분위기가 한층 더 화기애애해졌다. 사람들은 남의 실수를 재미있어 하는 것 같다. 내 영문 소설 제목은 ‘The Rich Boy Stands There Always’다. 너무 길어서 나는 삭둑 잘라 ‘부자소년’이라 부른다.
출판기념식이 있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바쁘게 영국으로 날아갔다. AIU-런던에서 브리티시 뮤지엄학, 셰익스피어문학, 그리고 아트폼 사진학 강의를 듣고 싶어서였다.
AIU-런던 기숙사에서 20대의 젊은 여학생들과 함께 생활한 2개월은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나는 유빈의 사진이 든 액자를 침대 옆에 놓았다. 학생들은 유빈이 엄마를 만나기 위해 런던에 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여대생들은 잘생긴 유빈을 만나고 싶어했다. 나는 내 아들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다는 말은 쉽게 나오지를 않는다. 상대가 괜히 미안해하고 어색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죽은 사람에 대한 것을 물을 때는 요즘도 가슴이 저리다.
기숙사에서 나는 5명의 딸을 얻은 기분이었다. 태산처럼 쌓인 싱크대의 설거지며 화장실과 샤워장 청소, 뱀허물처럼 벗어놓은 옷 정리는 물론, 목욕실 쓰레기통의 생리대가 붉은 피 꽃으로 고개를 들고 있는 것까지 엄마가 딸을 챙기듯 그렇게 다뤘다. 한때는 우리 폴의 인분이 묻은 팬티도 더럽다고 고개를 돌리던 못난 어미가.
연수생들은 그런 나를 엄청 좋아하며 셰익스피어글로벌극장이며 로열 오페라 하우스, 코벤트가든, 심지어 디스코텍까지 데리고 다녔다. 주말여행으로 스페인과 프랑스를 갈 때도 꼭 나를 챙겼다. 나는 뒷바라지해주는 엄마의 마음으로 그녀들을 따라다녔다. 프랑스에 갔을 때 박물관에서 다빈치의 그림 모나리자를 만났을 때 그들은 “리사가 저기 있네”라고 놀리기도 했다. 왜냐면 ‘The Mona Lisa’의 끝 이름이 내 미국 이름과 같았기에. 사실 내 이름 리사는 성경 누가복음에 나오는 성모마리아의 멘토인 엘리샤벳을 줄여서 부르는 이름이다. 미국 시민권을 얻을 때 보증인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이름이지만 나는 내 이름을 좋아한다. 예술을 전공하는 여대생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참으로 즐거웠다. 여대생들은 모두가 남자친구가 있었다. 나 외엔.
나는 연극과 오페라가 좋아 셰익스피어글로벌극장에서 연극 보는 것을 좋아했다.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를 볼 때는 안토니오에게 배신당한 클레오파트라의 절규가 지붕이 없는 옥외극장 하늘 위로 솟아올라 밤하늘의 은하수를 타고 템스강의 물결을 따라 흘러갔다. 극장을 나와 템스강 언덕을 걷는데 기타를 치며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를 부르는 청년이 있었다. 기타를 치며 폴 매카트니의 흉내로 날 즐겁게 해주던 폴이 한없이 그리웠다. 나는 템스강 위에 펼쳐진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렌지색 황홀한 별 하나가 내 머리 위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폴의 영혼이 빛을 발하며 엄마를 인도하고 있었다.
영국식 발음 탓에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강의, 튜브(지하철)를 잘못 타서 헤매던 일…. 온갖 희로애락이 꿈처럼 지나간 런던에서의 2개월은 공부만큼이나 값진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아파트를 정리하고 돈을 공부에 쓴 것이 오히려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소유의 삶보다 존재의 삶이 더 풍성했다. 은퇴한 뒤 빈둥거리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것이 큰 기쁨이었다. 내 정신의 성숙을 위해 배움을 선택한 것은 생애를 통해 내가 결정한 일 중 가장 잘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었다.
자식 교육
자식을 키우며 교육시킬 때가 삶에서 가장 보람 있고 행복했다. 최고로 의미 있고 값졌다. 1970년대 중반, 나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이민 보따리를 샀다. 미국에선 편모나 편부도 자식을 맑고 밝게 키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 꿈도 다른 부모들처럼 자식에게 전인적인 교육을 시켜 훌륭한 인간으로 키워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디아스포라의 첫걸음은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낯선 문화에서 오는 충격은 큰 고통이었다. 혼자서 직장일과 집안일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일터에 갈 때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고 돌아올 땐 픽업을 해야 한다. 아이도 나도 지치기 시작했다.
나는, 아는 분의 소개로 아이를 따뜻한 가정에서 돌봐주는 베이비시터를 만났다. 선량한 백인부부에게는 폴보다 두 살 위인 피터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참 잘됐다 싶었다. 외롭지 않게 형제처럼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건 내 착각이었다. 주말마다 폴을 보러 가면 아이는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겨우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가 슬픈 일부터 겪은 것이다. 폴은 베이비시터 부부에게 그 집 아들이 하는 대로 마미와 대디라고 따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피터가 폴을 무척 힘들게 한 것이다.
“낫 유어 마미, 낫 유어 대디.”
피터가 떠밀어 아들이 넘어졌다고 한다. 많이 아팠다면서 이곳저곳을 보여준다. 생가슴이 찢기는 것 같았다. 피가 흐르는 괴로움이었다. 서러움 덩어리를 삭일 길이 없어 응응 울었다. 외국에 나와 혼자서 아이를 키우며 돈을 벌어야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내가 힘이 드는 일보다 아이가 겪는 고통을 보는 것이 더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었다.
“돈 크라이 마미, 아이 원 투 고 위드 유.”
아가는 자기를 떼놓을까봐 두려워, 나를 꼭 붙들고 있다. 베이비시터는 나보고 자주 오지 말라고 한다. 엄마가 왔다 가면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편이 돈을 벌고, 자녀를 키우며 집안일을 하는 여자가 한없이 부러웠다. 나는 더 이상 내 아가에게 상처를 줄 수 없었다. 불안정하게 자라게 할 수 없었다. 이민 생활 1년도 채 못 견디고 아이를 데리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언니와 상의한 끝에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키워주겠다는 확답을 받아냈다. 평생을 두고 고맙고 감사한 우리 언니. 막내아들처럼 거두겠으니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일해서 자리 잡은 후 데려가라 하셨다. 자식을 떼놓은 나는 가슴 밑에 고름주머니 몇 개를 달고 사는 심정이었다. 그 주머니가 언제 터질지 항상 걱정이 되었다. 유빈을 어서 빨리 데려오기 위해 정신없이 일만 하며 살았다. 밤늦게 하는 빌딩청소처럼 험하고 힘든 막노동도 가리지 않았다.
2년을 그런대로 지낸 뒤 언니로부터 심장 떨리는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되었다. 아이가 모험심이 많아 온갖 사고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세발자전거로 버스와 경주를 벌인다면서 버스 옆에 붙어서 달리는 것을 이웃 주민이 끌고 온 적도 있다. 그 이웃 남자는 아이에게 주의를 제대로 주지 않는다고 언니에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언니는 그게 사건의 전부였다면 내가 걱정할까봐 조용히 넘기려 하셨단다. 하지만 아이의 모험은 끝이 없었다. 언니는 긴 한숨을 몰아쉬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햇살 쨍쨍히 맑은 날 아이는 우산을 들고 현관을 나섰다고 한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언니는 아이를 불러 왜 우산을 갖고 나가느냐 물었더니, 텔레비전에서 본대로 우산을 타고 날고 싶다고 하더란다. 엄마가 그리워 날아서 엄마를 찾아 가려고 했던가? 결국 아이는 타월을 어깨에 날개처럼 활짝 펴 묶은 뒤 이모의 눈을 피해 현관을 빠져나갔다. 언니가 사는 빌라의 옥상에서 뛰어내려 개구리처럼 납작하게 된 것을, 큰조카가 업고 병원에 데려갔다고 한다.
내가 유빈을 데리러 한국에 가려던 무렵, 언니는 또 한번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언니는 십년감수했다면서 어서 아이를 데려가라 하셨다. 유빈이가 친구들을 따라 버스를 타고 교외에 있는 강에 물고기를 잡으러 갔단다. 그런데 아들은 엄마가 사준 신이 물에 떠내려가자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버둥대다가 강의 물살에 휘말려 떠내려갔다. 어느 수호천사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는 뛰어들어 유빈을 건져주었다고 한다. 언니는 그 수호천사를 찾아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었으나 찾을 길이 없었단다.
마치 한 편의 성장기를 전해 듣는 느낌이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내 아들 폴 유빈이라니, 가슴이 놀라 벌렁거렸으나, 홀어미의 자식이 겁쟁이가 아니라 모험심이 많아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앞으로 탐험가가 되려나? 우리 폴이 원하면 달나라의 파이오니어가 되겠다고 해도 뒷바라지를 해주리라. 미국에 돌아오면 좋아하는 것을 찾아 마음껏 하게끔 해주고 싶었다. 언니에게 자식 맡긴 죄로 나는 수십 번이나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아들에게는 국제전화로 희망의 말을 해주었다.
“유빈아, 우리 유빈이가 미국에 오면 하고 싶은 것 모두 하게 해주고 가고 싶은 곳은 다 데리고 갈게요.”
내가 존댓말을 해야 아이도 존댓말을 배울 수 있다.
“네. 엄마 언제 와요? 빨리 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엄마가 많이많이 보고 싶어요.”
베이비시터 집 아들 피터에게 배운 영어는 몽땅 다 까먹고 한국말을 유창하게 해서 놀랐다. 한국말을 잘하는 것은 큰 수확 아닌가. 그런데 미국에 오면 또 다시 영어를 익혀야 한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엄마 빨리 갈게요. 엄마도 우리 유빈이 많이많이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
한국에 나가서 내 사랑하는 아들을 어서 데려오고 싶었다. 유빈이가 어릴 때 베이비시터 집에서처럼 유리창에 기대 서서 엄마를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당장에라도 한국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언니가 동생의 자식을 맡아 키우면서 고생이 많았다. 나는 언니에게 죄인이었다. 언니가 아들을 봐준 덕에 나는 아들과 살 수 있는 안정된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 언니에게 큰 감사를 드렸다. 언니의 자녀들이 모두 출가하고 자유로워지면 언니를 모셔와야지. 언니의 노후는 내가 보살펴야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유빈이가 미국에 들어온 후부터 나는 그동안 못 베푼 사랑을 퍼부어주었다. 유빈은 컴퓨터를 갖고 싶어했다. 좋아하는 게임을 실컷 해보고 싶다고 한다. 폴은 컴퓨터를 잘해서 내가 관리하는 아파트 입주자들에게 보낼 편지 등 여러 가지 일들을 매니저처럼 척척 도와주었다. 나는 우리 유빈이가 참으로 자랑스러웠다.
유빈이 서울대로 연수를 가기 전까지 우리 모자는 절대로 떨어져 살지 않았다. 서울대에서 갑자기 일어날 사고를 예감했다면, 아들을 언니에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최고의 교육을 시키려고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냥 아들과 여행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게끔 해주며 신나게 살았을 것이다.
후반전
런던으로 연수를 다녀온 후 내 인생을 되돌아보는 사유의 시간을 가졌다. 하프타임에 쉬면서 인생의 후반전을 프로그램화하며 디자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인생의 일모작은 은퇴하면서 마무리했다. 이모작으로 대학에 다시 입학해서 그림 공부를 했다. 삼모작으로는 공부를 더 하며 봉사생활을 하고 싶다.
졸업한 AIU-LA에 갔다. 성적증명서와 졸업증명서를 떼서 캘리포니아주립대 대학원으로 보냈다. 파인아트 신입생 담당교수인 세멘타로부터 몇 번의 힘든 테스트를 받았다. 그리고 학교에서 지정한 날 16점의 그림을 갖고 가서 6명의 교수님으로부터 실기평가를 받았다. 얼마 후 합격통지서가 분홍빛 날개를 달고 내게로 날아왔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양손을 높이 들고 풀쩍풀쩍 뛰었다.
꾸준히 노력하면 안 될 일이 없었다. 아프면 통곡하고 좋은 일은 춤추며 기뻐하는 게 나의 의식이었다. 그래야 온전히 내 것으로 실감할 수가 있다. 실패했을 때는 바닥 깊이 내려가 끝까지 아파한다. 그리고 다시 깨어나면 상처의 흔적마저 사랑하게 된다. 아픔도 피하지 않고 받아들여 환대하면 기쁨이 될 수 있다.
후반전 무대를 젊은 학생들과 대학원에서 시작할 수 있다니, 날듯이 기뻤다. 행복했다. 반면에 아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었다. ‘엄마가 우리 유빈이 대신 공부해서 네게 갈 때 모두 다 가져다줄게.’ 나는 말도 안 되는 말로 스스로를 위무하곤 한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나는 마음의 여유를 가졌다. 은퇴 후의 공부는 내 자신의 내면을 성장시키기 위함이었다. 또한 배움은 이웃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봉사하는 일에 신경을 썼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도왔고, 무기수에게 편지 보내는 일을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선배 봉사자를 따라 벨 양로병원에 갔다. 대부분의 노인들이 어린이로 되돌아가 귀저기를 차고 살았다. 그분들은 자식들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식들이 바빠서 자주 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연세가 드신 부모님들은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윤 할머니가 자식보다 낫다면서 내 손을 붙잡고 조금만 더 있다 가라 하신다. 할머니의 소원대로 한참을 더 있으면서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훗날 누굴 기다리고 그리워하며 살게 될까? 슬픈 그림자가 내 가슴을 가르며 지나간다. 하나님의 사랑이 큰 위안이 되었다.
인생 후반전의 마지막 단계를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안 가도록 잘 디자인해서 준비해야겠다. 예를 들면 건강해야 하므로 소식, 운동은 열심히, 그리고 봉사하며 늘 감사할 것….
최근 내가 즐겨 하는 일은 동양선교교회에서 주관하는 평생학습원의 독서지도사 및 독서코치반에서 학습자들의 숙제를 도우며 스태프로 봉사하는 일이다.
매주 책을 한 권씩 읽고 감상문을 발표하는 학습자들을 보면 즐겁고 행복하다. 봉사와 사랑에 빠지다보니 학교 숙제를 소홀하게 했다. 그러나 학교 공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은퇴한 이 나이에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것도 가치가 있지만,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더 큰 보람이고 축복인가. 결국은 봉사하기 위해 공부한 것이 아니던가?
여러 가지 일로 바빴으나 유빈이를 더 이상 용인의 산등성에 방치할 수 없었다. 용인에 계신 권 목사님은 1년 전부터 유빈의 이장 문제를 도와주기로 약속하셨다. 권 목사님은 30년 전부터 우리 모자의 교육 멘토이셨다. 30년 넘게 로스앤젤레스에서 목회하시던 분이 용인의 한 대학에 총회장으로 가셨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마치 우리 유빈의 일을 돕기 위해 그곳에 미리 가 계시기로 예정된 분 같았다. 참으로 믿어지지 않았다.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총장님이 그곳에 계셨던 것은….
치유가 일어난 꿈
한국으로 향하기 전 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유빈은 신나게 웃으면서 배를 타고 태평양으로 떠났다. 교도소에 편지를 보내는 형제의 일을 도와줘야 했음에도 권 목사님, 아니 권 총장님과의 약속, 그리고 아들에게 바다를 보여주기 위해, 모든 봉사활동을 두 주간 접고 서울로 날아갔다. 이럴 때는 몸이 여럿이었으면 좋으련만.
화장하기 전날 밤 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유골로 만나야 할 끔찍한 순간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나를 믿을 수 없었다. 또 혼절하면 어떻게 하지? 나는 절대로 쓰러져서는 안 된다. 사랑하는 동생과 올케에게 더 이상 걱정을 끼치면 안 되니까. 뼈들과 상봉할 것을 생각하자 걱정이 앞섰다.
권 총장님과 동생은 힘들 것 같으면 용인 산소와 수원연화장에 오지 말라 한다. 일을 잘 마무리해줄 테니 홈스테이에서 쉬라는 거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설사 혼절하는 일이 있어도 아들을 꼭 만나야 한다. 나를 억지로 못 따라오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일만큼은 내게 전적인 권한이 있었다.
렌트한 도곡동 홈스테이에서, 화장하기 전날 밤 꿈을 꾸었다. 참으로 신기한 꿈이었다. 나를 인도하는 소리를 듣고 어느 통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통로 바깥은 온통 푸른 나무들이 무성히 우거진 숲속이었다. 깨끗하고 아담한 집 한 채가 그림처럼 숲 속에 앉아 있었다. 우리 집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평소 때처럼 유빈이가 침실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활짝 웃는 얼굴로 “하이, 맘!” 인사를 한다. 눈물이 날 만큼 반가웠다. 유빈이 옆에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둘은 친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그 어린 사내아이를 유빈의 동생으로서 양자로 들여 서로 외롭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그때였다. 한 여인이 양손에 큰가방 한 개와 작은 가방 한 개를 들고 우리 집으로 들어온다. 여인에게 우리 아들 둘을 잘 봐달라 부탁하고, 나는 일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에 돌아오니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여인이 두 아들을 훔쳐갔다고 울부짖으면서 아들을 찾았다. 옷장과 목욕실 문을 열었으나 폴은 집안에 없었다. 나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울면서 숲을 헤매는데 가까운 거리에 높고 흰 건물이 보였다. 뛰어 올라가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내가 평소에 존경하는 신앙의 멘토가 계셨다.
“…모…모…모…옥…”
나는 안간힘을 다해 강준민 목사님을 불렀다. 아무리 애써 불러도 말이 목에 걸려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나는 답답해서 몸부림치며 울었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목사님께 전달된 듯했다.
“목사님, 어느 여인이 와서 우리 아들 둘을 훔쳐갔어요.”
“그 여인은 천사예요. 그들은 천국으로 갔어요.”
“목사님, 감사합니다.”
멘토의 그 말에 저절로 눈물이 그쳤다. 목메임이 풀리며 미소가 번져났다. 나는 숲 속의 우리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여인이 들고 온 두 개의 보따리 중 큰 것이 없어졌다. 내 걱정 근심이 큰 가방에 담겨 모두 천국으로 간 것일까? 작은 가방 하나가 응접실 바닥에 남아 있었다. 나는 가방을 열었다. 오래된 큰 책 한 권과 백도자기로 된 빈 접시 두 개가 들어 있었다. 무슨 뜻일까?
큰 책 한 권과 흰 접시 2개?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해석할 수 없었다. 그리고 유빈을 따라다니던 그 귀여운 어린왕자 같은 소년은 누구였을까? 내 심장에 박혀 있던 폴의 존재가 가슴에서 빠져나가 함께 하늘나라로 간 것일까?
그들은 천국으로 갔다고 멘토가 말하셨는데, 그 천국은 어느 행성을 말하는 것일까? 천국이란 곳이 있기나 한 것일까? 모르니까 있다고 믿고 싶다. 그래야 훗날 아들을 만날 희망이 있고 내 맘이 편하니까. 아니야, 천국은 꼭 있어.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을 보여주셨어.
두려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기분이 상쾌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꿈을 꾸고 난 후 지금 이 순간까지 두렵거나 무섭지 않다. 가슴의 아픔도 없어졌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아들은 말없이 내 곁에 있다. 꽃과 촛불을 친구 삼아 영혼의 안식을 위해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듣는다. 지난날 오열하고 통곡하며 들었던 레퀴엠이 지금은 위안과 평화의 선율로 들린다.
비바람 폭풍우 벼락이 몰아친 18년이란 긴 고뇌의 여정이 깨끗이 끝이 났다. 아들의 기일인 8월1일이나 생일인 8월28일 중 하나를 택해 그가 꿈에서 부탁한 대로 바다로 보내줄 것이다. 폴이 서핑을 즐기던 샌타모니카와 말리부, 태평양의 서해안에 가서.
지금까지 죽은 자식의 이름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다. 상처를 잊기 위해 그림에도 몰입했다. 그리고 내 영혼의 성장을 위해 몸부림치며 배웠다. 아들의 죽음과 이름, 무덤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집착을 깨끗이 분골로 완성하여 자연으로 보내게 되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들은 지금 내 곁에서 잠시 쉬고 있다. 머잖아 소원대로 드넓은 태평양 바다로 가서 좋아하는 서핑을 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내 인생을 가렸던 먹구름도 완전히 걷혔다. 앞으로 인생이란 운전대를 기도하며 잡으려 한다. 기도로 황혼 꽃을 피우며 사랑과 기쁨으로 살고 싶다.
하프타임을 가진 뒤 인생 후반전을 멋지게 준비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이제 나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지났다. 남은 후반전은 아들 곁으로 가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열정과 시간을 다해 형제, 친구, 그리고 이웃과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자로 살고 싶다. 아들이 죽는 순간까지 친구들을 위해 봉사하다가 떠났듯이.
매일매일 게으르지 않은 저 태양을 닮고 싶다. 자기를 가동시켜 어두움을 몰아내는 햇빛. 찬란하게 온 우주를 비추며 생명을 자라게 해주는 햇살. 오늘도 남가주의 강렬한 태양이 새날을 밝히며 불덩어리의 에너지로 힘차게 떠오르고 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우리 모자의 영혼을 위로하며 집 안 가득히 울림을 선사하고 있다. 난 레퀴엠의 선율을 통해 폴을 만나고,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했다. 깊은 감사가 불길처럼 솟구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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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엔 궂은비가 내리고 있었다. 많이 슬펐다. 내가 행복해야 주변에 햇살 밝은 즐거움을 나눠줄 수 있을 텐데. 올케의 딸들이 오는 것이 싫었다. 내 속에 감춰져 있던 아픔의 고름주머니가 터져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향기롭지 못한 말들이 냄새를 풍기며 수없이 튀어나오려고 야단들이다. 애써 견뎠다. 오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부모와 자녀가 오랜만에 상봉하겠다는데 나이 든 고모가 차가운 얼음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동생부부가 화장 일을 도와준 것만 생각하며 꾹꾹 참아냈다.
동생의 큰딸이 왔다. 묵직한 성격의 동생은 말이 없다. 올케는 내 앞에서 팔불출의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딸들 자랑과 사위들 자랑이 모자라 손자들 자랑까지 끝이 없다. 슬픈 얘기보다는 좋겠지만, 가슴에 자식을 묻은 시누이 앞에서 좀 지나치다 싶었다.
“내 조카딸아, 정말 자랑스럽다. 부산서 올라와 당당한 서울 여인으로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구나.”
그들 모녀를 위해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의 이중성이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네 나이에 미국에서 당당히 살았는데. 영어를 못해도 기죽지 않았거든.’ 나이 어린 조카딸과 비유하며 자위하는 내가 서글펐다.
모녀는 한 침대에서 잤다. 내가 조카딸과 같은 침대를, 올케와 동생이 한 침대를 사용하라고 제의했지만 사양한다. 신경이 예민한 나를 불편하게 하면 깊은 잠을 못 잘 거라는 배려에서였다. 동생은 남자라고 신사도를 발휘한다. 올케가 상경한 후 동생은 계속해서 바닥에서 잔다. 올케와 내가 침대 하나씩을 차지하게 해주었다.
서로가 주고받는 공해는 대단했다. 코고는 소리, 방귀소리, 이 가는 소리, 변기 물 내리는 소리 등. 이 모든 불편함도 내 마음이 즐거우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이었다. 혈육을 귀중히 여기고 감사한다면 여러 가지 공해도 꽃향기와 신나는 음악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그런데 도저히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남편과의 사별, 아들의 죽음 등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 깊이 파인 상처로 인해 내 성격이 병든 게 틀림없었다.
옷장 속에 내 자식의 뼛가루를 두고 동생 가족을 잘 대해주기가 어렵다. 내가 부처나 예수나 성모마리아가 아니니까. 마음이 갑자기 다양한 색깔로 변덕을 부리며 동생 가족 모두가 미워졌다. 싫었다. 잠재의식에 구멍이 뚫렸는지 켜켜이 쌓인 찌꺼기들이 자꾸만 터져 나오려 한다. 참으려니 내 영혼까지 괴로웠다. 우울증이나 정신분열증이 아닐까 두려운 생각이 순간순간 엄습해온다.
내 그늘진 얼굴 탓인지 조카딸은 아침을 먹자마자 도망치듯 떠났다. 올케와 동생도 어서 부산으로 돌아가줬으면 하고 바랐다. 모두가 다 싫었다.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즐거움이고 기쁨이 돼야 하는데 이건 고역이었다. 기분이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기복이 심했다. 잠재의식의 세계가 폭발했다. 마음 바닥에 납덩이처럼 앉았던 것들이 말이 되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너희들이 아니라도 권 목사님 모시고, 나 혼자서 얼마든지 이장과 화장을 할 수 있는데. 너희들 눈에 내가 바보 푼수 철따구니 없는 아이 같아 보이니? 난 미국이나 영국에서도 홀로 살아온 노하우가 있어. 내 나라, 내 땅에 왔는데 길을 잃을까봐? 그따위 동정심 같은 건 싫어. 너희 부부와 조카들 동정 때문에 내 꼴이 더욱 비참하게 느껴지거든. 그러니 앞으로는 내 걱정 그만해. 걱정 끼치는 것도 부담이야. 너희들 앞에 갈기갈기 찢어진 내 인생이 처량해서 더는 견디기 힘들어. 못 견디겠다는 내 가슴을 너희들은 몰라. 차라리 낯선 사람들이 더 편안하거든.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던데, 내 가정이 몰락했으니 고소하냐?”
아들의 유해를 옷장 안에 숨겨둔 어미의 가슴엔 유월에도 찬 서리가 내리고 있다. 내 앞에서 자기 자식 자랑이라니…. 속이 완전히 뒤집혔다. 가슴속에 겹겹이 쌓인 상처를 직선으로 내뱉을 수 없는 나는, 내 자신을 교묘하게 드러내며 쏘아댔다. 예상 못했던 돌개바람이고 억지였다. 듣는 사람이야 당황했겠지만 난 덧난 상처가 조금은 치유되는 것 같았다. 상처는 드러내어 말을 해야만 치유된다던 정신신경과 의사의 말이 기억났다. 그래서인지 멍든 가슴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동생부부는 그늘진 얼굴로 침묵하고 있었다. 망해와 한방에 사는 불쌍한 여인이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평소 같으면 따지거나 고함을 버럭 지를 텐데, 죽은 아들의 덕을 톡톡히 보는 것 같았다.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고생한 동생부부가 아닌가. 정말 고마워하고 다정히 형제애를 나누며 살아가도 짧은 인생이지 않은가. 시시각각 종잡을 수 없는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동생부부에게 상처를 주어 미안했다. 혀를 깨물고 싶었다. 한번 입 밖으로 빠져나간 말은 되돌릴 수 없다. 알면서도 자꾸만 저지르는 것이 말의 실수다. 무의식 속에 어릴 때부터의 상처가 켜켜이 쌓여 있기에 말이 화살처럼 올라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이상한 것 같지 않니? 벌써 수차례 너희들이 고마웠다가 밉고, 좋다가 싫고 그렇다. 가까운 병원에 가서 검진을 한번 받아봐야 될 것 같지 않니?”
그게 진실이었다. 동생이 양치질할 때 내는 소리에도 헛구역질을 할 정도였다. 역겨워 견디기가 거북했다. 양치질을 할 때마다 곁에 있는 사람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하는, 동생이 인격과 교양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몹시 싫었다. 사소한 일도 미움으로 자라났다. 깊은 상처를 풀어낼 대상도 없이 오랫동안 혼자서 살아온 탓일까? 나는 속으로 반성하며 동생 가족을 사랑하려 애썼다.
어머니는, 우리 4남매 중 막내인 동생을 가장 귀하게 생각하셨다. 동생의 양말을 밟지 못하게 하셨고, 누워있는 머리맡으로 치마를 펄럭이며 지나다니지도 말라 하셨다. 남자이기 때문에.
어릴 때 동생은 나의 홍시나 곶감 떡 등을 자주 빼앗아갔다. 누나이면서 빼앗겨야 했고 태권도 연습한다면서 곧잘 나를 차는 통에 자주 울었다. 동생은 내 모든 것을 뺏는 존재라는 의구심이 어릴 때부터 잠재의식 밑바닥에 상처의 나무를 키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 번씩 부닥치는 일이 있더라도 잘못 자란 갈등의 나무는 그때그때 즉시 잘라내고 화목의 나무로 키워야 했다.
평소 나는 동생을 미워하고 질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처럼 동생을 끔찍이 아꼈다. 나도 어머니처럼 동생을 사랑하자. 귀하게 생각하자. 지금은 이 땅에 계시지 않아 직접적인 효도는 불가능하다. 대신 부모님의 분신인 형제자매와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이 곧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길이 아닐까. 그처럼 아름다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부모님의 혼백도 기뻐하시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아낌없이 사랑했다. 그런데 최근 몇 년째 나의 성격이 내가 감당하기 버겁도록 비정상이 되었다. 정신상태를 진찰받으려면 병원을 찾는 길이 최선이었다. 회색으로 변질되고 있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동생이 묻는다.
“누나, 강남세브란스병원이 가까우니까 가서 정밀검사 한번 받아보자.”
“네. 형님, 그러세요.”
올케와 동생은 나를 걱정한다. 동생은 병원에 전화를 건다. 미국에서 잠시 방문 중이라 시간이 많지 않으니 빠르게 진료받을 수 있는 검진 프로그램이 있느냐고 묻는다.
“형님이 검진받으실 때 당신도 같이 해보세요.”
남편의 건강을 끔찍이 챙기는 올케였다. 올케는 젊고 건강한 편이나 동생은 지병으로 시달리는 형편이었다.
“그래, 모두 같이 받자.”
“형님, 저는 검사받았어요.”
올케는 거절했고 동생은 수락했다. 저녁부터 장을 모두 비우는 작업에 들어간다. 화장실이 하나이기에 동생과 나는 경쟁하듯 화장실을 드나든다. 우리 남매는 사랑하는 올케 앞에서 체면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갈등을 바닥까지 드러낸 엉망진창의 교양 없는 남매가 되었다.
저세상으로 먼저 떠나간 남편과 아들에게 미안했다.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서 끝까지 살아남겠다고 버둥대는 내 꼴이 비참했다. 나는 망자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가졌다.
건강검진
오전 8시, 강남세브란스병원에 도착한다. 어제 준비물 받으러 왔을 때는 보이지 않던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별관 쪽으로 가는 복도 왼편의 벽 전체에 커다란 추상화가 걸려 있다. 강렬한 원색이 화려한 조화를 이루고, 선의 흐름에 힘이 있다. 다가가서 화가의 성함을 확인한다. 이두식 화가의 작품이다. 내 마음에 감동을 준다. 나는 그림에 푹 빠져 산 적이 있다. 당시였더라면 당장 짐을 챙겨 이두식 교수를 찾아가 가르쳐달라고 했을 것이다.
우리는 별관 4층으로 올라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건강증진센터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자 자동으로 도어가 열린다. 어제 만났던 안내자가 친절히 수속을 담당해준다. 친절은 어두운 마음을 밝게 열어주는 마스터키 같다.
간호사가 이름을 호명한다. 난 빠르게 움직이며 머리에서 발끝까지 검진을 받으려고 각 과를 찾는다. 수면상태에서 상부위장관 내시경이 시행된다. 당시에는 통증을 몰랐으나 조직검사를 위해 살점을 떼어낸 자리가 조금 아프다. 위장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아 조직검사를 했단다. 종합건강검진을 받는 데 총 6시간이 소요됐다. 미국 같았으면 3개월쯤 걸리지 않을까? 미국의 병원시스템은 예약해놓고 기다리는 시간이 길다. 앞으로 검진이나 수술 받을 일이 있으면 꼭 한국에 나오고 싶다. 종합건강검진 결과는 5일 후에 나왔다. 그게 믿어지지 않았다. 빨라서 참 좋았다. 미국 같으면 1개월쯤 걸리지 않을까. 자꾸만 비교가 된다. 병원이 깨끗했고 의사와 간호사는 친절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든다.
동생부부와 나는 각 과의 담당의를 만나서 설명을 듣는다. 의사 앞에 앉을 때마다 마치 죄인이 판결을 기다리는 것처럼 두렵고 떨린다. 죽음을 초월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저세상으로 불려가야 한다면 내 사랑하는 가족이 그곳에 다 있으니 기쁜 마음으로 가겠노라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검진을 받으면서 생에 애착이 많은 나를 다시 발견한다. 병에 걸리지 않고 하늘나라에 있는 내 가족의 몫까지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핑계를 만든다.
의사가 망막 정밀검사를 해보는 게 좋겠다고 권고한다. 안압이 상승하면 녹내장이 올 수 있다고 한다. 녹내장? 판정된 결과는 아니지만 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사가 내비쳤기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눈이 나빠지기 전에 꼭 쓰고 싶은 글이 있다. 많은 사람이 자기의 체험을 특별하다고 생각하듯, 나 역시 그렇다. 나의 경험을 쓰고 싶다. 켜켜이 쌓인 상처를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면 진정한 치유와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체험이 어느 누구 단 한 사람에게 위안이나 도전이 된다면 치부쯤이 문제가 되겠는가. 그건 큰 보람이고 기쁨이 될 것이다. 성경에서 많은 사람이 자기의 치부를 드러내어 회개하고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지 않던가? 나의 부끄러움을 드러내어 남을 위로하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실 일이라 생각되었다.
오래전 하와이에 계신 박대희 목사님 댁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다. 그 당시 임 집사란 분이 목사님 내외분 앞에서 “목사님, 유빈이 어머니의 책은 요즘 저에게 성경보다 더 위안이 되어요”라며 핸드백에서 내 책을 꺼내 보이던 생각이 난다. 그분도 나처럼 대학생 외아들을 잃은 같은 처지였다. 혹시 나의 글 ‘레퀴엠’이 당선된다면 임 집사님 같은 분이 읽게 되어 위안을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쓰고 싶었다.
망막뿐만 아니라 내 몸속 곳곳에서 온갖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염려하던 정신건강은 환경이 가져온 충동적인 현상일 뿐 특별한 이상이 없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참 많이 감사했다.
이세상에는 앞을 못 보는 사람도 많고 암 환자도 많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염려할 필요는 없다. 앞으로 밝은 태양처럼,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으며 마음 편하게 살면 어떤 질환도 치유될 터이다.
지금까지 많은 시간을 상실의 상처에 짓눌려 살았다. 내가 파놓은 동굴 속에 갇혀 밤마다 와인을 퍼마시며 잡히지 않는 어두운 그림자를 안고 몸부림쳤다. 이 땅을 떠난 가족을 남몰래 그리워하며 괴로움에 사로잡혀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다. 그토록 힘들었던 과정을 통과하는 동안 내 몸을 혹사했던 생각을 하면 오늘의 검진결과는 별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이렇게 양호한 편이기에 자꾸만 감사하고 싶었다.
동생의 종합건강검진 결과는 좋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종류의 낭종이 갑상선에 여럿 있고 신장에도 이상이 있다. 5년 전에 신장 하나를 절제했는데, 나머지 하나에도 낭종이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걱정이 되는 것은 동맥경화다. 심장혈관이 여러 곳 막혔다. CT촬영한 사진을 컴퓨터로 분석해 알게 된 결과다.
나야 홀로 사니 언제 이세상을 떠난들 남겨둔 사람이 걱정돼 눈 못 감을 일이 없다. 하지만 동생은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이 있잖은가. 동생은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 동생의 건강검진 결과를 보고 나는 며칠 전에 교묘하게 퍼부었던 것을 뼛속 깊이 후회했다. 앞으로는 동생을 미워하지 않으려 한다. 미움의 파장이 활을 쏘듯 동생의 삶 속으로 날아들면 안 될 일이다. 그의 병이 깊어지면 나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동생부부를 사랑하겠다고 다짐한다. 많이많이 사랑해주어야지.
올케와 동생이 부산으로 내려갔다. 동생부부의 축복을 빌었다. 때때로 천사 같은 동생부부를 힘들게 한 내가 미웠다. 동생부부가 떠난 자리에선 빈 웅덩이 같은 공허가 맴돌았다. 함께 있을 때는 버거워 빨리 내려가라고 했었다. 막상 떠나고 나니까 다시 부르고 싶었으며, 보고 싶어서 허전했다.
홀로 있는 시간엔 불청객이 자주 찾아온다. 외로움과 우울증이란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이들이 수시로 마음의 창에 노크를 해댄다. 어두움의 세력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긍정적인 면을 생각하며 자신을 훈련시킨다. 난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자유로운 여인이다. 파란 자유를 하늘 높이 누릴 수 있는 마음의 날개가 있다. 마음과 시간의 자유가 풍요로우니 최고의 부자가 아닌가. 푸른 날개를 펴서 훨훨 지구를 날아다니자.
용인 에버랜드
미국에 들어가기 전 용인에 있는 에버랜드에 가보고 싶었다. 아들과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기 위해. 옷장 속에 있는 상자를 꺼낸다. 상자를 넣은 백팩을 등에 멨다. 모처럼 우리 아들이랑 데이트하는 날이다. 유빈은 나의 등에 업혀 좋아한다. 우리는 온종일 에버랜드에서 즐긴다.
호랑이와 사자 원숭이 그리고 물개의 쇼가 재밌다. 플로리다의 디즈니월드나 로스앤젤레스의 디즈니랜드보다 더 좋다. 고개를 들어 가까이 있는 산을 본다. 산세마저 정겹다. 헐벗고 메마른 로스앤젤레스의 산을 보다가 우리나라의 신록이 풍성한 산을 보니 마음마저 푸르러온다. 나는 한참 숲을 바라본다. 푸른 잔디나 나뭇잎을 자주 보면 눈 건강에 좋다던 말이 기억났다. 그렇지 않아도 천국의 낙원이 지구에 내려와 앉은 것처럼 아름다운 산세를, 눈에 좋다니까 나는 보고 또 바라본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것이 자연의 아름다움이다.
수백 가지의 녹색으로 단장한 푸른 숲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속의 에버랜드에서 우리는 걷고 또 걷는다. 디즈니랜드와 디즈니월드에 갔을 때 우리는 탈거리를 두고 의견 충돌로 서로 티격태격했었다. 이곳에서는 그럴 일이 전혀 없었다. 아들은 조용히 내 등에 업혀 있으니까. 하지만 서로 다툴 일이 태산 같아도 우리 유빈이가 나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긴 한숨이 담배연기처럼 하늘로 오른다.
아들이 보고 싶어 등에 업은 상자를 어린아이 업은 것처럼 한번 들썩여본다. 엄마 등에 업혀 있으니 좋니? 폴 유빈 리는 답하지 않는다. 말이 없어도 괜찮다. 내 친구의 외아들은 유럽여행에서 실종돼 10년 넘게 소식이 끊겼다. 유해도 거두지 못해 속상해하는 그녀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 엄마인가?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이렇게 등에 업고 다닐 수 있는 아들이 있으니….
그런데 한국에 사는 친척 중에 죽은 자식이 있는 이가 있다. 그들은 자식을 앞세운 것을 큰 죄로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자기 죄 때문에 아들을 앞세운 것처럼. 아마도 유교 풍습에 젖은 우리네 문화 때문일 것이다. 죽음의 원인은 병사와 사고 아니면 자해, 이 세 가지가 아닐까?
아들이 못 견디게 그립다. 나는 유빈을 생각하며 마음의 분골을 나무들의 뿌리에 비타민처럼 뿌린다. 초록이 우거진 에버랜드 숲에서 나뭇가지에 새들이 앉아 노래를 부르면 폴의 영혼도 안식을 취하리라. 유빈과 내가 지나간 자리마다 지워지지 않는 추억의 꽃이 피어나리라.
아들과 함께 여러 곳을 다닌다.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이렇게 아들을 등에 업고 마음 편하게 다니고 싶어서 동생부부가 빨리 가주기를 바랐던가? 새벽에 미사를 드리고 나오다가 정원의 성모마리아상 앞에 고개를 숙이고, 우리 아들의 영혼을 편안하게 해달라고 묵념의 기도를 바친다. 성모마리아상 양옆에 있는 꽃나무와 소나무에도 마음의 분골로 비타민을 뿌린다. 아들의 영혼은 도곡동 사리공원, 용인의 에버랜드, 성모마리아상, 태평양, 아니 온 우주에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걸림 없이 어디에고 존재하리라.
분골
묵상을 하고 있다. 아주 조용히. 아무리 업고 다녀도 말썽을 부리지 않는 착한 아들이다. 너무 선량하고 착해 하나님이 일찍 하늘나라로 데려간 유빈. 그런데 인천공항에서는 아니었다. 검색기계가 아들의 분골을 훑는다.
“상자 속에 있는 것이 뭡니까?”
“분골입니다.”
“사망신고서와 화장증명서 보여주십시오.”
사망신고서와 며칠 전 수원연화장에서 받은 개장유골 화장증명서를 꺼내 보인다. 수원연화장을 생각하니 우리 폴보다 3일 뒤에 화장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저절로 연상된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많고 많은 선택 중 하필 죽음의 길을 선택했을까? 하지만 어떤 사유에도 불구하고 산 생명을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은 아니 될 일이 아닌가? 고통으로 치자면 난 수백 번 더 죽었어야 한다. 결혼해서 얼마 안 되어 남편을 사고로 잃었다. 나도 함께 따라가고 싶었다. 절벽 끝에 서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나는 잘 안다.
미련했던 나는 동생에게 내 아들을 양자로 입적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동생부부는 냉혹하게 거절했다. 조카를 양자로 들이면 누나가 남편을 따라 죽을 것이라 직감했던 것 같다. 동생부부 덕분에 나는 악착같이 살아야 했다. 아들을 이 땅에 버려두고 혼자 편안한 곳으로 떠날 맘을 가졌던 것이 유빈에게 무척 미안했다.
내 아들이 아빠 없는 자식이라고 놀림을 받으며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결심한다. 살고 있던 집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는 일에 모든 것을 투자하는 모험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대단한 용기였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내 모든 것, 생명까지도 아들을 위해 바치고 싶었다. 유빈은 나의 전부였다. 내 자신보다 더 소중한 보물덩어리였다. 내게는 쳐다만 봐도 아까운 그런 아들이었다.
생명이나 고통이 지위에 따라 다른가? 누구에게나 고통은 동일하지 않은가? 나는 잘 모른다. 죽은 사람은 고통을 모르리라. 슬프고 괴로운 것은 살아남은 가족들의 몫이다. 남편과 아버지를 잃고 날개가 빠진 아픈 가슴으로 살게 될 노 전 대통령의 유가족들에게 동병상련의 애도를 보낸다. 어떻게든 견디어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나는 TV를 보면서 유가족의 평강을 위해 맘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두 번째 엑스레이를 통과할 때도 같은 질문을 받는다. 나는 같은 서류를 보이며 같은 대답을 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엑스레이가 아닌 몸을 수색하는 검사다. 비행기 타기 바로 직전에 온몸과 핸드백, 백팩, 노트북 등을 꼼꼼히 뒤진다.
“이게 뭐죠?”
여승무원이 묻는다.
“유골입니다.”
나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한다.
“아, 네. 죄송합니다. 실례지만 누구신데요?”
“조상님….”
죽은 가족은 모두가 조상이 된다고 어느 스님이 말씀하셨던 기억이 그 순간 떠올랐다.
“네. 잘 모시고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런데 유골을 모시고 비행기 타시는 분이 가끔 계시나요?”
“글쎄요. 저는 처음이에요.”
그녀의 예쁜 미소에 나는 가벼운 미소로 답하고 비행기에 탑승한다. 아들은 밥 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화장실을 가겠노라고도 하지 않고 보채지도 않았다. 살아서처럼 말썽을 피우지 않는다. 그렇게 얌전한 아들과 함께 미국에 도착한다. 작은 무덤이 된 아들을 나는 다시 등에 업는다. 혼자는 연수를 가지 않겠다던 유빈이었다. 가기 싫다고 시무룩해 했었다. 그러나 건강한 몸으로 이곳 로스앤젤레스공항을 떠났었는데…. 나는 서울에서 재가 된 아들을 데리고 돌아온다. 공항에서는 아무른 제재가 없었다. 세관통관 때도 조사를 받지 않는다.
“내 아가야! 우린 미국에 다시 왔어.”
“안다고?”
“그래, 알겠지. 넌 영혼으로 존재하니까.”
“땡큐, 맘. 용인에 있을 때보다 좋아.”
독백 같은 무언의 대화가 큰 위무가 된다. 폴은 내 등에 업혔으니 내 어린 아기로 되돌아온 것이다.
무겁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차리는 형식적이고 불편한 관계는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마중 나온 사람이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니 자유롭고 편하다. 택시를 탄다. 분골과 함께하는 여행인데도 나는 폴이 곁에 있는 것처럼 든든하다. 벙어리라도 내가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있는 것이 좋다.
아가를 등에 업고 집에 도착한다. 테이블 위에 아들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도착하자마자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한다. 즉시 친구가 배달로 보내준 흰 장미바구니, 비프저키, 초콜릿을 분골 앞에 놓고 촛불을 켠다. 살아서 왔으면 맛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해주겠는데 이게 무슨 꼴이람. 안타까워 긴 한숨을 몰아쉬며 다시 영혼의 평강을 빈다. 수목장을 할 것인지, 바다장을 할 것인지, 아니면 나랑 평생을 살다가 내가 떠날 때 함께 보내달라고 할까? 내 영혼으로부터 어떤 답도 얻을 수 없다. 아직은…. 일단 집에 왔으니 바쁘게 서두를 필요가 없지 않은가. 시간을 갖고 후회하지 않게끔 생각해본 뒤 결정하기로 마음먹는다. 아들이 바라던 대로 태평양으로 보내주어야 하겠지만 아직은 내 곁에 더 두고 싶었다.
회상
유빈을 용인공원묘지 높은 산자락에 토장한 후 18년 동안 불편과 갈등에 시달렸다. 자주 못 가봐서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언니와 조카들이 대신 다녀오면 고마움과 부담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하긴 삶과 인간관계 자체가 갈등이니 그런 감정이 당연한 것인지 모르겠다.
아들의 장례식은 1992년 8월3일 서울대병원에서 열렸다. 1년 후 추모식을 위해 서울행 비행기에 오르기 하루 전날 밤이었다. 아들을 꿈에서 만난다. 무덤 속이 너무나 뜨거워 못살겠다 한다. 불 화산 같다는 것이다. 제발 태평양 바다로 보내달라고 한다. 그리고 유빈은 멀리 수평선으로 헤엄쳐 갔다. 죽은 사람이 무덤 안에서 못살겠다니? 무슨 의미일까? 개꿈이라 생각하고 잊어버리기엔 지금도 생생히 기억되는 선명한 꿈이었다.
갈등이 시작됐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꿈의 뜻을 해석하면서 고민했다. 무덤을 없애고 화장해서 바다로 보내달라는 뜻이 아닌가? 갇힘이 없는 출렁이는 바다에서 헤엄치겠다는 것이 아닌가? 서핑을 좋아했던 폴은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탈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이 만든 파란 캔버스에 추상화로 펼쳐지는 흰 구름을 보면서, 태평양에 사는 것이 소원이라고. 유라시아 대륙과 남북아메리카 대륙,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대륙과 남극의 파도가 출렁이는 세계 제일의 큰 바다로 가서 살고 싶다고? 그곳이 용인의 산등성보다 좋다고 선택한 것일까? 비행기가 태평양 상공을 지날 때 내 자신을 생각한다. 폴이 그리울 때 찾아갈 곳 없어 방황하는 나를. 무덤을 아들의 집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내가 아닌가. 그런데 없애버리다니. 유빈의 집을 방문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하지? 1주년 추모기일 때 나는 언니께 의논드렸다. 꿈 이야기를 하며.
“언니! 7,8월의 무덤 안은 불가마같이 더운가봐. 무덤 속이 뜨겁다고 유빈이가 꿈에 와서 태평양으로 보내달래. 화장해서 바다로 보내면 내가 이렇게 찾아올 곳이 없어서 어떻게 하지? 그래서 무덤 위에 천막을 쳐주고 싶어.”
언니는 정신 나간 여자를 바라보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내 60평생 살아오면서 무덤에 천막을 친다는 말은 못 들었다.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무덤 안이 불 화산같이 뜨겁다는데 어떻게 해?”
“앞으로 네가 이곳에 찾아오기 힘들 거라고, 너를 위해서 그런 꿈을 꾸게 한 것 같구나. 그러니 산소에 천막을 칠 생각일랑 하지 말거라.”
언니의 단호한 반대에 부딪혀 무덤 위에 천막을 치는 일은 안 했다. 내가 꾼 꿈은 폴을 위한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한 꿈이었다는 언니의 해몽을 믿는다. 그리고 나 역시 죽으면 유빈이 있는 곳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들의 산소 옆에 내가 묻힐 자리 하나를 더 마련한다. 심지어 아들집에 매일 드나들기 위해 산소가 가까운 마을로 이사를 가려고 했었다. 언니와 조카는 내가 살 집을 빌리기 위해 용인공원묘지 가까운 마을로 집을 찾아다닌 적도 있다.
그런데 산소가 용인에 있으니 별별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서울에 사는 남자조카와 질녀가 나를 대신해서 가끔 산소에 가준다. 참으로 고마웠다. 무덤 속에 누워 있는 고인과도 아주 가까이 지냈으니 찾아가는 것은 나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흐린 날 조카가 산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소낙비를 만나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 국제전화로 들려온다. 속이 많이 상한다. 조카와 상대방이 다치지 않았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조카의 형편도 넉넉하지 않은데 거금을 조카의 처가에서 빌려 상대방의 피해보상금으로 물었단다. 내 예민한 성격이 부담을 느낀다. 내가 보상금을 보내야 되는가? 걱정하며 고민한다. 멘토와 상담한다. 멘토는 반대한다. 앞으로 산소에 오가는 일로 생겨난 다른 일들도 내가 책임지고 해결할 것인가? 멘토가 물었다. 그럴 수 없다는 뜻으로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조카에게 전화해서 앞으로는 절대로 산소에 가지 말라고 부탁한다. 무덤이 산의 초입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산등성에 있는지라 차로 오르내리는 길이 너무 위험해 조카가 걱정된다고. 살아있는 사람이 귀하고 소중하지, 죽은 사람은 마음에 있지 그곳에는 없으니 앞으로는 제발 가지 말라고 조언한다.
질녀에게도 당부한다. 그녀는 산소에 다녀오면 내게 꼭 보고를 한다. 생전 고인이 좋아하던 비프저키와 과일을 준비해서 다녀왔다고. 어느 날은 생화를 사서 꽂아놓고, 또 어느 날은 작은 유리로 된 집을 갖다놓았다고 한다. 촛불을 켜서 유리로 된 집에 담으면 꺼지지 않고, 내 사진을 넣어놓아도 비바람에 젖지 않는다는 것이다. 질녀의 정성과 수고가 한없이 고마웠다.
내가 멀리 있어서 자주 서울에 못 가니 주변의 친척들이 나 때문에 고생이었다. 서울에 나가면 잘해주어야지. 명품가방, 옷, 구두, 밍크코트, 반지까지 내 것을 모두 주어야지. 미국에 오면 여행도 시켜주어야지. 인간관계는 주고받는 관계가 되어야 건강한 관계로 유지될 수 있지, 어느 한쪽만 주다보면 부담스러워 언젠가는 피하게 되니까.
고인의 1주기 때 꾸었던 꿈의 뜻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 꿈을 산소와 나로 인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동생 가족은 멀리 부산에 있으니 한 번도 산소에 가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에 사는 언니 가족, 조카와 질녀에게 본의 아니게 부담을 주어 힘들게 한 것이 미안했다. 그 후 두 번 더 유빈이 바다로 떠나는 꿈을 꾸고 나는 화장을 결심한다.
어느 흐린 토요일 오후 산소에 갔다가 내려오는데 눈이 내렸다. 내리는 것이 아니라 퍼붓기 시작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눈이 내리는 풍경을 30년 이상 못 보고 살았던지라, 눈발이 희끗희끗 차창으로 휘날리는 것을 보며 나는 소녀처럼 신이 났다. 그러나 즐겁던 마음은 순간이었다. 곧 걱정이 밀려왔다. 지난번 큰조카의 교통사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천천히, 천천히, 조심조심….”
질녀에게 조심해서 운전하라 거듭 일렀다. 토요일 오후인데 갑자기 눈까지 내려 교통은 순식간에 마비됐다. 미국에서 본 한국 TV 채널 뉴스가 떠오른다. 고속도로를 주차장으로 만들었던 폭설. 내 마음은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었다. 욕심을 내려놓아야지. 산소를 없애야지. 주변사람들을 먼저 생각해야지. 죽은 사람이 뭐 그리 중요해. 하지만 죽은 아들을 하찮게 말해야 하는 속마음은 몹시 아프고 괴로웠다.
미국 국세청
무덤을 정리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나는 무덤을 사랑한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 그 속에 있기에. 아들을 위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폴 유빈 리 장학재단’을 캘리포니아주에 정식으로 신청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3년 후 세금감사를 받으라는 편지 2장이 국세청으로부터 배달됐다. 1장은 장학재단과 관련된 것이었고, 다른 1장은 내가 하는 사업에 관해서였다. 앞이 캄캄했다. 내 생애 처음 받아본 세금감사에 대한 편지다. 긴장되고 무서웠다. 세금관계에서 정직하고 깨끗이 살아왔는데….
편지를 갖고 지인인 회계사를 찾아간다.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자기가 해결해 주겠다고. 해결이야 되겠지. 범죄 한 사실이 없으니까. 지출해야 할 금액이 문제지. 회계사야 사건이 수입으로 직결되니 좋겠지만. 한 사람에게 가슴 아픈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신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건 현실이다. 자료 수집이 무척 힘들었다. 6년 동안의 수입과 지출 장부를 꼼꼼히 정리해서 가져오란다. 그렇지 않아도 상처투성이인 내게 자료 수집은 힘든 과정이었다. 자료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신경쇠약으로 시달렸다.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것이 세금관계란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던 터라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웠다. 달라는 대로 다주고 떠나면 될 것을 왜 그때는 그렇게 괴로워했을까?
알고 보니 변호사가 비영리장학재단으로 신청했다는 것이 영리장학재단으로 잘못 허가가 난 것이었다. 캘리포니아주의 실수인지? 변호사의 실수인지? 나는 아직도 정확한 사실을 모른다. 세금으로 낸 금액보다 장학금으로 준 액수가 더 많다는 게 문제였다. 원래는 우리 아들 대학 학자금과 차를 살 돈이었다. 저금통장에 있던 것을 빼서 나눠주었다고 사실대로 말했다. 내가 절약해서 생활하고 남은 돈을 장학금으로 주는 것이 세금감사를 받아야 할 일이라면 당장 그만두고 싶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한국에서라면 선한 일을 했다고 신문에 나거나 칭찬받을 일이 아닌가. 미국은 세금 거두어가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나라다. 무서운 나라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세금감사가 끝난 뒤 재단에 남은 돈을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에 있는 장학재단으로 넘겼다. 차라리 학교에서 관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해서다.
‘폴 유빈 리 장학재단’은 결국 5년을 넘기지 못하고 정리됐다. 국세청 감사에 더 이상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장학금을 넘겨준 클레어몬트대학의 장학재단에 편지를 보냈다. 한국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사용해줄 것을 학교 측에 당부했다. 얼마 안 되는 금액이지만, 대학에선 아직도 고맙다는 감사 편지를 계속해서 보내온다. 내 사업에 대한 세금감사는 땅 문제였다. 땅을 기증한 것이 말썽을 일으켰다. 마약하는 청소년들을 모아 훈련하는 사회기관에 내가 소유한 땅을 내준 것이 문제였다. 그곳에 건물을 지어 교포사회와 지역사회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해달라는 뜻이었다.
IRS(Internal Revenue Service)가 의심한 것은 기증과 관련해서였다. 현물은 세금 보고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땅을 매입할 때의 가격을 그대로 신고했는데, 그것이 말썽이 된 것이다. 왜 세금을 낸 액수보다 기증한 액수가 더 크냐는 것이 세금감사를 받게 된 원인이었다. 좋은 일이 골치 아픈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국세청 감사로 시달리면서 신경성 이명증을 얻었다. 귀에서 쇠를 자르는 듯한 소리가 항상 들린다. 신경이 자꾸만 날카로워진다. 훌륭하다는 양의와 한의를 몇 년씩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았지만 치유는커녕 조금의 효과도 없다. 로널드 레이건의 귀를 수술했다는 귀전문병원에 찾아가 검진을 받고 약을 복용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다. 쇠를 자르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는 잠까지 설치게 하며,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치료를 받다가 지쳐버린 나는 차라리 귀에서 울리는 소리를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제5번 제1악장이라 생각하며 즐기기 시작한다. 슬픈 일을 당했을 때 그 소리는 모차르트나 베르디의 레퀴엠이 되어 나를 위무해준다. 내 귀 안에서 생음악이 창조됨은 참으로 신묘하고 기이한 일이었다.
유빈은 말이 없다. 그러나 사랑하는 고인은 내 곁에 있다. 비록 뼛가루가 되어 돌아왔지만 아들이 있음으로 나는 행복하다. 촛불이 유해 앞에서 신나게 춤을 춘다. 폴이 기타를 메고 비틀스의 멤버인, 베이스 기타를 치던 폴 매카트니의 이름이 자신과 똑같다고 좋아했었다. 매카트니를 흉내 내며 춤을 추던 아름다웠던 모습을 마음으로 그려본다. 엄마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보여주던 아들이 많이 보고 싶다. 폴이 남기고 간 추억이 많아 잠재의식의 문을 열면 내 영혼은 자유롭게 그와 즐긴다.
서울대에서
UCR(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에서 전화가 왔다. 폴이 서울대 기숙사에서 감전사했다는 소식이다. UCR의 여직원은 무척이나 미안해한다. 나와 함께 서울에 갈 여인이 곧 우리 집에 도착할 것이라 한다. 맑은 하늘에서 벼락이 내 가슴을 내리쳤다. 나는 수화기를 떨어뜨리고 쓰러졌다.
UCR에서 보낸 한국 여인이 도착했다. 그 여성의 도움으로 얼음물을 마시며 애써 정신을 차린다. 믿어지지 않는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살려야 한다. 불쌍한 내 아들, 일찍 아빠를 잃고 홀엄마 밑에서 자란 가엾은 내 아들. 살려야 한다. 엄마가 간다. 엄마가 가면 일어나야 한다.
나는 미친 여자 같았다. 아니 혼이 반은 나간 상태였다. 하늘도 땅도 보이지 않는 허공을 밟는 느낌으로 모든 것을 여인에게 의탁하고 길을 나섰다. 여인은 나를 데리고 로스앤젤레스공항으로 갔다. 5주 전만 해도 이 공항 카페테리아에서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비행기 안에 있는 작은 담요에 얼굴을 묻고 나는 짐승처럼 컥컥 안으로 흐느꼈다. 빗줄기 같은 눈물이 핏물이 되어 가슴을 적신다. 큰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내 등을 쓸어내리며 옆 좌석에 앉은 여인은 “울어야 산다”면서 울라고 말한다.
폴 유빈 리는 1974년 8월28일 태어났다. 1년 후 엄마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 어린 나이의 폴은 무척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다.
1992년 6월 캘리포니아주 샌타모니카시티에 위치한 크로스로드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월23일 서울대로 연수를 갔다. 폴은 연수 마감을 일주일 남겨놓은 8월1일 새벽 서울대 기숙사에서 생을 마감했다. 대학 입학을 앞둔 18세 꽃 같은 나이로.
우리나라에서 최고라는 국립대학의 기숙사가 그렇게 허술했던가? 금요일 저녁에 친구들과 외출한 뒤 돌아온 폴은 배가 고팠다고 한다. 유빈은 친구들을 위해 혼자서 물을 끓여 컵라면에 붓다가 감전이 됐다고 한다. 사고 후 전기선과 물 끓이는 탕관을 검사한 결과 전기선이 끊어진 자리에 구리선으로 임시 땜질을 해놓은 게 드러났다. 이전에도 여러 학생이 위험을 느꼈다고 한다. 연수생들은 관리사무소에 보고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다. 자기가 맡은 일을 방관한 책임자들…. 한때는 그들을 참 많이 원망했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 그들만의 잘못이겠는가. 기숙사 관리와 관련한 재정적인 문제였겠지.
아들에게 보낸 우편물도 유빈은 한 번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 비프저키가 먹고 싶어 목이 다 아프다고 했다. 그것 한번 못 먹고 가다니 나는 요즘도 마켓에서 비프저키를 보면 가슴이 아려 그 코너를 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