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호

‘클래식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위대한 선지자인가, 약삭빠른 장사꾼인가

  • 전원경│주간동아 객원기자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09-12-09 10: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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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래식 문외한조차 지휘봉을 들고 명상에 잠긴 카라얀의 사진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무려 35년간 베를린 필을 지휘한 카라얀은 클래식 녹음에 본격 나섬으로써 클래식 대중화를 일궈냈다. 그로 인해 그 자신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으며, ‘장사꾼’이란 비난도 피할 수 없었다.
    ‘클래식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br>● 1908년 4월5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출생<br>● 1916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입학, 지휘·피아노 전공<br>● 1929년 울름 오페라극장과 지휘자 계약<br>● 1933년 나치 입당<br>● 1935년 아헨 오페라극장 음악감독 취임(독일극장 최연소 음악감독)<br>● 1945년 연합군에 의해 지휘 활동 일절 금지당함 <br>● 1955년 베를린 필과 종전 10주년 기념 미국 순회공연<br>● 1956년 베를린 필 종신 음악감독 계약체결<br>● 1957년 빈 오페라극장 음악감독,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예술감독 취임<br>● 1964년 빈 오페라극장 음악감독 사임<br>● 1967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음악제 창설<br>● 1987년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 지휘<br>● 1989년 4월24일 베를린 필 사임. 7월16일 81세로 잘츠부르크에서 타계

    카라얀을 싫어하는 사람조차 20세기 클래식 음악계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1908~89)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명제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카라얀은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Berlin Philharmonic)에서 35년간 종신 지휘자로 군림한, 클래식 음악의 살아있는 신화였다. 카라얀 이전까지 일부 상류층이나 고급 취향을 가진 이들의 전유물이던 클래식은 그의 등장을 기점으로 해서 대중의 음악으로 성큼 다가섰다. ‘뉴욕타임스’는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인으로 카라얀을 꼽았다. 대중가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1935~77)나 존 레넌(John Lennon·1940~80)처럼, 카라얀도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장 많은 클래식 음반을 파는 지휘자다.

    지휘자로서 카라얀의 능력이 그만큼 특출했던 것일까? 물론 카라얀이 그저 그런 지휘자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그가 평범한 수준의 지휘자였다면, 어떻게 세계 제1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의 종신 지휘자로 군림할 수 있었겠는가. 카라얀은 스물일곱 살에 아헨(Aachen)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이 되었고, 1950년대에는 베를린 필과 빈 오페라극장(Wien Staatsper)의 음악감독을 겸임한 전무후무한 경력의 소유자다. 20세기 지휘자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아무리 인색하더라도 열 손가락 안에 카라얀의 이름을 넣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단연 20세기를 대표하는 지휘자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클래식 애호가들은 생동감과 활기에서는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1918~90)을, 영혼을 울리는 영감 넘치는 연주에 대해서는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ngler·1886~1954)를, 강렬함과 민첩함으로는 게오르그 솔티(Georg Solti·1912~97)를,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고상한 음색의 재현에서는 브루노 발터(Bruno Walter·1876~1962)를 꼽는다. 클래식 애호가에게 카라얀은 아무리 좋게 본다 해도 ‘모든 면에서 그저 무난한 지휘자’ 또는 ‘단점도 장점도 없는 몰개성한 지휘자’ 정도인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카라얀이 ‘지휘자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의 어떤 점이 여느 지휘자와 달랐던 것일까? 카라얀에게는 분명 다른 지휘자와 구별되는 점이 있었다. 그는 훌륭한 음악가인 동시에, 탁월한 비즈니스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어찌 보면 음악가로서의 능력보다 비즈니스 능력이 더 뛰어났다고도 할 수 있다.

    레코딩의 가능성



    카라얀은 1930년대부터 50여 년 동안 900여 장의 SP, LP, LD(레이저 디스크)를 녹음해 2억장에 달하는 통산 판매고를 기록했다. 1940년대 후반, 막 LP 시대가 열릴 때 카라얀은 어떤 지휘자보다 먼저 레코드음악의 무한한 가능성을 알아차렸다. 그때까지 적지 않은 지휘자가 음반 녹음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레코딩은 죽은 음악’이라며 음반 녹음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라얀은 앞으로는 굳이 공연장에 오지 않고 집에서 편하게 음악을 즐기는 시대가 올 것임을 내다보았다. 그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900장에 달하는 레코딩 덕분에 카라얀은 생전에 음반 인세로만 매년 40억원을 벌어들이는 클래식계 최대의 갑부가 되었다. 그리고 이처럼 수많은 레코딩을 통해 카라얀은 ‘카라얀=최고의 지휘자’라는 공식을 손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대다수 클래식 초보자가 처음 음반을 고를 땐 아무래도 수적으로 우세한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레코드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들어 CD라는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을 먼저 알아본 사람도 카라얀이었다. 당시 클래식음악 관계자들은 차갑고 기계적인 음색의 CD가 LP를 대체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카라얀은 CD가 등장한 이상, LP의 시대는 끝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CD 녹음에 앞장섰다. 여기서 생겨난 작은 에피소드가 있다. 한 장의 CD에는 최대 74분 분량의 음악이 들어간다. 이 분량을 74분으로 결정한 사람이 카라얀이라는 얘기가 있다. 처음으로 CD를 상용화한 필립스와 소니 기술진은 CD 1장 분량으로 LP 음반 앞뒷면을 합한 분량과 같은 60분이 적당하다고 생각했으나, 카라얀이 “60분으로 하면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전곡을 녹음할 수 없다”며 74분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클래식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1984년 내한 당시 부인 엘리에트 여사와 함께한 모습.

    이 에피소드의 진위에 대해서는 사실 논란이 있다(필립스의 일부 기술진은 ‘74분’과 카라얀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여하튼 이런 일화들이 카라얀의 양면성-뛰어난 지휘자인 동시에 탁월한 비즈니스맨-을 뒷받침해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1980년 출시된 세계 최초의 판매용 CD는 카라얀이 지휘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1864~1949)의 ‘알프스 교향곡(Eine Alpensinfonie op.64)’이었다. 카라얀은 디지털 콤팩트 카세트(DCC) 역시 널리 사용될 것으로 내다보았으나 이 부분에서는 그의 예측이 빗나갔다.

    두 번째로 카라얀을 여타 지휘자와 차별화한 것은 철두철미한 이미지관리 능력이다. 카라얀은 무대에서나 무대 밖에서나 자신의 이미지를 빈틈없이 관리했다. 무대에서는 백발을 휘날리며 눈을 감은 채 지휘에 몰두하는 모습, 즉 범접할 수 없는 마에스트로(Maestro)의 카리스마를 과시했다. 한편 무대 밖에서는 모델 출신의 세련된 부인을 대동한 채 페라리와 자가용 비행기를 몰고 다니는 베스트 드레서였다. 한마디로 그에게는 남다른 스타 기질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창조한 ‘마에스트로 이미지’를 통해 음악팬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까지 능란하게 조종했다. 돌이켜 보면, 카라얀 생전인 1980년대에는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조차 카라얀은 알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지휘봉을 들고 명상에 잠긴 카라얀의 스틸 사진이 미용실이나 맥줏집에도 걸려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카라얀은 지휘자로서 보낸 50여 년의 세월 동안 찬사와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그런 카라얀이 타계한 지 꼭 20년이 지난 지금, 카라얀만한 지휘자, 이미지로나 음반 판매로나 대중을 그처럼 사로잡은 지휘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1989년 카라얀의 사망과 더불어 클래식 음악계는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듯하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붙여졌던 ‘클래식 음악의 황제’라는 칭호는 과장이 아니었다. 황제든 독재자든 간에, 이제 클래식 음악계는 그 같은 카리스마를 목마르게 그리워하고 있다.

    20세기의 독일을 뒤흔든 두 남자, 히틀러와 카라얀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평생 독일을 주 무대로 활동했지만 사실 이들의 조국은 독일이 아닌 오스트리아였다.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Salzburg)에서 귀족의 후예로 태어난 카라얀은 똑똑하지만 경쟁심이 너무 강해 친구가 없는 아이였다. 그는 피아노 연주와 외국어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는데, 열네 살 때 영국에 단 석 달간 머무르면서 영어를 마스터할 정도였다.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지휘를 전공한 카라얀은 좁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독일로 간다. 최고의 지휘자였던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1867~ 1957)의 연주를 듣기 위해 잘츠부르크에서 바이로이트(Bayreuth)까지 250마일을 자전거로 달려가기도 했으며 당시 베를린 필을 지휘하던 푸르트벵글러의 연주에도 깊이 빠져들었다. 약관의 카라얀은 독일 울름(Ulm)의 오페라극장에 채용되어 지휘자로 첫발을 내디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출신 젊은이의 실력과 야심을 주목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5년간 일하던 울름 오페라극장에서 갑자기 해고되면서 그는 일자리를 잃어버렸다.

    나치당원 카라얀

    1933년, 이런 상태에서 스물다섯 살의 카라얀은 나치에 입당한다. 그가 나치에 입당한 이유는 명백해 보인다. 일자리가 필요한 외국인 지휘자에게 당시 나치 당원증만큼 확실한 신분보장이 없었다. 훗날 카라얀은 “아헨 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기 위해 1935년 어쩔 수 없이 나치 당원이 되었다”고 말했지만 이는 거짓이다. 그가 1933년 본인의 뜻으로 나치에 입당한 게 분명하다. 이 때문에 종전(終戰) 후 아이작 스턴(Isaac Stern·1920~ 2001), 이츠하크 펄먼(Itzhak Perlman ·1945~) 등 유대계 연주자들이 카라얀과의 연주를 거부했다. 1967년 전성기를 구가하던 카라얀은 미국 주간지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당당하게 말했다. “(나치 입당은) 지휘대를 얻기 위한 방법이었다. 지휘를 계속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그보다 더한 범죄라도 저질렀을 것이다.”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발언이지만, ‘황제’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치 당원이 된 덕분에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등 각종 저명 페스티벌에 지휘자로 참가할 수 있었다. 1938년에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베를린 필을 지휘할 기회를 얻었다. 카라얀은 이 오케스트라의 탁월한 능력을 첫눈에 알아보았고, 언젠가는 베를린 필의 수석지휘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이 야심이 실현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나름 음악에 일가견이 있던 히틀러가 카라얀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카라얀의 책임도 있었다. 1939년, 카라얀은 히틀러가 참석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바그너(Richard Wagner·1813~83)의 악극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Die Meistersinger von Nrnberg)’를 지휘했다. 그런데 카라얀과 성악가들의 손발이 제대로 맞지 않아 극은 뒤로 갈수록 뒤죽박죽이 되었고, 마침내 관객들의 야유 속에서 막을 내렸다. 바그너의 며느리인 비니프레드 바그너(Winfred Wagner·1897~1980)의 회고에 따르면 이 연주가 끝난 후, 히틀러는 “카라얀을 다시는 바이로이트 무대에 세우지 말라”고 지시했다.

    독일 내 유대인 지휘자가 대부분 추방된 상태에서 카라얀은 헤르만 괴링(Hermann Wilhelm Gring·1893~ 1946)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이 경력이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았다. 카라얀은 1945년 독일 패망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송환되어 1947년까지 지휘 활동을 일절 금지당했다. 종전과 함께 베를린 필의 지휘자로 복권된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을 약삭빠르고 기회주의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로 보나 카라얀의 앞날은 암울해 보였다.

    남다른 자기 과시욕

    그러나 카라얀은 주저앉지 않았다. 때마침 바다 건너 영국에서 명 프로듀서 월터 레그(Walter Legge·1906~79)가 ‘필하모니아(The Philharmonia)’라는 레코딩 전문 오케스트라를 창단해놓고 지휘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카라얀은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데 적임자였다. 월터 레그는 카라얀이 오케스트라 조련에 솜씨가 있는 데다 ‘레코드 산업’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적합한 세련된 이미지까지 갖추고 있음을 간파했다. 카라얀은 ‘무대에서 지휘하는 행위’를 금지당한 상황이었지만, 레코딩은 무대가 아닌 스튜디오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가능했다.

    카라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그는 이 우연찮은 기회를 통해 LP가 새로운 청중을 개발할 수 있는 방법임을 알아차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레코드 산업은 SP에서 LP로 넘어가며 날개를 달기 시작했던 것이다. 녹음 분량이 적은 SP에 비해 LP는 한 장에 60분가량, 즉 대부분의 교향곡이나 협주곡을 담을 수 있었다. 카라얀은 앞으로 레코드가 콘서트홀을 대체할 것임을 직감했다. 카라얀은 필하모니아의 첫 번째 수석 지휘자가 되었고, 월터 레그-카라얀-EMI가 손을 맞잡은 클래식 음반 시리즈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음악 황제 카라얀’이 바야흐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1954년, 베를린 필의 지휘자였던 푸르트벵글러가 68세로 타계했다. 수장을 잃은 베를린 필은 후임을 물색했고, 루마니아인 세르지우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1912~96)와 카라얀이 물망에 올랐다. 마침 베를린 필은 1955년으로 예정된 전미 순회공연을 앞두고 있어서 참신하고 역량 있는 지휘자 발굴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10주년을 기념해 열릴 이 전미 순회공연은 정치적으로도 큰 사건이었다. 첼리비다케는 능력이나 경력에서는 카라얀을 앞섰지만, 지나친 완벽주의자인데다 매스컴을 기피하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더구나 첼리비다케는 레코딩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이는 음반을 팔아 돈을 벌어야 하는 오케스트라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단점이었다.

    반면 카라얀은 잘생긴 외모에 신선하고 독일적인 이미지를 갖추고 있었다. 오케스트라 사무국은 카라얀을 점찍었고 카라얀은 대담하게도 “전미 순회공연을 성공시키면 베를린 필의 종신지휘자 계약을 성사시켜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로서는 일대 도박이었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의 편이었다. 전미 순회공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 성공의 대가로 카라얀은 1956년 4월 베를린 필의 종신지휘자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쉰 살이 채 안 된 나이에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의 종신지휘자라는, 말 그대로 ‘황제’ 반열에 올라선 것이었다.

    카라얀은 이어 1957년에는 빈 오페라극장 음악감독으로도 임명된다. 빈 오페라극장의 오케스트라는 그 이름도 유명한 빈 필하모닉(Wien Philharmonic)이다. 베를린 필과 빈 필이라는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가 모두 카라얀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다. 빈 오페라극장과 카라얀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해서 1964년에 카라얀은 빈 오페라극장을 떠났다. 그러나 베를린 필과 카라얀의 인연은 이보다 훨씬 길었다. 카라얀은 장장 3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베를린 필의 전권을 휘두른다. 그의 탁월한 조직 장악력과 카리스마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카라얀은 베를린 필에서 언제나 황제로 군림했고 그 누구도 그에게 공공연히 반대하고 나서지 못했다. 자기 과시욕이 유달리 강한 카라얀은 오케스트라를 제치고 언론과 대중의 집중조명을 한몸에 받고 싶어했다. 심지어는 오페라 공연 중에 오케스트라 부스의 조명을 밝혀놓아 관객들이 지휘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할 정도였다. 전쟁 중에 파괴되어 1963년 재건된 베를린의 베를린 필하모닉 홀 무대는 오케스트라보다 지휘자가 관객에게 잘 부각되도록 설계되었다. 물론 카라얀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다. 쉽게 말해 그는 베를린 필의 ‘강마에’였다.

    누가 클래식음악을 죽였는가?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그토록 오래 밀월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카라얀은 민주적인 지휘자이기는커녕, 오케스트라의 절대 권력으로 군림했는데도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베를린 필은 카라얀을 통해 일찍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돈을 벌었다.

    카라얀은 1959년 베를린 필과 함께 도이체 그라모폰(DG)과 레코딩 계약을 체결했다. 이로부터 두 해 전인 1957년 스테레오 녹음 기술이 개발되면서 바야흐로 레코딩 산업이 본격화하고 있던 시점이다. 바로 이 시점에 카라얀은 베를린 필이라는 최고의 무기를 갖고 레코딩 산업에 뛰어든 것이다. 물론 이전에 필하모니아와 함께 EMI에서 녹음한 음반들도 있지만 카라얀의 본격적인 녹음 행보는 1959년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카라얀은 DG를 통해 베토벤, 브람스 교향곡 전집을 비롯해 각종 협주곡, 오페라 등 268종의 음반을 내놓았다.

    흔히 카라얀을 오케스트라 지휘자로만 생각하는데, 카라얀은 울름 오페라극장에서 지휘자로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이탈리아 스칼라 극장(La Scala)과 빈 오페라극장 음악감독을 거쳤다. 이러한 경력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레퍼토리 중에서 카라얀이 지휘하지 않은 작품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라얀은 아주 많은 음반을 내놓았고 유명한 레퍼토리는 오케스트라를 바꾸어가며 녹음하기도 했다. 베토벤 교향곡 전집의 경우 무려 네 번 녹음했다.

    1980년대 초, CD와 레이저 디스크(LD)가 등장했을 때도 카라얀은 이 새 매체들의 가능성을 눈여겨보았다. 특히 공연영상물에 주목했는데 LD가 너무 늦게 상업화된 사실을 한탄하며 “내 몸을 15년간 냉동시켜두었다가 LD로 모든 레퍼토리를 다시 녹음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카라얀은 이처럼 음악 재생 매체가 바뀔 때마다 자신의 음악을 CD와 디지털 레코딩, LD 등으로 새롭게 제작하고, 여기에 대해 각각 별도의 로열티를 받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로열티를 불린 데다, 로열티 자체가 어떤 지휘자보다 높았기 때문에 그의 재산은 천문학적으로 불어났다.

    영국의 음악평론가인 노먼 레브레히트(Norman Lebrecht·1948~)는 저서 ‘누가 클래식음악을 죽였는가(‘Who Killed Classical Music’, 1996)’에서 이 같은 카라얀의 장삿속과 독선을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 지휘대를 독점하다시피 한 바람에 다른 지휘자들이 베를린 필을 지휘할 기회를 거의 가질 수 없었고, 카라얀이 너무 높은 로열티를 요구함으로써 연주자들의 로열티가 전반적으로 치솟아버렸다고 주장한다. 결국 높은 로열티에 대한 부담은 공연 티켓에 전가되어 일반인이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데 큰 장애가 되었다고도 지적한다. 아무튼 카라얀은 이 같은 방식으로 자가용 비행기와 페라리를 몰고 다니는 갑부가 되었다. 그가 1989년 타계한 후, 모델 출신인 세 번째 부인 엘리에트 무레와 두 딸이 상속한 유산은 1750억원이었다.

    무너지는 황제 신화

    ‘클래식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카라얀은 35년간 베를린 필을 지휘했지만 말년엔 단원들과 불협화음이 심했다.

    35년이라는 세월은 웬만한 국가 독재자들이 통치한 기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다. 물론 베를린 필은 독재국가가 아니라 음악계에서 가장 뛰어난 연주자들이 모인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다. 이런 베를린 필이 카라얀의 독재에 언제나 숨죽이고 있었을 리 없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지휘자로 군림한 지 20년이 넘어가면서 오케스트라와 카라얀 사이가 눈에 보일 만큼 삐걱거렸다. 1980년대 들어 카라얀은 “(베를린 필) 단원들은 내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파문은 엉뚱한 데서 터졌다. 1982년 카라얀이 스물세 살에 불과한 미모의 클라리넷 연주자 자비네 마이어(Sabine Meyer·1959~)를 베를린 필에 입단시키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당시 베를린 필에는 여성 단원이 한 사람도 없었다. 마이어는 베를린 필 최초의 여성 단원이었다. 카라얀은 독단적으로 마이어를 영입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마이어는 단원 입단을 위한 오디션을 거쳤고, 카라얀은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그녀를 선발했다. 따라서 선발 과정에는 어떤 의혹이나 부정도 없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마이어가 베를린 필에 발을 들여놓았던 1982년은 카라얀과 단원들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은 시점이다. 베를린 필 단원들은 ‘마이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똘똘 뭉쳐 카라얀에게 맞섰다. 단원 투표에서 73대 4라는 압도적 숫자로 마이어 입단을 반대하는 결과가 나왔다. 여기에는 ‘여자는 베를린 필 단원이 될 수 없다’는 남성우월주의적 시각도 작용했다. 그러나 카라얀은 단원들의 반대에 개의치 않은 채 마이어를 입단시켰고, 마이어는 9개월간 단원들의 이른바‘왕따’를 버티다 결국 오케스트라를 떠났다.

    일부 언론에서는 ‘마이어가 미모로 황제의 눈에 들었다’며 카라얀의 ‘롤리타 콤플렉스’를 들먹이기도 했다. 실제로 카라얀은 안네 소피 무터(Anne Sophie Mutter·1963~), 아그네스 발차(Agnes Baltsa·1944~) 등 젊고 아름다운 여성 연주자들에게 관대한 편이었지만 이를 롤리타 콤플렉스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가 발굴해낸 연주자들 중에서는 예프게니 키신(Evgeny Kissin·1971~) 을 비롯한 남성 연주자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마이어에게는 억울한 일일 테지만, 이 분쟁의 원인은 단원들의 주장대로 ‘마미어의 실력 부족’이 아니었다(현재 마이어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클라리네티스트로 성장했다). 단원들은 카라얀의 독선과 횡포, 그리고 객원지휘자조차 허락하지 않는 고집에 넌덜머리를 내고 있었다. 때맞춰 카라얀이 아시아 공연에서 따로 거액을 챙긴 사실이 발각되면서 오케스트라 내에서 ‘카라얀 축출’을 외치는 목소리가 공개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휘자의 독단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단원들의 불만이 쏟아졌고, 카랴얀은 이를 수용하기는커녕 “그렇다면 내가 피아니시모로 지휘하기 전에 단원투표를 해야 하는가?” 하며 감정적으로 맞섰다.

    카라얀-베를린 필 간의 갈등이 악화일로로 치닫자 베를린 시 당국은 ‘베를린 필을 앞으로 연간 6회만 지휘하겠다’는 카라얀의 요구를 거부하는 등 단원들 편에 섰다. 시 당국 내엔 카라얀이나 베를린 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오케스트라를 선택해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점점 좁아지는 자신의 입지를 견디지 못한 카라얀은 1989년 4월, 베를린 필을 영원히 떠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종신 지휘자로 계약된 상태였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베를린 필에 남아있을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30년 이상 황제로 군림한 그는 단원들의 ‘반역’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장인이긴 하나 혁명가는 아니다

    카라얀은 베를린 필 없이도 지휘자로서의 인생을 계속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을 것이다. 실제로 카라얀은 1980년대 중반부터 빈 필과 빈번히 연주하고 있었고, 자신이 음악감독으로 전권을 행사하고 있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도 있었다. 그러나 카라얀 본인도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베를린 필이 카라얀의 또 다른 분신이었다는 점이다. 이 분신을 잃어버린 카라얀은 반쪽짜리 인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반쪽짜리 인생에도 많은 시간은 허락되진 않았다.

    1989년 여름, 두 달 전 베를린 필을 물러난 카라얀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세계 최고의 음악축제로 부상한 것 역시 카라얀의 비즈니스 감각이 발휘된 결과다. 7월16일, 카라얀은 직접 차를 몰고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개막작품인 ‘가면무도회’ 연습장으로 향했다. 이 공연에는 플라시도 도밍고(Placido Domingo·1941~), 레오 누치(Leo Nucci·1942~) 등과 함께 한국인 소프라노 조수미가 오스카 역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리허설을 무사히 끝낸 카라얀은 다시 자신의 별장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이날 오후, 심장마비를 일으켜 급사했다. 어이없을 정도로 갑자기 찾아온 죽음이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지휘를 했던 것을 보면, 이 키 작고 고집 센 오스트리아 남자는 지휘자로서의 운명을 타고났던 것이 분명하다.

    카라얀에 대한 평가는 음악가들 사이에서도 엇갈린다. 동료 지휘자인 첼리비다케는 카라얀을 가리켜 ‘뛰어난 장사꾼이지만 음악을 듣는 귀가 없다’고 혹평한 반면,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David Oistrach·1908~74)는 ‘모든 음악 스타일에 통달한, 현존하는 최고의 지휘자’라는 찬사를 보냈다. 또 오스트리아의 평론가 요제프 바이스베르크는 “카라얀의 음악은 강력하기는 해도 깊이가 없다”고 말했고 그와의 불협화음으로 오페라 ‘로엔그린’에서 중도하차한 테너 르네 콜로(Rene Kollo·1937~)는 “모든 문제를 대화가 아니라 명령으로 처리하는 지휘자”라고 비난했다.

    지휘자 카라얀에 대한 수많은 평가 중 기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장인이긴 해도 혁명가는 아니었다’는 평이다. 즉, 카라얀은 바흐 비발디부터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바그너 차이코프스키 브루크너 말러 등의 오페라와 교향곡들을 가장 표준적 규범에 맞춰서 연주한 지휘자였다. 그의 연주에서 토스카니니 풍의 과감한 시도나 푸르트벵글러의 장기였던 ‘극적이고 감동적인 울림’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카라얀이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 바그너 등의 독일 음악을 다채롭고 우아하게 연주해낸 지휘자라는 데는 이견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최소한 카라얀은 오케스트라에서 최상급의 아름답고 정제된 소리를 뽑아낼 줄 아는 지휘자였다.

    권위 있는 음반 소개책자 ‘펭귄 가이드’는 카라얀의 연주 중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Die Schopfung)’‘사계(Die Jahreszeiten)’에 최고점을 주고 있다. 또 1980년대에 베를린 필과 함께 연주한 네 번째 베토벤 교향곡 전집, 그리고 만년에 빈 필과 연주한 음반들은 대부분 최상급의 연주를 담고 있다. 빈 필은 카라얀이 베를린 필과 사이가 틀어진 1980년대 후반에 카라얀과 함께 한 적잖은 녹음을 남겼는데, 의외로 멋진 융화를 이루어내고 있다. 카라얀의 고향이 오스트리아라는 사실이 이들의 하모니에 무언가 긍정적인 작용을 미친 것일까?

    선지자의 운명

    카라얀이 그 누구보다 야심만만하고, 자기 과시욕과 물욕이 유난히 강한 지휘자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카라얀은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과 탁월한 사업가적 능력을 갖고 있던 드문 음악인이기도 했다. 카라얀의 음반들이 엄청나게 팔려나갔다고 해서 그를 ‘돈벌이에 혈안이 된 지휘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카라얀이 녹음한 음반들이 대중에게 클래식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인도해주었다면, 그것은 비난이 아니라 찬사를 받아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카라얀은 상류층만의 음악, 철학과 심오함의 음악이었던 클래식을 상업과 대중, 그리고 20세기적인 감각과 새로운 미감으로 탈바꿈시킨 주인공이었다. ‘스타’카라얀은 자신의 수많은 음반을 통해, 그리고 스스로 창조한 이미지를 통해 클래식과 대중 사이를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 카라얀을 통해 클래식 음악가들은 ‘대중’이라는 무궁무진한 시장을 얻게 된 셈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 같은 일을 해준 대가로 카라얀이 동료들로부터 받은 건 감사 인사가 아니라, ‘고상하고 철학적인 클래식 본연의 정신을 훼손했다’는 비난이라는 점이다. 고향에서 푸대접 받는 것이 선지자의 운명이라면, 카라얀은 선지자였다.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람스 등 오스트리아가 낳은 뛰어난 음악가들은 모두 빈 중앙묘지의 음악가 묘역에 묻혀 있다. 카라얀의 성격에 비추어 보면, 그 역시 중앙묘지의 화려한 비석 아래에 잠들어 있을 듯싶다. 그러나 카라얀은 빈 중앙묘지 대신 고향 잘츠부르크의 시골 교회를 택했다. 잘츠부르크 근교의 아니프(Anif)에 가면, 한 교회 묘지에 작은 나무 십자가가 세워진 카라얀의 무덤을 볼 수 있다. 생전에 지휘자로 누릴 수 있는 모든 명예와 비난을 한몸에 받은 카라얀, 세계적인 스타였던 그는 이제 이름 없는 시골 교회의 소박한 무덤에 누워 있다.

    ‘황제’가 떠난 클래식 음악은 급격한 사양길을 걷고 있다. 지금은 어떤 지휘자나 연주자도 카라얀처럼 늘 화제를 몰고 다니거나 일거수일투족이 대중의 주목을 받지는 못한다. 카라얀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이러한 사람은 오직 카라얀 하나뿐이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카라얀이라는 이름, 한 위대한 선지자가 짊어져야만 했던 빛과 그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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