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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의 특별함 <마지막회>

‘클래식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위대한 선지자인가, 약삭빠른 장사꾼인가

  • 전원경│주간동아 객원기자 winniejeon@hotmail.com│

‘클래식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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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래식 문외한조차 지휘봉을 들고 명상에 잠긴 카라얀의 사진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무려 35년간 베를린 필을 지휘한 카라얀은 클래식 녹음에 본격 나섬으로써 클래식 대중화를 일궈냈다. 그로 인해 그 자신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으며, ‘장사꾼’이란 비난도 피할 수 없었다.
‘클래식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br>● 1908년 4월5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출생<br>● 1916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입학, 지휘·피아노 전공<br>● 1929년 울름 오페라극장과 지휘자 계약<br>● 1933년 나치 입당<br>● 1935년 아헨 오페라극장 음악감독 취임(독일극장 최연소 음악감독)<br>● 1945년 연합군에 의해 지휘 활동 일절 금지당함 <br>● 1955년 베를린 필과 종전 10주년 기념 미국 순회공연<br>● 1956년 베를린 필 종신 음악감독 계약체결<br>● 1957년 빈 오페라극장 음악감독,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예술감독 취임<br>● 1964년 빈 오페라극장 음악감독 사임<br>● 1967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음악제 창설<br>● 1987년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 지휘<br>● 1989년 4월24일 베를린 필 사임. 7월16일 81세로 잘츠부르크에서 타계

카라얀을 싫어하는 사람조차 20세기 클래식 음악계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1908~89)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명제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카라얀은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Berlin Philharmonic)에서 35년간 종신 지휘자로 군림한, 클래식 음악의 살아있는 신화였다. 카라얀 이전까지 일부 상류층이나 고급 취향을 가진 이들의 전유물이던 클래식은 그의 등장을 기점으로 해서 대중의 음악으로 성큼 다가섰다. ‘뉴욕타임스’는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인으로 카라얀을 꼽았다. 대중가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1935~77)나 존 레넌(John Lennon·1940~80)처럼, 카라얀도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장 많은 클래식 음반을 파는 지휘자다.

지휘자로서 카라얀의 능력이 그만큼 특출했던 것일까? 물론 카라얀이 그저 그런 지휘자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그가 평범한 수준의 지휘자였다면, 어떻게 세계 제1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의 종신 지휘자로 군림할 수 있었겠는가. 카라얀은 스물일곱 살에 아헨(Aachen)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이 되었고, 1950년대에는 베를린 필과 빈 오페라극장(Wien Staatsper)의 음악감독을 겸임한 전무후무한 경력의 소유자다. 20세기 지휘자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아무리 인색하더라도 열 손가락 안에 카라얀의 이름을 넣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단연 20세기를 대표하는 지휘자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클래식 애호가들은 생동감과 활기에서는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1918~90)을, 영혼을 울리는 영감 넘치는 연주에 대해서는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ngler·1886~1954)를, 강렬함과 민첩함으로는 게오르그 솔티(Georg Solti·1912~97)를,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고상한 음색의 재현에서는 브루노 발터(Bruno Walter·1876~1962)를 꼽는다. 클래식 애호가에게 카라얀은 아무리 좋게 본다 해도 ‘모든 면에서 그저 무난한 지휘자’ 또는 ‘단점도 장점도 없는 몰개성한 지휘자’ 정도인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카라얀이 ‘지휘자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의 어떤 점이 여느 지휘자와 달랐던 것일까? 카라얀에게는 분명 다른 지휘자와 구별되는 점이 있었다. 그는 훌륭한 음악가인 동시에, 탁월한 비즈니스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어찌 보면 음악가로서의 능력보다 비즈니스 능력이 더 뛰어났다고도 할 수 있다.

레코딩의 가능성



카라얀은 1930년대부터 50여 년 동안 900여 장의 SP, LP, LD(레이저 디스크)를 녹음해 2억장에 달하는 통산 판매고를 기록했다. 1940년대 후반, 막 LP 시대가 열릴 때 카라얀은 어떤 지휘자보다 먼저 레코드음악의 무한한 가능성을 알아차렸다. 그때까지 적지 않은 지휘자가 음반 녹음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레코딩은 죽은 음악’이라며 음반 녹음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라얀은 앞으로는 굳이 공연장에 오지 않고 집에서 편하게 음악을 즐기는 시대가 올 것임을 내다보았다. 그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900장에 달하는 레코딩 덕분에 카라얀은 생전에 음반 인세로만 매년 40억원을 벌어들이는 클래식계 최대의 갑부가 되었다. 그리고 이처럼 수많은 레코딩을 통해 카라얀은 ‘카라얀=최고의 지휘자’라는 공식을 손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대다수 클래식 초보자가 처음 음반을 고를 땐 아무래도 수적으로 우세한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레코드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들어 CD라는 새로운 매체의 가능성을 먼저 알아본 사람도 카라얀이었다. 당시 클래식음악 관계자들은 차갑고 기계적인 음색의 CD가 LP를 대체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카라얀은 CD가 등장한 이상, LP의 시대는 끝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CD 녹음에 앞장섰다. 여기서 생겨난 작은 에피소드가 있다. 한 장의 CD에는 최대 74분 분량의 음악이 들어간다. 이 분량을 74분으로 결정한 사람이 카라얀이라는 얘기가 있다. 처음으로 CD를 상용화한 필립스와 소니 기술진은 CD 1장 분량으로 LP 음반 앞뒷면을 합한 분량과 같은 60분이 적당하다고 생각했으나, 카라얀이 “60분으로 하면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전곡을 녹음할 수 없다”며 74분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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