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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의 특별함 <마지막회>

‘클래식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위대한 선지자인가, 약삭빠른 장사꾼인가

  • 전원경│주간동아 객원기자 winniejeon@hotmail.com│

‘클래식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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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1984년 내한 당시 부인 엘리에트 여사와 함께한 모습.

이 에피소드의 진위에 대해서는 사실 논란이 있다(필립스의 일부 기술진은 ‘74분’과 카라얀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여하튼 이런 일화들이 카라얀의 양면성-뛰어난 지휘자인 동시에 탁월한 비즈니스맨-을 뒷받침해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1980년 출시된 세계 최초의 판매용 CD는 카라얀이 지휘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1864~1949)의 ‘알프스 교향곡(Eine Alpensinfonie op.64)’이었다. 카라얀은 디지털 콤팩트 카세트(DCC) 역시 널리 사용될 것으로 내다보았으나 이 부분에서는 그의 예측이 빗나갔다.

두 번째로 카라얀을 여타 지휘자와 차별화한 것은 철두철미한 이미지관리 능력이다. 카라얀은 무대에서나 무대 밖에서나 자신의 이미지를 빈틈없이 관리했다. 무대에서는 백발을 휘날리며 눈을 감은 채 지휘에 몰두하는 모습, 즉 범접할 수 없는 마에스트로(Maestro)의 카리스마를 과시했다. 한편 무대 밖에서는 모델 출신의 세련된 부인을 대동한 채 페라리와 자가용 비행기를 몰고 다니는 베스트 드레서였다. 한마디로 그에게는 남다른 스타 기질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창조한 ‘마에스트로 이미지’를 통해 음악팬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까지 능란하게 조종했다. 돌이켜 보면, 카라얀 생전인 1980년대에는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조차 카라얀은 알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지휘봉을 들고 명상에 잠긴 카라얀의 스틸 사진이 미용실이나 맥줏집에도 걸려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카라얀은 지휘자로서 보낸 50여 년의 세월 동안 찬사와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그런 카라얀이 타계한 지 꼭 20년이 지난 지금, 카라얀만한 지휘자, 이미지로나 음반 판매로나 대중을 그처럼 사로잡은 지휘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1989년 카라얀의 사망과 더불어 클래식 음악계는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듯하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붙여졌던 ‘클래식 음악의 황제’라는 칭호는 과장이 아니었다. 황제든 독재자든 간에, 이제 클래식 음악계는 그 같은 카리스마를 목마르게 그리워하고 있다.

20세기의 독일을 뒤흔든 두 남자, 히틀러와 카라얀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평생 독일을 주 무대로 활동했지만 사실 이들의 조국은 독일이 아닌 오스트리아였다.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Salzburg)에서 귀족의 후예로 태어난 카라얀은 똑똑하지만 경쟁심이 너무 강해 친구가 없는 아이였다. 그는 피아노 연주와 외국어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는데, 열네 살 때 영국에 단 석 달간 머무르면서 영어를 마스터할 정도였다.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지휘를 전공한 카라얀은 좁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독일로 간다. 최고의 지휘자였던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1867~ 1957)의 연주를 듣기 위해 잘츠부르크에서 바이로이트(Bayreuth)까지 250마일을 자전거로 달려가기도 했으며 당시 베를린 필을 지휘하던 푸르트벵글러의 연주에도 깊이 빠져들었다. 약관의 카라얀은 독일 울름(Ulm)의 오페라극장에 채용되어 지휘자로 첫발을 내디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출신 젊은이의 실력과 야심을 주목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5년간 일하던 울름 오페라극장에서 갑자기 해고되면서 그는 일자리를 잃어버렸다.



나치당원 카라얀

1933년, 이런 상태에서 스물다섯 살의 카라얀은 나치에 입당한다. 그가 나치에 입당한 이유는 명백해 보인다. 일자리가 필요한 외국인 지휘자에게 당시 나치 당원증만큼 확실한 신분보장이 없었다. 훗날 카라얀은 “아헨 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기 위해 1935년 어쩔 수 없이 나치 당원이 되었다”고 말했지만 이는 거짓이다. 그가 1933년 본인의 뜻으로 나치에 입당한 게 분명하다. 이 때문에 종전(終戰) 후 아이작 스턴(Isaac Stern·1920~ 2001), 이츠하크 펄먼(Itzhak Perlman ·1945~) 등 유대계 연주자들이 카라얀과의 연주를 거부했다. 1967년 전성기를 구가하던 카라얀은 미국 주간지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당당하게 말했다. “(나치 입당은) 지휘대를 얻기 위한 방법이었다. 지휘를 계속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그보다 더한 범죄라도 저질렀을 것이다.”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발언이지만, ‘황제’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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