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호

오래된 운명의 숲을 지나다

  • 고승철│저널리스트·고려대 강사 koyou33@empal.com│

    입력2009-12-09 15:2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오래된 운명의 숲을 지나다

    ‘오래된 운명의 숲을 지나다’<br> 류정월 지음/이숲/286쪽/1만5000원

    삼성그룹의 어느 사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회사 선배의 권유로 용하다는 역술인으로부터 운명 감정을 받았단다. 맞는 듯 틀리는 듯한 사주풀이를 듣고 복채 봉투를 내놓았다. 이튿날 그 역술인이 전화를 걸어와 “어제 받은 복채를 분실했으니 죄송하지만 다시 달라”고 요청하더라는 것. 황당했지만 봉투를 또 주었다. 그 사장은 “자신이 겪을 한치 앞의 일도 모르는 사람이 남의 운명을 봐준다니 어이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때다. 어느 방송사에서 유명한 역술인들에게 한국팀의 경기 결과를 점치게 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제대로 맞힌 역술인은 아무도 없었다. 대선 때면 으레 자칭 타칭 ‘도사’들이 당선자를 예언한다. 헛다리 짚은 예언이 수두룩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예언이 나온 지 한참 지났지만 그는 건재하다.

    운명이란 게 있을까. 사람은 정해진 운명대로 살아갈까. 인간 의지로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신(神)은 과연 존재하며 신이 인간사에 관여할까. 열심히 기도하는 인간에게 신은 도움을 줄까. 인간사의 미래를 미리 알 수 있을까. 이런 원초적인 의문을 풀기 위해 인간은 오랫동안 고심해왔다.

    고대에는 이 의문을 해결하는 일에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동원됐다. 종교, 학문, 정치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있을 때다. 공자는 주역 목간을 연결한 가죽 끈이 3개나 닳아 끊어질 정도로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주역은 공자 이전의 선현들이 우주 원리에 대해 밝힌 책으로 점서(占書)로도 쓰인다. 고대 그리스 지역에서도 집권자는 주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는 델포이 신전에 가서 신탁(神託)을 받았다.

    근대에 접어들어 인간 이성이 눈을 뜨고 자연과학이 발전하면서 ‘운명학’은 점점 음지로 들어갔다. 양지에서 활동하기엔 합리성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양지의 논리만으로는 풀이되지 않는 일이 허다하다. 그래서 인터넷 시대인 오늘날에도 적잖은 사람이 ‘신화의 논리’에 귀를 기울이며 답답한 가슴을 푼다. 한국의 주요 일간지에는 ‘오늘의 운세’가 실리고 젊은이들은 타로 점을 보거나 사주 카페를 즐겨 찾는다.



    ‘오래된 운명의 숲을 지나다’란 책은 조선 시대의 운명담과 운명론을 다루었다. 동서고금의 운명학도 아우르고 있어 이 분야에 대한 시야를 넓혀주는 지침서 구실을 한다. 저자는 ‘문헌 소화(笑話)의 구성과 의미작용에 대한 기호학적 연구’란 제목의 논문으로 서강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저술가다. 옛날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하는 분야의 전문가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전문성을 발휘해 운명과 관련한 갖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흥미진진하게 읽히면서도 웅숭깊은 의미를 가진 사례들이 그득하다.

    허난설헌(1563~89)은 어느 날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27세 때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집안사람들에게 이 꿈 이야기를 하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조선의 걸출한 도인 정렴(1506~49)은 을사사화 때 아버지 정순붕이 반대파를 많이 죽이자 “이러면 30년 후에 반드시 패망합니다”라며 말렸다. 정렴의 예언대로 1577년 정순붕은 관직과 훈작을 박탈당했다.

    숱한 예언을 말한 정렴은 야담에도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의 친구가 운명을 감정해달라며 끈질기게 졸랐다. 정렴은 마지못해 “자네 수명은 내년이 끝인데 더 살고 싶으면 정월 초하루 새벽에 만리재에 가서 도롱이 입은 노인에게 살려달라고 빌게”라고 말했다. 친구는 정렴이 일러준 대로 노인을 만나 애걸했다. 노인은 “정렴이 일러주었구나”면서 “정렴의 수명 17년을 떼어 자네에게 붙여주지”라고 대답했다. 그 노인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대사명성(大司命性)이란 신선인데 지상으로 귀양 왔다는 것이다.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

    이 책은 어느 유명한 여성학 강사의 성공 사례도 소개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태몽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고 한다. “너를 뱄을 때 흰 말을 탄 남자가 긴 머리를 휘날리며 말을 달리고 사람들이 벌떼처럼 너를 쫓아가더라”는 내용이었다. 태몽처럼 그녀는 강의마다 수많은 청중을 끌어 모으는 명사(名士)가 됐다. 그러나 알고 보니 딸이 큰 뜻을 품고 살아가도록 독려하기 위해 어머니가 지어낸 태몽이었다.

    이는 ‘로젠탈 효과’로 설명된다. 하버드대학의 심리학자 로버트 로젠탈 교수가 1964년 실시한 실험에서 비롯된 이론이다. 그는 어느 초등학교 교사들에게 특정 어린이들의 명단을 주면서 “얘들은 지능이 매우 높아 공부를 잘할 것”이라 귀띔했다. 사실 무작위로 뽑힌 평범한 어린이들이었지만 학년말이 되자 실제로 그들의 성적은 상위권으로 나타났다. 교사의 기대감이 학생에 대한 예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된 ‘피그말리온 효과’도 같은 내용이다.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자신의 이상형 여성을 조각으로 만들어 애타게 사랑하자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감동하여 조각품을 진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는 줄거리다.

    커피를 마시면 잠이 오지 않으리라 걱정하면 유난히 밤잠을 설치고, 어느 은행이 파산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면 예금자들의 인출 러시가 벌어져 실제로 은행이 문을 닫는다. 이런 현상도 마찬가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징크스(Jinx)는 고대 그리스에서 마술에 쓰이던 새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불길한 조짐을 뜻한다. 운동선수들에게는 유독 징크스가 많다. 심리 요인이 적잖게 작용하기 때문이리라. 골프계의 거목인 잭 니클라우스는 1센트짜리 동전 3개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페어웨이를 걸어갈 때 이 동전을 만지작거리면 마음이 안정된다고 한다. 박세리 선수는 달걀을 먹지 않는다는데 달걀이 깨지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버드 대학생들은 시험을 잘 치르게 해달라고 학교 설립자 존 하버드 동상의 발을 만지곤 한다. 이런 행동들은 일종의 미신이다. 미신이란 합리적인 근거가 없는 신념 체계다. 합리적인 근거를 가진 신념은 ‘믿음’ 또는 ‘종교’라 불린다. 그러나 그 경계가 매우 모호하다고 이 책의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어떤 기독교인은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성경책을 펴고 눈에 들어오는 아무 구절이나 보면서, 마치 계시처럼 신이 그 구절을 통해 자신의 앞날을 인도한다고 믿는다”면서 “비신자가 볼 때 이런 믿음은 비합리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고 말한다.

    어떤가. 흔히 내가 믿으면 합리성을 띤 신앙이요, 남이 좇으면 미신이라고 여기지 않는가. 원시인의 주술은 모두 미신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저명한 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는 원시인 주술을 분석한 끝에 ‘유사(類似)법칙’과 ‘접촉법칙’을 주장했다. 유사법칙은 누군가를 저주할 때 그를 상징하는 인형을 만들어 바늘로 찌르면 실제 사람이 고통을 느낀다고 믿는 것을 일컫는다. 궁중 비화나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에서 이런 사례를 흔히 접한다. 임산부가 닭고기를 먹으면 아기 피부가 닭살처럼 된다고 믿는 것이나 해구신을 먹으면 정력이 세진다고 믿는 것도 같은 원리다. 접촉법칙은 탯줄과 태반은 분리되더라도 여전히 상호작용을 하므로 탯줄과 태반을 훼손하면 재난을 당한다고 믿는 것과 같은 심리상태를 말한다.

    대통령과 사주가 같은 노숙자

    음양오행설에 기초한 사주(四柱) 명리학은 수천 년 동안 동양인의 의식구조를 지배해왔다. 예를 들어 사주에 화(火) 기운이 많은 사람은 열정적인 성품을 가졌다는 식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 목, 화, 토, 금, 수 등 오행의 기운을 받기 때문이란다. 우주가 음양과 오행의 기운으로 구성됐으므로 인간이 이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다. 이 논리는 프레이저의 유사법칙과 접촉법칙이 함께 작용함을 보여준다.

    토정 이지함(1517~78)이 쓴 운세 예언서 ‘토정비결’의 첫 문장은 ‘동풍에 얼음이 풀리니 마른 나무가 봄을 만나도다’라고 시작한다. 은유적 표현이 대부분이어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식으로 인간사 모두를 아우를 수 있다. 중세기 서양의 대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도 마찬가지여서 어떤 현상도 그럴듯하게 설명한다. 혈액형에 따른 성격 분류가 한때 유행했다. 이 때문에 B형 남성은 바람둥이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어느 일본인 호사가가 장삿속으로 유포했다는 게 정설이다.

    운명학이 뚜렷한 합리적 근거가 없다 하더라도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언젠가 한국의 어느 TV 오락 프로그램에서 대통령과 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을 찾아냈는데 그는 노숙자였다. 그 프로그램은 운명론이 허구라는 메시지를 던지려 했다. 이 책의 저자는 “사주가 같은 사람을 찾아 공동 운명을 발견하려는 것은 하늘이 있음을 입증하는 일이었고 하늘이 있기에 선하게 살려고 했다”면서 “오늘날 TV 프로그램에서 동일 사주를 찾는 이유는 운명을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풀이했다. 인간의 성패를 가름하는 대표적인 잣대는 연봉과 같은 자본주의적 요소라는 것. 저자는 운명론의 긍정적 측면은 인간이 천명을 깨달아 도덕적으로 살아가도록 촉구하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사주명리학에 따르면 태어난 연, 월, 일, 시 등 사주의 4대 구성요소 가운데 날짜가 가장 중시된다. 이를 일간(日干)이라 한다. 목(木) 기운 가운데서도 갑목(甲木)을 띤 날에 태어난 사람은 우뚝 솟은 나무처럼 조직의 리더가 되려는 속성을 지녔다고 한다. 아기가 출생 직후 처음 숨을 들이쉴 때 받아들인 우주의 기운이 운명을 결정짓는 데 중요하다고 한다. 인간은 우주의 여러 기운이 조합돼 탄생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고급승용차도 비포장도로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소형차도 잘 정비해서 좋은 도로를 달리면 매끄럽게 굴러간다. 타고난 운명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노력에 의해 바뀌는 게 우주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