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호

소설이 사랑한 공간, 공간들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09-12-09 15: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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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 사랑한 공간, 공간들

    ‘저녁이 아름다운 집’<br>구효서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314쪽/1만1000원

    작가 구효서는 노래를 구성지게 잘 부른다. 또한 그는 글씨를 정갈하게 잘 쓴다. 그는 춘향가 한 대목 ‘쑥대머리’를 구수하고 천연덕스럽게 불렀고, 내가 좋아하던 기형도의 시를 한지에 붓으로 멋지게 써주었다. 옛날, 그러니까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는 그랬다. 그때 나는 그와 함께 광화문에 위치한 같은 직장에 다녔고, 그는 나와 함께 점심 식사를 가장 많이 한 동료였다. 당시 그는 나보다 3년 먼저 신춘문예에 당선돼 소설가로 데뷔했으며, 나보다 그 직장에 1년 먼저 입사해 다니고 있었다.

    그는 내가 만난 첫 강화도 사람이었고, 내가 신춘문예로 소설가가 되자 제일 먼저 축하해준 첫 동료였다. 그는 가끔 점심을 먹는 중에, 또는 야유회 가는 길에 유년 시절의 일들을 ‘소설처럼’ 들려주었다. 주로 강화도 이야기였다.

    그의 강화도 정서가 익숙해질 무렵 나는 광화문의 그 직장을 떠나 포스트모던한 강남으로 갔고, 그리고 유럽으로 떠났다. 시간이 흘렀고, 세기가 바뀌었고, 그는 마을 길목을 지키는 굴참나무(‘명두’)처럼 흘러가는 세월을 묵묵히 견디며 소설들을 써냈다. 이번에 출간한 ‘저녁이 아름다운 집’은 굴참나무 같은 작가 구효서의 일곱 번째 소설집이다. ‘승경(勝景)’‘TV, 겹쳐’‘조율-월인천강지곡’ 등 소설집에 수록된 아홉 편의 작품을 비롯해 그동안 구효서가 발표한 여섯 권의 소설집과 11권의 장편소설에서 일관되게 주목되는 특징은 탁월한 공간성의 창출이다. 이번 ‘저녁이 아름다운 집’은 그중에서도 ‘소설의 승경’을 이룬다.

    공간성이 빛나는 소설들

    공간성이 빛나는 소설들이 있다. 캐서린을 향한 고아 히스클리프의 광적인 사랑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희생자인 캐서린의 혼이 음울한 바람소리가 되어 황량한 워더링 하이츠의 저택을 휘도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10년 동안 바다를 표류하며 방랑하던 희랍의 율리시즈(‘오디세이아’)를 근대의 광고쟁이 사내 레오폴드 블룸으로 둔갑시켜 하루라는 긴 역사를 더블린에 창조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치명적인 전염병을 불러오는 불온한 바람과 뱀처럼 물길 현란한 수도(水都) 베네치아의 특수한 공간성을 살려 한 중년 사내의 미소년을 향한 관조적 동성애(에로스)의 극치를 보여준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 죽다’, 그리고 살아 150년 죽어 20년을 마을 숲에 버티고 서서 명두라는 아낙의 한 많고 기이한 삶을 굴참나무가 되어 전한 구효서의 ‘명두’. 이 공간들은 소설의 성패(인상)를 결정짓는 인물(캐릭터)의 창조와 함께 또 하나의 강력한 주인공으로 존재한다. 서머싯 몸이 세계 10대 소설의 하나로 꼽은 ‘폭풍의 언덕’의 워더링 하이츠란 공간은 주인공 히스클리프(벼랑 위에 핀 히스 꽃 같은 존재)와 캐서린 언쇼의 비극적인 사랑을 음울하게 휘감는 상징적 공간으로 압권이다.



    워더링 하이츠란 히스클리프씨의 집 이름이다. ‘워더링’이란 이 지방에서 쓰는 함축성 있는 형용사로, 폭풍이 불면 위치상 정면으로 바람을 받아야 하는 이 집의 혼란한 대기를 표현하는 말이다. 정말 이 집 사람들은 줄곧 그 꼭대기에서 일년 내내 그 맑고 상쾌한 바람을 쐬고 있을 것이다. 집 옆으로 제대로 자라지 못한 전나무 몇 그루가 지나치게 기울어진 것이다. 태양으로부터 자비를 갈망하듯이 모두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고 늘어선 앙상한 가시나무를 보아도 등성이를 넘어 불어오는 북풍이 얼마나 거센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김종길 역, 민음사)

    공간성이 뛰어난 소설들은 독자로 하여금 직접 그곳으로 가도록 유혹한다. 나는 구효서에 홀려 강화도를 수없이 찾았고, 제임스 조이스에 빠져 더블린으로 향했고, 로맹 가리에 반해 페루의 바닷가로 떠났다.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의 하숙집을 찾아 파리의 팡테옹 언덕의 좁은 골목들을 헤집고 돌아다녔는가 하면, 르 클레지오의 ‘조서’의 무대를 쫓아 밤이나 낮이나 니스 해변의 영국인 산책로를 오갔다. 버지니어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품고 런던의 거리와 공원을 산책했는가 하면,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을 옆구리에 끼고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떠돌아다녔다. 한국 소설에서 공간이 소설의 핵심으로 진입한 것은 모던 보이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에서다. 작가는 자신의 분신인 구보라는 주인공 사내를 내세워 독자를 1930년대 근대 도시 경성의 거리로 인도한다.

    구보는 집을 나와 천변 길을 광교로 향하여 걸어가며, 어머니에게 단 한마디 “네-”하고 대답 못했던 것을 뉘우쳐본다. (…)구보는 갑자기 걸음을 걷기로 한다. 그렇게 우두머니 다리 곁에 가 서 있는 것의 무의미함을 새삼스러이 깨달은 까닭이다. 그는 종로 네거리를 바라보고 걷는다. 구보는 종로 네거리에 아무런 사무(事務)도 갖지 않는다. 처음에 그가 아무렇게나 내어 놓았던 바른발이 공교롭게도 왼편으로 쏠렸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구보는, 약간 자신이 있는 듯싶은 걸음걸이로 전차 선로를 두 번 횡단하여 화신상회 앞으로 간다. 그리고 저도 모를 사이에 그의 발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서기조차 하였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깊은샘)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1970년대에는 최인훈에 의해, 또 1990년대에는 주인석에 의해 각자의 시대에 맞게 패러디된다. 이들 소설의 특징은 소설가형 소설이라는 유형의 차용과 서울이라는 공간의 재현이다. 모더니스트 박태원으로부터 출발한 서울의 소설화는 염상섭의 ‘삼대’를 거쳐 2000년대에는 급기야 김종은의 ‘서울특별시’가 등장하게 된다.

    소설의 승경, 저녁이 아름다운 집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곧 서울이라는 고현학(考現學)적 공간의 창출이라는 의미심장한 지점을 형성한다. 1930년대 식민지 수도 경성의 근대성, 곧 ‘현대성’의 풍경을 연구하려면 박태원의 이 소설을 피해갈 수 없다. 이는 일찍이 문학에서 현대성의 대변자들, 곧 파리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와 더블린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로 연원을 거슬러 올라갈 때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박태원 소설의 모태가 된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은 그의 모든 소설, 그러니까 소설집 ‘더블린 사람들’과 장편 ‘젊은 예술가의 초상’, 그리고 ‘율리시즈’(1914~22), ‘피네건의 경야’의 무대로 등장하고, 이 공간은 소설을 이루는 핵심 요소인 인물과 스토리를 견인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경성 산책에 앞서 조이스가 등장시킨 광고쟁이 블룸씨의 더블린 걷기는 현대소설의 새로운 탄생을 알린다.

    구효서 작품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장소에 대한 사랑, 곧 장소애(愛)를 일컬어 토포필리아(Topophilia)라고 한다. 구효서의 소설들은 토포필리아의 원천이랄 수 있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정서로 빚어낸 산물이다. 그는 이전에 발표했던 ‘시계가 걸렸던 자리’에서 시한부 사내를 내세워 유년기를 보낸 고향 강화도 집을 찾아 추억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소설화했다. 그러면 이번에 출간한 ‘저녁이 아름다운 집’이란 어떤 것일까. 그 집은 어디에 있어야 하며, 어떤 세계일까. 구효서는 해질녘의 숭고하고도 온화한 어조로 말한다.

    지난해 그들은 강원도 횡성에다 집 지을 땅을 샀다. 땅덩이리가 커서 세 집이 함께 사서 나누었다. 나눈 한 필지에 묘지 한 동이 붙어 있었다. 다들 그 땅을 피하고 싶었지만 제비뽑기에서 걸렸다. 마땅히 이장을 해주어야 할 묘지주인은 몹시 미온적이다. (…)주말마다 내려와 농사를 지었다. 농약은 주지 않았지만 작물들은 그럭저럭 잘 자랐다. 농사를 짓느라 그의 얼굴은 새카많게 탔다. 그녀는 선크림을 바르고 수건을 두르고 커다란 챙이 있는 모자를 썼다. (…) 방치해두면 잡종지로 변해 세금이 많이 나온다는 말에 겁나 시작한 농사였다. 그러나 밭에서 맞았던 지난 사계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나고 자라고 맺고 사라지는 이치가 그곳에 있었다.

    (구효서, ‘저녁이 아름다운 집’, 랜덤하우스 코리아)



    사실, 소설의 화자인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녀, 그러니까 아내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시나리오 작가인 그와 그의 아내가 전원생활을 꿈꾸며 형제 세 집이 합작으로 산 땅덩이에 덩그러니 남의 무덤이 솟아 있다. 무덤은 제비뽑기에 의해 그들 차지가 되었다. 갑자기 무덤 문제가 그들 사이에 끼어든다. 그들은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무덤에서 자신의 죽음과 그 이후를 본다. 남편의 죽음을 감지하지 못한 채 그녀는 무덤을 이장시킬 방법을 찾다가 결국은 여러 차례 남편과 대화한 끝에 무덤과 함께 집을 짓기로 마음을 돌린다. 그가 사전에서 찾아낸 무덤의 동의어들 중 산소는 ‘그냥 산의 어떤 곳’이라는 의미를 받아들인 것이다.

    구효서는 한 사람에게 죽음이 다가와 휘감고 또 풀려나가는 흐름을 강물처럼 순연하게 풀어낸다. 그의 순연함은 강화도 작가의 변하지 않는 성정이며 나아가 작가 경력 22년 차의 능숙과 세련의 경지다. 누가 남의 묘를 마당가에 품은 채 새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작가 구효서는 능청스럽게 아내가 홀로 남은, 그러나 무덤이 마당가에 놓인 석양빛 가득한 세계로 이끈다. 그리고 명명한다, 저녁이 아름다운 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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