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호

개츠비를 만나는 황홀한 봄밤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0-04-06 16:5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봄밤이 깊어간다. 피츠제럴드를 읽는다, 아니 개츠비를 만난다. ‘위대한 개츠비.’ 번역자가 다를 뿐 내 서가에는 같은 작가의 동명 소설이 세 권이나 있다. 이 봄밤의 동행자는 막 번역되어 나온, 사진을 작품의 이미지로 얹은 블랙 장정의 문학동네 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간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들을 밀치고 ‘위대한 개츠비’가 책상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딱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봄이 일으키는 현기증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문우(文友)의 기준, 피츠제럴드

    개츠비를 만나는 황홀한 봄밤

    ‘위대한 개츠비’<br>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문학동네/252쪽/9500원

    몇 년 전 평소 친하게 지내는 선배 작가 S의 문학 강연에 젊은 문학도들과 함께 참여한 적이 있다. 강연이 끝나고 독자의 질문 시간이 되었다. 철학과 출신으로 현재 소설가 지망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청년이 작가에게 비문학 전공자로서 문학에 입문한 계기, 대학 시절 문학동아리 생활, 문우 관계에 대해 질문했다. S는 법대에 다녔지만, 주로 문리대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답변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스무 살 어름 나에게 문우의 기준은 ‘피츠제럴드’를 읽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에 있었습니다.” 이때 피츠제럴드를 읽는다는 의미는 그의 ‘위대한 개츠비’를 의미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오래전, 스물다섯 살 여름, 일본의 초대형 베스트셀러작가의 첫 번역 장편소설인 ‘상실의 시대(원제:Norwegian Wood, ノルウェイの森)’의 어느 구절이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경험을 했다. 당시 하루키라는 생소한, 그러나 일본에서 슈퍼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른 이 작가는 주인공의 시니컬한 말투를 통해 ‘한동안 피츠제럴드만이 나의 스승이요, 대학이요, 문학하는 동료’였음을 토로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 드러냈다. “누구든지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

    나는 비틀스의 노래 제목에서 빌려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화제작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장편소설이 ‘상실의 시대’란 한국어 제목으로 출간되는 과정 속에 있었고, 지금도 유유정이라는 원로 일어 번역자가 전해준 낡은 원고지 더미들 속에서 파편처럼 빛나던 피츠제럴드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하루키의 소설 속에는 피츠제럴드뿐만 아니라 수많은 외국 작가와 외국 음악, 재즈, 음식, 그림, 도시, 비행기 이름들이 현란하게 출몰했고, 그것이 하루키의 새로움, 그러니까 그 시대 젊은 작가의 언어관, 소설관을 대변하는 독창성이었다.

    그때 서른일곱 살이던 나는 보잉 747기의 한 좌석에 앉아 있었다. 거대한 비행기는 두터운 비구름을 뚫고 내려와, 함부르크 공항에 막 착륙하려 하고 있었다.



    11월의 차가운 비가 대지를 어두운 장막으로 감싸고 있었고, 비옷을 걸친 정비공들과, 민둥민둥한 공항 빌딩 위에 나부끼는 깃발들 하며, BMW의 광고판 같은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이 플랑드르화파의 음울한 그림들의 배경처럼 보였다. 드디어 ‘또 독일에 왔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금연등이 꺼지고 기내의 스피커에서 조용한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어떤 오케스트라가 감미롭게 연주하는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하드보일드 문체

    독자가 작가와 작품을 만나는 경로는 몇 가지가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터키의 작가 오르한 파묵은 ‘새로운 인생에서 한 권의 책을 만났다. 그리고 내 인생은 바뀌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여러 매체의 서평을 통해, 또는 독서 관련 단체의 추천 목록을 통해, 그리고 선배 작가 S나 나처럼 어떤 작가의 말이나 작품을 통해, 나는 하루키를 통해 비틀스와 비치보이스, BMW와 독일, 그리고 피츠제럴드와 레이먼드 카버를 만났다. 피츠제럴드는 나에게 1920년대 뉴욕을, 그리고 레이먼드 카버는 헤밍웨이로부터 물려받은 하드보일드 문체를 전해주었다.

    나는 뉴욕이라는 도시, 밤이면 역동적이고 모험적인 분위기로 충만한 도시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나는 5번가를 걸어 올라가 군중 속에서 신비로운 여자 하나를 찾아내 아무도 모르게,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그 여자의 삶으로 들어가는 나만의 공상을 즐겼다. 상상 속에서 나는 그녀들의 집까지 뒤쫓아가고, 그러면 그녀들은 어두운 거리 모퉁이에서 몸을 돌려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는 문을 열고 따뜻한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는 것이었다. 대도시의 찬란한 어스름 속에서 나는 간혹 저주받은 외로움을 느끼고, 그것을 타인들-해질 무렵, 거리를 서성이며 혼자 식사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러면서 자기 인생의 가장 쓰라린 한순간을 그대로 낭비하고 있는 젊고 가난한 점원들-에게서도 발견하였던 것이다.

    위에 인용한 ‘위대한 개츠비’는 소설가 김영하의 번역에 의해 이번에 새롭게 출간된 최신 번역본 문장이다.

    2년 전부터 김영하가 머문 도시들을 테마로 여행기들이 출간되고 있는데, 시칠리아(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하이델베르크(김영하의 여행자-하이델베르크), 도쿄(김영하의 여행자-도쿄)를 거쳐 그는 현재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 머물고 있다. 여행자 김영하가 브루클린에 머물면서 한국의 독자에게 내놓은 것은 여행기나 소설이 아닌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다.

    사실 이 소설은 고등학생과 대학생, 일반인에게 권하는 필독서인 만큼 오래전부터 여러 번역자에 의해 수십 권이 나와 있다. 작가라는 존재와 마찬가지로 독자라는 신분, 또는 정체성을 고유하게 확보하고 그 특권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번역으로 읽어야 하는 외국 작품을 선택하는 섬세하고도 까다로운 기준이 있다. 내가 새삼 1925년에 출간된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는 이유는 1925년 뉴욕의 피츠제럴드와 2010년 뉴욕을 바다 건너 바라보고 있는 김영하의 문장을 동시에 경험하고자 하는 욕심과 호기심에 있다.

    “신사 숙녀 여러분.” 그가 외쳤다. “개츠비 씨의 요청에 따라 블라디미르 토스토프의 최신작을 연주하겠습니다. (중략) “이 작품의 제목은”, 그는 힘차게 결론지었다. “블라디미르 토스토프의 입니다.” (중략) 가 끝나자 여자들은 애교스럽게 남자 어깨 위에 머리를 올려놓는가 하면, 기절이라도 하듯이 남자들의 팔에 갑자기 몸을 맡기기도 하고, 심지어 누가 잡아주겠거니 생각하고 사람들 무리 속으로 몸을 던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츠비한테는 그 누구도 그러지 않았고, 프랑스식 단발머리 여자들 중 누구도 개츠비의 어깨에 손을 대지 않았고, 또한 노래하는 무리들 중 그 누구도 개츠비와 함께 노래하지 않았다.

    개츠비, 이 위대한 인물은 누구인가!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위대한’이라는 엄청난 수사가 붙은 것일까. 이 소설은 1925년에 발표된 길지 않은 장편소설로,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서 1929년에 닥칠 대공황 이전의 불안과 혼란, 격정의 뉴욕 풍경을 제이 개츠비라는 문제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생생하게 전해준다. 개츠비는 한마디로 미천한 출신으로 태어났으나 우여곡절 끝에 밀주업으로 부를 축적한 주인공. 개츠비가 활보하던 미국은 금광과 석유 채굴과 함께 산업혁명의 총아 런던에서 대서양 건너 뉴욕의 월스트리트 증권가로 자본이 형성되던 시기. 금으로, 석유로, 또는 술(밀주)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주인공들과 그들의 역동적인 생의 폭발과 끝을 우리는 몇몇 소설과 영화를 통해 알고 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의 고아 출신의 히스클리프, 제임스 딘 주연의 영화들,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가 주인공들이다. 또한 우리는 짧은 시간 안에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이 사내들의 가슴속 비밀을 알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그들은 존재하며, 또한 죽어간다는 것도 알고 있다. 히스클리프에게 캐서린이 있다면, 제이 개츠비에게 데이지가 있고, 그것은 그들에게 축복이자 저주이자 희망이었던 것.

    위대하지 않은 사랑이 있으랴!

    이 소설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육군 장교 시절 만났던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집요하고도 바보 같은 사랑이야기다(번역자 김영하는 ‘표적을 빗나간 화살들이 끝내 명중한 자리들’로 근사하게 표현했다). 비극은 서로 알아보았고, 사랑에 빠졌으나, 둘 중의 하나가 다른 길(삶/사람)을 선택했다는 데 있다.

    사치와 화려한 삶을 추구한 데이지와 전쟁 중에 만난 청년 장교인 개츠비의 사랑이 삶으로 영원히 포개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만이, 그럴 때만이 비로소 한 편의 소설이 탄생한다는 것. 제목에 사로잡혀, 피츠제럴드가 창조한 개츠비라는 사내의 위대성에 골몰하는 경우가 있다. 위대하지 않은 사랑이 있으랴! 번역자 김영하의 제목에 관한 사유를 전하자면, 피츠제럴드가 이 작품을 쓸 당시 뉴욕 근교 롱아일랜드의 그레이트 네크(Great Neck)로 이사를 했고,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 인물로 개츠비를 불러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어의 강박관념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의 위대함이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Great’가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아니었다면, 피츠제럴드 사후 이토록 오랫동안 이 소설이 독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비록 출간되기까지 여러 곡절을 겪었고, 또 출간되었을 때 독자의 외면을 받았지만, 그래서 이후 잊힌 작가로 쓸쓸하게 말년을 보내야 했지만, 결국은 이렇게 눈부시게 살아남아 21세기의 젊은 독자들과 소통한다는 것. 이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있을까. 개츠비를 만나는 봄밤, 어둠조차 황홀하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