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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논픽션 다큐멘터리 - 남북 현대사의 10대 비화

최초 북파공작대 ‘호림부대’의 비극적 운명

  • 오세영│역사작가, ‘베니스의 개성상인’ 저자│

최초 북파공작대 ‘호림부대’의 비극적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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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히 38선에서 충돌이 잦아졌고 규모도 커졌다. 본격적인 충돌은 1948년 11월4일 180여 명의 북한 인민유격대가 오대산으로 침투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패주 중인 여순반란사건 패잔병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서둘러 남파된 이들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장비도 부실했기 때문에 출동한 군경에 의해 쉽게 토벌됐다.

그러나 1949년에 접어들자 상황이 달라졌다. 북한은 6월1일 400여 명의 대규모 인민유격대를 백두대간을 통해 남파시켰다. 국군 8사단이 급히 출동해서 토벌에 나섰지만 100여 명은 끝내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갔다. 남파 목적은 지역 공비들과 합류해 산간 오지의 주민들을 모아 해방구를 설치하고 장기투쟁을 꾀할 목적이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이 소지한 위조지폐는 도시로도 침투해 지하당을 조직하고 남한 경제를 교란할 목적도 지니고 있었음을 시사했다. 이전의 우발적인 충돌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남파였다.

남한 당국을 더욱 긴장시킨 것은 무장유격대의 남파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사실이었다. 북한은 평양 인근의 강동정치학원에서 월북자들을 대상으로 남파유격대원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너희가 내려오면 우리도 올라간다.’ 남측 군 당국은 북측의 인민유격대에 상응하는 무장유격대를 조직하기로 했다. 최초의 북파공작대인 호림부대는 그렇게 해서 탄생한다.

속속들이 공개된 창설 소식



최초 북파공작대 ‘호림부대’의 비극적 운명

1949년 8월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호림부대 생포대원들에 대한 재판 장면. 북한이 촬영한 필름을 6·25전쟁 당시 미군이 노획한 것이다.

호림부대는 서북청년단을 주축으로 국방부 산하 유격부대로 창설됐다. 서북청년단은 공산당의 학정을 피해 월남한 평안도 청년들이 구성한 단체인데, 흔히 평안도 사람들의 기질을 맹호출림(猛虎出林)이라고 하는 데서 부대의 명칭을 호림부대로 정했다고 한다.

호림부대는 1947년 7월에 서북청년단 영동지구본부가 중심이 되어 창설한 계림공작대(鷄林工作隊)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부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방부 제4국 소속 동해특별대(東海特別隊)로 개편됐다. 사설 군사단체에서 국방부의 후원을 받는 준군사단체로 승격한 셈이다. 이범석 국방부 장관은 동해공작대에 큰 기대를 걸고 대원 150여 명을 선발해 3개월간 특수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할 방침으로 창설됐던 동해공작대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남과 북의 충돌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한 미 군사고문단의 압력으로 국방부 제4국이 해체되면서 동해특별대도 함께 해체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고 인민유격대 남파가 이어지는 마당에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군 당국은 동해공작대의 소속을 1949년 2월25일자로 국방부에서 육군으로 이관시키고 명칭도 호림부대로 바꿨다. 마침내 월남청년들의 사설 군사단체가 국방부 관련단체를 거쳐 대한민국 육군 소속 북파공작대로 탈바꿈한 것이다. 소속이 육군으로 이관됐다고 하지만 호림부대는 정식으로 육군에 편제된 부대는 아니었다. 호림부대원들은 대북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환하면 그때 정식 군인이 되는 조건부 신분이었다. 그 때문에 나중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생환한 호림부대원들은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억울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1949년 2월28일에 대구로 이동한 호림부대원들은 18연대에서 기본 군사훈련을 받았다. 지휘관은 정보국 특무과장 한왕룡 소령. 그곳에서 기본 훈련을 끝낸 호림부대원들은 수원의 육군수색학교로 이동해서 본격적인 유격교육을 받았다. 당시 교관 이희성 소위는 먼 훗날인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훈련을 마친 호림부대원들은 경상남도 거제도와 경상북도로 이동해 그곳 지방 게릴라 토벌에 투입됐다. 일종의 실전경험이었던 셈이다. 토벌전을 마친 호림부대는 5월25일 서울로 귀환해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의 사열을 받았다. 당시 신문들은 국방부 제2국 소속의 호림부대 대원 557명이 총리의 사열을 받았는데 이들의 지휘계통은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에서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을 거쳐 정보과 5과장 한왕룡 소령으로 이어진다고 보도했다. 선전효과를 위해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고 매스컴까지 동원한 것. 이는 기밀을 엄수해야 할 북파공작대에는 큰 패착이었고, 정부와 군 수뇌부의 안일한 판단은 나중에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최초의 북파공작대인 호림부대가 출발부터 잉태하고 있던 비극의 씨앗이다.

그런데 신문에 보도된 지휘계통은 사실과 조금 다르다. 557명이라는 숫자도 정확하지 않았다. 북파된 호림부대원의 총인원은 동해특별대를 모체로 하는 5대대와 오대산유격대를 모체로 하는 6대대를 합쳐 252명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호림부대에는 이들 5대대와 6대대 외에 2대대와 3대대의 두 개 대대가 더 있었다. 2대대는 서부전선을 맡고 있었고 3대대는 5대대와 6대대를 지원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신문이 557명이라고 보도한 것은 2,3대대원까지 전부 포함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북한은 실제로 북파된 인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숙군작업을 통해 남로당원들이 대거 군에서 축출됐지만, 그래도 여전히 암약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기에 정확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시작부터 비극의 씨앗을 안고 있던 호림부대 5대대와 6대대 대원들은 1949년 6월23일에 서울을 출발해 강원도 횡성을 거쳐 동부전선에 도착했다. 그리고 6월29일 마침내 비장한 각오로 38선을 넘는다. 사흘 전인 26일에 백범 김구 선생이 포병장교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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