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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철녀들 23

변중석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 부인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끈 무한 신뢰

  •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변중석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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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 회장집이 이 따위냐”

당시 방을 보여달라는 기자의 청에 변 여사는 “창피해서 어쩌나”를 되풀이하면서 1층 한쪽 구석으로 안내한다. 두 평도 채 안 될 것 같은 작은 방이었다. 한국 최고 재벌의 아내가 이런 방에서 자다니 기자는 다시 한 번 놀란다. 방 한쪽에는 이불 한 채가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고 윗목에는 피난 때 부산까지 갖고 갔다는 낡은 재봉틀과 가족사진으로 가득 찬 사진첩 여남은 권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변 여사는 재봉틀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6·25 전엣것이라 구식이죠. (그래도) 웬만한 옷은 요즘도 이 재봉틀로 만들어 입을 수 있어요. 취미라고는 재봉틀질밖에 없어요. 명절 때 며느리들과 손자들 옷을 만들어 입히는 게 큰 즐거움이죠. 이 재봉틀이 우리 집안 가보이고 저 사진첩은 내 밑천이죠.”

한편 남편 정 회장의 방은 2층 침대방이었다. 이와 관련해 같은 해 9월에 나온 ‘가정조선’에 두 사람이 층까지 달리해 각방을 쓰는 사연이 변 여사 육성으로 재미있게 소개됐다.

본래 변 여사 방은 2층 정 회장 옆방이었는데, 당시로부터 5년 전에 도둑이 들었던 모양이다. 변 여사는 아들 몽준의 혼사를 앞두고 있어 반지와 시계 같은 패물을 보관해놓고 잠을 자고 있었는데 여름이다보니 열어놓은 문으로 도둑이 든 것이다. 변 여사가 인기척에 잠이 깨자 도둑은 변 여사의 머리를 겨드랑이에 끼고 휘발유를 뿌리면서 “소리를 지르면 불 질러 죽이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변 여사를 이불로 뒤집어씌웠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부들부들 떨 상황인데, 변 여사가 담이 큰 사람인 게 분명한 것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반격을 했다. 방안을 뒤지던 도둑의 두 손을 붙잡고 “뉘 집인지 알고 들어온 모양인데 소리 안 지를 터이니 타협적으로 하자”고 도둑을 달랬다. 하지만 도둑은 변 여사가 내놓은 패물과 200만원을 쥐고도 성에 차지 않은 듯 변 여사의 눈과 입을 반창고로 가리고 전깃줄로 꽁꽁 묶었다. 그러면서 ‘딸라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변 여사는 “딸라 돈은 나도 이름만 들었지 못 봤다”고 맞선다. 그러자 도둑이 “무슨 현대건설 회장집이 이 따위냐”면서 투덜거리며 그냥 갔다는 것이다.



이튿날 이 소식을 들은 정 회장의 반응이 가관이다. 변 여사가 정 회장에게 “아이고 회장님 나 죽을 뻔했어. 도둑놈이 날 꽁꽁 묶어놓고 몽준이 패물 다 갖고 갔어요” 하니 정 회장은 아내 걱정은 고사하고 “왜 도둑놈을 내 방으로 안 데려왔느냐. 내가 돈 쪼금 줘서 타일러 보냈을 것인데”하며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변 여사는 혹여 도둑이 남편 방에 가 해코지를 할까봐 죽을 각오를 하고 덤볐는데, 그 마음도 몰라주고 타박을 받았으니 얼마나 서운할 일인가. 하지만 이런 일화를 기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전하는 변 여사의 육성은 경쾌하게 들렸다. 큰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호방함이 보였다. 그래도 ‘그때 그일’에 너무 놀라서 2층은 꼴도 보기 싫어 아예 아래층에 방을 잡았다고 하니 영락없는 연약한 아낙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아내를 존경한다”

정 회장은 생전에 펴낸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와 ‘이 땅에 태어나서’를 통해 “아내를 존경한다”는 표현을 썼다. “늘 통바지 차림에 무뚝뚝하지만 60년을 한결같이, 평생 변함없는 점들을 존경한다. (하기야) 존경하고 인정할 점이 없다면 사랑도 할 수 없다.” 이어 “내가 돈을 번 것도 모두 아내 덕택이었다”며 “아내를 보며 현명한 내조는 조용한 내조라는 사실을 알았다”고도 했다.

실제로 정 회장은 생전에 인터뷰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내는) 패물 하나 가진 적 없고 화장 한 번 한 적이 없다. 그저 알뜰하게 간수하는 것은 재봉틀 한 대와 장독대의 장항아리들뿐이다. 부자라는 인식이 전혀 없는 그런 점들을 존경한다”면서 “어려웠던 고생을 함께 하면서도 하나 내색하지 않고 집안을 꾸려준 내자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고 했다. 가끔 임원 가족과 한자리에서 어울려 놀 때는 느닷없이 임원들에게 변 여사에게 절을 하라고 시키고는 정 회장 자신이 솔선수범해 절을 했다고 하니 평소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는 남편으로서는 최고의 애정표현이었던 셈이다.

변 여사가 얼마나 부자 티를 내지 않고 검박한 사람인지는 곳곳에 전하는 일화로도 확인된다. 생전에 그가 자주 들렀던 슈퍼마켓 종업원들도, 동대문시장 포목점 주인도 변 여사의 정체(?)를 잘 몰랐다고 한다. 어느 해 정초에는 복조리 장사가 조리 값을 받으러 왔다가 변 여사를 보고 “사모님 안 계시느냐”고 물었다는 일화도 있다. 변 여사가 단골로 다녔던 용산 청과물시장에서는 ‘인심 좋게 보이는 어떤 할머니가 택시를 타고 와서 과일과 채소를 대량으로 사서는 용달차에 싣고 운전사 옆자리에 타고 사라지면 그 할머니가 바로 현대그룹 회장 부인이다’는 말도 돌았다. 생전에 변 여사는 “내 앞으로도 차가 한 대 있지만 시장 봐가지고 용달차 타고 돌아오는 게 가장 편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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