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착형 영웅 홍길동과 전우치는 영화 ‘홍길동의 후예’(왼쪽) ‘전우치’ 등으로 작품화되며 지금도 영웅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충족시키고 있다.
이때 임금이 팔도에 공문을 내려 길동을 잡으라 명했다. 그러나 길동의 조화가 무궁하여 서울 큰길에서 수레를 타고 왕래하기도 하고, 각 고을에 미리 알리고 가마를 타고 다니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암행어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탐관오리의 목을 벤 다음 임금에게 보고하기를 ‘가어사(假御史) 홍길동이 올리는 보고서’라 하였다. 임금은 더욱 진노하여, “이놈이 각 도에 다니며 이런 난리를 치는데도 아무도 잡지 못하니 이를 장차 어찌하리오? … 이놈은 사람은 아니고 아마 귀신인 것 같소. 신하 중에서 누가 그 근본을 아는 사람이 없겠소?”
-허균, ‘홍길동전’,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27~28쪽.
그들에게는 전형적인 공통점과 매력적인 차이가 공존한다. 홍길동에게 변신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면, 전우치에게는 변신 자체가 그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홍길동의 키워드가 ‘호부호형(呼父呼兄)’과 ‘율도국’인 반면, 전우치의 키워드는 ‘변신’인 것이다. “자, 이제 어디 한번 변해볼까” 하는 영화 ‘전우치’ 속 대사는 전우치의 매력 포인트를 정확히 짚어낸 셈이다.
홍길동의 출생과 성장과정이 그의 캐릭터 형성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면, 전우치는 현재의 변신 그 자체, 변신의 능력이 있는 한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유희적 가능성이 중요하다. 홍길동의 변신이 프로메테우스의 반항을 닮았다면 전우치의 변신은 디오니소스의 유희와 축제를 더 많이 닮은 것이다. 홍길동의 정의(正義)가 위에서 내려다본 정의의 이상형이라면, 전우치의 정의는 아래에서 올려다본 정의의 다채로운 변형이다.
또한 홍길동의 관료제 비판이 시스템 자체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 의지를 담고 있다면, 전우치가 힘 있는 자들을 혼내는 방식은 단지 그들의 권력을 풍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자들이 터무니없이 망가지는 모습’ 자체를 즐기려는 쾌락에 초점이 맞춰질 때가 많다. 말하자면 홍길동의 변신은 매우 진지하고 심각한 데 반해 전우치의 변신은 장난스럽고 쾌활하다.
벼슬 하는 놈 치고 백성들을 위하는 걸 본 적이 없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영화 ‘전우치’ 중에서
영웅의 백그라운드
천하로 집을 삼고 백성으로 몸을 삼겠노라.
-‘전우치전’ 중에서
홍길동이 좋아하는 인생 지침서는 ‘육도삼략’ ‘주역’ 등이고, 롤 모델은 장길산이다. 홍길동은 불교경전 해석과 풍수지리학에도 능하다. 주역의 팔괘로 점을 치고는 둔갑법으로 몸을 숨겨 자객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모면한다. 박학다식한 홍길동의 이상은 허균의 ‘호민론’에서도 잘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