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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유학생의 영국 일기 ⑤

내 인생의 봄날

  • 전원경│작가 winniejeon@hotmail.com│

내 인생의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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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연재를 읽은 지인들의 반응이 대체로 “고생이 많다” “짠하다”인 걸 보면, 글에 담긴 내 모습이 객지에서 혼자 어린아이 둘 데리고 사느라 고군분투하는 불쌍한 아줌마인 모양이다. 공부를 끝까지 해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나는 단순하고 소박한 지금의 생활이 행복하다.
내 인생의  봄날
내가 그렇게나 고생하면서 살고 있나? 객관적으로 볼 때 내 처지가 그리 편안하거나 품위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석사 학위를 끝낸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새삼 시작한 공부는 정말이지 힘에 부친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영어도 논문도 너무 어렵다. “과연 끝까지 할 수 있을까, 내가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괴로운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내가 소속된 글래스고대학 문화정책센터의 다른 박사과정 학생들은 대부분 석사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석사 후 대학 연구원이나 대학 강사로 일하다가 박사 과정에 진학한 경우다. 그러니 이 친구들의 연구 속도는 나보다 월등히 빠르다. 나는 공부하는 방법도 잘 모르지, 논문 주제도 제대로 못 잡았지, 선행 연구해놓은 것도 없지, 설상가상 아이들 때문에 오후 3시20분이면 세상없어도 하던 일 접고 집으로 가야 한다. 그러니 연구가 동료들에 비해 뒤처질 수밖에 없다. “공부는 내가 하는 것이고, 논문도 내가 써야 한다. 그러니 내 경쟁상대는 남이 아닌 내 자신이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어보지만 같은 시기에 박사과정을 시작한 동료들이 연구주제를 잡고, 현지 조사를 나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절로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언어 문제도 아직은 힘겹다. 이제 기본적인 의사소통이야 얼렁뚱땅 하지만, 돌발 상황이 터졌을 때가 문제다. 갑자기 아이가 아프거나, 부엌에서 가스 냄새가 나거나, 어제까지 잘되던 무선인터넷이 작동을 안 하거나 하면 무척 곤란해진다. 원래 나는 한국에 있을 때도 전구 하나 갈아 끼우지 못하는 구제불능 기계치(痴)였다. 그런가 하면 동네 밖에서는 운전을 못하는 심각한 길치였다. 공과금을 내거나, 세차를 하거나, 심지어 전동칫솔의 건전지 갈아 끼우는 일까지 남편이 알아서 했다. 나는 그저 남편에게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으니 해결해달라고 말만 하면 끝이었다. “희찬이네는 아빠가 살림 다 하잖아.” 동네 아줌마들이 이렇게 말할 정도로 나는 일상에서 부딪치는 소소한 문제들에 젬병이었다. 그러니 한국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무선인터넷 결함을 영국 인터넷회사에 전화로 설명하는 건 조금 과장해서 아이 업고 지리산 올라가는 일만큼이나 버거웠다. 하지만 이제는 영어가 좀 는 건지, 아니면 뻔뻔해진 건지(아마도 후자겠지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전화에다 손짓발짓 해대며 설명을 하고, 또 그러면 대개 내 뜻이 상대방에 전달되곤 한다. 툭하면 멎어버리는 우리 집 무선인터넷도 그런 방식으로 전화를 붙들고 고쳤다.

춥고, 궁금하고, 불편하지만

날씨도 이곳 생활의 복병이라면 복병이다. 영국, 아니 스코틀랜드는 원래 1년의 절반 이상이 겨울인 지역이다. 특히 지난겨울의 스코틀랜드는 1962년 이래 가장 추웠다. 원래 유학생은 첫 겨울이 가장 추웠다고 기억하기 마련인데, 나는 정말 첫 겨울이 무진장 추웠다. 라디에이터 시스템으로 난방을 하는 영국의 주택은 난방을 세게 틀어봤자 미적지근한 온기가 느껴지는 정도다. 한국처럼 뜨끈뜨끈한 마룻바닥과 훈훈한 온기는 아예 기대할 수 없고, 설령 그런 난방이 가능하다 쳐도 난방비가 워낙 비싸서 그런 호사를 누리기 어렵다. 지난 겨울, 아이들이 잠든 후 컴퓨터를 사용하다보면 금방 손가락이 얼어서 뻣뻣해지곤 했다. 이런저런 기억을 되짚어보면, 나는 영국에서 고생스럽게 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정작 나는 고생스럽다는 생각을 거의 안 하고 산다는 사실이다. 정말로 이곳 생활은 한국에서 짐작하는 것에 비해 그리 고단하지 않다. 말이 안 통하는 것도, 사흘 중에 이틀은 비가 오거나 날이 흐린 것도, 집 앞 마트에서 김밥이나 순대를 사먹을 수 없는 것도 모두 익숙해졌다. 아이들이 가끔 한국에서 먹던 갈치구이나 오징어튀김을 그리워하지만, “못 구하는 음식을 무슨 수로 해주냐”는 엄마의 무정한 대답이 먹혀들었는지 요즘은 갈치 구워내란 소리도 더는 하지 않는다.

요컨대 영국에서의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하다. 그리고 그 단순하고 소박한 삶에서 행복하다는 느낌이 자주 든다.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리 많은 조건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여기서 새삼 깨달았다고 할까. 말이 좀 통하지 않는 게 불편하고, 보고 싶은 사람이나 먹고 싶은 음식이 있지만 영국에서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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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경│작가 winniejeo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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