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호

내 인생의 봄날

  • 전원경│작가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10-05-03 18:2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내 연재를 읽은 지인들의 반응이 대체로 “고생이 많다” “짠하다”인 걸 보면, 글에 담긴 내 모습이 객지에서 혼자 어린아이 둘 데리고 사느라 고군분투하는 불쌍한 아줌마인 모양이다. 공부를 끝까지 해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나는 단순하고 소박한 지금의 생활이 행복하다.
    내 인생의  봄날
    내가 그렇게나 고생하면서 살고 있나? 객관적으로 볼 때 내 처지가 그리 편안하거나 품위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석사 학위를 끝낸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새삼 시작한 공부는 정말이지 힘에 부친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영어도 논문도 너무 어렵다. “과연 끝까지 할 수 있을까, 내가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괴로운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내가 소속된 글래스고대학 문화정책센터의 다른 박사과정 학생들은 대부분 석사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석사 후 대학 연구원이나 대학 강사로 일하다가 박사 과정에 진학한 경우다. 그러니 이 친구들의 연구 속도는 나보다 월등히 빠르다. 나는 공부하는 방법도 잘 모르지, 논문 주제도 제대로 못 잡았지, 선행 연구해놓은 것도 없지, 설상가상 아이들 때문에 오후 3시20분이면 세상없어도 하던 일 접고 집으로 가야 한다. 그러니 연구가 동료들에 비해 뒤처질 수밖에 없다. “공부는 내가 하는 것이고, 논문도 내가 써야 한다. 그러니 내 경쟁상대는 남이 아닌 내 자신이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어보지만 같은 시기에 박사과정을 시작한 동료들이 연구주제를 잡고, 현지 조사를 나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절로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언어 문제도 아직은 힘겹다. 이제 기본적인 의사소통이야 얼렁뚱땅 하지만, 돌발 상황이 터졌을 때가 문제다. 갑자기 아이가 아프거나, 부엌에서 가스 냄새가 나거나, 어제까지 잘되던 무선인터넷이 작동을 안 하거나 하면 무척 곤란해진다. 원래 나는 한국에 있을 때도 전구 하나 갈아 끼우지 못하는 구제불능 기계치(痴)였다. 그런가 하면 동네 밖에서는 운전을 못하는 심각한 길치였다. 공과금을 내거나, 세차를 하거나, 심지어 전동칫솔의 건전지 갈아 끼우는 일까지 남편이 알아서 했다. 나는 그저 남편에게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으니 해결해달라고 말만 하면 끝이었다. “희찬이네는 아빠가 살림 다 하잖아.” 동네 아줌마들이 이렇게 말할 정도로 나는 일상에서 부딪치는 소소한 문제들에 젬병이었다. 그러니 한국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무선인터넷 결함을 영국 인터넷회사에 전화로 설명하는 건 조금 과장해서 아이 업고 지리산 올라가는 일만큼이나 버거웠다. 하지만 이제는 영어가 좀 는 건지, 아니면 뻔뻔해진 건지(아마도 후자겠지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전화에다 손짓발짓 해대며 설명을 하고, 또 그러면 대개 내 뜻이 상대방에 전달되곤 한다. 툭하면 멎어버리는 우리 집 무선인터넷도 그런 방식으로 전화를 붙들고 고쳤다.

    춥고, 궁금하고, 불편하지만

    날씨도 이곳 생활의 복병이라면 복병이다. 영국, 아니 스코틀랜드는 원래 1년의 절반 이상이 겨울인 지역이다. 특히 지난겨울의 스코틀랜드는 1962년 이래 가장 추웠다. 원래 유학생은 첫 겨울이 가장 추웠다고 기억하기 마련인데, 나는 정말 첫 겨울이 무진장 추웠다. 라디에이터 시스템으로 난방을 하는 영국의 주택은 난방을 세게 틀어봤자 미적지근한 온기가 느껴지는 정도다. 한국처럼 뜨끈뜨끈한 마룻바닥과 훈훈한 온기는 아예 기대할 수 없고, 설령 그런 난방이 가능하다 쳐도 난방비가 워낙 비싸서 그런 호사를 누리기 어렵다. 지난 겨울, 아이들이 잠든 후 컴퓨터를 사용하다보면 금방 손가락이 얼어서 뻣뻣해지곤 했다. 이런저런 기억을 되짚어보면, 나는 영국에서 고생스럽게 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정작 나는 고생스럽다는 생각을 거의 안 하고 산다는 사실이다. 정말로 이곳 생활은 한국에서 짐작하는 것에 비해 그리 고단하지 않다. 말이 안 통하는 것도, 사흘 중에 이틀은 비가 오거나 날이 흐린 것도, 집 앞 마트에서 김밥이나 순대를 사먹을 수 없는 것도 모두 익숙해졌다. 아이들이 가끔 한국에서 먹던 갈치구이나 오징어튀김을 그리워하지만, “못 구하는 음식을 무슨 수로 해주냐”는 엄마의 무정한 대답이 먹혀들었는지 요즘은 갈치 구워내란 소리도 더는 하지 않는다.

    요컨대 영국에서의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하다. 그리고 그 단순하고 소박한 삶에서 행복하다는 느낌이 자주 든다.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리 많은 조건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여기서 새삼 깨달았다고 할까. 말이 좀 통하지 않는 게 불편하고, 보고 싶은 사람이나 먹고 싶은 음식이 있지만 영국에서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요즘 우리 가족의 일상은 이렇다. 오전 7시20분쯤 일어나 아이들을 깨워 토스트와 과일, 시리얼을 먹이고 학교 갈 준비를 한다. 봄이 된 이후로 스코틀랜드의 낮이 부쩍 길어져 7시만 지나면 온통 환하다. 8시10분이면 희찬이가 교복을 입고 집을 나선다. 보통 영국의 초등학생들은 집 근처 학교에 다니지만, 희찬이는 외국인 특별학교에 다니는 터라 매일 아침 글래스고 시의회에서 무료로 보내주는 미니버스를 타고 학교에 간다. 희찬이가 학교에 간 뒤에 희원이를 씻기고 옷을 입혀서 차에 태워 유치원으로 향한다. 언덕배기에 있는 유치원 마당에는 비 오는 날이면 가끔 커다란 개구리들이 앉아 있어 나를 혼비백산하게 만든다. 희원이를 유치원에 데려다놓고 다시 집에 와 차를 주차장에 두고, 나는 걸어서 연구실로 향한다. 500년이 넘은 글래스고대학에는 주차장 공간이 충분치가 않아서 나는 늘 20분쯤 걸어서 학교에 간다. 비가 오거나 거센 바람이 부는 날이면 20분의 등굣길이 그야말로 악전고투지만,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날에는 무척 즐겁다. 맑은 하늘에는 예쁜 구름이 가볍게 흘러가고 길가에 수선화와 이름 모를 들꽃들이 무더기로 피어 한들거린다. 연구실 문을 밀고 들어서면 드디어 내 자리로 왔다는 충족감이 살며시 나를 감싼다.

    봄바람이 분다

    학교만 아니라 오래된 도시 글래스고 시내는 대부분 주차 공간이 부족하다. 한국에 비해 대중교통이 그리 잘되어 있는 편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교통비가 비싸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20~30분 거리는 으레 걸어 다닌다. 나 역시 웬만한 거리는 걷는 게 일상이 됐다. 운동화를 신고 걸어 다니다보니 한국에서 나를 괴롭히던 요통도 사라졌다.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정형외과 신세를 졌고, 의사로부터 “빨리 디스크 수술하는 게 그나마 고생 덜하는 길”이라는 말도 듣곤 했는데 말이다.

    오후 4시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을 데리고 집 근처 클라이드 강변으로 산책을 가거나, 이웃동네 놀이터에 갈 때도 당연히 걸어간다. 놀이터에 있으면서 비슷한 처지의 주부들이나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할머니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곳에서는 좀체 보기 어려운 동양인 아줌마가 신기해서인지, 스코틀랜드 아줌마와 할머니들은 내 이야기를 고개 끄덕이며 열심히 들어준다. 소리 없이 내리는 부슬비를 맞으면서 돌아오는 길에 집 근처 마트에서 다음날 먹을 우유와 식빵을 사거나 공립도서관에 들러 한두 권의 책을 빌린다. 어느새 하늘을 가득 물들인 주홍빛 노을을 바라보며 아이들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이 소박한 생활이 나는 정말로 좋다. 더구나 그 춥던 겨울도 지나가고 봄바람이 부는데 더 이상 무얼 바랄까 싶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는 자의든 타의든 짊어져야 하는 짐이 많았다. 꽤 오랫동안 여러 직장에서 여러 직책으로 얽혀 있었고, 아이들의 엄마 노릇, 글 쓰는 일, 크고 작은 집안일이 끝이 없었다. 희찬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학부형 노릇이 예상외로 큰 부담이었다. 학부모 모임이나 친구 생일 파티, 학교 운동회, 학원 보내기 등 무슨 일이 그렇게나 많은지,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 엄마는 아이 매니저로 전락한다는 말이 절로 실감났다.

    그 모든 부담에서 멀리, 아주 멀리 떨어진 지금은 그저 내 공부와 두 아이에게만 집중하면 되는 단순한 생활의 연속이다. 희찬이의 학교생활도 단순하기는 마찬가지다. 잉글랜드와 달리 스코틀랜드의 초등학교에는 시험이 없다(잉글랜드 초등학생은 6학년이 되면 전국 일제고사를 치른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는 초등학교 일제고사를 시행하지 않는다. 요즘 잉글랜드의 학부모들은 스코틀랜드처럼 일제고사를 폐지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아이의 시험 성적이 얼마나 엄마를 옥죄는지, 여기에 와서 새삼 실감했다. 아이가 시험을 치지 않으니 시험성적표가 있을 리 없고, 성적 때문에 부모가 속 끓일 일도 없는 것이다. 학교 선생님과의 정기적인 면담 때는 아이가 학교에서 누구와 친한지, 무얼 잘하고 어디에 소질이 있는지, 학교 급식은 어떤 걸 잘 먹는지, 축구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럭비를 좋아하는지 같은 이야기를 주로 나눈다.

    “필립이라고 불러라”

    이곳에서의 삶이 만족스러운 또 하나의 이유는 너나 할 것 없이 나를 온전히 나로 봐준다는 점이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나를 내 영문이름인 ‘위니(Winnie)’라고 부른다. ‘선생님’이나 ‘기자님’ ‘희찬이 엄마’ ‘올케’ ‘언니’ ‘선배’라고 부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지도교수는 물론이고 연구실 동료나 아랫집 존 할아버지, 희원이의 친구 엄마 모두 나를 ‘위니’라고 부른다. 나보다 열 살 위든, 열 살 아래든, 남자든 여자든 간에, 나를 부르는 호칭은 다 똑같다.

    내 인생의  봄날

    외국인 특별학교 학예회에서 친구들과 함께 수료증을 받은 필자의 아들 희찬군(가운데).

    나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영국 사회에서는 대부분 상대를 이름으로 호칭한다. 예를 들어, BBC 10시 뉴스에서 현장에 나가있는 기자가 리포트를 마칠 때면 늘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가자 지구에서 BBC 뉴스 제레미 본이었습니다. 피오나 나와주세요.” 그러면 앵커인 피오나 브루스가 이렇게 말한다. “네, 제레미, 여기는 스튜디오입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에서 나를 내 이름으로 불러준 사람이 몇이나 있었나 생각해보면 가족이나 친구 외에는 거의 없었다. 나는 늘 이름 대신 특정한 지위나 역할로 불렸고, 그럼으로써 그 역할과 지위에 어울리는 행동을 강요당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 사람들은 내가 그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나이가 몇인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나는 그저 ‘위니’라는 한 명의 사람이다.

    나는 여기서 내 나이를 잊어버렸다. 사람이 사람을 만날 때 나이나 지위가 아닌 그 사람 자체를 보기 때문에 마음이 맞으면 나이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올해 60세를 넘긴 내 지도교수는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슐레징어 교수님”이라고 부르자 의자에서 펄쩍 뛰어오를 듯 놀라면서 ‘필립’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처음엔 어떻게 나이 많은 교수님을 이름으로 부르나 싶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교수님을 만나면 반사적으로 “하이, 필립!” 하고 인사한다. 그러면 파파 스머프 같은 인상의 교수님은 상냥하게 웃으시면서 “하이, 위니”하고 대답하신다.

    깊이 들어가보면 영국 사회에도 계급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 겉으로 보기에 이 사회가 평온하고 안정적인 것은 오히려 상류층-중간층-노동자층이라는 계급상의 차이가 굳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차기 선거에서 집권이 유력시되는 보수당의 당수 데이비드 캐머런이나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의 재무부총리인 조지 오스본 같은 경우가 그렇다. 각기 44세, 39세에 불과한 이들은 척 보기에도 이튼, 옥스퍼드 같은 최상류층 학교를 졸업하고 엘리트 가도를 밟아온 상류층 자제들이다(특히 조지 오스본은 인물까지 얼마나 잘났는지, 정치인이 아니라 영화배우를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좋은 집안 태생-‘퍼블릭 스쿨’이라고 불리는 유서 깊은 사립학교-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진학-졸업 후 변호사나 금융인, 정치인으로 성장. 이런 식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계급의 차이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바꾸어 말하자면 한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로는 타고난 계급 차이를 뛰어넘기 어렵다. 그래서 영국 사회가 더 안정되고 기복이 없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한 번도 안 울었거든!”

    내 인생의  봄날

    봄을 반기며 글래스고대 캠퍼스 곳곳에 피어난 들꽃들.

    그러나 외국인인 나로서는 이런 속사정과 별개로, 나이나 직위를 따지지 않고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 받아들여주는 영국 사회의 평등함이 기껍다. 이것저것 유용한 정보를 많이 알려줘서 내가 장난 삼아 ‘구루(guru)’라고 부르는 연구실 동료 앤디는 올해 스물아홉 살이다. 한국 사회라면 나와 그는 열한 살이라는 나이 차 때문에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나는 앤디와도, 그리고 앤디의 장모님인 캐시와도 친구다. 캐시가 내 영어작문을 교정해주는 영어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앤디에게 “너, 지도교수님 이름 부르는 거 좀 이상하지 않니? 프로페서라고 불러야 되는 거 아냐?” 하고 물었더니 앤디는 “요즘이 빅토리아 시대도 아니고, 같은 연구자끼리 대등하게 부르는 게 당연한 거지”라고 대답했다. ‘같은 연구자라고? 필립 교수님은 문화정책 분야에서 국제적인 석학인데, 그런 교수님과 내가 대등하다고 하면 교수님이 자존심 상하지 않으실까?’

    어쩌면 봄바람이 스코틀랜드에만 불어온 게 아니라 내 마음속에도 불어온 것인지 모른다. 한국에서 그저 인생의 전성기를 지난 아줌마, 아이들의 엄마였던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인생의 봄을 맞고 있는 듯싶다. 나보다 훨씬 나이 어린 학생들과 친구로 지내면서, 정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제 다섯 살인 희원이는 “희원아, 누가 네 베스트 프렌드니?”하고 물으면 “젠슨”이라고 대답한다. 젠슨은 내 친구의 남편이다. 아직 아이가 없는 젠슨 부부는 희원이를 딸처럼 예뻐한다. 희원이에게는 자기와 숨바꼭질도 하고, 인형놀이도 해주는 젠슨 아저씨가 베스트 프렌드인 모양이다. 희원이의 유치원 친구인 홀리는 나만 보면 멀리서도 “위니이이이!”를 외치면서 달려와 안긴다. 우리 식으로 보면 친구 엄마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셈인데, 이건 좀 억울하긴 하다. 아니, 내가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다섯 살짜리하고 친구하게 생겼냐고!

    얼마 전에 한국의 친구가 e메일을 보내왔다. “잘 지내니? 힘들어서 밤마다 울고 있는 거 아냐?” 나는 재깍 답장을 보냈다. “나 여기 와서 한 번도 안 울었거든!” 힘들거나 고달프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작은 일에도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다는 건 분명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나는 한국에서보다 더 행복하게 살고 있는 셈이다.

    용감한 어린이에게 축복을

    참, 며칠 전에 한번 눈물이 난 적이 있다. 희찬이가 지금 다니고 있는 외국인 특별학교가 5월 말에 문을 닫을 예정이다. 3월 마지막 금요일, 희찬이의 외국인 특별학교에서 일종의 학예회(Assembly)가 열렸다. 100여 명쯤 되는 전교생이 합창과 연극을 하고, 교장 선생님께 일일이 수료증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로 목사님이 특별히 축하말씀을 하셨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얘들아. 나는 얼마 전에 마흔아홉 번째 생일을 맞았단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에 여기서 30마일쯤 떨어진 내 고향 마을에서 글래스고대학교로 유학을 왔단다. 나는 난생 처음 글래스고에 오는 길이었고 그 30마일을 기차로 달려오는 동안 너무너무 두려웠단다. 30마일을 달려오기 위해서 정말 큰 용기가 필요했단다. 그런데 너희들은 나보다 훨씬 더 용감한 아이들이구나. 너희들은 열아홉 살인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몇 백, 몇 천 마일이 넘는 길을 달리거나 날아서 여기까지 왔으니 말이다. 너희들은 스스로가 얼마나 용감한 어린이인지 상상도 못 할 거야. 그러니 이제 이 학교를 떠나서 글래스고 각지에 있는 다른 학교로 돌아가더라도 용기 있게, 그리고 이 학교에서 했던 것처럼 훌륭하게 학교생활을 잘해나가리라고 믿는다. 너희 모두에게, 그리고 학예회를 보러 와주신 모든 학부모님에게 평화가 함께하길 바랍니다.”

    내 인생의  봄날
    전원경

    1970년 출생

    연세대, 런던 시티대 대학원(석사) 졸업

    월간 ‘객석’, ‘주간동아’ 기자

    저서 : ‘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 ‘짧은 영광, 그래서 더 슬픈 영혼’ ‘역사가 된 남자’ 등

    現 영국 글래스고대 문화정책 전공 박사과정 재학 중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축도를 들으면서 나는 잠깐 울었다. 교장선생님인 미세스 브라운과 희찬이 담임선생님인 미세스 레슬리도 그 순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목사님의 소박한 축도대로, 희찬이를 비롯한 이 용감한 아이들이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