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환’은 실패한 아들의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아버지의 인자한 표정을 잘 포착하고 있다.
가끔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런 사연을 전하는 MC의 말이 흘러나왔다. 7080세대가 주로 듣는 프로그램이니 자연스럽긴 한데, 그 자연스러움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낮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점심을 먹는데, 친구가 ‘엄친아’였던 자신의 아들 얘기를 한다.
“나름 공부를 잘했잖아? 그런데 OO대학밖에 가지 못했어. 그랬더니 남편은 아들을 쳐다보려고도 안 해.”
“너는?”
친구가 긴 한숨을 쉬며, 멋쩍게 웃으며 말한다.
“한숨 나오지. 더구나 학부형 모임에 가면 모두 여전히 엄친아를 둔 엄마들인데….”
“거기 안 가면 되잖아!”
“응?”
내 씨 박힌 말에 친구가 놀란다. 참 많다. 대입문제로 아들에게 실망하는 아버지가, 딸에게 실망하는 어머니가.
자식에 대한 욕구불만은 자기에 대한 불만이다. “네가 내 아들인데 겨우 그 대학밖에 못 가다니” 하는 이상한 탄식으로 주문을 거는 아버지가 힘이 있는데 아들이 어떻게 그 대학에서 인생의 밑거름이 될 정신의 양식을 제대로 거둘 수 있겠는가. “네가 내 딸인데 겨우 그것밖에 안되다니” 하며 저주인 줄도 모르고 저주를 퍼붓는 어머니가 힘이 있는데 딸이 어떻게 기진맥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데 겨우 이곳, 여기라니’ 하며 자괴감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눈을 뜨고 자기인생을 설계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과거 대단했던 실력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대책 없는 폭력에 당하는 것이다. “우리 집안에 너 같은 사람은 없다”는 잔인한 말은 잘난 집안의 말이 아니라 콤플렉스의 말이다. 자식을 망치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들을 망치고 스스로를 망치는.
나는 그런 학생을 많이 알고 있다. ‘무의식과 마음의 상처’라는 과목을 개설하고 보니 왜 그렇게 상처 입은 학생을 많이 만나게 되는지.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해 기가 죽어 있는 청년들! 참 많은 청년이 가장 가까운 부모에게서 참 많은 상처를 받고 산다.
수업시간에 늘 앞자리에 앉는 성실한 학생이 있었다. 수업을 진지하게 듣지만, 질문을 던지면 당황하며 고개를 숙이는 소심한 학생이었다. 선생을 오래 하다 보면 할 말이 없어 대답을 못하는 건지, 당황해서 논리를 구성하지 못하는 건지, 소심해서 자기를 보여주지 못하는 건지 알게 된다. 선생이 어떤 논리를 구성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또 다른 논리구성력에서만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표정, 눈빛, 몸짓이 모두 언어다.
그 성실하고 소심한 학생이 학기 말에 내 연구실을 찾았다. 노크 소리를 듣고 들어오라고 했는데도, 뜸을 들이더니 겨우 연구실의 문을 빼꼼히 연 것이다. 아마 문 앞에서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하다가 어렵게 찾은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