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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액션 영화배우 열전 ③

매혹적인 얼굴 뒤에 숨은 심연과 고독 신성일

도시 뒷골목을 누비던 청춘, 처진 어깨 무력한 눈빛의 사내가 되다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매혹적인 얼굴 뒤에 숨은 심연과 고독 신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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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먹 잘 휘두른다고 해서 아무나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좋은 배우는 카메라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영화 속 캐릭터 그 자체가 된다. 신성일이 그랬다.
  • 번듯한 외모와 젠체하는 말투에 가려졌지만, 그는 인물의 감춰진 심연과 고독을 그 누구보다도 잘 표현하는 연기자였다.
  • 흔들리는 눈동자와 번들거리는 땀방울로 청춘의 우수와 중년의 비루함을 두루 드러냈던, ‘미남 배우’그 이상을 성취한 ‘한국의 알랭 들롱’ 신성일을 추억한다.
매혹적인 얼굴 뒤에 숨은 심연과 고독 신성일

젊은 시절 잘생긴 외모로 승부를 건 신성일은 연기 경력을 쌓아가며 차차 원숙한 배우로 성장했다.

‘프랑스에 알랭 들롱이 있다면 한국에는 신성일이 있다.’ 한국 영화계에서 영화배우 신성일을 한마디로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20여 년 전 이 말을 영화계 선배들에게서 들었을 때 나는 1960년대를 풍미한 프랑스 최고 미남 배우에 빗대어 ‘같은 시대를 풍미한 한국 최고의 미남 배우는 신성일’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생각했다. ‘최무룡도 신성일에 뒤지지 않는 미남인데 왜 알랭 들롱에 맞서는 인물로 이야기되지는 않지?’ 하는 생각도 했다. 알랭 들롱이 출연한 영화 중 인상 깊은 영화가 거의 모두 범죄 스릴러 영화였던 데 비해 신성일은 멜로 영화에 많이 출연한 배우라는 인상을 갖고 있어서 두 배우의 비교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내가 가진 신성일에 대한 기억은 두 가지다. 하나는 초등학교 5학년 무렵 동네 극장에서 본편 시작 전에 상영한, 신성일 주연의 제목이 기억 안 나는 영화 예고편이다. 인기 가수가 노래하는 주제가가 나오면서 예고편이 시작되면, 당시 꿈에서나 볼 것 같은 빨간 스포츠카를 운전하는 신성일의 모습이 등장한다. 큼지막한 영화 제목이 화면 위에 뜨고, 고개 숙인 신성일의 수심이 가득한 얼굴 위로 눈물인지 빗물인지 줄줄 흐르고, 그 반대편에 선 여자도 비를 맞으며 울고 있다. 제목이 사라지고 뒤이어 두꺼운 붓으로 힘차게 휘갈겨 쓴 ‘사랑’이라는 글자가 뜨면, 여자와 신성일은 뚝섬의 아름드리 나무 사이를 달린다. 강 건너 잠실의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눈부신 역광으로 연인들을 비추고, 연인들은 나무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 키스를 하고는 껴안고 뒤엉켜 풀밭 위를 뒹군다. ‘사랑’이란 글자가 사라지면 ‘갈등’이란 글자가 휘몰아치듯 화면 위로 뜨고 신성일과 또 다른 잘생긴 남자 배우, 남궁원이라든지, 이대엽 같은 배우가 서로 마주서서 노려보고 있다. 그러고는 곧 뒤엉켜 주먹을 교환한다. 그들이 싸우는 장면의 배경은 해변의 모래밭이거나 갯벌이고, 수평선 너머로 석양이 물들고 있다. 두 남자가 엉켜서 한 번씩 주먹을 주고받으며 넘어지기를 반복하다 다시 새로운 글자가 뜬다. ‘이별.’ 여자가 눈물을 흘리고 비가 내린다.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삼키던 신성일이 여자를 남겨두고 천천히 돌아서서 걷는다. 그리고 뜨는 글자.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어린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랑 갈등 이별이라는 자막이 영화의 전체 스토리를 가늠하게 해주는 것과 여자를 홀로 두고 떠나는 수심이 가득한 신성일의 얼굴이었다.

여자들만 흠모하는

두 번째 기억은 1970년대 중반, 당시 소년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미녀 여배우들이 나오는 영화에 항상 나오던 중년의 화가·대학교수 또는 시인, 신성일이다. 장미희 정윤희 유지인 안인숙. 그들이 출연하는 멜로 영화를 보는 것은 또래의 아이들은 모르는 비밀스러운 어른의 세계를 엿본 것 같은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학교 지도부 선생들과 극장 안에 기생하는 양아치들의 무서운 눈길을 피해 보았던 ‘별들의 고향’ ‘속(續) 별들의 고향’ ‘겨울 여자’ 모두에서 신성일은 아름다운 여배우의 상대역으로 나왔다. 그는 ‘겨울 여자’에서 젊고 아름다운 장미희와 연애를 하는 중년 남자였고, ‘별들의 고향’에서는 역시 젊고 아름다운 안인숙과 사랑을 하는 중년 화가였다. 1970년대의 멜로 영화에서 신성일은, 젊고 싱그럽지만 자신의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병들어가는 여자들을 위로하거나 그들의 몰락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중년 남자였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신성일은 울고 있는 여자를 두고 돌아서서 심각한 얼굴로 떠나가는 젊은 남자이거나, 젊고 아름다운 여배우들의 상대역으로 나오는, 김추련이나 백일섭같이 그녀들을 몰락시키는 악마 같은 남자들에 비해 양심적이기는 하지만 무기력한 중년의 지식인 남자였던 셈이다.

나는 그가 사내다운 매력을 물씬 풍기는 액션 영화배우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신성일은 여자들이 좋아하고 흠모하는, 한마디로 남자들은 보지 않는 영화에 나오는 배우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내게 한국 남자 영화배우는 장동휘 박노식 이대근 같은 투박하기 짝이 없는 액션 배우들이 전부였다. 멜로 배우인 신성일에게는 관심도 없고 그가 출연하는 영화를 본 것도 거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제3부두 고슴도치’(이혁수 감독, 1977)라는 영화를 보게 됐다. 어린 시절 저녁 때면 나와 동생들을 라디오에 귀 기울이게 만든, TBC 라디오의 인기 연속극 ‘목격자 시리즈’ 중 한 에피소드를 영화로 만든 것이고, 당시 ‘김두한 시리즈’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신세대 액션 배우 이대근이 주연을 맡았다. 박노식과 장동휘의 시대가 가면서 떠오른 새로운 액션 스타 이대근은 1974년 ‘김두한’(김효천 감독)으로 등장한 액션 영화의 새로운 바람이었다. 그의 팬이었던 나는 개봉관 스카라극장으로 달려갔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이대근은 걸쭉한 부산 사투리를 쉴 새 없이 지껄이며 천방지축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주먹을 휘둘러대기 시작했는데, 고슴도치라는 별명을 지닌 이대근 앞에 나타난 살모사라는 정체불명의 사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여자를 울리고 심각한 얼굴로 돌아서던 남자, 신성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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