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호

꿈꿨기에 불행했던 이카루스의 지친 뒷모습 최무룡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입력2011-06-22 09: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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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생겼다. 연기도 잘했다. 연출력은 뛰어났고 영화를 향한 열정은 끓어 넘쳤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았다.
    • “운명의 근본은 무엇인가? 인생의 해석은 또 무엇인가? 신이여.
    • 우리 주먹으로 해결하자!” 영화 속 주인공의 입을 빌려 토해낸 최무룡의 분노는 결국 그의 생을 갉아먹었다. 40대 한창 나이에 스크린에서 외면당하고 변두리 재개봉관에서 쇼 공연을 하던 영화 천재의 쓸쓸한 눈빛, 몰락한 풍운아의 처져 있던 어깨를 추억한다.
    꿈꿨기에 불행했던 이카루스의 지친 뒷모습 최무룡

    최무룡, 신성일, 윤정희, 문희 등 당대의 톱스타들이 주연을 맡아 화제를 모은 영화 ‘두 아들’(1970). 최무룡은 엘리트 검사 장남 역을 맡아 큰 인기를 끌었다.

    1975년 어느 날이었다. 서울역 뒤편, 서부역 근처의 봉래극장에 홍콩 무술영화를 보러 들어간 나는 말로만 듣던 ‘쇼도 보고 영화도 보고’를 만나게 됐다. 당시 서울의 재개봉관에서는 영화만 상영한 것이 아니라, 남진 나훈아 같은 가수와 최무룡 김희라 박노식 같은 배우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한두 곡씩 부르는 쇼프로가 드문드문 있었다. 이런 날이면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보다 가수와 영화배우의 노래를 듣고 직접 얼굴을 보기 위해 오는 사람이 더 많았다. 동시상영관이던 봉래극장에는 그날따라 관객이 꽤 많았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를 직접 보게 됐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오직 이소룡과 왕우만을 좋아하는 열혈 홍콩 무술영화광이어서 객석을 채운 사람들의 쇼를 기다리는 벅찬 심정은 몰랐고, 빨리 쇼프로가 끝나고 영화가 상영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환하게 밝혀진 무대에 누군가 등장했다. 최무룡이었다. 밴드의 전주가 시작됐고, 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기억 속에 그날 최무룡은 노래를 상당히 잘 불렀지만 몹시 지쳐 보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무렵의 최무룡은 거의 영화를 찍지 않고 있었다. 1972년에만 해도 20여 편에 달하던 출연작이 1973년 8편으로 줄더니 1974년에는 한 편도 없었고, 1975년에는 단 두 편의 영화에만 출연했다. 1976년 ‘보통여자’(변장호 감독) 단 한편에 출연한 최무룡은 이후 1987년 그의 마지막 감독 작품을 찍기까지 영화계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다. 1970년대 중반 최무룡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는 왜 그렇게 지쳐 보였을까?

    한국의 제임스 딘

    한 사나이가 지하수로를 달리고 있다. 그 사나이는 조금 전 은행을 털고 복개공사 중인 청계천의 어두컴컴한 지하수로의 썩은 물을 첨벙첨벙 밟으며 경찰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다. 퇴역군인인 그는 일자리를 얻으러 돌아다녔다. 아무리 다녀도 일할 곳은 없다. 답답한 가슴을 안고 대폿집에 들어가 술 한 잔을 한다. 술집에 들이닥쳐 깽판을 치는 상이군인들. 손목부터 잘려나간 팔에 쇠갈고리를 달고 사람들을 위협하는 그들은 바로 사나이와 함께 참전했던 동료들이다. 사나이는 고개를 숙인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된 걸까? 뱃속 저 아래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 분노 때문에 그는 은행을 털었고, 그 결과 시궁쥐가 우글거리는 컴컴한 지하수로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리기를 멈춘 사나이. 어디선가 아기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지하수로에 아기 울음소리라니, 환청인가? 사나이는 소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점점 더 크게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 어두컴컴한 지하수로의 시멘트 기둥 사이로 뭔가 허연 물체가 보인다. 그 앞으로 달려간 사나이는 얼어붙고 만다. 아기를 업은 젊은 여인이 시멘트 기둥에 목을 매 자살했던 것. 사나이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그의 눈은 절망으로 가득 찬다. 배우 최무룡을 처음 내 머릿속에 각인시킨 영화 ‘오발탄’(유현목 감독, 1961)의 청계천 지하수로 시퀀스다.

    1980년대 중반 영상자료원에서 ‘오발탄’을 처음 봤을 때, 같이 영화를 본 친구는 양공주로 전락해 밤거리를 헤매는 누이동생과 그를 사랑했던 윤일봉의 미래를 가슴 아파했다. 하지만 나는 최무룡이 준 강렬한 인상에 취해 비틀거리며 한겨울 매서운 바람이 부는 서초동 거리를 걸었다.



    1956년 최무룡은 자신의 재능을 빛내줄 수 있는 감독과 조우한다. 유현목이다. 데뷔작 ‘탁류’(이만흥 감독, 1954)에서 조연으로 출발해 다섯 번째 작품 ‘유전의 애수’(유현목 감독, 1956)를 촬영한 뒤, 그는 어지간히 감독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유 감독과 처음 작업한 ‘유전의 애수’가 비평적으로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도 다음 작품에서 같이 일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유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이며, 8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최무룡의 여섯 번째 작품은 ‘잃어버린 청춘’(1957)이다. 제대군인인 주인공 최무룡은 셋방 얻을 돈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뜻하지 않은 살인을 하게 돼 경찰에 쫓기는 범죄자가 된다. 필름이 사라져 이제는 볼 수 없는 이 영화에 대해 당시 신문은 ‘대단한 열연이었다’는 찬사를 보냈다. ‘오발탄’의 청계천 지하수로 장면을 보고 ‘잃어버린 청춘’의 연기를 유추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쉽지만, 최무룡은 범죄를 저지르고 쫓기는 남자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낸 그 연기로 배우로서 인정받는다. 당시의 신문기사는 최무룡을 할리우드의 제임스 딘과 비교하며 절망에 찬 우울한 청춘의 표상이라 칭찬한다.

    1959년. 최무룡은 25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다음해에는 23편, 그 다음해에도 23편. 한 해 2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하는 최고 전성기였다. 바로 그 시기에 그는 스캔들에 휩싸인다. 모두 아는 최무룡 김지미 간통 사건. 이 일로 최무룡은 구치소에 수감되고 전처와 이혼한 후 김지미와 결혼한다. 간통 사건이 있었지만, 그의 인기에는 별 영향이 없었고 전과 다름없이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건재를 과시한다. 김지미와 새로운 살림을 차리고 모든 것을 얻은 최무룡의 가슴속에서 새로운 욕망이 꿈틀거리며 솟아난다. 감독이 되고픈 것이다. 이미 유현목 감독과 함께 ‘잃어버린 청춘’을 제작했던 그는 배우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제작·감독까지 겸하고 싶어했다.

    분노와 광기

    꿈꿨기에 불행했던 이카루스의 지친 뒷모습 최무룡

    최무룡이 좌·우익이 대립하던 6·25 전쟁 중 서울에서 비극적 죽음을 맞는 인물을 연기한 1966년 작 ‘잃은 자와 찾은 자’의 한 장면.

    결국 1965년 일을 저지른다. 감독·제작을 겸한 영화 ‘피어린 구월산’을 만든 것이다. 자신이 주연까지 하고픈 유혹을 이겨내고 신영균과 장동휘, 박노식 등 당대의 스타를 총출동시켜 만든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시나리오가 표절 시비에 휩싸였고, 감독 역량이 부족한 실패작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이듬해 최무룡은 절치부심 대단한 영화를 만들어내는데 그의 세 번째 작품이며 자존심과 트라우마, 분노가 고스란히 담긴 걸작 ‘나운규 일생’이다.

    산언덕에 위치한 카메라가 먼 아래 해변을 보여준다. 해변에는 한 남자가 서 있다. 다음 장면은 해변에 서 있는 남자의 정면. 나운규로 분한 최무룡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카메라 프레임을 만들어 풍경을 바라본다. 나운규의 손가락 프레임 안으로 오몽녀와 한 남자가 들어온다. 그들은 나운규의 마지막 작품 ‘오몽녀’의 출연 배우들이다. 나운규의 손가락 프레임 안에서 그들은 연기를 시작한다. 쇼트가 바뀌면서 영화 속 장면이 실연되고, 그들의 감정이 고조될 무렵 미친 듯이 연기를 지시하는 나운규의 허벅지까지 파도가 밀어닥친다. 나운규는 가슴까지 차오르는 바닷물에도 아랑곳 않고 연기를 지시한다. 영화감독의 광기와 집념이 고스란히 표현된 멋진 장면이다. 물속에서 허우적대다 쓰러진 나운규를 배우들이 해변으로 끌어내면서 카메라는 다시 산언덕으로 올라가 장면을 마무리한다.

    이 장면을 보는 내내 나는 숨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조강지처 아내와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하는 병든 어린 딸을 냉혹하게 외면하고 동가식서가숙 장안의 기생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무의미하게 인생을 방기하는 삶. 그것은 자신의 영화를 검열해 가위질하는 숨 막히는 현실에 대한 자학적인 저항의 모습이다. “어차피 아쉽게 끝날 운명. 어차피 아쉽게 끝날 영화. 어차피 아쉽게 끝날 사랑”이라며 자신의 생명과 재능을 낭비해버리는 삶을 택한 나운규는 폐병으로 고통스러워하며 신(神)에게 묻는다. “운명의 근본은 무엇인가? 인생의 해석은 또 무엇인가? 신이여. 우리 주먹으로 해결하자!”

    나운규의 모습을 빌려 최무룡은 군사독재의 서슬 퍼런 검열과 자신에 대한 저평가에 대해 분노한다. 나운규의 영화에 대한 집념과 광기로 숨 막히는 영화의 클라이맥스. 피를 토하고 혼절해서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받고 누워 있는 병실에서도 나운규는 “진행! 진행! 내일 촬영 준비는?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영화를 끝내고 싶다”며 기어이 일어나 ‘오몽녀’를 촬영하기 위해 촬영장으로 들어서서는 “이 나운규의 생명을 절약합시다” 소리치고 ‘레디 고’를 외쳐 영화의 라스트 장면을 찍고 “내 가슴이 뽀개진다”면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숨을 거둔다.

    영화의 라스트. 완성된 ‘오몽녀’가 극장에 걸리고 극장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극장 앞 도로를 가득 메운 수천의 관객, 표를 사려고 줄을 선 수많은 관객 옆 도로에 나운규의 영정을 든 장례행렬이 지나간다. 자신의 목숨을 불살라 하얗게 타버릴지라도 자신이 만든 영화를 많은 사람이 보았으면 하는 영화감독의 욕망. 그것은 나운규의 열망이었고, 최무룡의 열망이기도 했다.

    저평가된 명장

    걸작 ‘나운규 일생’을 만든 이후 최무룡은 액션 영화를 한 편 만드는데 그것이 ‘제삼지대’(1968)다. 영화가 시작되면 울퉁불퉁한 돌덩이가 화면에 가득 찬다. 물론 진짜 돌덩이가 아니라 스티로폼을 깎아 그 위에 색칠한 가짜 바위이긴 하지만 그다지 조악해 보이지는 않는다. 카메라가 서서히 뒤로 빠지며 화면 안으로 세 개의 돌덩이가 더 드러난다. 돌을 깎아 만든 한자 영화 제목 제삼지대! 타이틀 시퀀스가 끝나면 어디선가 날아온 잭나이프가 나무에 박히고, 잭나이프를 피해 고개를 숙여 화면 아래에 있던 박노식이 몸을 일으키며 액션 신이 시작된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대여섯 명의 악당을 노려보는 박노식의 앙각(仰角) 바스트 샷으로 신을 열고 카메라는 박노식의 액션을 나눠 찍지 않고 한 호흡으로 멀리서 길게 찍어낸다. 어라. 최무룡은 액션신도 잘 찍는 걸! 박노식이 악당들을 모두 처치하자 다시 카메라는 액션신의 첫 화면과 같은 앵글로 돌아와 땀에 젖은 박노식의 앙각 바스트 샷으로 마무리된다. 신의 열림과 닫힘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이 엿보이는 첫 액션 신이다.

    자기 이름을 당시 화제를 모으며 등장한 모노레일에서 딴 ‘모노레로 박’이라 하며 허세를 부리고 술을 마시기 위해 싸움질을 하고, 사람을 패야 밥이 나오고, 주먹질을 해야 잠자리가 생긴다며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박노식에게는 동경대를 다니며 김지미와 사랑을 약속한 지식인 동생 최무룡이 있다. 잘난 동생이 어머니에게 효도할 기회마저 빼앗아간다고 화를 내는 한심하고 극악무도한 형 박노식은 폭행 청부를 받고 사람을 찌를 때 한 치 한 푼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고 정확하게 찌른다며 호언장담하는데 그가 범죄를 저지른 현장이 공교롭게도 동생 최무룡과 김미지의 데이트 장소였다. 최무룡은 사람을 찌르고 도망친 형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형무소로 간다. 동생이 옥고를 치르는 동안 형 박노식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다며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가서 훈련을 받고 지도원이라는 감투를 쓰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까지 북에서 배운 고문 기술을 쓰는 잔혹한 짓을 저지르며 입신출세에 모든 것을 건다. 출감한 최무룡은 사랑하는 김지미가 북송선을 타고 북으로 갔다는 말에 낙심해 자신을 이름도 성도 없는 무법자라 칭하며 점점 폭력의 길에 들어서고, 급기야 민단의 고문을 지키는 요짐보(用心棒), 즉 보디가드가 된다. 이쯤 되면 관객은 박노식과 최무룡 형제의 피 튀기는 대결과 화해를 예상할 것이다. 당시 모든 영화가 그랬듯 악당 박노식은 최무룡에 의해 죽어가며 길고 긴, 그래서 하품까지 나오는 대사를 읊조리며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리라. 그런데 영화는 그렇게 진행되지 않는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마주 선 형과 아우는 대결을 하지 않고 박노식이 슬쩍 빠지면서 조총련계 야쿠자 20명과 최무룡 혼자서 대결하는 조건을 걸고 싸움이 시작된다. 20대 1의 대결은 장검을 휘두르는 액션이다. 최무룡은 그동안 검도를 익혔는지, 일본 사무라이 영화에서 영향을 받은 액션장면을 연출한다. 1960년대 말 홍콩 무협 영화 ‘방랑의 결투’(호금전 감독, 1966)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장철 감독, 1967)가 한국에 상륙해 홍콩 무협영화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최무룡은 당시 인기 있는 액션 장면을 따라 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고 자신의 취향을 따른 액션신을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이른 침몰

    꿈꿨기에 불행했던 이카루스의 지친 뒷모습 최무룡

    최무룡, 윤정희가 주연을 맡은 1971년 작 ‘미스 리’.

    20명과의 대결이 끝날 무렵 야쿠자 두목이 총을 빼들고 이때쯤 박노식이 나타나 최무룡을 구해주지 않을까 하는데,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최무룡 혼자서 야쿠자들을 모두 처치해버린다. 드디어 라스트. 도대체 어머니까지 죽었는데 박노식은 어디 간 거야? 영화 중간 조총련 내부에 민단 쪽의 첩자가 있다며 혹시 박노식이 민단 쪽 첩자였다는 것이 밝혀질까 했지만 그것도 아니다. 어머니의 무덤 앞에 앉아 있는 최무룡. 그는 이제 조총련들의 악랄한 짓을 처단하는 처단자가 될 것을 결심한다. 그것이 피를 나눈 형일지라도 자신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한다. 묘지를 나오는 최무룡 앞에 박노식이 서 있다. 박노식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냉혹하게 지나치는 최무룡. 박노식에게 다가온 형사 오지명이 그에게 앞으로 형제간에 피바람이 몰아치겠다고 하지만 박노식은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이 멀어져 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 ‘제삼지대’는 같은 시기의 액션 영화들에 비해 통속으로 빠지지 않고 설득력 있는 시나리오를 만들려고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제작자이자 감독인 최무룡이 아무리 오락 영화인 액션 영화라도 불량식품을 만들지 않으려 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뭔가 석연찮다. 박노식의 바쁜 스케줄 때문에 영화가 저렇게 이상해진 것일까? 아니면 일본 로케이션이라는 부담 때문에 박노식의 등장이 많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속편에서 둘의 대결을 그리려는 속셈인가? 다음해 이 영화의 속편 ‘흑점. 속 제삼지대’(최무룡 감독, 1969)가 만들어지지만, 아쉽게도 남아 있지 않아 영화를 볼 수 없다.

    ‘제삼지대’와 속편이 흥행에 성공했지만 최무룡은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거듭된 영화 제작과 현실 감각 없던 돈 씀씀이로 그는 빚만 짊어진 채 김지미와 이혼한다. 당시 그의 빚은 살고 있는 집과 전 재산을 다 처분해도 도저히 수습이 안 되는 정도였다고 한다. 영화감독으로서 그는 ‘서울은 만원이다’(1967) 같은 현실에 대한 고민이 담긴 영화부터 ‘지하여자대학’(1970) 같은 호스티스 영화, ‘북한’(1968)같이 정권에 밉보인 자신을 만회하려는 선전물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영화를 만들었지만, 서서히 침몰한다.

    빚더미에 오른 천재

    꿈꿨기에 불행했던 이카루스의 지친 뒷모습 최무룡

    최무룡이 영화계의 외면을 받던 시기인 1981년 윤정희와 함께 출연한 영화 ‘자유부인’의 한 장면.

    1970년 22편. 1971년 37편. 자신의 최고 전성기 때의 작품 수를 능가하는 출연횟수를 기록한다. 빚 때문이었을까? 이 무렵 최무룡은 깡패영화에 다수 출연한다. 명동 시리즈, 종로 시리즈 등등. 나는 이 시기에 그가 출연한 수많은 깡패 영화들 중 인상적인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명동 잔혹사’(1972)는 세 명의 감독이 세 명의 배우를 데리고 일제강점기, 6·25전쟁 직후, 1960년대 말 이렇게 시대를 구분해 만든 옴니버스 영화였다. 박노식, 김희라, 최무룡 세 명의 배우가 주연을 했다. 그중 최무룡이 주연한 에피소드는 다른 두 편의 에피소드를 초라하게 만드는 박력이 있다. 아름다운 여인 윤정희를 만난 깡패 최무룡. 그는 윤정희와 결혼하기 위해서라면 지옥불까지 마셔버릴 기세다. 두목을 찾아간 최무룡은 자신을 놓아달라고, 이제는 손을 씻겠다고 한다. 어찌된 일인지 두목은 순순히 그의 말을 들어준다. 다만 조건이 있다! 라이벌 깡패 집단의 두목을 살해하면 소원대로 해주겠다는 것이다. 지옥불까지 마셔버릴 기세인데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최무룡은 장검을 들고 혼자서 상대편 깡패 집단을 찾아간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던가? 최무룡의 두목은 최무룡의 행동을 배신이라 여기고 그를 처단할 생각으로 상대편 깡패두목에게 최무룡의 습격을 미리 통보해 대비토록 하고, 경찰에게 알린다. 두목의 배신을 모르는 최무룡은 장검을 휘두르며 깡패 두목을 살해하지만, 경찰에 잡히면서 윤정희와 결혼하는 꿈은 갈가리 찢기고 만다.

    세월이 흐른 후 최무룡은 출소해 다시 명동거리로 찾아온다. 사랑하는 윤정희. 그녀만 생각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명동은 주인이 바뀌었다. 윤정희는 소식도 없이 사라진 최무룡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새로운 명동의 패자 윤양하의 지극정성 어린 헌신에 마음을 열고 이미 그의 아내가 되어버렸다. 남의 아내가 된 윤정희 앞에 유령처럼 나타난 최무룡은 그 유명한 최무룡만의 전매특허, 자신을 3인칭 어떤 사람으로 놓는 긴 대사 읊조리기를 감행한다. “먼 옛날 어떤 바보가 있었습니다. 그 바보는 한 여인만을 생각하며 감옥의 벽돌 하나하나에 그녀의 얼굴 새겨 넣고 긴 세월을 참고 기다렸답니다. 운운” 한다. 모두가 안다. 오직 최무룡만 모르고 있다 “사랑은 변하는 것.” 윤정희는 이미 윤양하의 여자다. 그녀가 괴로워하며 자신을 따라가겠다는 결심을 못하자 최무룡은 시퍼렇게 날이 선 단검을 들고 윤양하를 찾아간다. 윤양하의 부하들이 서슬 퍼렇게 지켜보는 가운데 최무룡은 윤양하와 담판을 짓는다. “내놔라” “못 내놓는다” “내가 너보다 더 윤정희를 사랑한다”“아니다 내가 더!” 절대 끝날 수 없는 말싸움. “그러면 칼로 해결하자”며 최무룡이 윤양하와 자기 사이의 테이블에 단도를 꽂는다. 이때 윤정희가 달려와 “내가 없어지면” 하면서 자결을 하고 최무룡은 테이블에 꽂힌 칼을 집어 들고 윤양하도 품에서 칼을 꺼내 서로를 찌른다. 최무룡의 칼이 조금 더 깊고 빨랐다. 거목이 쓰러지듯 윤양하의 육중한 몸이 바닥에 쓰러짐과 동시. 윤양하의 부하 수십 명이 최무룡에게 달려들어 그의 몸 깊숙이 칼을 꽂아 넣는다. 부하들의 몸이 최무룡에게서 떨어지자 온몸에 구멍이 뚫린 최무룡의 몸이 기우뚱 쓰러지고 화면은 어두워진다.

    지쳐버린 사나이

    나는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이미 남의 아내가 된 여자를 내놓으라며 싸우는 최무룡이 “정 그렇다면 여자를 칼로 잘라 반으로 나누자!”라고 광기를 보였다고 착각했다. 다시 영화를 보니 그런 무지막지한 대사는 없었고, 최무룡의 지독히 어두운 감정에 이입된 내가 만들어낸 환청이었다. 여기서 배우 최무룡의 개인사에 빗대어 그의 분노와 회한을 이야기한다면 너무 억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쏟아져 나온 수많은 깡패 영화 중 이 정도로 감정이 순식간에 폭발하는 영화는 본 적이 없다.

    1960년대 배우 생활을 했던 연기자와 감독들은 연기 잘하는 배우로 최무룡을 꼽는다. 최무룡이 감독한 작품 ‘나운규 일생’에 출연해 그의 됨됨이를 곁에서 지켜봤던 배우 이순재는 가장 존경하고 연기 잘하는 배우로 단연 최무룡을 꼽으며, 자기 대사의 템포를 가진 메소드 연기의 대가이자 확고한 원칙과 ‘폼’이 잡혀 있는 최고의 배우였다고 상찬한다. ‘제삼지대’의 한 장면. 헤어졌던 김지미와 최무룡이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만난다. 김지미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됐고 최무룡은 김지미의 남편에게 고용돼 예기치 않은 만남이 이뤄지는 장면이다. 신문지로 얼굴을 덮고 누워 있던 최무룡에게 다가오는 김지미. 김지미가 인사를 하자 최무룡이 일어난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기 전, 몇 초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최무룡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얼굴을 덮었던 신문을 접고 고개를 드는 섬세하고 계산된 연기로 서로를 알아보는 시간을 지연시킨다.

    또 다른 예가 최무룡이 박노식의 소굴에서 그와 정면으로 대치하는 장면이다. 박노식은 선이 굵고 투박한 연기를 한다. 그의 몸놀림은 상당히 크고 가만히 서서 눈을 부라리기만 해도 대단한 기세를 내뿜는다. 그런 박노식 앞에 선 최무룡은 그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 같이 눈을 부라리는 것이 아니라 얼굴 표정을 섬세하게 바꿔 죄의식과 허세가 가득한 박노식에 대항해 자신의 증오를 표현한다.

    꿈꿨기에 불행했던 이카루스의 지친 뒷모습 최무룡
    오승욱

    1963년 서울생

    서울대 조소학 학사

    영화 ‘킬리만자로’ 각본 및 연출

    1999년 제36회 대종상 영화제 각본상


    최무룡이 좋아하는, 신을 열고 닫는 수미쌍관 방식을 흉내 내 다시 1975년 봉래극장으로 돌아가자. 빚더미에 올라 허덕이고, 사랑했던 아내와 헤어지고, 동가식서가숙 삼청각, 청운각 같은 기생집을 전전하며 자신을 돌보지 않던 삶. 배우가 감독을 하는 것에 대한 저평가와 질투의 시선. 제작자와 후배 감독들이 기피해 아무도 찾지 않는 배우. 언제나 자신만의 걸작을 찍고 싶어하는 배우 출신 감독. 이 모든 모순과 욕망에 지쳐버린 사나이. 천하의 나운규를 통해 자신을 이야기한 풍운아. 최무룡이 1975년 서부역 뒤편 동시상영관 봉래극장의 무대에 올라 지친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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