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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액션 영화배우 열전 ④

꿈꿨기에 불행했던 이카루스의 지친 뒷모습 최무룡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꿈꿨기에 불행했던 이카루스의 지친 뒷모습 최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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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생겼다. 연기도 잘했다. 연출력은 뛰어났고 영화를 향한 열정은 끓어 넘쳤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았다.
  • “운명의 근본은 무엇인가? 인생의 해석은 또 무엇인가? 신이여.
  • 우리 주먹으로 해결하자!” 영화 속 주인공의 입을 빌려 토해낸 최무룡의 분노는 결국 그의 생을 갉아먹었다. 40대 한창 나이에 스크린에서 외면당하고 변두리 재개봉관에서 쇼 공연을 하던 영화 천재의 쓸쓸한 눈빛, 몰락한 풍운아의 처져 있던 어깨를 추억한다.
꿈꿨기에 불행했던 이카루스의 지친 뒷모습 최무룡

최무룡, 신성일, 윤정희, 문희 등 당대의 톱스타들이 주연을 맡아 화제를 모은 영화 ‘두 아들’(1970). 최무룡은 엘리트 검사 장남 역을 맡아 큰 인기를 끌었다.

1975년 어느 날이었다. 서울역 뒤편, 서부역 근처의 봉래극장에 홍콩 무술영화를 보러 들어간 나는 말로만 듣던 ‘쇼도 보고 영화도 보고’를 만나게 됐다. 당시 서울의 재개봉관에서는 영화만 상영한 것이 아니라, 남진 나훈아 같은 가수와 최무룡 김희라 박노식 같은 배우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한두 곡씩 부르는 쇼프로가 드문드문 있었다. 이런 날이면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보다 가수와 영화배우의 노래를 듣고 직접 얼굴을 보기 위해 오는 사람이 더 많았다. 동시상영관이던 봉래극장에는 그날따라 관객이 꽤 많았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를 직접 보게 됐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오직 이소룡과 왕우만을 좋아하는 열혈 홍콩 무술영화광이어서 객석을 채운 사람들의 쇼를 기다리는 벅찬 심정은 몰랐고, 빨리 쇼프로가 끝나고 영화가 상영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환하게 밝혀진 무대에 누군가 등장했다. 최무룡이었다. 밴드의 전주가 시작됐고, 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기억 속에 그날 최무룡은 노래를 상당히 잘 불렀지만 몹시 지쳐 보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무렵의 최무룡은 거의 영화를 찍지 않고 있었다. 1972년에만 해도 20여 편에 달하던 출연작이 1973년 8편으로 줄더니 1974년에는 한 편도 없었고, 1975년에는 단 두 편의 영화에만 출연했다. 1976년 ‘보통여자’(변장호 감독) 단 한편에 출연한 최무룡은 이후 1987년 그의 마지막 감독 작품을 찍기까지 영화계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다. 1970년대 중반 최무룡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는 왜 그렇게 지쳐 보였을까?

한국의 제임스 딘

한 사나이가 지하수로를 달리고 있다. 그 사나이는 조금 전 은행을 털고 복개공사 중인 청계천의 어두컴컴한 지하수로의 썩은 물을 첨벙첨벙 밟으며 경찰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다. 퇴역군인인 그는 일자리를 얻으러 돌아다녔다. 아무리 다녀도 일할 곳은 없다. 답답한 가슴을 안고 대폿집에 들어가 술 한 잔을 한다. 술집에 들이닥쳐 깽판을 치는 상이군인들. 손목부터 잘려나간 팔에 쇠갈고리를 달고 사람들을 위협하는 그들은 바로 사나이와 함께 참전했던 동료들이다. 사나이는 고개를 숙인다. 우리는 왜 이렇게 된 걸까? 뱃속 저 아래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 분노 때문에 그는 은행을 털었고, 그 결과 시궁쥐가 우글거리는 컴컴한 지하수로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리기를 멈춘 사나이. 어디선가 아기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지하수로에 아기 울음소리라니, 환청인가? 사나이는 소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점점 더 크게 들리는 아기 울음소리. 어두컴컴한 지하수로의 시멘트 기둥 사이로 뭔가 허연 물체가 보인다. 그 앞으로 달려간 사나이는 얼어붙고 만다. 아기를 업은 젊은 여인이 시멘트 기둥에 목을 매 자살했던 것. 사나이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그의 눈은 절망으로 가득 찬다. 배우 최무룡을 처음 내 머릿속에 각인시킨 영화 ‘오발탄’(유현목 감독, 1961)의 청계천 지하수로 시퀀스다.

1980년대 중반 영상자료원에서 ‘오발탄’을 처음 봤을 때, 같이 영화를 본 친구는 양공주로 전락해 밤거리를 헤매는 누이동생과 그를 사랑했던 윤일봉의 미래를 가슴 아파했다. 하지만 나는 최무룡이 준 강렬한 인상에 취해 비틀거리며 한겨울 매서운 바람이 부는 서초동 거리를 걸었다.



1956년 최무룡은 자신의 재능을 빛내줄 수 있는 감독과 조우한다. 유현목이다. 데뷔작 ‘탁류’(이만흥 감독, 1954)에서 조연으로 출발해 다섯 번째 작품 ‘유전의 애수’(유현목 감독, 1956)를 촬영한 뒤, 그는 어지간히 감독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유 감독과 처음 작업한 ‘유전의 애수’가 비평적으로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도 다음 작품에서 같이 일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유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이며, 8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최무룡의 여섯 번째 작품은 ‘잃어버린 청춘’(1957)이다. 제대군인인 주인공 최무룡은 셋방 얻을 돈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뜻하지 않은 살인을 하게 돼 경찰에 쫓기는 범죄자가 된다. 필름이 사라져 이제는 볼 수 없는 이 영화에 대해 당시 신문은 ‘대단한 열연이었다’는 찬사를 보냈다. ‘오발탄’의 청계천 지하수로 장면을 보고 ‘잃어버린 청춘’의 연기를 유추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쉽지만, 최무룡은 범죄를 저지르고 쫓기는 남자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낸 그 연기로 배우로서 인정받는다. 당시의 신문기사는 최무룡을 할리우드의 제임스 딘과 비교하며 절망에 찬 우울한 청춘의 표상이라 칭찬한다.

1959년. 최무룡은 25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다음해에는 23편, 그 다음해에도 23편. 한 해 2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하는 최고 전성기였다. 바로 그 시기에 그는 스캔들에 휩싸인다. 모두 아는 최무룡 김지미 간통 사건. 이 일로 최무룡은 구치소에 수감되고 전처와 이혼한 후 김지미와 결혼한다. 간통 사건이 있었지만, 그의 인기에는 별 영향이 없었고 전과 다름없이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건재를 과시한다. 김지미와 새로운 살림을 차리고 모든 것을 얻은 최무룡의 가슴속에서 새로운 욕망이 꿈틀거리며 솟아난다. 감독이 되고픈 것이다. 이미 유현목 감독과 함께 ‘잃어버린 청춘’을 제작했던 그는 배우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제작·감독까지 겸하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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