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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수의‘그 영화’ ③

병산서원을 바라본 그때

  • 전윤수│영화감독·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dkall@ajou.ac.kr

병산서원을 바라본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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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을 바라본 그때

신윤복의 생을 담은 영화 ‘미인도’

순간 따뜻한 액체가 뺨을 타고 턱에서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하얀색 양말 위로, 만대루 마루 위로 불길한 붉은색 액체가 투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에 앉아 대사를 점검하던 배우 김영호씨가 얼굴이 허옇게 질려 나를 쳐다봤다. 당황한 스태프들이 내 주위로 몰려와 수건으로 내 머리를 감쌌다. 만대루 천장에 세팅한 조명기가 내 머리 위로 떨어진 것이다.

촬영은 중단되고 나는 프로듀서가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차는 비포장도로를 질주해 안동시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미친 듯 질주했다. 수건으로 감싼 내 머리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얼마나 찢어졌을까? 큰 상처가 아니길….”

프로듀서가 현장의 스태프들과 통화하는 내용이 언뜻 들렸다. 감독님 응급실 다녀오는 동안 스태프와 배우들은 야식시간을 가지라고 지시하는 내용이었다. 응급실까지 소요시간은 약 30분. 나는 그제야 비로소 창밖으로 낙동강 물에 드리워진 달빛을 봤다. 인기척에 놀라 달아나는 고라니도 봤고 깨알같이 박힌 별도 눈에 들어왔다. 차가 응급실로 달리는 동안 나는 절호의 찬스를 얻었다. 바로 부족한 잠을 청하는 일이었다.

코 골며 자던 나를 프로듀서가 깨웠다. 응급실로 들어서니 나보다 더 피곤한 몰골을 한 의사가 피에 젖은 수건을 벗겨내고 상처 부위를 살폈다. 그리고 상처 부위의 머리카락을 잘라 영구 땜통을 만들더니 스테이플러 같은 장비로 찢어진 피부를 봉합했다. 프로듀서는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현장 스태프와 통화했다. 큰 부상이 아니니 감독님 현장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촬영을 재개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머리에 담뱃갑만한 붕대를 붙이고 현장에 도착했다. 응급실 의사보다 더 피곤한 몰골을 한 조명감독이 제일 먼저 달려와 사과했다. 그리고 제작팀 막내가 내 손에 주먹밥을 쥐어줬다. 빨리 먹고 촬영 진행하라는 뜻이었다.

“이걸 죽여, 살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이 가장 적절한 상황이었다. 내가 입교당 마루에 걸터앉아 주섬주섬 주먹밥을 먹는 동안 스태프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나를 위로하는 듯 평소보다 더 열심히 뛰고 있었다.

나는 주먹밥을 삼키며 입교당 정면에서 보이는 만대루를 바라보았다. 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져 내리고 달빛은 만대루 기와 위에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내 눈에는 만대루 위에서 류성룡 선생과 제자들이 글 읽는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름다움을 느끼라는 가르침

한참을 바라보다 나는 내 머리에 생긴 상처의 의미를 생각했다. 대중에게 아름다움과 감동을 제공해야 하는 영화감독이, 시간에 쫓겨 병산서원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데 소홀한 것이다. 상처 부위가 욱신거렸다. 2000년대를 사는 영화감독을 위해 1500년대에 사셨던 류성룡 선생이 회초리를 드신 것이다.

류성룡 선생은 평생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학문을 닦는 데 최선을 다했음에도 만년에 ‘세 가지 한(三恨)’이라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나의 한평생에 세 가지의 회한이 있으니, 군주와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것이 그 첫째 한이요, 관작과 위계가 너무나 지나쳤는데도 일찍이 물러나지 못한 것이 그 둘째의 한이요, 도(道)를 배울 뜻을 가졌음에도 이를 성취하지 못한 것이 셋째 한이다.”

병산서원을 바라본 그때
田允秀

1971년 서울생

중앙대 영화학과 졸, 동 대학 첨단영상대학원 영상예술학과 석사

2001년 영화 ‘베사메무쵸’ 각본·감독으로 데뷔

영화 ‘파랑주의보’(2005), ‘식객’(2007), ‘미인도’(2008) 각본·감독


3년 전 여름, 내가 류성룡 선생에게 맞은 ‘회초리의 상처’는 이미 사라졌다. 하지만 그날을 계기로 만년에 현역 감독에서 물러난 후 내게는 어떤 내용의 회한이 남게 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됐다.

“영화감독을 은퇴하며 나의 한평생에 세 가지의 회한이 있으니….”

신동아 201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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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수│영화감독·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dkall@aj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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