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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근대를 찾아서

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1920년대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조선은 하루아침에 허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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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친구라도 십 년 사귀기 어려운 일인데 내가 그이를 모시기는 근 사십 년이었습니다. 그동안 하루에 두 번 혹은 열흘에 한 번씩 그이를 만나는 동안에 언제나 한적하고 울울하였습니다. 나도 심사가 울적할 때마다 그이를 찾아간 것입니다. 최후까지 말끔한 정신으로 계시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을사조약 회의에 참석했던 8명의 대신은 이제 권중현 하나만 빼고 모두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완용이 4년 전에, 박제순은 14년 전에 세상을 떴다. 그 밖의 사람들도 2, 3년 전 혹은 11년 전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승을 하직했다.

“나는 죄인이니 죽거든 통부(通訃)도 하지 말고 번화(繁華)스럽게 대여(大輿)도 쓰지 말고 사인방상(四人方床)을 써라.”

큰 상여 말고 네 사람이 가마처럼 울러 메는 작은 상여(喪輿)를 쓰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은 일부는 지켜지고 일부는 지켜지지 않았다. 일반에 보내는 부음도 없이 화환도 사절하고 자택에서 발인을 하였다. 다만 상여는 중간 크기로 정해졌다. 전직 고관대작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전 참정대신 한규설 씨의 장의(葬儀)는 30일 오전 열시에 거행했다. 장식 일체는 ‘죄인의 주검’이라는 그의 유지에 따라 철두철미 간단하게 거행하였다. 옛날 같으면 대방상(大方狀) 소방상(小方狀) 에 앞 뒷줄이 이어지고 여러 가지 의식과 번잡한 절차가 있을 것이로되 겨우 열두 방맹이, 소방상에 유해를 모시고 화환 기타의 일체 의식을 전연 폐지하였을 뿐 아니라 호상행렬까지 사절하여 한낱 무명(無名) 장의로 거행하였다. 장지는 고양군 원당면 사설묘지다. 첫 겨울 아침 처연하게 내리는 찬비는 장례행렬 연도에 뿌려져 산과 나무가 오히려 이 간단한 장식(葬式)을 슬퍼하는 듯하였다.



신문 기사는 장례식의 발인 모습을 이렇게 적었다. 부음 기사는 “적극적으로 큰 공을 세운 바는 없으나 일생에 깨끗한 지조를 지키었을 뿐 아니라 생전에 아낌없이 재산을 공익사업에 던졌다”고 고인을 평했다. 세상은 위인(偉人)을 바라는가. 영웅이 없어서 나라가 망한 것은 아니라고 한림은 생각했다. 신문은 한규설이 청년학생들에게 남겼다는 유훈을 소개했다.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는 것도 귀하고 좋으나 이미 아는 것을 시행하는 것이 더욱 귀하고 크니라.”

고관대작의 집이 불고기 전문 대감집으로

비는 그쳤다. 한림은 노인에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안마당에는 청동 갓과 프레임에 사방 유리를 씌운 서양식 램프에 황색 불이 깜박깜박 들어왔다. 안채 뒤 후문 옆 굴뚝 위로 흰 연기가 피어오른다. 사잇담 너머로 남녀 하인들이 안채 안마당과 뒷마당을 분주히 오가는 기미가 느껴진다. 저녁 준비로 여인네들의 뒷대문 출입이 빈번할 시각이다. 노비는 1894년 갑오 이래 없어졌다고 하지만 그 제도가 없어진 것이지 내용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이름만 노비에서 평민으로 바뀌었을 뿐 하는 일은 그 전이나 후나 비슷하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고 싶은 사람은 남아 저마다의 살림을 이어갈 뿐이다. 나라의 국호가 바뀌고 그들이 경성부민(京城府民)으로 불려도 역시 그러하다.

나라가 식민지에서 벗어나고 한참 뒤인 먼 훗날 소유권이 이전된 한 대감의 대저택은 뿔뿔이 해체되어 저마다의 길을 가게 된다. 안채는 음식점으로 바뀌었다. 이 불고기 전문 식당에는 대감집이라는 옥호가 붙었다. 소실이 살았다는 별채는 요정으로 변신했다. 하인들이 거처하던 줄행랑은 인쇄소 집합소로 변모했다. 다시 한 번 더 세월이 흐르면 그 모든 것은 흔적도 없이 다 사라지고 빈 땅에 상상조차 못한 초대형 빌딩이 들어서게 된다.

한길로 빠져나오며 한림은 뒤를 돌아보았다. 옛집은 어스레한 불빛을 안고, 무겁게 내려앉는 축축한 겨울하늘 아래 웅크리고 있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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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석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를 탐구하는 연구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20년 일했다. 건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한국근대와 근대신문에 대해 강의했다. 서울에서 식구들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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